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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신학

James Chae 2013. 1. 28. 23:13

 조던 오먼, 영성신학, 이홍근 역, 분도출판사, 1987, ,경북 왜관 [요약 발제]



 

 


신비신학

채 야고보

 


그러므로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 마태복음548(표준새번역)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누가복음 636(표준새번역)

 

크리스천의 영성은 믿음과 사랑과 이 밖의 다른 덕행들로 말미암아 작용하는, 은총의 내적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다.” [1]

 

 수덕적인 것과 신비적인 것은 결코 나누어지지 않으며 서로 상보적인 관계에 있고, 결국 이 둘은 영성신학이라는 큰 범주에서 하나로 다뤄질 수 있다. 여기에서는 영성생활에 있어서의 신비적인 것’, 신비주의에 관해 알아본다. (이 글은 조던 오먼의 영성신학을 주로 참고했음을 밝힌다.)

 

[신비주의 용어 정의]

먼저 신비적이라는 용어는 그리스어 ‘mystikos’에서 유래된 것으로, “은밀한(신비에 연관된)”, “감추어진 전례(비밀의식)”를 의미하고 또한 어두운”, “비밀에 찬등을 뜻하는 형용사이다.[2] 사실 신비라는 말은 일상적인 차원에서 흔히 사용되는 용어로 앎이나 믿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로서[3]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서 일상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신비라는 말은 늘 체험을 수반하게 되고 이 체험의 대상이 구체적일 때, 내면성•전체성[4]을 획득할 때 비로서 종교적 영역으로 넘어간다. 이와 같이 종교적, 철학적 영역에서 신비주의라는 용어가 의미를 갖는다.


신비주의를 독일어로 위스티치스무스Mystiaismus”라고 하는데 이는 복합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인간의 신에 대한 직접적 체험영혼과 절대자 신과의 합일에 관한 신학적•형이상학적 이론[5]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신비적 체험의 특징은 철학적으로는 주관과 객관의 합일[6]이고 종교적으로는 신인합일을 뜻 한다. 조던 오먼은 이 신인합일을 마태복음 5 48절의 완전함과 동일시 하는 것 같다. 하느님의 완전함에 이르는 것이 성화의 궁극적 목적이고 이 완전함은 다른 말로 완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결코 인간 스스로 이를 수 없는 길이고 오직 하느님의 은총의 도움을 받아야 만 가능하다. 결국 신비신학은 이러한 완전함에 이르는 성화의 과정 가운데 나타나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신비적 현상이나 체험에 의해 깨닫는 하느님의 신성에 대한 변론이나 분별에 대한 지식을 다루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 신비적이란 말은 주후 3세기 경부터 전례적으로는 종교적인 의식(儀式), 주석학적으로는 문자적 의미가 아닌 성서해석상의 비유 내지 상징적 의미를, 그리고 신학적으로는 만인 공유의 일반 지식이 아닌, 특수한 소수의 사람들만이 지니는 심오한 신앙의 진리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주후 4세기에 이르러 신비신학이란 용어가 등장하면서 5~6세기를 거쳐 위 디오니시우스이 이르러 신비적이란 말은 신에 관한 체험적이고 , 직관적인 지식[7]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은총]

완벽한 크리스천의 완성은 오직 은총에 의해서 만 가능하다. 은총이란 하느님이 피조물 안에 주입하고 창조한 초자연적 선성(善性)” 이다. “은총(초자연적)은 인간의 본성(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하고 상승시킨다. “은총은 초자연 생명의 형상적 원리로서 정적 방식(static manner)으로 영혼의 본질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 덕행과 은사는 초자연 구조에 있어서 동적(動的,dynamic) 요소로서 인간의 기능 또는 능력 안에 머물고 이 기능 또는 능력을 초자연 질서로 상승시킨다.”


이러한 은총의 효과는 인간을 신성에 참여케 함이다. 은총은 인간을 하느님의 자녀로서 상속자의 신분을 갖게 한다. 우리가 상속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공동상속자로서 그리스도의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은총에 의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인간적 위치 뿐 아니라 천사의 본성 위로 상승된다.” , 하느님의 자녀로 신적 양식(divine manner)으로 살기 시작한다.”


또한 은총을 통해 인간은 의로워지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살게 되며, “초자연 공로를 세울 능력을 갖게 된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하느님이 우리 안에 친밀한 결합을 이룬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삼의 살아 있는 성전이 됨으로 우리 안의 하느님 나라가 형성됨을 체험한다.

 

[성화은총]

은총은 1) “받는 이를 성화시키는 은총 2)“남을 성화시키는 은총으로 나뉘는데 전자에는 성화은총도움 은총이 있다. 여기서는 1)에 대해서만 다룬다.


성화은총은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인간을 하느님의 자녀의 지위로 들어 높이어 천국의 상속자가 되게 한다.” 성화은총은 영혼 안에 부여된 초자연 특질로서 비록 유비적이고 우유적(analogous and 偶有[8] accidential)이긴 하나 하느님의 본성과 생명에 물리적이고 형상적으로 참여함이다. 은총은 초자연 생활에서 인간을 들어 높이고 인간을 구원하는 형상적 원리로서 분명히 초자연적이다결국 인간은 성화은총에 의해 신성에 물리적,형상적,유비적 및 우유적으로 참여한다고 하겠다.


피조물들은 어떻게 하느님의 완전성에 참여하는가? 세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성없는 피조물은 그들이 존재하는 점에서만 하느님의 완전성에 참여하고 있으나 하느님을 닮은 유사성은 미약하여 자취 또는 흔적이라 불릴 정도이다. ‘이성을 지닌 피조물은 그들이 신령한 영혼과 기능을 부여 받고 있는 점에서 더욱 분명한 양태(樣態)로 하느님의 완전성을 표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성을 지닌 피조물은 하느님의 본성적인 모상이라 불린다. ‘의인들의 영혼은 성화은총에 의해 하느님과 결합되고, 그 때문에 그들은 하느님의 초성적(초자연적) 모상이라 불리고 실상 하느님의 양자가 된다.”

 

[도움은총]

의인이 성화은총주입덕행을 부여 받았어도 초자연적 능력을 작용시키기에는 반드시 도움은총이 필요하다. “도움은총의 필요성은 비록 의인이라도 죄를 피하고 은총지위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특별한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도움은총은 인간으로 하여금 초자연적 영역에서 무엇을 행하거나 받을 수 있게 하는 모든 능력, 운동, 성향 및 감도를 포함한다.” 이것은 외적 또는 객관적 은총내적 작용 은총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하나님의 현존을 만나게 하는 어떤 방법으로 전례, 준성사, 설교 및 착한 표양 등이다. 후자는 인간의 의지와 결합하는 어떤 것이다. 분명한 것은 도움은총은 내적으로 인간의 의지에 영향을 미치고 인간의 협력을 불러일으키는작용을 한다.


도움은총의 세 가지 기능은 “1)영혼이 주입된 습성을 지니지 못했을 때나 또는 대죄로 인해 그들을 잃었을 때 주입습성을 받아들이게 한다. 2)주입덕행을 활성화시키고 만일 어떤 이가 성화은총 지위에 있으면 충동작용은 주입덕행을 완성하고 초자연 생명의 증가와 성장을 가져오게 한다. 3)성화은총 및 주입덕행이 대죄로 인해 상실되는 것을 막는다.” 도움은총은 귀중한 보배로서 성화은총과 주입덕행이 효과를 낼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주입덕행]

작용습성인 주입덕행과 은사도 도움은총과 관련된다. “주입덕행은 신앙으로 조명된 이성의 명령에 따라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느님께서 영혼의 기능 속에 주입하신 작용습성이다. “ ‘작용습성이란 모든 자연적 및 초자연적 덕행에 공통된 정의의 포괄적 요소이다.” ‘습득덕행이 반복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것에 반해 주입덕행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주입하심에 의존한다. “습득덕행과 주입덕행의 주요한 차이는 형상적 대상에 의거한다. 주입덕행은 습득덕행의 경우와는 달라 기능이 단순한 이성의 명령이 아니라 신앙으로 조명된 이성의 명령을 따르게 한다.” “주입덕행의 목적은 영혼의 기능을 은총질서로 상승시킴으로써 그 기능을 초자연화하고 그들로 하여금 초자연 행위를 수행할 수 있게 함이다.” “주입덕행이나 그것을 대신하는 도움은총 없이는 인간이 초자연 행위를 수행할 수가 없다.”


주입덕행의 특징을 살펴보면, 1)주입덕은 언제나 성화은총을 동반하고 은총과 더불어 주입된다. 2) 주입덕은 실제상 성화은총과 구별된다. 즉 은총은 영혼의 본질 속으로 주입된 존재적(entitative) 습성이라 생각하면 충분하나, 주입덕은 실제로 영혼과는 구별되는 가능태(potencies) 속으로 주입된 행위적 습성(operative habits)이다. 3)주입덕은 그에 상응하는 습득된 본성덕과 특이하게 구분된다. 4)주입덕은 작용양상으로 보아서가 아니라 본질로 보아 초자연적이다. 5)주입덕은 성화은총과 함께 증가된다. 6)주입덕행은 초자연 행위를 할 수 있는 내적 힘을 주지만 외적 용이성은 주지 않는다. 이런 경우 외적 용이성을 주는 습득덕이 필요하다. 7)신앙과 희망을 제외한 주입덕은 모두 대죄의 결과로써 잃게 된다. 8)주입덕은 직접 감소되지 않는다. 오직 소죄나 덕 실천의 중지가 감소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성신의 은사]

일반적인 용어로, “은사(恩賜)란 그 누가 타인에게 너그러운 마음에서 자애롭게 무엇인가를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주는 자 편에서 은사는 빚이나 의무의 개념을 배제함을 뜻한다.” 은사의 개념에는 주는 사람은 기꺼이 베풀고 받는 사람은 감사한다는 점과, 받은 자가 이를 잘 관리하여 사용할 것 등을 전제한다. 이 은사는 잘 사용할 때 온전해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은사 중 가장 큰 것은 분명 성신일 것이다.


그렇다면 은사는 습성인가 아닌가? 1) “성신의 영감이나 충동으로 움직이는 이에게는 도움의 은총이 충분하다. 그러므로 은사들은 습성이 아니고 도움의 은총이다. 2) 성신은 활동의 무한한 행위자요 따라서 영혼 편에는 선재하는 성향이 필요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거부된다. 그러므로 은사는 습성이 아니다. 그러나 성신이 활동함에 있어서 영혼이 쉽게 움직일 수 있도록 어떤 선재하는 성향이 요구되고 따라서 영혼은 , 초자연적 양식에서 활성화될 수 있는 습성이 필요하다면 그것이 바로 성신의 은사이다.” 더욱이 은사는 주입덕의 완성임으로 은사는 덕처럼 활동적 습성이다


다음은 은사와 덕의 공통 특징을 살펴본다. “1)은사와 덕은 함께 활동적 습성이기 때문에 서로 유적(類的)으로 동일하다. 2)그들은 하느님을 동일한 동인(efficient cause)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양자가 주입된 초자연 습성이다. 3) 그들은 동일한 생래적 주체인 인간의 기능을 가진다. 4)그들은 동일한 질료적 대상(material object), 즉 모든 윤리적 질료(matter)를 가진다. 5)그들은 현세에서 시작되어 후세에서 완성되는 인간의 초자연적 완덕을 동일한 목적인(目的因)으로 삼는다.”


은사와 덕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1)주입덕의 동인은 신앙으로 조명되고 도움의 은총으로 고무되는 인간의 이성이다. 은사는 성신의 충동 아래 작용하고, 성신은 직접적인 접촉으로 은사를 활성화시킨다. 2)주입덕은 신앙으로 조명된 이성의 지도와 관리 아래 작용하고, 은사는 성신을 그의 동인으로 삼는다. 3)주입덕의 실천에 있어서 영혼은 매우 활동적이다. 반면 은사의 활동에 있어서 영혼은 비록 의식적이고 자유로우나 수용적(受容的)이다.


은사는 주입덕의 완성을 위해 또한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고 한다면 주입습성이나 주입덕은 불완전한 것인가? 은사가 필요한 이유를 간단히 살펴보면 “1)습성이 그의 완전한 질료 대상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2) 습성이 그 목적을 달성할 만큼 강하지 못한 경우, 3)습성이 주체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경우 4)습성 자체의 본질(신앙이나 희망)에 속하는 내적 불완전성이 있을 경우 5)습성 및 습성을 지닌 주체간의 불균형이 생길 경우등이 있다. 은사는 인간의 이성에 의함이 아니라 성신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은사에 의해 이러한 불완전성을 바로 잡을 수 있다.

 

[신비체험]

주입덕행이나 은사의 도움으로 영혼은 그리스도교적 완덕에 이른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은 신비를 체험한다. 신비체험은 철저히 신학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신비가들로부터 나온 자료는 신학적 원리 및 결론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신학적 진리에 모순되는 진술은 주장자가 누구든 관계없이 선험적(a priori)으로 배척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학적 원리또한 궁극적 바탕을 신적 계시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신비체험이란 신적인 것의 체험을 의미한다. 신비사상의 본질은 심리적 사실로서 영혼에 미치는 신적 활동(divine activity)의 인식이다. “신비사상은 수동적 체험이지 능동적 체험이 아니다.” 이는 오직 성신 만이 은사를 통해 우리 안에 이러한 체험을 경험케 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성신의 은사가 불완전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그 체험을 우리가 감지할 수 없지만 그 은사의 활동이 더욱 빈번해 지고 우리 영혼 안에서 점점 우위를 차지하면서 이는 더욱 강화된다. 이리하여 우리 영혼은 신비적 상태를 체험한다. 그러나 수동적 정화가 이루어지는 동안, 은사의 신적 작용은 영혼이 모든 집착으로부터 정화됨을 그 목적으로 삼는다.”


신비체험과 성신의 은사와의 관계를 살펴보자. “은사의 작용은 신비현상의 본질을 형성한다. 성신의 은사가 작용할 때마다, 다소간에 격렬한 신비적 활동이 있게 된다. 그리고 은사의 작용이 빈번하고 반복됨으로써 그것은 인간적 방식으로 활동하는 주입덕행의 실천보다 월등하고, 이때 영혼은 신비적 상태로 들어간다.” 그러나 신적인 것의 체험은 은사의 활동에서 중요한 현상이지만 반드시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영혼의 어두운 밤이나 실로 신비로운 수동적 정화(ex. 하느님의 전적 부재 total absence)가 이루어지는 동안에는 (이러한 현상이) 결여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적 행위에 관한 자각에 의해 신비적 상태와 수덕적 상태간의 기본적 차이점이 드러난다. “수덕적인 영혼은 비단 믿음과 사랑의 지도를 받긴 하나 순수한 인간적 방법으로 크리스천 생활을 영위한다. 그는 신적인 것을 오직 내성(內省)과 추리에 의해서만 인식할 뿐이다.” 그러나 신비가들은 은총생활의 실재를 자신들 안에서 체험하고 우리 안에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증거한다.” 또 신비가들은 자신들이 체험하는 바를 스스로 만들어 내지 않음을 충분히 아는데 이러한 수동성은 신비체험의 특징이다.


신비적 활동과 주입관상기도는 구분될 뿐 아니라 별개의 것이다. 사실상 주입관상기도가 성신의 은사적 작용을 요구하기 때문에 신비적 활동이 없는 주입관상기도는 있을 수가 없으나, 주입관상이 없는 신비적 활동은 있을 수 있다.”

 

[신비체험과 신비상태]

신비적 체험은 성신의 은사들이 신적 양식에 따라 작용할 때 생긴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이 신비적 상태로 계속 지속되지는 않는다. “성신의 은사들은 어떤 신비가에게 있어서도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성신만이 직접,간접으로 행동할 수 있으므로 은사의 작용을 위해서는 어떤 경우에서나 성신의 특별한 운동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신비행위(활동)는 성신의 은사가 신적 방법으로 작용하는 다소 강한 단순 활동이다. 신비상태는 인간적 양식으로 작용하는 주입덕의 단순한 수행보다 월등한 신적 양식으로 작용하는 은사행위의 분명한 우위성이다.”


신비상태는 바로 영혼이 성신의 은사의 작용 아래 습관적으로 행동할 때 시작되는 것이다. 능동적 및 수동적 정화에서 판단한다면, 신비상태는 감각의 수동적 밤을 거치는 동안에 시작된다. 만일 기도의 등급을 척도로 삼는다면, 신비상태는 일치의 기도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신비생활은 수덕생활 안에 이미 나타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결론에는 크리스천 생활의 전체적 발전과 하느님과의 일치의 전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완벽한 크리스천 완성은 오직 신비상태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크리스천의 완덕은 세례 때에 씨앗으로 받은 성화은총의 완전한 발전이다. “주입덕행이 성신의 은사의 영향을 받지 않고서는 완성에 도달될 수 없다. 주입덕행이 은사 없이는 이성의 법칙 아래 있는 인간적 양상을 넘어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은사가 지니고 있는 신적 양상만이 주입덕행의 자기완성에 필요한 상황을 그에게 제공한다.”

 

 


정리해보면, 신비주의는 신인합일을 그 궁극적 목표로 하며 이를 조던 오먼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의 완전함에 이르는 완덕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이러한 과정은 결코 인간 스스로 할 수 없고 반드시 하느님이 주입하시는 ‘(성화)은총에 의존한다. 이 은총에 의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시는 주입덕행성신의 은사는 인간을 성화케 하고 하느님의 완전함으로 나아가게 도와준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이 체험이고 이것은 수용적이고 수동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체험, 매튜 폭스가 말한 대로, “아무도 우리 대신 삶과 신을 체험해 줄 수 없는 것과 같이 개인적인 체험이다. 이와 같이 신비주의가 개인적차원의 성격이 강하지만 그러한 개별적 체험의 요소들을 분석하고 보편성의 장으로 이끄는 것이 신비신학의 과제일 것이다.


나는 조던 오먼이 제시한 마태복음 5장의 완전함에 이의를 제기한다. 로마 가톨릭 신학은 이를 성화에 대한 성서적 근거로 제시하는 것 같다. 그러나 매튜 폭스가 이미 지적한 바 같이 이 말씀을 누가복음 636[9]자비와 함께 생각한다면 그 의미가 사뭇 달라질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완전함만 강조하신 것이 아니라 이와 동시에 자비또한 강조하신 것이다. ‘완전함만을 강조 할 때 인간은 상승 지향적이 되고 자연스럽게 상하의 위상이 정해지게 된다. 이는 플로티노스의 유추설과 같이 일자에 가까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의 위상적 차별과 같은 원리일 것이다. 여기서 차별의 가능성이 대두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거룩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남자와 여자 등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는 완전함이란 단어에 이미 내포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던 오먼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의 영혼이라고 강조하는 것 같다. ‘영혼이 성화의 주체라고 한다면 육신은 과연 무엇인가? 단지 영혼에 대하여 열등한 객체일 뿐인가?


개인적 성화의 영역에서 신비주의를 다룬 조던 오먼의 책이지만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성화의 사회적 차원이다. 도로테 죌레나 매튜 폭스는 신비주의에 대해 논하면서 신비주의란 안으로는 신비주의이고 밖으로는 예언, 즉 사회 정의이다라고 했다. 이는 성서의 예언자 전통에서 잘 나타나있다. 신비주의는 개인적 성화사회 정의모두에 중요성을 두며 이 둘은 결코 나눠질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 조던 오먼, 영성신학, 이홍근 역, 분도출판사, 1987, ,경북 왜관, p.19

[2] 강영계, 기독교 신비주의 철학, 도서출판 삼문, 1986, 서울,  p.18

[3] Ibid, p.18

[4] Ibid. p.18

[5] Ibid. p.19

[6] Ibid. p.19

[7] Ibid., p.15

[8] 사물이 일시적으로 우연히 가지게 된 성질 (전자사전 피시딕 9.0 참조)

[9]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