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9. 나해_대림1주일
이사 63:19하-64:8_ 시편 80:1-7, 17-19 _1고린 1:3-9_ 마르 13:24-37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십시오!”
채야고보 신부 / Artist, 성공회 사제
“아,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십시오.”(이사63:19하)
오늘 1독서 이사야63장의 말씀입니다.
קָרַ֤עְתָּ שָׁמַ֙יִם֙ 쿼라타 샴마이 “하늘을 찢으시고”에서 ‘쿼라타’의 원형은 קָרַע (쿼라)라는 동사입니다. 이는 뭔가를 둘로 나눌 때 사용하는 단어로 구약에서 특히 옷을 찢는 행위에 많이 사용됩니다. “르우벤이 구덩이로 돌아와 요셉이 그 안에 없는 것을 보고 옷을 찢으며”(창세37:29) 여기서 ‘찢으며’에 사용된 단어가 ‘쿼라’입니다. 단순히 무엇을 찢는다는 차원을 넘어 이 행위는 절박하고 진실한 마음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경우에 주로 사용됩니다. ‘억울하거나 분개한 마음을 표현할 때’(판관11:36), ‘참회의 마음을 표현할 때’(여호7:6), ‘자신의 결백이나 진실을 주장할 때’(민수14:6) 등 입니다. ‘샴마이’는 ‘하늘(heaven) 또는 복’이란 뜻으로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창세기1장1절에서도 같은 단어가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하늘을 쪼개다’는 절박한 심정을 담은 기도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의 의미에 맞게 오늘 성서 정과는 모두 간절한 재림의 기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편 80편의 “거룹 위에 좌정하신 분”은 야훼 하느님의 ‘전능’과 왕으로서의 ‘절대 주권’을 상징한 표현입니다. 그러한 전능함에 기대어 인간의 도움을 요청하는 절박한 마음이 오늘 시편 80편에 녹아 있습니다.
“거룹 위에 좌정하신 분이여, 에브라임과 베냐민, 므나쎄 가문 앞에, 햇빛처럼 나타나소서. 힘을 떨치고 오시어, 우리를 도와주소서.”(시80:1하-2)
또한 ‘고린토인들에게 보내는 바울로의 첫째 편지’에도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가 넘쳐납니다. 여기에서는 ‘심판의 날’에 모두가 주님을 영접하길 희망하는 재림의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로의 사랑의 표현일 겁니다.
“모든 은총의 선물을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받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1고린1:7)
그리고 오늘 마르코 복음에서도 다시 오실 주님은 ‘역사적 예수’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마르13:26)
이 말씀은 마르코 기자가 환상을 보고 기록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마르코가 자신의 공동체의 초기 전승을 기초로 하여 기록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물론 다니엘 7장13-14절을 근거로 한 것이겠지요. 여기에 ‘재림 그리스도론’을 첨가하여 ‘종말 심판 설교 집성문’을 완성합니다.
“그 재난이 다 지나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고,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며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이다.”(마르13:24-25)
이 표현에서 우리가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재림의 징조가 창세기 1장과 같은 우주관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1창조의 때와는 반대로 하느님께서 만드신 해와 달은 빛을 잃고, 하늘의 별들이 떨어집니다. 그런 후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이 세상에 다시 오십니다. 마르코가 제1데살로니카 4장15절-18절의 말씀을 접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두 말씀 간에 유사성이 보입니다. 왜냐하면 제 1데살로니카 편지가 마르코 복음 보다 먼저 쓰였기 때문입니다.(서기 65년 경 추정)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입니다.”(1데살4:16하) 천지창조 이전에 흑암과 혼돈이 있었듯이 주님의 재림 이전에도 이 세상은 카오스로 뒤덮입니다. 재림은 이렇게 제2의 창조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개역한글 성경의 표현대로 말하면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2고린 5:17후) 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일관되게 ‘그리스도 비밀 사상’(W. 브레데)을 유지합니다. ‘그리스도 비밀 사상’이라 함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처음부터 숨기는 내러티브를 말합니다. 이는 마르코의 신학적 의도가 반영된 것입니다. 아마도 초기 ‘비의적 전승’에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이러한 내러티브는 마르코 복음 전반에 흐릅니다. 8장에 베드로의 고백 이후 이러한 분위기는 차츰 바뀌어 예수의 수난 예고를 3번에 걸쳐 전개하며 제자들의 첨예한 반응들이 드러납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드러내지만 제자들은 끝까지 이에 대해 ‘몰이해’를 보입니다. 그러다가 예루살렘 입성 후 예수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그 절정은 마르코 복음 15장 39절에 백인 대장의 외침에서 드러납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마치 온갖 고생을 겪다가 마침내 자신의 신분이 원래 왕자임이 밝혀져 자신의 자리로 다시 돌아간다는 ‘왕자와 거지’ 동화와 비슷한 내러티브입니다.
‘역사적 예수’께서는 로마시대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 처형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살아남은 초대 교회에 대단한 수치이면서 신앙의 혼란을 가져온 것이 분명합니다. 자신들이 믿던 메시아가 반역죄로 처형을 당하다니. 그것도 십자가에서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쏟아지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비난과 박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혼란이 일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타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뜻에 대한 우리 인간의 ‘오해’와 ‘몰이해’ 여야 했습니다. ‘역사적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했다는 사실은 숨길 수 없는 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숨길 수없는 사실이기에 그것을 ‘몰이해’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몰이해’를 불식시킬 교회의 부활과 재림의 신앙은 그만큼 절실했습니다. 제자들의 부활에 대한 증언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힘이 되었고, 또 제자들의 정체성마저 바꿔놓았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그들은 이제 ‘사도’로 불리게 됩니다. 또 ‘재림에 대한 기대’는 교회로 하여금 박해 상황에서도 더욱 희망을 갖게 했습니다. 마르코는 이러한 교회의 요청에 응답하며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역사적 예수’가 사실은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 였음을 사람들에게 극적으로 일깨우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단순하지만, 명확한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마르코는 이러한 전개를 독창적으로 구상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의 중심 내러티브를 만든 사람이 바로 마르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갈릴리 시대- 예루살렘 상경기 - 예루살렘 활동기 - 십자가 처형과 빈 무덤(부활)’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에 대한 큰 이야기 줄기 말입니다. 이러한 마르코의 노력에 힘입어 마태오와 루가는 모두 마르코 복음의 내러티브를 따릅니다. 특히 마태오는 전반적으로 마르코 복음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었을 정도로 많은 부분 마르코 복음에 의지했습니다. 마태오는 마르코의 거친 내러티브 문장을 더욱 세련되게 다듬으면서 탄생 이야기와 설교 집성문, 부활과 재림에 대한 자료 등을 덧붙여 더욱 구조적으로 탄탄한 복음서를 완성하여 율사다운 면모를 발휘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 이해의 실마리가 조금은 잡힙니다. 마르코는 사람들이 외면하고 버린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실패자 같으나 실은 승리자였다는 역설. 그래서 다니엘서 7장13-14절을 모티브로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다시 오시는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비밀 사상’의 완전한 반전입니다.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마르12:10상) 이 말씀은 ‘그리스도 비밀 사상’의 핵심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씀은 60년대 로마가 유대인 탄압을 하던 시절에 마르코 공동체에게는 매우 강력한 위로의 말씀이었을 겁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의 이미지와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인” 예수의 모습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대비에 커다란 감흥을 얻기 힘들 수 있지만, 당시의 ‘삶의 자리’에서 이러한 것을 상상해 보면 마르코 공동체가 느꼈을 통쾌한 환희와 희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러한 극적인 대비는 네로의 핍박의 상황에 놓인 마르코 공동체에 커다란 용기와 희망을 줬을 것입니다. 이것이 마르코가 기록한 ‘재림 신앙’이 가진 강력한 힘입니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이들의 모습이 당시의 일반 사람들에게는 마치 광신적인 종말론자로 비쳤을 것이란 사실입니다. 1999년 세기말에 한때 우리 사회에 문제가 되었던 종말론자들을 기억해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한심해 보이지 않던가요? 이 세상에서 삶의 기대와 희망을 잃고 방황했던 많은 사람들. 자신들을 괴롭히고 아프게 만든 이 세상에 대한 그들의 증오가 바로 종말에 대한 기대로 나타났던 거지요.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했고 절대자가 나타나 이 세상을 벌해주고 자신들을 구해주길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한심하다고 비판했지만, 그들은 우리 사회가 낳은 ‘실존적 절망의 외침’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들은 망상증 환자들처럼 자신들의 신념을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그들의 아픔을 외면했습니다. 우리는 마치 그런 부적응자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듯이. 그러나 이러한 종말론자들과 초대 교회의 재림을 기다리던 사람들 사이에 외형적인 차이는 없어 보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 재림에 대한 기대에 담겨있는 ‘깊은 인간 실존의 아픔과 고통’ 말입니다. 그것이 절망에 빠진 인간에게 강력한 신앙적 역동성을 추동한다는 이 역설 말입니다.
새로운 전례력을 시작하며 우리는 이러한 당황스러운 재림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을 합니다. 절박하고 애절한 구절로 한 해를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마르코 복음에 의하면 제자들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깨달은 것은 그의 부활과 재림의 신앙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사역을 함께 하는 동안에도 전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눈이 있어도, 귀가 있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주님이시요, 그리스도로 알아본 것은 부활과 재림 신앙 때문입니다. 마르코는 이 부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갈보리의 수난과 십자가 처형, 그리고 제자들의 배반...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라는 절규와 함께 철저하게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한 그리스도. 깊은 어둠과 절망. 그리고 그것을 ‘쪼개는’ 부활 사건과 재림 신앙’. 여기에는 2천 년을 이어온 기독교의 핵심 신앙이 녹아 있는 것입니다. 사복음서 중 최초로 마르코는 이를 기록했습니다. 그는 부활과 재림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늘을 향해 “하늘을 쪼개고 내려오십시오”라는 절박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실존을 감당하라는 뜻일 겁니다. 그리고 바로 그 기도가 대림을 기다리는 우리의 간절함의 표현이 되어야 할 겁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는 십자가 고난과 부활은 강조하면서 ‘재림’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주저하게 된 것 같습니다. 아마도 잘못된 종말론의 오해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재림의 신앙’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과 삶을 지탱하게 했던 기둥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유효합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기간 동안 이러한 재림의 신앙이 우리 마음 가운데 성령의 뜨거움으로 다시 한번 재조명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하늘을 쪼개고 내려오십시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전례독서: 나해_대림1주일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성령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며 주님의 재림을 깨어 준비하게 하시나이다. 구하오니, 우리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덕으로 늘 새롭게 하시어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이사 63:19하-64:8
63:9b64:1 아,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십시오.
. 산들이 당신 앞에서 떨 것입니다.
12 나뭇가지가 불에 활활 타듯,
. 물이 펄펄 끓듯,
. 당신의 원수들은 당신의 이름을 알게 되고
. 민족들은 당신 앞에서 떨 것입니다.
23 당신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은
.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입니다.
34 일찍이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일,
. 일찍이 아무도 보지 못한 일,
. 당신밖에 그 어느 신이
. 자기를 바라보는 자에게 이런 일들을 하였습니까?
45 정의를 실천하고 당신의 길을 잊지 않는 사람이
. 당신 눈에 띄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 당신께서 이렇듯이 화를 내신 것은
.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고
. 처음부터 당신께 반역하였기 때문입니다.
56 우리는 모두 부정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 기껏 잘했다는 것도 개짐처럼 더럽습니다.
. 우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었고
. 우리의 죄가 바람이 되어 우리를 휩쓸어갔습니다.
67 당신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는 자도 없고
. 당신께 의지하려고 마음을 쓰는 자도 없습니다.
. 당신께서 우리를 외면하시므로
. 우리는 각자 자기의 죄에 깔려 스러져가고 있습니다.
78 그래도 야훼여,
. 당신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 우리는 진흙, 당신은 우리를 빚으신 이,
. 우리는 모두 당신의 작품입니다.
89 야훼여, 너무 노여워 마십시오.
. 우리 죄를 영원히 기억하지는 마십시오.
. 굽어살펴 주십시오.
. 우리는 모두 당신의 백성입니다.
작은 아래첨자로 쓰인 구절번호는 라틴어 성서에서 사용합니다.
시편 80:1-7, 17-19
1 이스라엘의 목자여,
. 요셉 가문을
. 양떼처럼 인도하시는 이여,
. 귀를 기울이소서. ◯
. 거룹 위에 좌정하신 분이여,
2 에브라임과 베냐민, 므나쎄 가문 앞에,
. 햇빛처럼 나타나소서. ◯
. 힘을 떨치고 오시어,
. 우리를 도와주소서.
3 만군의 하느님, 우리를 다시 일으키소서. ◯
. 당신의 밝은 얼굴 보여 주시면,
. 우리가 살아 나리이다.
4 만군의 주, 하느님,
. 당신 백성의 기도소리를 ◯
. 언제까지 노엽게 들으시렵니까?
5 당신 백성에게 눈물의 빵을 먹이시고 ◯
. 싫도록 눈물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6 이웃들에게는 시빗거리가 되게 하셨고 ◯
. 원수들은 우리를 비웃습니다.
7 만군의 하느님,
. 우리를 다시 일으키소서. ◯
. 당신의 밝은 얼굴 보여 주시면,
. 우리가 살아 나리이다.
17 당신 오른편에 계시는 분, ◯
. 몸소 굳건히 세워 주신 그분을 붙들어주소서.
18 다시는 당신을 떠나지 않으리니
. 우리를 살려 주소서. ◯
. 당신의 이름을 불러 예배 하리이다.
19 만군의 하느님, 우리를 다시 일으키소서. ◯
. 당신의 밝은 얼굴 보여주시면,
. 우리가 살아 나리이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1고린 1:3-9
3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4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생각하면서 나는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5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갖추게 되었고 특히 언변과 지식에 뛰어나게 되었습니다. 6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에 깊은 확신을 가졌으며 7 모든 은총의 선물을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받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8 주께서도 여러분이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끝까지 굳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9 하느님은 진실하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게 해주셨습니다.
마르 13:24-37
24 “그 재난이 다 지나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고 25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며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이다. 26 그러면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27 그 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으로부터 뽑힌 사람들을 모을 것이다.”
28 “무화과나무를 보고 배워라.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된다. 29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온 줄을 알아라. 30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31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2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33 그 때가 언제 올는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어라. 34 그것은 마치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이 종들에게 자기 권한을 주며 각각 일을 맡기고 특히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하는 것과 같다. 35 집 주인이 돌아올 시간이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혹은 이른 아침일지 알 수 없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36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서 너희가 잠자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큰일이다. 37 늘 깨어 있어라.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또한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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