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과 평화로 가는 길
“한” 사상의 묘합(妙合)의 원리로 본
이원론적 세계관의 극복
채 야고보
[숨 고르기]
“나는 현대 물리학에 의하여 암시되고 있는 세계관이 현재의 우리 사회와는 일치하지 못하고 있다고 믿는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우리가 자연에서 관찰하는 조화로운 상호 관계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역동적인 평형의 상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적, 경제적 구조가 요구될 것이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화 혁명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모든 문명의 생존이 우리가 그러한 변화를 성취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우리가 동양적 신비주의의 어느 정도의 음적 태도를 채택할 능력이 있는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즉 자연의 전일성을 경험하고 그것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역량이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
-프리조프 카프라(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 서문 중에서) [1]
데카르트와 뉴튼 이후 서구문명은 줄곧 이성과 과학을 앞세워 이 세상을 둘로 나누어왔다. 주체와 객체, 영과 몸, 지배자와 피지배자, 선과 악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이분법적인 것들로 가득하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의 일상생활 뿐 아니라 성서를 바라보는 시각에까지 영향을 미쳐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성경에서 찾는 일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는 서구제국주의가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하며 자행한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일 것이다. 피부색이 누렇다는 이유로 이성적인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고 ‘동물’이나 ‘노예’로 간주된 예는 서구인들의 오만함이 계몽주의 이후 최극치에 달한 경우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인권유린은 더 나아가 과학과 발전의 이름으로 끊임없는 생태계 파괴로 이어지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생태계 간에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이러한 서구인들의 만행을 뒷짐지고 있던 기독교의 ‘하나님’이 죽었다고 외친 니체 이후, 서구에서도 끊임없이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에 대한 철학적, 문화적 반성이 계속되어 왔다는 것은 이미 주지된 사실이다. 20세기부터 유럽철학을 중심으로 비판이론, 현상학, 구조주의 철학 등이 등장하며 이성중심의 서구 문명에 거대한 메스(mes)가 가해졌고, 신학에서도 이러한 활동들이 두드러졌다. 특히 존 캅이나 떼이야르 드 샤르댕 등과 같은 과정신학과 진화신학, 몰트만의 희망신학, 매튜 폭스의 영성신학 등은 이러한 서구문명의 철저한 반성의 토대 위에 이 지구촌의 당면한 문제에 새로운 답을 각각 제시하고자 했다. 이들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중요시 다뤄진 문제는 생명, 상생, 생태계 위기, 이원론적 세계관의 극복, 인권, 양극화, 평화 등의 문제들이었다. 사실 이러한 당면 문제는 인종과 국가, 종교, 계층에 관계없이 모든 인류가 직면한 문제임으로 결코 지엽적이고 근시안적인 방법으로 풀 수 없는 문제임을 모두 전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와 생태계의 상생의 길을 모색하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결국 인간과 인간, 인간과 생태계를 나눴던 간격을 메우고,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며, 모두가 상생과 평화 관계를 이루는 것을 전 인류의 미래에 대한 공통적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시급히 요청되는 것이 바로 ‘서구 이원론적 사고’의 극복이라 하겠다.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 없이는 ‘너와 나’의 대화의 장마저도 만들기 어려울 뿐더러, 만약 대화가 가능하더라도 서로의 차이만 확인 할 뿐 별다른 진전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문제제기 위에 이원론의 극복에 대한 한국적이고도 성서적으로도 맥이 통하는 한국적인 사상의 정립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당면한 지구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전인류 차원에서 공감할 수 있는 것이면서, 또한 ‘나’ 또는 ‘우리’에게도 공감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보편성’이 전제된다. 이는 표현의 문제 뿐만 아니라 각 민족간의 정서적, 문화적, 토양적 문제도 함께 아우르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아직도 ‘한국적’이란 말에 어떤 거부감이나 선입견을 조금은 가지고 있다. 그러한 선입견은 한국전통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서 온 것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발전 지향적인 7,80년 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민족고유문화전통에 대한 사회적 적개심도 필자의 성장기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마치 마녀사냥을 하듯이 ‘미신이다’, ‘비과학적이다’, ‘촌스럽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우리 민족고유전통들이 무시되었던가? ‘과학’과 ‘개발’은 당시 우리 민족에게 푸른 미래를 약속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였다.
필자는 인도 유학 시절 입학하자마자 첫 수업에서 인도인 교수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자네는 자네 그림 속에서 한국적인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나는 부끄럽게도 한마디도 답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한국적인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후 졸업할 때까지 나는 이 질문에 대해 많은 고민과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결국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과도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글에서 “한” 사상이 서구 신학의 이원론을 극복하는 우리의 전통 사상임을 말하고자 한다. 이는 우리의 전통사상이 현재 서구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원론을 극복하려는 서구 철학과 서로 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바로 그 지점이 “한” 사상의 “묘합의 원리”이다. 또한 이러한 비교연구는 한국전통사상과 서구사상이 모두 이 지구촌의 상생과 평화에 공동으로 기여할 것이라는 희망을 그 바탕으로 한다.
[1]
박재순은 그의 저서 ‘한국생명사상의 뿌리’와 ‘한국생명신학의 모색’에서 우리 전통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을 ‘한’으로 보고 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그 중에서도 필자의 관심을 끄는 한의 특징 중 ‘묘합의 원리’에 집중하려 한다. 이 한의 ‘묘합의 원리’는 ‘상생’의 중요한 개념이며 서구 기독교와 철학의 ‘육화(肉化)’와도 어느 정도 상호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는 한민족이 생명 사랑이 많은 민족임을 전제하면서 그 기원은 알타이 어족의 기나긴 동방으로의 여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난 것이라고 한다. 이 여정 속에서 많은 고난을 겪으며 ‘밝고 따뜻한 삶’에 대한 염원이 우리 민족에게 형성된 것이다. 밝음에 대한 희망과 고난에 대한 감수성은 결국 한민족의 몸과 기억 속에 ‘육화’ 된 것이라 하겠다. ‘한’은 “환하다, 크다, 임금(왕), 높음, 온전함, 대략, 하나, 많은, 무릇, 모든, 바른, 넓은,가운데”[2]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 어원은 ‘환하다=해=밝음(白)’에서 온 것이다. 결국 ‘한’은 ‘밝음’을 상징하고 “하늘과 태양과 신”을 하나로 보는 사상이다. 여기서 한민족의 생명에 대한 근원적 체험이 있다고 박재순은 말한다. “밝고 환한 세상은 하나로 통하는 세상이고 전체가 다 드러나는 세상이다.”[3] “크고 하나이며, 밝고 환함”[4]은 생명을 조화롭고 포괄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결국 생명이 하나이며 전체이듯이 ‘한’ 또한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한’ 사상은 이원론적 사고를 거부한다. “하늘과 땅, 초월과 내재, 성과 속, 형태와 비형태”[5]가 한 생명 안에 결합되어 있다고 한다. 이러한 ‘한의 묘합 사상’은 “ ‘온’(전체=큼=많음)과 ‘낱’(개체=하나), 선과 악, 삶과 죽음”[6] 까지도 하나로 본다. 선과 악을 대립적 관계로 보지 않고 “상대적이고 유동적”인 관계로 보는 것이다. 심지어는 산자와 죽은 자의 조화까지도 아우르는 사상이라고 한다. ‘한’에는 서구적 이분법의 사상이 끼여들 틈이 없다. “ ‘한’의 사상에서 보면 둘은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다”[7] 또한 “ ‘크다(전체)’와 ‘하나다’의 이원적 구조가 일원적 존재”[8]로 이해된다. 이것이 바로 ‘한’이 가진 “묘합(妙合)”의 특징이다. 박재순은 이러한 한의 “역동적 일원론”을 말한다. “ ‘한’ 사상은 조화와 원융(圓融), 역동적인 일원론을 담고 있다. 양극화, 분리, 대립, 배제, 갈등의 논리와 사고는 삶의 본질과 현실에 충실한 한민족의 기본 정서와 사유에 낯설다.”[9] 결국 “ ‘한’ 사상은 무한히 포용적이고 동화적이고 난관적인 사고이다.”[10]
이러한 ‘한’의 ‘묘합의 원리’는 단군신화에서 ‘신인합일(神人合一)’, ‘천인합일(天人合一)’로 나타난다. 단군은 “천상적 생명”과 “지상적 생명”의 결합에서 태어난 것이다. 마치 기독교의 ‘성육신’과 유사하다 하겠다. 여기에는 “신과 인간, 하늘과 땅, 영과 육, 성과 속”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 이러한 ‘묘합’은 상호 관련성 속에 있으며 어떤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 합일이다. 하늘과 땅을 하나로 아우르는 ‘한’은 자연과 인간의 ‘묘합’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우리 민족의 자연과 생명에 대한 사랑의 정서가 담겨 있다. 이러한 특징은 왜 우리 토속종교가 타민족의 범신론에 기초한 토테미즘totemism 보다는 ‘신인합일’을 중심으로 한 ‘샤머니즘shamanism’으로 나아갔는지에 대한 이유가 된다.
[2]
이러한 ‘한’ 사상의 ‘묘합의 원리’를 서구적 사유의 장에서 찾아보자. 이원론보다는 통합성을 강조한 몰트만의 경우를 먼저 살펴본다. 이러한 특징은 그의 삼위일체론과 신체성에 대한 설명에서 두드러진다. 몰트만의 ‘관계론적 삼위일체’는 “순환적 사귐”[11]의 특성이 매우 강하다. “이 삼위일체론은 하나님 안에서 구별과 통일성, 구별과 통일성의 통일성을 발견하며, 그러므로 자기 자신 안에서 풍부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사귐 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한다.”[12] 몰트만이 이해하는 삼위일체는 각 위격 간의 군주적 지배의 관계가 아니라 각 위격 간의 “사귐의 관계”이다. 어떠한 지배의 원리도 배격된 “순환적” 사귐의 관계이다. 여기서 위와 아래, 앞과 뒤가 하나로 통합한다. 이러한 삼위일체의 유비적 관계로 몰트만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도 순환적 “사귐”으로 설명한다. “영 안에 계신 하나님의 현존은 의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모든 유기체 속에 , 다시 말하여 몸과 영혼을 가진 사람이 그의 환경 속에서 발전시키는 역사적 ‘형태’ 속에 있다는 것이다.”[13] 여기서 몰트만은 의식과 몸의 이원론을 거부하면서 더 나아가 인간의 ‘신체’를 하나님의 영과 환경의 관계에까지 확장 시킨다. 결국 이러한 모든 것들은 순환적 관계 속에서 인간의 ‘신체의 장’에서 하나로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과 몸, 의식과 무의식, 의지적인 것과 무의지적인 것 등 사람들이 인간학적인 기본 차이라고 규정하는 것을 상호간의 침투와 구별을 가진 통일성의 순환적 관계로 보아야 할 것이며, 일방적인 지배의 구조를 이 통일성 속에 집어넣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영혼의 우위’로부터 출발하지 않지만 ‘육체의 우위’를 인정하지도 않는다.”[14]
여기서 몰트만이 강조하는 ‘통일성’은 결국 서구 사상의 이원론을 극복하는 것이라 하겠고 ‘한’이 ‘전체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전체인’ 역동적 관계에 있는 것 같이 삼위일체의 세 위격도, 인간의 영과 육도 역동적인 사귐과 순환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와 칸트 이후 서구 이원론은 주체를 ‘의식’에 두어 늘 정신과 몸을 구별하여 몸이 의식에 종속된 것으로 여겨 이 둘 사이의 상하구조를 만들어 왔다. 메를로 퐁티는 이러한 이원론을 극복하여 의식을 ‘육화’시키고 ‘신체’를 사유의 중심으로 이끌었다. 퐁티에게서 의식과 몸의 이원론은 파괴되며 “따라서 그의 현상학은 선험적 자아에서 신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에서 선험적 의식을 역구성”[15]한다. 결국 “지각과 인식의 주체는 신체이고 개개의 감각 기관은 모종의 종합의 대행자이다. 신체가 하는 종합은 고유한 신체의 지향적 구조에 의해서 해명된다.”[16] 이와 같이 퐁티는 “주지주의와 경험주의, 관념론과 실재론,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대립 구도”를 허무는 데서 그의 철학의 출발점을 삼고 있으며 그가 말한 “세계-에로-존재의 개념에서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양극단을 통합하는 길을 제시”[17]하고 있다.
“나는 인과 관계에 의해서 연결된 과정 또는 사물의 총합으로서의 나 자신과 구별시켰던 이 세계를, ‘나 자신 속에서’ 나의 모든 사고 작용의 영원한 지평으로서 내가 쉼 없이 나의 자리를 자리매김하는 데 있어 관계하는 차원으로서 재발견한다. 진정한 ‘코기토’는 주관의 존재를, 그가 가지고 있는 존재한다는 사고에 의해서 규정하지 않으며, 세계의 확실성을 세계에 대한 사고의 확실성으로 바꾸지도 않고 필경 세계 자체를 의미 세계로 대체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나의 사고 자체를 파기할 수 없는 사실로서 인식하고 나를 ‘세계-에로-존재’로 발견하면서 모든 종류의 관념론을 제거한다”[18]
이 “세계-에로-존재”는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 그러나 세계에 매몰되지 않고 세계를 소유하고자 세계로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실존적 초월 운동”[19]을 말한다고 한다. 이 개념은 매우 역동적이며 세계와 인간의 끊임없는 순환적 관계를 내포하는 말이다. 이 둘은 서로를 소유하면서도 결코 서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이다. 이는 인간이 세계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 같이 인간의 의식과 신체도 결코 나눌 수 없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퐁티가 말하는 “체험된 신체의 현상학은 지각적 경험에서 신체가 수행하는 역할과 의미를 탐구한다. 그것은 신체를 우리와 세계와의 살아 있는 유대로서, 우리를 세계에 소속시키는 탯줄로서 이해한다. 그것은 인간의 경험의 뿌리가 신체에 있음”[20]을 알려 주는 거라 하겠다. 퐁티에게 있어서 ‘신체’는 의식과 지각의 통합의 장인 것이다. 여기서도 이원론의 모순은 극복되며 묘합의 원리가 나타난다 하겠다.
매튜 폭스는 철저히 서구의 이분법적인 사고가 “타락/속량의 기독교 전통”[21]에 뿌리가 있다고 하면서 이에 대한 철저한 경계와 대안으로서 변증법적인 방법으로 “창조영성”을 제시한다. 그는 “창조영성”에 이르는 길을 그의 책 ‘원복’에서 네 가지 단계로 나눠 설명한바 있다. “긍정의 길 - 부정의 길 - 창조의 길 - 변모의 길”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도 이원론적인 구조를 해체하며 통합에 대한 지향성을 유지한다. 특히 그의 이원론의 극복은 ‘신인합일’ 사상에서 두드러진다. 그는 에카르트의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어머니로 의도되었다”[22]라는 말에서 “하나님의 어머니요 하나님 아들의 출산자인 우리 자신”[23]이란 명제를 이끌어 냈다. 이는 남녀의 이원론적인 차별을 극복하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도 “하나님의 공동의 창조자”[24]로서의 인간의 역할을 강조한 표현이라 하겠다. 그가 해석하는 창조력, 즉 “다바르”는 우리를 하나님의 계속된 창조의 협력자로 또한 예술가로 규정한다. 매튜 폭스는 “우리가 하나님으로 자라고 있다”[25]라는 에카르트의 표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하나님을 우리 밖의 ‘타자’의 자리에 놓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일치하는 존재로 설명한다. 신과 인간의 합일은 ‘타자’의 자리가 전혀 없는 하나이다.
또한 매튜 폭스는 기쁨과 고통도 정반합의 원리를 적용하여 결국 ‘합’을 이뤄낸다고 한다. 삶의 이면인 ‘고통’이 우리를 “비움”과 “비워짐”의 자리로 인도하고 결국에는 고통을 “떨쳐버림”의 단계로 나아가, 에카르트가 말한바, “어둠과 결함과 악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축복한다”는 영성에 도달한다고 한다.[26] 이는 ‘선과 악’ , ‘삶과 죽음’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 ‘한’ 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하겠다. 이와 같이 매튜 폭스의 신비주의 창조영성도 다분히 동양적인 면이 많으며 특히 ‘신인합일’의 관점에서 더욱 ‘한’ 사상의 ‘묘합의 원리’에 가깝다.
[내쉬는 말]
그러므로 상생과 평화에 이르는 길은 철저히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극복하는 데서 가능할 것이다. ‘너’와 ‘나’가 아닌 “한” 사상이 강조하는바 ‘우리’이어야 한다. 서구 철학과 신학은 19세기 이후부터 이원론에 대한 반성을 시작한 반면 우리의 “한” 사상은 벌써 수 천년 동안 한민족의 정서 속에 육화된 사상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지나 독재정권에 희생되면서 우리 민중은 너무 많은 부분 우리의 고유 사상을 잃어버리거나 신화 속에 가둬왔던 것 같다. 프로이드가 그리스 신화에서 착안하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우리가 ‘한’ 사상에서 서구철학의 이원론을 극복하는 ‘묘합의 원리’를 말하고 단군신화에서 ‘삼위일체’를 말하는 것이 왜 불가능하겠는가? 더 이상 우리는 우리의 것을 과거라는 먼지 쌓인 창고 속에 가두어 둬서는 안 될 것이다. ‘묘합의 원리’는 일원론도 이원론도 아닌 ‘합(合)’을 말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상호 공존과 상호 역동적인 관계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철저히 평등의 원리가 그 저변에 있다.
이러한 “한” 사상은 결국 우리 민족을 “우리”라는 “공동체”로 묶는 역할을 했으며 하나로 어우러짐의 장에서 한민족의 놀이 문화와 신명과 한(恨)의 정서가 함께 싹트게 했다. 매튜 폭스는 창조영성의 가장 중요한 실천으로 ‘놀이’와 ‘예술’을 강조했는데, 이는 우리 민족의 ‘놀이’와 ‘신명’과 상통하는 의미와 목적을 갖는다. “다바르는 능동적이고 상상력과 놀이로 차 있다”[27]고 했으며 이 놀이를 “에로스”와도 연결하여 설명한다. 그는 이 에로스는 “감각”이 아니라 “느낌” 임으로 강조하고 “에로틱의 회복은 느낌의 회복”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사랑의 느낌은 인간사의 변혁의 힘이 되며 창조의 원동력과 기쁨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느낌과 잠재적 느낌 또는 상처 받을 가능성을 가진 만남”을 반드시 전제해야 한다.[28] 에로스가 넘치는 놀이는 곧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이 만남의 장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상생과 평화는 이러한 ‘만남의 장’, 곧 우리 밖에 있고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사랑할 가능성과 상처 받을 가능성을 동시에 지니지만 또한 ‘합일’로 나아갈 희망 또한 발견한다. 우리가 서로에게 상처 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것 보다 그 상처를 감싸고 치료할 가능성이 우리에게 더 충만함을 깨닫는 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욱 많이 서로 사랑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형벌과 맞물려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요일 4장 18절)”
결국 서로에 대한 두려움이, 서로에 대한 신뢰 없음이, 상생과 평화를 깨뜨리는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두려움은 남을 전적으로 ‘타자 또는 객체’의 위치에 놓고 자신을 ‘의식하는 주체’로 놓는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것은 ‘분열’과 ‘대립’, ‘경쟁’ 등과 같은 개념들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우리가 ‘완전한 사랑’을 이루려면 이러한 이분법적인 세계관에서 탈피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 위에 ‘우리’라는 ‘합일’의 바탕을 두고 ‘만남’을 통해 궁극적인 ‘평화와 상생’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명심할 것은 ‘상생과 평화’가 모든 갈등과 다툼이 ‘제로(zero)’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여기에는 ‘정(正)’과 ‘반(反)’과 ‘합(合)’ 상호간의 역동적인 운동성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정’만도 아니며 ‘반’만도 아니고 ‘합’만도 아니다. 매튜 폭스가 말하는 바대로 여기서 어느 하나만 빠져도 진정한 ‘합’에 이를 수 없다. 그리고 이 셋은 정지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상호 관련 속에서 인간사에 관여한다. 기쁨과 슬픔이 인간사 속에서 끊임없이 교차 발생하는 것과 같은 원리라 하겠다. 헤겔이 말한 것 같이 역사는 끊임없이 이러한 변증법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해 간다는 것이 옳을 말일지 모르겠다. 이것이 기독교의 삼위일체의 원리이고 철학의 정반합의 원리이며 “한” 사상의 “묘합의 원리”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않을까? 결국 상생과 평화의 길은 “합”에 이르기 위한 끊임없는 ‘순환적 움직임’이라고…
<참고서적>
이경숙,박재순,차옥숭, ‘한국 생명 사상의 뿌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1,서울
박재순, ‘한국생명신학의 모색’, 한국신학연구소, 2000, 서울
매튜 폭스, ‘원복’ , 황종렬 역, 분도출판사, 2004, 경북 왜관
메를로 퐁티, ‘지각의 현상학’, 류의근 역, 문학과 지성사, 2002, 서울
위르겐 몰트만,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김균진 역, 한국신학연구소, 2004, 서울
한국현상학회 편, ‘몸의 현상학’ , 철학과 현실사, 2000, 서울
메를로 퐁티, ‘현상학과 예술’, 오병남 역, 서광사, 1983, 서울
피에르 테브나즈,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심민화 역, ㈜문학과 지성사, 1995, 서울
리차드 커니, ‘현대유럽철학의 흐름’, 임헌규 외, 한울, 1992, 서울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1,2,3’, 휴머니스트, 2005, 서울
김승태, ‘메튜 폭스의 창조영성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2005
F.카프라,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 이성범,구윤서 역, 범양사출판부, 1987, 서울
[1] F.카프라,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 이성범,구윤서 역, 범양사출판부, 1987, 서울
[2] 이경숙,박재순,차옥숭, ‘한국 생명 사상의 뿌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1,서울, p.42
[3] Ibid., p.43
[4] Ibid., p.43
[5] Ibid., p.43
[6] Ibid., p.44
[7] Ibid., p.45
[8] Ibid., p.45
[9] Ibid., p.45
[10] Ibid., p.45
[11] 위르겐 몰트만,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김균진 역, 한국신학연구소, 2004, 서울, p.324
[12] Ibid., p.324
[13] Ibid., p.372
[14] Ibid., p.p.371~372
[15] 메를로 퐁티, ‘지각의 현상학’, 류의근 역, 문학과 지성사, 2002, 서울, p.,702
[16] Ibid., p.,702
[17] Ibid., p.,702
[18] Ibid., p. 22
[19] Ibid., p.,691
[20] Ibid., p.,705
[21] 매튜 폭스, ‘원복’ , 황종렬 역, 분도출판사, 2004, 경북 왜관, p.10 이하
[22] Ibid., p.241
[23] Ibid., p.239
[24] Ibid., p.191
[25] Ibid., p.197
[26] Ibid., p.p.149~157 참조
[27] Ibid., p.41
[28] Ibid., p.p.302~3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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