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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박재순의 '한국생명신학의 모색'을 읽고...

James Chae 2012. 12. 15. 14:16


한국생명신학의 모색을 읽고 (박재순, 한국신학연구소, 2000, 서울)


 

 

 


한국+생명+신학의 삼위일체


채 야고보 

 

[들어가는 말]

 

서구문화의 토양에서 자라고 형성된 기독교가 동양종교문화의 비옥한 토양과 결합하는 위대한 시기를 우리는 몸으로, 혼으로 경험하고 있다.” –(216)

 

생명의 창조와 회복이 하나님의 활동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인간의 생명을 지향하고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생명의 풍성한 실현을 가져오고, 예수의 죽음은 부활생명을 가져온다.” –(155)

 

 


생명이란 화두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려 있다.  건강과 생명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우리가 먹는 먹거리에 대한 관심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내가 어렸을 때는 아이들이 먹는 삼립빵에 들어있는 방부제에 대해 어느 누구도 문제시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며칠을 놔둬도 상하지 않는 빵을 보고도 말이다. 그 당시에는 인간의 건강과 생명 보다는 기업의 이윤과 산업의 발전이 더 중요시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웰빙(well-being)이라는 말에서 보여지듯이, 육체적·정신적 삶의 유기적 조화를 통해 건강한 심신을 유지함으로써 행복한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생활양식이 보편화된 현대에서 생명이란 건강과 직결된 개념으로 인식되는 듯하다. 건강은 생명 연장의 필수 선결 요건이고 이러한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육신과 정신의 조화로운 삶이 필요하다. 육신에 대한 이성의 우위에서 이제는 육신이 이성과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데카르트 이후 서구 문명에서 비롯된 육체적. 정신적 삶의 분열이 오늘 날에 와서는 다시 하나로 통합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묘합의 사상'[1]을 갖고 있었던 우리 민족이 서구문명에 의해 잠시 잊고 있었던 우리의 옛 정신을 다시 찾는 듯한 느낌을 준다. 계몽주의와 산업혁명을 통해 인간은 이성과 과학의 힘으로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은 마르크스와 니체, 프로이드를 거치면서 비판을 받았고 두 차례의 세계 대전으로 인류는 홍역을 앓았으며, 이제 우리는 심각한 생태계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과학과 이성이 우리 인간에게 유토피아를 가져 다 준다는 믿음은 이미 깨진 지 오래다. 특히 생명과 생태계에 대한 문제는 종교와 국가를 넘어 범 세계적인 중요 과제로 남았다. 이러한 시점에서 과학과 이성의 행보에 침묵 또는 동조하고 있던 기독교에서 기독교의 본질을 생명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시도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더욱이 한국 주체적인 신학이나 생명 신학에 대한 관심도 날로 높아 가고 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한민족의 주체적 생명 신학 사상을 논하는 데 한국 신학자나 학자들 간에도 아직 한국적인 정서나 사상에 대한 용어개념의 정의가 너무 분분하다는 것이다. 이는 이러한 한국적 정체성과 주체성을 찾는 노력이 아직 초보단계에 있다는 역설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이런 선상에서 이 책도 그러한 노력의 과정 가운데 놓여 있다. 저자는 이러한 위험성을 직시하면서 가급적 다양한 근거 자료를 제시하려 노력했지만 위와 같은 위험성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느낌을 준다.

 

이 책은 단순히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생명을 다루는 것을 넘어 그러한 생명사상이 우리의 전통에 이미 녹아 있다는 것을 여러 증거들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이 생명이란 담론 속에서 서구적 기독교와 한국적 기독교가 서로 일치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결국 이 책의 책 제목은 이미 그러한 것을 암시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국(+)생명(+)신학의 모색이라고.

 

이 책은 크게 5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1부에서는 한민족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 신앙과 생명 사랑의 사상, 우리 민족의 고유 정서인 한 사상’, 그리고 인간과 생명을 소중하게 여겼던 동학, 증산교, 무속 신앙 등을 언급하면서 우리 한민족의 정서 속에 깃 들어 있는 생명 사상의 뿌리를 더듬어 보고있다. 2부에서는 서구 이성적 철학에 대한 비판과 기독교 믿음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이성적 사유와 기독교의 믿음, 그리고 동양적 사고의 만남이 가능한가를 논하고 있다. 3부에서는 한국적 신학의 주체성의 확립을 강조하면서 김재준, 함석헌, 민중신학 등의 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저자가 한국생명신학의 거점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4부는 저자가 이 책의 주제와 관련된 몇몇 책을 읽고 쓴 독후감과 몇몇 단상(斷想)들을 모아 놓았다. 5부는 부록 같으면서도 실재적인 부분으로 교회와 사회 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저자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치병사역이나 귀신들림 현상, 그리고 예배 등에 관한 것들이다.

 

이 책은 저자가한국적 생명신학이란 화두로 오랜 시간 써 온 글들을 묶어 구성된 것이다. 그래서 다분히 각 장 마다 반복되는 부분들이 있어 한번에 이 책을 쭉 읽는 것은 약간의 인내를 요구하지만 한번에 읽음으로써 저자의 생각의 흐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각 단편적인 논문들 자체로도 나름대로의 완성도가 있어 관심 있는 부분들을 나눠서 읽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럴 경우 지루함은 달랠 수 있지만 저자의 큰 사고의 숲의 윤곽을 파악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이 책의 서문에서도 그렇고 편집 방법에 있어서도 저자가 가장 관심을 두는 부분은 단연 함석헌의 씨알사상’(원래는 '알'에 아래아를 써야 하는데 폰트 전환이 안돼 부득불 '알'로 사용함을 양해바랍니다) 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나는 여기서 4가지 부분으로 나눠서 이 책의 내용을 정리하고자 한다. 첫번째는 한민족의 생명사랑과 생명력에 대해, 두 번째는 이성과 믿음에 대해, 세 번째는 주체적 신학에 대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씨알사상에 대해 정리한다.

 

 


[한국+생명+신학]

 

1. 우리 한민족이 근원적으로 생명체험과 생명이해가 있다고 저자는 말하면서 사상을 예로 든다. ‘환하다==밝음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또한 높음, 온전함, 하나, 많은, 무릇, 모든, 넓은등의 뜻도 지니고 있어 생명을 조화롭고 포괄적인 실재로 본다[2]. ‘은 크고 하나인 이원적 구조를 지닌 묘합’(妙合)의 원리로 이해된다. 모든 것을 포함한 하나이며 하나이면서 모든 것이 되는 하나이다. 결국 한 사상은 무한히 포용적인고 동화적이고 낙관적인 사고"[3]라고 할 수 있다. 밝고 따뜻한 생명을 추구한 한민족의 삶과 정신이 여기에 녹아있는 것이다.

 

저자는 계속 이 사상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크고 넓은 품의 님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은 밝고 따뜻한 생명의 님이시다. 이는 단군신화 속에서도 잘 나타나 있으며 특히 동학의 시천주(侍天主)와 사인여천(事人如天)”그리고 증산교의 해원상생(解寃相生)의 도 속에 생명사랑의 윤리로 나타나 있다고 한다. 저자는 우리 한민족이 하나님을 우리 몸과 마음에 모시고 살았으며 또한 하나님은 민중과 친화력이 있는 민중적인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생명윤리는 삶의 고통과 고난에 대한 감수성에서 시작된다고 하면서 기독교의 십자가 신학과 한민족의 의 정서를 연결 짓는다. 한민족의 고유한 정서인 은 고통 받는 민중의 이름없는 아픔이며 이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화되어 하나 임의 염원을 담고 있다. 생명존중과 평화의 사상이 이 한의 정서에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은 이러한 민중의 의 정서를 잘 대변해 준다. 예수는 자신을 고난 받는 종으로 이해했고 민중의 벗으로서 민중과 더불어 먹고 사셨다. 결국 예수님의 치병사역도 예수님과 민중이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됨으로써 일어난 것으로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4] 한민족의 생명에 대한 정서와 기독교의 십자가의 생명 사상의 일치점을 여기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저자는 한국 기독교 신앙과 한국 종교 문화는 한국 정신 문화를 새롭게 형성하는 과정 가운데 있다고 보고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 얼이 어우러진다면 한국 민족의 종교정신사에 큰 의미를 지닐 것이라고 조심스러운 전망을 제시한다.[5]

 

2. 저자는 이성에 입각한 서구 철학의 한계를 지적하는데, 이성이 인간 의지를 따르지만 인간 의지는 언제든지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또한 이성의 한계 때문에 주관과 대상의 분열과 대립을 피할 수 없는 인식의 한계로 지적한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바르게 사용될 때 유용한 것이다. 인간의 이성 만으론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성의 안내를 받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결국 신학의 주제는 이성의 안내를 받는 믿음이고 믿음에 의해 세례를 받은 이성이다.[6] 이것은 깨달음으로 설명되는데 동양의 도통의 철학과도 일맥상통한다. “도통의 철학은 몸과 마음, 마음과 불성, 인간과 신의 일치와 조화를 추구하고 도통의 깨달음은 이성과 영감의 통전이다라고 저자는 설명한다.[7] 저자는 서구철학과 동양철학 그리고 기독교 신학이 결합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유기체적이고 전일적인 동양적 사고, 객관적 세계에 대한 이성적 탐구와 개인의 권리의식을 강조하는 서구철학, 인간의 죄성과 사회의 악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성서적 사고가 한데 만날 때 비로소 오늘의 인간과 세계를 비추는 종교사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8]

   

3. 저자는 한민족의 신학적 주체성을 강조하면서 김재준 목사의 예를 설명한다. 사대주의적 기독교에 빠져있던 20세기 초의 한국 기독교에 토착화 신학을 부르짖어 한국적 기독교의 바탕을 만든 인물로 그를 평가하고 있다.

 

김재준의 토착화신학은 종교혼합주의도 아니고 복음의 씨앗이 민족문화의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 단순한 유기체적 토착화신학도 아니다. 또한 다른 종교들을 기독교 안에 포용하는 단순한 포용주의도 아니고 다른 종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 완성된다는 성취설도 아니다. 김재준은 민족 문화와 민족사가 새롭게 형성되고 한국적 기독교가 한국 민족의 문화와 역사에 의해 새롭게 형성되는 상호 변혁적인 역동적 토착화신학을 주장한다.”[9]

 

결국 그는 기독교의 신앙고백적 정체성을 뚜렷이 하면서 다른 종교와도 대등한 친교와 협력을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신학적 주체성 확립에 관한 원칙 다섯 가지를 언급한다. 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사대주의적 신학풍토를 청산해야 한다. 또한 특정한 신학자에 대한 일방적 추종을 삼가 해야 한다.

2) 모든 논의의 방향을 서구신학적으로 환원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 신학적으로 성찰하고 평가하는 풍토가 확립되어야 한다.

3) 서구의 유행주의적 신학을 경계해야 한다.

4) 혼합주의적 토착화신학과 관념적 급진주의 신학도 비주체적이다.

5) 지나친 반()서구주의 신학도 비주체적이다.

 

결국 우리 상황과 전통 그리고 나 자신에 걸 맞는 신학, 혼으로 체화된 신학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잘 조화된 신학으로 저자는 함석헌의 씨알사상을 예로 들고 있다.

 

4.씨알은 사람의 참 생명이다. 삶의 시작과 끝이 그 속에 있으며 민족의 역사와 사회의 삶을 지탱하는 에너지를 품고 있다. ‘씨알속에 나무가 있고 나무 속에 씨알이 있는 것 같이 “‘씨알은 하나이면서 전체이다.” 결국 이를 통해서 전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씨알은 민중을 뜻하는 말로 맨사람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속에는 시작과 끝이 담겨 있음으로 역사성을 지니며 미래적 삶에 대한 염원이 담겨있다. ‘씨알()’라는 변화와 생성의 힘을 생명력으로 지니고 있다. 역사와 삶의 혁신을 끊임없이 추진하는 힘이다. 함석헌은 이 씨알과 같이 하나님도 고정불변한 완전자로 보지않고 완전하면서도 자람의 과정에 있으며 영원의 미완성적 존재로 보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역동성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씨알이 스스로 싹트고 스스로 자라듯 함석헌은 스스로 함하나로 어우러짐을 강조한다고 한다. 생명은 스스로 살 때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삶은 아무도 대신 살아줄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함에 평화가 있고 억압과 폭력에 대한 자립적 저항이 있는 것이다. 또한 스스로 함씨알의 특징인 전체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전체를 아우르는 것을 포함하는 특징이 있음으로 타자와의 조화를 강조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한국 전통 사상의 원리인 묘합(妙合)과 귀일(歸一)’과도 상통한 개념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씨알사상이 개인주의나 이기주의화 될 위험은 없는가? 저자는 여기서 함석헌의 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이러한 위험성을 비켜간다. “죄는 개인적인 것도 단순히 사회적인 것도 아니고,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이고 영적인 실재이다그리고 나는 죄인의 대가리다라고 한 함석헌의 말을 언급하면서 주체성을 상실한 인간의 죄의 근원을 설명한다. 저자는 이 함석헌의 죄의식이 기독교적 신앙관에서 온 것으로 주장한다. 왜냐하면 나-우리-전체를 일원적으로 여기는 동양적 사고에서는 이러한 죄의식이 나오기 어렵다는 것이다.

 

씨알이 곧 나라이고 여기서 풀뿌리 민주주의가 가능하다. 이는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사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민족과 국가의 벽을 넘어 세계 평화 공동체를 향한 염원이 여기에 담겨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일각에서 염려하는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는 여기에 끼여들 틈이 없다. 여기에는 씨알’, 곧 민중 하나 하나가 주체적이고 스스로 책임감 있는 삶을 추구하고 타자와 상생과 평화 삶을 이뤄가는 풀뿌리 민주주의가 있을 뿐이다.(p.p.220~261 참조)

 

이와 같이 씨알사상에는 기독교적이고 한국적인 요소가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복음서에서 씨앗의 비유를 통해 이러한 씨알사상을 설파하셨다. 거기에는 자기 희생과 그리고 부활의 의미가 담겨있다. 씨앗이 죽어야 만 싹을 피우고 결국 많은 이들을 살리는 생명의 나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적 자기 희생과 생명 사랑의 사상은 함석헌의 씨알사상과 일치한다. 결국 한국+생명+신학의 삼위일체가 함석헌의 씨알사상에서 녹아 있다는 주장을 저자는 하는 것 같다.

 

 

[나오는 말]

 

한국+생명+신학이라는 화두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나름대로의 거점을 만들려 했고 어느 정도 성공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씨알사상세계 평화 공동체에 공감 있는 화두를 던지기에는 여러 가지 넘어야 할 산이 많을 듯하다. 그 한 예로, 한국적 특징을 담고 있는 특정 단어에 대한 보편적 정의의 필요성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한민족이 갖고 있는 독특한 정서인 에 대한 정의도 학자들 간에, 또는 대중들 간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한마디로 너무 주관적인 해석에 치우친 감이 있다. 기독교의 십자가에 대한 해석이 각 민족들 간에서 다르게 해석 되기도 하지만 그 사랑과 희생에 대한 십자가의 보편성은 변함이 없이 모든 나라에서 통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아직 이라던가 씨알이란 단어는 범세계적인 보편성을 얻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보편성을 얻지 못한 이 개념들이 세계 공동체에서 어떻게 보편성을 얻을지 의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나는 특정 단어의 확대해석을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편성을 가지는 자료들과 또한 많은 논의와 토의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아쉽게도 그러한 근거 자료가 많지 않다고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해석 가능한 자료를 근거로 한국적 단어들에 대한 보편적 근거를 새롭게 만들어 갈 필요는 있다. 여기에 한국적인 감성과 냉철한 이성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이 모든 문제들이 어쩌면 표현의 문제로 귀결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우리의 정서를 담을 표현의 그릇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무당의 신내림을 자신의 작품에 사용하기 전 까지 어쩌면 우리는 신내림에 대해 다른 민족에게 설명할 합당한 방법을 모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적 샤머니즘이 한 아티스트의 작품을 통해 국제적 정서로 승화 될 수 있다면 우리의 한의 사상이나 씨알사상도 문자적인 코드를 넘어 문화예술적 코드로 얼마든지 표현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표현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한 모든 것이 표현 보다 먼저 선재 하는 것이지만, ‘세계 평화 공동체를 향한 인류의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미 우리에게 있는 것을 표현하는 차원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말하는 이 표현은 결국 의사소통과 관련한 것이고 이러한 소통의 도구는 학술적이고 학문적인 언어 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적인 표현의 언어도 포함하는 문화총체적 의사소통의 도구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씨알사상이 보편성에 대한 잠재력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계 평화 공동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보다 다차원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씨알사상을 담아낼 문화적 그릇이 기독교 내에서와 사회 곳곳에서 생성되어야만 보편성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씨알사상맨사람에 기초하는 한 더욱 그러하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들의 정서에 선재하는 사상이라면 그들 속에서 이러한 것들이 흘러나오게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풀어야 할 과제가 또한 있다. 그것은 민중에 대한 새로운 개념의 정의이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7,80년대에 정의 내리는 민중의 계층이 모호해 졌기 때문이다. 과거 전태일과 같은 상황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현재 외국인 근로자들로 대체되고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민중(?) 계층에도 분열이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신흥 노동자 귀족(정규직?)’이 등장하면서 민중을 대변하던 노동자 계층도 무너진 지 오래다. 사회적 안정망이 무너져 양극화가 극대화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민중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이 사회를 주체적으로 이끌어갈 씨알들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전태일 열사와 같은 의를 위해 죽는 이들보다 생계와 빚에 쪼들려 비관해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 때에 우리는 어디에서 민중을 찾을 것인가? 민중의 자리를 시민이나 대중이 대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서는씨알'의 주체인맨사람민중'을 새롭게 정의해야만 한다.

--

 

 



[1] P.19

[2] p.17

[3] p.19

[4] p.114

[5] p.159

[6] p.p.139~141

[7] p.157

[8] p.157

[9] p.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