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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와 숭고미_현대미술과 기독교 미학의 접점

James Chae 2013. 1. 31. 16:15

*이 글에 실린 도판은 책에서 직접 찍은 것이라 도판 사진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미리 밝힙니다.

 

 

 

 

 

신비주의와 숭고미

현대미술과 기독교 미학의 접점

 

채 야고보

 

 

아무도 아버지의 말씀을 묘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 테오토코스여, 그가 당신으로부터 육체를 취하셨을 때

그는 자신에 대해 묘사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타락된 형상을 신적 아름다움과 연합함으로써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우리는 말과 성상으로 우리의 구원을 고백하고 선포합니다.”

(동방정교회 정교주일의 시기송 중에서)[1]

 

[들어가는 말]

 

곰브리치는 그의 책 서양미술사에서 원시시대 동굴벽화의 주술적 기능을 설명하면서 독자들에게 재미있는 물음을 던진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 속 얼굴(특히 눈)을 바늘로 찌를 수 있는가? 이 질문으로 그는 원시동굴벽화를 그린 사람들의 의도와 그림에 대한 태도를 설명하고자 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러한 행동을 실천에 옮길 이가 없을 것이다. 자신과 상관 없는 사람의 사진이라면 모를까 일반적으로 자신의 남편, 아내, 부모님, 자식 등의 얼굴사진에 그런 짓을 쉽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 그런가? 사진에 무슨 힘이 있기에 우리는 사진 속 인물과 실제 원형과 연관성을 늘 가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사진은 단지 인화지 위에 잉크의 화학적 작용에 의해 나타나는 일종의 얼룩일 뿐인데 말이다. 사진은 사진일 뿐이지 실재 대상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미시적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여기에는 보다 다양한 뉘앙스들이 늘 존재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사진과 그 대상의 원형 간에는 어떤 관계가 실제로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우리의 시지각을 통한 인식의 작용에 의해 우리가 그렇게 인식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만약 후자 만의 이유라면 오히려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될 것이다. 그 의미를 인식하는 주체가 우리 자신임으로 그 사진은 아무것도 아닌 그냥 종이일 따름이기 때문에 눈을 가리고 바늘로 찌르면 그만일 것이다(그냥 단순히 종이에 구멍을 뚫는 것이라고 자위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결코 빈 종이에 바늘을 찌르는 것 같이 자유롭고 편안하게 만 느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행동에는 분명 묘한 긴장과 부담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사진과 사진의 대상, 그리고 우리의 인식 간에는 땔래야 땔 수 없는 어떤 관계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우리의 이성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그 이면의 실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관련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러한 현상에 집중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분명 인간의 체험, 특히 미적 체험이나 신비 체험과 관련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미학에서는 숭고미와 관련해서 생각한다. 이는 이성이나 로고스에 의존한 비례와 균형 등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대상 이면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으로부터 느껴지는 아름다움이다. 로고스 중심의 서구 사유세계에서 부수적인 것으로 치부 받던 숭고미가 현대미술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도 근래의 일이다. 문화평론가 진중권은 이미 현대미술의 특징을 숭고와 시뮬라크르[2]로 정의한 바 있다. 이러한 숭고미는 인간의 이성에 의해 느껴지고 분별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인간 이성과 느낌을 초월하는 물질적인 대상 이면의 보이지 않는 세계의 아름다움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보는 이로하여금 감격이나 충격, 혹은 당황스러움까지도 느끼게 한다. 그래서 현대미술 작품 앞에서 오늘날의 관람객들은 그렇게도 충격을 받는 것 같다.

 

나는 이러한 숭고미를 신비주의 신학과 관련하여 생각한다. 이 둘의 공통점은 체험에서 찾을 수 있다. 신비주의의 신학에서 말하는 신인합일의 과정에서 이러한 숭고미는 당연한 현상으로 우리에게 주입되는 은총이다. 신비체험에는 환희와 미적 감흥이 동반되기도 하는데 이때 느끼는 미적 체험은 이성이나 어떤 조형적 질서에 의존한 감흥이기 보다 오히려 우리의 지각이나 직관, 그리고 감정에 의존하거나 그것을 넘어선다. 그래서 숭고미도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주입덕행이나 신비체험, 은사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라 정의 할 수 있다. 그것은 이성의 한계를 넘어 초월적인 영역으로부터, 로고스logos를 넘어 파토스pathos[3]로부터, 그리고 코스모스cosmos에서 보다는 카오스chaos로부터 현상의 세계로 주입되는 아름다움이다.[4] 그리스,로마 미술의 균형과 비례에 의존한 이 세상 형상에 내재된 아름다움이 아니라, 비잔틴 미술에서 보여지는 물질적 형상이 지향하는 초월적 아름다움이다. 여기에 숭고미의 특성이 신비주의신학과 일치하는 접점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이 글에서 숭고미와 신비체험과의 관계를 정리해보고, 이것이 미학적, 신학적으로 적용된 비잔틴 미술의 이콘(성화상,Icon)에서 두드러졌음을 말하고자 한다. 또한 몇몇 현대미술 작품들을 소개하며 현대미술에서 어떻게 이러한 신비주의적 요소가 숭고미로 드러나는지도 살펴보고자 한다. 나는 신비체험과 미적체험 간에 연관성이 있다고 믿는 바, 이 둘 사이의 관계성 속에서 비잔틴 미술과 현대미술의 연관성 또한 언급하고, 향후 현대미술에서 기독교 신학적미학의 자리를 숭고미의 차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의 한계를 정하자면 신비주의와 숭고미의 존재론적 논의 보다는 신비체험으로서의 숭고미가 현대미술 뿐만 아니라 종교미술에까지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까지 일 것이다.

 

 

1. 신비주의와 숭고미 : 체험을 중심으로

신비적이라는 용어는 위 디오니시우스가 사용한 그리스어로 ‘mystikos’에서 유래된 것으로 은밀한(신비에 연관된)”, “감추어진 전례(비밀의식)”을 의미하고 또한 어두운”, “비밀에 찬[5]등을 뜻하는 형용사이다.” 이는 앎이나 믿음즉 로고스적인 것과 상관없는 차원의 것을 말한다. 신비라는 말은 늘 체험을 수반하고 철학에서는 이 합일의 체험이 주관과 객관의 합일, 또 종교적으로는 신인합일을 뜻한다. 기독교적으로는 이러한 체험이 결국 완덕에 이르는 것을 말하며 이러한 하나님의 완전함에 이르는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신비현상들을 이성적으로 정리하고 분석하는 것이 바로 신비신학의 영역이다.

 

조던 오먼이 마태복음 5 48절의 완전함’(완덕에 이르는 것)을 신비주의의 목적으로 삼은 것[6]에 반해 매튜 폭스는 신비주의를 자비와 창조력, 그리고 사회정의와 연결시킨다. 폭스는 말하기를 나는 안의 경험을 신비주의로, 밖의 경험을 예언으로 명명했다. 신비주의로 명명된 안의 경험은 우리가 삶의 아름다움과 기쁨과 즐거움을 얻기 위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언으로 명명된 밖의 경험은 우리가 받아들인 아름다움을 더 잘 비추기 위해 밖으로 나가서 사회와 역사를 개조하는 것을 의미한다[7]고 했다. 신비주의가 개인적 완덕을 강조하면 개인의 성화, 사회정의를 강조하면 사회의 성화를 말하는 것이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이러한 것이 체험을 통해 경험되어지는 것이고 자연스럽게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이 우리의 이다. 우리의 은 체험의 장소이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8]이 만나는 경계[9]로서, 단순히 주체의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가 나누이지 않는 장소이다. 그러므로 은 신비주의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며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로서, 가시적 영역과 비가시적 영역의 경계로서 존재한다. 체험의 관점에서 이러한 의 개념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10]

 

보통 미의 본질을 말하면 조화롭고 균형 잡힌 형식이라고 말하곤 한다. “예술에 있어서의 심미적 체험이란 그러한 형식을 순수하게 관조하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이해되어 왔다.”[11] 이러한 심미적 체험은 어디까지나 수학적 비례관계로또는 사물에 대한 공간적 지각방식과 로고스적 사고방식으로 이해한 결과이다. 이러한 미학은 코스모스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것으로 숭고미에서 말하는 파토스적인 것과 카오스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코스모스적인 세계 내에서 신비적 체험이나 숭고미가 체험 되는 것은 이성의 한계를 넘어 그 질서를 뚫고 분출되는 파토스에 의해 가능하다. 이를 통해 인간은 카타르시스catharsis’를 경험하게 되고 실존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적 희열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로고스적이고 코스모스적인 심미관과 다른 숭고미의 특징이다.[12] 이런 차원에서 숭고의 미학은 현실을 넘어선 존재론, 혹은 현실의 심연에 드리운 근본적 존재론[13]이라 할 수 있다.

 

신비주의의 체험과 숭고미의 체험은 모두 우리 몸의 지각과 감각에 의존하며 인간의 이성이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입되는 수동적체험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특히 신비주의에서는 일치라는 것을 전제하며 신과의 합일을 궁극적 목적으로 한다. 동방정교회의 성화상에서 추구되는 것도 이콘Icon을 통해 나타나는 숭고미이고, 그것은 성화상과 그 대상 간의 연관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단순히 이콘은 관조의 대상으로 그린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콘 자체가 표현하는 대상의 원형은 분명 아닐 것이다. 이러한 이콘의 묘한 미학은 구체적인 체험을 전제로 하는 것임으로 이것 또한 신비주의의 범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2. 이콘(성화상, Icon)과 숭고미

아무도 아버지의 말씀을 묘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 테오토코스여, 그가 당신으로부터 육체를 취하셨을 때…”[14]그 묘사의 가능성이 열린 것이라고 동방정교회 신학자 오우스펜스키는 정교주일의 시기송을 인용하여 말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므로 표현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는 성육신 사건을 이콘 표현의 근거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성부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는 우리에게 계시된 것, 즉 성자의 성육하신 인격인 예수 그리스도만 묘사할 수 있다[15]는 것이다. , ‘계시된 것 만 묘사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의 경우는 성서에 묘사된 형상으로만 묘사됨으로 비둘기의 모습이나 불의 혀[16]등으로 표현된다.

 

이콘이 가지는 신비주의적인 특징은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연합[17]이다. 이것이 이콘을 통해 나타나는 숭고미이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가시적 대상의 비례와 균형에 의해 느껴지는 아름다움이나, 우리의 경험과 이성, 그리고 환경에 의해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디오니시우스는 하나님은 아름다움이라 불렀는데 이는 하나님이 한편으로는 모든 피조물에게 특이한 아름다움을 수여해주시며, 다른 한편으로는 또 다른 아름다움, 즉 진실로 신적인 아름다움[18]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 아름다움은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해주는 통로, 혹은 수단이 될 수 있다[19]고 한다. 결국 숭고미는 하나님과의 합일 또는 하나님의 완전함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주입은총인 것이다.

 

이콘이 가지는 신비스러움은 다음 말에서 더 두드러진다. 이콘은 신적 아름다움과 영광을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적인 방법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원형의 특성인 은혜가 성상 안에 임재한다[20]고 동방정교회 미학은 말한다. 이는 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를 사제가 축성하면 그리스도의 실재 피와 포도주로 변한다는 화체설과는 다른 임재설에 가까운 내용이다. 은혜가 임하므로 그 떡과 포도주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단순한 물질적인 그림이 거룩한 이콘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늘 우상숭배의 위험이 있게 마련인데 이를 피하기 위해 동방정교회 신학은 이를 신비주의적인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숭배하는 것은 형상의 본질이 아니라, 그 형상에 각인되어 있는 원형의 형태이다. 왜냐하면 형상의 본질은 숭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숭배되는 것은 물질이 아니다. 오직 원형이 그 형태와 함께 숭배된다.”[21] 그들은 이콘을 통해 그 원형에게 경배하는 것이지 그 그림 자체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콘은 결국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 또는 통로로서 자리한다. 그림 저 너머의 세계와 지금 현재의 세계를 연결하는 매체가 바로 이콘이다. 여기서 이콘의 원형과 이콘 그리고 관자(觀者) 간에 묘한 긴장감이 존재하며 관자에게 주입되는 은혜에 의해 신비 체험의 경험이 나타난다. 여기에 이콘의 숭고미가 관자에게 체험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콘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현상들은 신비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3. 현대미술과 숭고미

현대미술에서도 신비주의적 요소를 찾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대상의 재현이나 모방을 넘어 더 이상 재현이나 모방이기를 거부하고 실재보다 더 실재같은 시뮬라크르, 비례와 질서 그리고 합리주의적 미적 관점을 넘어서는 숭고미, 현대미술은 더 이상 재현과 일상적인 미에 의존하지 않는 다른 길을 걸어 왔다. 그것이 현대인들이 현대 미술 앞에서 낯선 아름다움(?)에 당황하는 이유일 것이다. 더 이상 현대미술가들은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나 그 대상의 아름다움에 집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재보다 더 실재같은 무엇을 표현하여 실재를 대체하거나 또는 실재와 미를 해체하여 충격과 공포에 미적인 지위를 부여하기도 하면서, 대상의 재현 너머에, 그리고 대상의 아름다움 너머에 있는 그 무엇에 도달하려 한다. 그것은 퐁티가 말한 지각 이전, 즉 우리의 이성이 지각을 통해 인식과 판별을 하기 이전의 세계인 원초적 지각의 세계일 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주체와 객체, 주관과 객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등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세계로의 지향성이 현대미술을 더욱 신비롭게 하는 요인이다. 이것이 현대미술에 나타나는 숭고미이다. 여기서는 말레비치(Kazimir Severinovich Malevich 18781935),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 그리고 송번수의 작품을 중심으로 간단히 이러한 경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화가 말레비치는 러시아 전통 속에 담겨있는 비잔틴적 숭고미를 현대적 형태로 재현했다( 그림 1, 2). 그의 작품에서는 원근법도, 볼륨도, 그리고 어떠한 묘사도 찾아 볼 수 없다. 보이는 것은 단순한 색과 사각형이 전부이다. 그의 그림은 철저히 그림 그 자체가 되었다. 잰슨은 그의 작품이 현대적 이콘이며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숭고미를 대신하고 있다고 한다.[22] 그의 작품의 평면성은 공간을 대신하며 사각형의 네 개의 꼭지점은 3차원을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시간을 상징하며 4차원의 세계를 표현한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개념은 시간과 공간의 밀접한 관계를 규명한 아인슈타인의 이론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분명 1917러시아 혁명을 전후로 하여 활동한 작가로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예감하고 이전의 전통적 형식과 단절된 새로운 형식을 새로운 러시아에 제시하려 했는지 모른다. 미술사에서는 그의 절대평면의 회화 양식을 절대주의(Suprematism)’라 명명했다. 과학과 철학 그리고 종교적 숭고미 등 절대로 함께 섞일 것 같지 않는 이질적 요소들이 그의 작품 안에서 하나로 어우러진다. 대상의 묘사보다는 순수한 기하학적인 색채 평면 만 표현하고 그 결과 형태가 없는 색채와 평면 만 남는 추상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러한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평면의 그림은 우리의 순수감성을 자극한다. 우리의 인식이 그 의미를 깨닫기 이전의 원초적인 지각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수한 느낌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관자(觀者)가 고전주의적으로 어떤 형태나 의미를 찾으려 하면 할수록 그의 그림을 더욱 난해하게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는 이성이나 고정관념 그리고 자연적인 형태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의 지각이나 감성의 틈을 비집고 나오는 파토스(pathos)적 감성에 호소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림1. K.S.Malevich. Black Quadrilateral. c. 1913-15. Oil on canvas. 61x43.3 cm

 

 

 

 

그림2. K.S.Malevich. Suprematist Compositon : White on White. 1918. Oil on canvas. 79.4 x 79.4 cm

 

 

말레비치의 사각형이 정제된 느낌을 주었다면 로스코의 사각형은 더욱 격정적 느낌을 더한다. 색의 번짐과 침투로 인해 캔버스와 물감은 완전한 일체를 이루며 말레비치 보다 더한 평면성을 획득한다.(그림 3, 4) 로스코의 사각형은 이미 꼭지점을 상실한 상태임으로 사각형의 모양은 하고 있지만 더 이상 사각형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말레비치의 작품은 로스코의 것에 비해 더 기하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여겨진다. 자연에 대한 재현은 더 이상 로스코의 작품과 관계가 없다. 그는 매체를 넘어 자신 만의 가상의 세계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지각에 의존한 눈에 보이는 현상의 세계 너머에서 합리주의의 틈을 뚫고 나오는 감성의 강한 에너지. 그것이 그의 그림과 관자를 일치의 경험으로 인도하는 역동적 힘이다.

 

 

 

그림3. Mark Rothko. Orange and Yellow . 1956. Oil on canvas. 231x180.3 cm

 

그의 작품은 대상의 재현이라는 고전주의 미술의 기능을 포기하고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을 연결하는 매체로서 자신의 그림을 위치시켰다. 이러한 일치의 개념은 관자와 작품 간의 교감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종의 신비적 체험이다. 그의 작품은 관자로 하여금 자연스러운 명상으로 이끈다. 그 명상을 통한 일치는 우리의 지각이 인식과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기 이전의 원초적 지각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신비적 체험은 시지각의 언어에 의존한다. 동방정교회의 이콘이 말없는 말[23]이었다면 로스코의 작업 또한 그러하다. 그의 작품 속에서 보여지는 색과 색의 대비, 중첩, 혼합, 흡수는 우리의 지각적 감성을 이끌어 상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2m가 넘는 그의 작품의 스케일은 평면의 그림 안에 또 다른 평면의 세계를 담기에 충분하다. 넓은 색면은 관자의 시선을 마치 블랙 홀처럼 작품 속으로 빨아드린다. 그의 작품 앞에서 느껴지는 이러한 전율은 분명 작품의 스케일이 주는 또 다른 아름다움임에 틀림없다. 그가 주고자 한 아름다움은 작품을 통해 관자에게 주입되는 피안의 세계의 아름다움이다. 그것이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숭고미이다.

 

 

 

 

그림4. Mark Rothko. White and Greens in Blue. 1957. Oil on canvas

 

 

송번수의 작품(그림 5, 6)을 보는 이들은 누구나 고난또는 고통을 연상하기 쉽다. 이러한 감정은 인간과 삶의 존재론적인 문제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는 사랑하는 자식과 동생의 죽음을 경험하는 어두운 시간을 통해 고통을 암흑과 침묵의 근원에서 극복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한 비탄eleos과 전율phobos’[24]을 통한 카타르시스는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고통의 숭고미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비탄과 전율은 현실의 힘 앞에서 실존의 한계가 극단적으로 드러날 때 터져 나오는 인간의 가장 부정적인 체험의 표현이다[25]고 안성찬은 그의 저서 숭고의 미학에서 말한다.  이러한 카타르시스에 대해 안성찬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성의 사슬에 묶여있던 인간 내면의 광기, 즉 파토스(pathos)가 통제에서 풀려나 무서운 힘으로 모든 현실적인 벽과 경계를 무너뜨리고 관객을 일상적 실존의 좁은 감옥에서 풀려나게 한다. 이러한 해방과 고양의 체험이 카타르시스의 본래적 내용과 의미라고 할 수 있다.”[26] 이것이 송번수의 작품을 통해 체험하게 되는 카타르시스적 숭고미이다.

 

 

 

그림5. 송번수그날 이후. 1997. Wool, Plain Weave. 205x305 cm

 

 

그의 태피스트리(tapestry)[27]작품에서 보여지는 가시의 이미지는 그 대상의 재현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가시가 가지는 보여지는 언어, 즉 상징적인 의미에 중점을 둔 것이다. 미시(微視)적으로 그림 속 가시에 주목하게 되지만 동시에 그 가시이면의 거시(巨視)적 세계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림 속의 가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로 그곳에 표현된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숭고와 신비를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앞에 언급한 로스코의 경우와 같이 그의 그림도 관자를 자연스럽게 명상으로 이끈다. 그의 그림은 단순히 관조의 대상을 넘어 이콘(Icon)이 가지는 초월적 형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실존의 고통을 정화하고 승화시키는 그의 작품의 카타르시스는 기독교의 고난의 영성에 닿아있다.

 

 

 

그림6. 송번수절망과 가능성. 2001. Wool, Plain Weave. 205 x 197 cm

 

 

이라크전을 배경으로 작업한 그날 이후(그림5)는 가시 두 개가 서로 교차한 십자가 형태를 띠고 있어 십자가의 고난과 고통을 연상케 한다. 이러한 알레고리적 표현은 이미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즐겨 사용하셨던 방식으로 대상의 원래의 의미를 더욱 강력하게 암시해 주는 역할을 한다. ‘절망과 가능성(그림6)이라는 작품은 날카로운 가시가 천을 뚫고 나오는 것 같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 같이 보이는 세계의 장막을 뚫고 나오는 파토스적 힘이 분출되고 있는 듯 보인다. 그 파토스는 현실의 혼란과 고통의 상태, 즉 카오스를 통해 모든 이성적이고, 합리주의적인 구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 새로운 코스모스를 찾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이 보여주는 절망과 가능성카오스와 코스모스의 또 다른 표현이 된다.

 

 

4. 숭고미: 기독교 신비주의 미학으로서의 가능성

비잔틴 시대의 이콘은 그 시대가 추구했던 보편성을 종교적 형식으로 잘 간직하고 있다. 비잔틴 시대가 지정학적으로, 시대적으로 이질적인 문화가 하나로 결집되어 있으면서도 이데올로기적으로 보편성과 통일성을 획득한 것은 정교합일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교권이 교황에게 속한 로마교회와 달리 황제에게 보편적인 그리스도 국가의 수장으로서의 통치권과 교회의 대표자로서의 교권을 부여한 것이다. 정치적으로 그리스도의 국가라는 보편성과 종교 문화적으로 이콘이라는 보편적 미술양식을 창출함으로 비잔틴 제국은 나름대로의 보편성을 정치와 미술분야에서 유지할 수 있었다. 다양함 속에서의 보편성, 아마도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과 같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양한 문화와 사상, 그리고 이질적인 것들이 뒤섞여 있으면서도 숭고와 시뮬라크르라는 문화적 코드는 어떤 유행과도 같이 현대문화 전반에 흐르는 보편성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전개되는 양상은 국가와 문화마다 다르고 예술적 장르 마다 다르게 나타나고 있지만, 비잔틴 제국이 현실의 형상과 자연 세계의 미와 비례, 균형 등을 중시했던 그리스,로마의 내재적 미의 개념을 배척하고 물질과 로고스, 코스모스의 세계를 넘어 비가시적인 세계와 숭고에 집중한 것 같이[28] 오늘날의 현대미술도 현실의 세계에 대한 재현과 미의 규범을 넘어 새로운 미의 보편성을 추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위의 세 작가의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형식적,표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 그림을 한 시대의 그림으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이들의 작품들이 숭고미를 모두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고전주의적 미의 관점을 여전히 유지한 채 이들의 작품들을 보면서 보편성이 결여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혹자는 작가 마음대로 자신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 무슨 보편성이 있느냐고 반문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보편성이 이콘을 통해 숭고미로 드러난 것처럼, 숭고미가 일반적 미의 개념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닌 한, 숭고미는 현대미술에서 독특한 보편성을 갖는다. 이러한 숭고미는 체험적인 관점에서 신비주의적 성격이 짙다. 이는 개체들의 감정,느낌,경험을 중시하는 포스트모던의 한 경향이기도 하다. 그러한 경향조차도 거시적 안목으로 보면 자본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테두리 속에 있지만 신비주의는 그러한 질서와 제한을 언제나 넘어서려 한다. 이성과 합리주의의 세계가 한계에 다다를 때, 물질 지향적이고 자본 중심적인 세계가 그 모순을 드러낼 때, 늘 파토스는 그 한계와 모순의 틈을 비집고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어 왔다. 그것이 신비주의가 갖고 있는 일치저항이라는 두 얼굴이다.

 

 현대미술 속에서는 이러한 흐름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간과해 왔던 것은 이러한 흐름이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이나 비잔틴 전통과 맥을 같이 한다는 사실이다. 80년 대의 대부분의 미술사 수업에서는 늘 중세 미술, 즉 비잔틴 미술에 대해서는 가볍게 다루거나 그냥 건너뛰기 일수였다.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창의적인 것이 전혀 없는 미술의 암흑기로 여겼던 것이다. 성균관대 교수인 이덕형은 그의 저서 비잔티움,빛의 모자이크에서 이러한 것이 라틴 문화에 우월성을 강조한 서구문명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29]동서로마의 오래된 대립으로 생긴 깊은 골이 서구문명으로 하여금 이러한 편견을 갖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 또한 예외는 아니다. 교권과 교리중심의 교회전통에서 신비주의 전통은 늘 주류로 편입됨이 없이 주변 현상으로 남아 있었다. 신비적 체험이 때론 교권과 교리를 위협할 위험이 감지 될 때는 가차없는 탄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과거 로마교회의 마녀사냥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영성의 흐름에서 이러한 신비주의 전통을 무시하고는 기독교 영성은 절름발이로 남을 수 밖에 없다. 신비 체험에 대한 흐름은 역사를 통해 민중들의 삶 속에서 늘 그 맥을 이어왔다. 물론 주술과 접신 등과 같은 많은 폐단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나 대다수가 문맹이었던 과거의 민중들을 위로해 왔던 것은 이러한 신비주의 경향의 체험 신앙이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대미술이 자본화, 소비화되어 있는 병패도 있지만, 그러한 먹구름 만 걷고 본다면 작가 개개인과 작품을 감상하는 개인들이 그림을 통한 어떤 체험을 중시한다는 차원에서, 현대미술은 신비주의적 경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술에 있어 작가와 작품 간의 어떤 체험도 중요하지만 이를 감상하는 자의 참여 또한 매우 중요하다. 현대미술에서 의미의 전달이 작가 편에서 일방적으로 관객에게 주입되는 성향은 줄어든 반면 작가와 관객이 함께 쌍방간에 소통하는 구조가 늘어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작가의 창작을 통한 미적 체험 만큼 관객이 작품을 통해 경험하는 체험 또한 중시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자리하는 것이 숭고의 미학이다. 형상의 이면이나 그 너머에 존재하는 미, 그것은 질서나 균형이 가져 다 주는 미와는 분명 다른 초월적인 면이 있다. 비잔틴 미술의 이콘이 끊임없이 우상숭배의 논란에 휩싸인 것도 결국은 내재와 초월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작품에 그려진 대상의 본질이 작품 안에 내재 한다고 주장한다면 반드시 그려진 작품 자체가 원형과 동일한 지위를 갖게 됨으로 이는 우상의 범주에 든다. 그러나 작품은 그 원형의 그림자요 그 원형으로부터 오는 은혜가 머무는 자리이며, 현실과 초월을 매개하는 그 무엇이라 할 때는 우상의 범주에서 벗어난다. 고전주의 미술에서는 그려진 사과나 대상으로서의 사과에 동일한 의미를 부여했지만 현대미술에서는 그러한 재현을 포기한지 오래다. 그림에서 대상을 모방한다는 의미는 퇴색되고 대상과 그려진 대상 간에는 이제 의미의 연결고리 또한 사라졌다. 이것이 현대미술 양식에서 보여주는 시뮬라크르이다. 이 글에서는 이 부분에 관한 것은 생략하고 숭고미의 특징에 집중했지만 현대미술의 표현 양식에서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현대미술이 가지는 숭고미는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과 분명히 맥을 같이한다. 이러한 전통은 이미 비잔틴 미술에서 그 가능성을 보였다. 비잔틴 미술이 너무 형식주의적으로 치우친 문제는 있지만 그들이 추구하고 이루려 했던 미는 초월적이며 신비적인 미였다. ‘신비라는 말은 가시적이며 현상적이고 물질적인 이 세계에 대한 반대 국면이며 초월이란 말로도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잔틴 문명이 초월적인 것을 중시한 나머지 작품 자체를 경히 여겼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원시종교와 같이 작품을 신적인 대상의 범주에 갖다 놓은 것 또한 아니다. 그들은 초월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의 경계에다 이콘의 위치를 부여했다. 그 이콘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그 원형의 은혜가 임재하는 곳이다.

 

현대미술에서 작품보다 작가의 창작이나 사상이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것은 사실이나 작품 자체가 그 의미를 상실한 적은 전혀 없었다. 뒤샹의 변기 작품이 하나의 해프닝으로 등장한 것이지만 그것을 새로운 의미로 재해석한 것도 현대미술 자체이다. 그러므로 보이는 작품 또한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며 그 작품은 늘 메를로 퐁티의 표현대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은 것의 경계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미술의 신비적인 요소는 이러한 두 세계의 경계에서 작품이 만들어 내는 그림 이면으로의 초월과 이 세상으로의 주입의 반복과 긴장 속에서 생겨난다. 그러한 긴장은 늘 관객 안으로 주입되고 체험되는 신비적 현상이다. 물론 그러한 감흥이 늘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신비적이란 말이 무색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에서 기독교적 미학의 위치는 바로 이러한 곳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신비주의는 이러한 체험에 미학적 답을 제시하기에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뿌리는 이미 비잔틴 미술에서 형성된 것이다. ‘내재초월의 경계에서 현대미술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가능성은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에서 발견된다. ‘숭고미는 어쩌면 그 숙제를 푸는 첫번째 열쇠일지도 모르겠다.

 

 

[나오는 말]

 

현대미술은 끊임없이 기존질서의 한계를 무너뜨리며 진화해 왔다. 새로운 경향은 또 다른 새로운 경향에 의해 자리를 내주어야 만 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늘 현대물질문명의 한계와 생태계의 파괴로 인한 지구촌 생존의 위기가 늘 존재해 왔었다. 이러한 속에서 예술이 서야 할 위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당연히 제기돼야 한다. 아울러 계시와 예언이 죽고 대신 교리와 교회 전통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또 자본의 논리가 그대로 교회에 적용되면서 세속화의 길을 가고있는 오늘날의 교회에서 기독교의 영성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도 동시에 던져져야 한다. 헬라 세계의 이질적 문명과 문화가 어우러지면서도 문화와 예술, 종교와 정치가 하나의 보편성을 추구했던 비잔틴 세계에 다시금 기웃거리게 되는 것은 이러한 질문에 나름대로의 답을 찾고자 함이다. 비잔틴 문명의 어두운 면 보다 그 문화가 가지고 있는 응집력과 융화력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콘의 미학적 신비를 탐구하며 느끼는 것은 그것이 기독교 신비주의 영성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현상들은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것이 푯대 없이 중구난방 헤매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각 종교가 지향하는 바를 성취하는 차원에서 분명한 자리 매김이 필요할 것이다. 현대미술이 방향성 없이 헤매는 것이 아님은 그 미학이 가지는 특수성이 많은 미학자들에 의해 밝혀지면서 드러난 사실이다. ‘시뮬라크르와 숭고미를 현대미술의 특징으로 발견한 것도 현대미학의 발전의 일환이다. 현대미술에서 기독교미술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자리에서 숭고미기독교 신비주의를 살펴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르겠다. 현대미술 속에서 기독교 미학의 전통의 흔적을 찾고,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방향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면 그 결과 또한 긍정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참고 서적]

강영계, 기독교 신비주의 철학, 도서출판 삼문, 서울, 1986

이덕형, ‘비잔티움, 빛의 모자이크,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서울, 2006

안성찬, 숭고의 미학, 유로서적, 서울, 2004

조던 오먼,영성신학, 이홍근 역, 분도출판사, 경북 왜관, 1987

메를로 퐁티, 지각의 현상학, 류의근 역, 문학과 지성사, 서울, 2002

메를로 퐁티, 현상학과 예술, 오병남 역, 서광사, 서울, 1983

메를로 퐁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남수인/최의영 역, 서울, 동문선,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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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1,2,3’, 휴머니스트, 서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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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니얼 B.클린데닌,동방 정교회 신학, 주승민 역, 은성, 서울, 1997, p. 49

[2]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3, 휴머니스트, 서울, 2005

[3]수동(受動)을 표현하는 말. 격정·정념·충동 등으로 옮겨지며, 로고스(logos)에 대치된다. 일시적이고 지속성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며, <무슨 활동을 받는다><영향을 받는다>는 뜻을 가진 라틴어의 <받다(paschein)>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다. 넓은뜻으로는 어떤 사물이 <받은 변화상태>를 의미하고, 좁은뜻으로는 특별히 <인간 마음이 받은 정태(情態)>를 의미한다. 수동성·가변성이 특징이며, 때때로 안팎의 상황에 대해 인간의 마음이 빠지는 기분·정서를 통괄한다. 이성의 판단과 다른 근원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쾌()> <고()>의 정이 그 기본이며, 고전논리학에서는 <쾌·고>의 이성이 판단에 따르는 것은 <덕()>이라고 하였다. 개별성·주체성을 가지므로 이성의 명령에 반항하기도 하여 스토아학파에서는 파토스를 병으로 보았으며, 각성적 의식보다 의식 아래의 근원충동에 더 깊은 관계를 가진 인간 존재의 근원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겼다. 오늘날 파토스란 비상하게 고양된 감정상태를 가리키며, F.W. 니체의 《거리감(Pathos der Distanz)》은 이러한 의미의 파토스의 전형적 표현이다. <인터넷 야후 사전 참조: www.yahoo.co.kr>

[4]안성찬, 숭고의 미학, 유로서적, 서울, 2004, p.p.,7~62 참조

[5]강영계, 기독교 신비주의 철학, 도서출판 삼문, 서울, 1986, p.18

[6]조던 오먼,영성신학, 이홍근 역, 분도출판사, 경북 왜관, 1987, p.p.13~157 참조

[7]매튜 폭스, 영성-자비의 힘, 김순현 역, 다산글방, 서울, 2002, p.109

[8]메를로 퐁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남수인/최의영 역,동문선, 서울, 2004, 이 책의 제목

[9] 여기서 말하는 경계는 이 둘을 이분법적으로 가르는 기준으로서의 경계가 아니라 이 둘의 차이를 편의상 나누는 차원에서의 경계라는 뜻이다. 몸은 육과 영(또는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존재론적으로 결코 나눠서 말할 수 없는 존재라는 차원에서 경계라는 말을 사용했다.

[10]메를로 퐁티, 지각의 현상학, 류의근 역, 문학과 지성사, 서울, 2002

[11] 안성찬, 숭고의 미학, 유로서적, 서울, 2004, p.22

[12] Ibid., p.p.,17~25 참조

[13] Ibid., p.25

[14] 대니얼 B.클린데닌,동방 정교회 신학, 주승민 역, 은성, 서울, 1997, p. 49

[15] Ibid., p. 53

[16] Ibid., p. 53

[17] Ibid., p. 60

[18] Ibid., p. 60

[19] Ibid., p. 60

[20] Ibid., p. 62

[21] Ibid., p. 145

[22] H.W.Janson, ‘History of Art’, Thames and Hudson, New York, 1995

[23]이덕형, 비잔티움, 빛의 모자이크,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서울, 2006, p.91

[24]안성찬, 숭고의 미학, 유로서적, 서울, 2004, p.40

[25] Ibid., p.43

[26] Ibid., p.43

[27] 다채로운 색실로 짜서 만드는 그림 작품

[28] 안성찬, 숭고의 미학, 유로서적, 서울, 2004, p.p.7~62 참조

[29] 이덕형, 비잔티움, 빛의 모자이크,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서울, 2006, p.p.98~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