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6. 나해_대림2주일
성 니콜라(대한성공회 수호성인, 미라의 주교, 326년)
이사 40:1-11_ 시편 85:1-3,8-13 _ 2베드 3:8-15상_ 마르1:1-8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
채야고보 신부 / Artist, 성공회 사제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엣 하샴마힘 베엣 하아레츠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 (창세1:1)
Ἀρχὴ τοῦ εὐαγγελ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Υἱοῦ Θεοῦ
아르케 타우 유앙켈리오우 이에수 크리스토우 휘오우 테오우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마르1:1)
마르코는 마치 창세기를 여는 느낌으로 최초의 복음서를 기록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창세기 기자가 천지창조 선포에 다른 어떠한 부연 설명도 없이 갑자기 시작한 것처럼, 마르코도 기록할 내용의 주제가 어떤 것인지를 부연 설명 없이 ‘청자’에게 거침없이 발설합니다. ‘청자’라 함은, 마르코 복음이 기록될 시기에는 오늘날 우리와 같이 문자로 정보를 접하는 사람들이 극히 적은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듣는 것’으로 정보를 접하던 시기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독자’가 아닌 ‘청자’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은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청자’들이 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분명하고 명확한 표현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형식도 달라야 합니다. 복음서는 ‘청자’를 위한 기록이지 ‘독자’를 위한 기록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서를 읽을 때 소리를 내어 읽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학 양식적으로 주제를 미리 글 서두에 배치하는 방식을 ‘이니치움(Initium,시작의)’이라 부릅니다. 이는 책의 제목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내용의 주제를 드러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마르코는 전기 작가로서 글을 쓰고자 했던 것도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탄생 이야기와 성장과정의 이야기를 담았을 겁니다. 마르코는 오직 예수가 누구인지 자신의 공동체와 후대에 남기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사실을 감추는 내러티브 속에서도 마르코는 세 번에 걸쳐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 예고하는 형식으로 이니치움에서 밝힌 주제를 더욱 구체화시킵니다. 수난 예고는 8장31절, 9장30절, 10장33~34절에 있습니다. 그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한 예수는 부활하셨고 그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것입니다.
18세기 이후 고고학의 발달과 더불어 성서해석학이 발달하면서 오랜동안 마르코복음이 ‘역사적 예수’를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다.는 교회의 확신은 무너졌습니다. 불트만에 의해 ‘역사적 예수’와 ‘신학적 그리스도’가 구분되었고, W. 브레데의 ‘그리스도 비밀 사상’에 의해 마르코 복음이 갖고 있던 ‘역사적 예수’와의 연관성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런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에는 마르코 복음이 갖는 내용의 심오함은 아직도 우리를 ‘역사적 예수’와 연결 짓고 있습니다. 마르코 공동체가 전승한 초기 그리스도 자료들이 그들의 ‘삶의 자리’와 연결된 것처럼, 현재에도 그 유용성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복음이 순수한 마르코의 창작물이 아니라면 말이지요. 마르코 복음 전반에 걸친 진지함과 확신에 찬 모습은 마르코가 물려받은 교회 전승에 대한 확고한 신뢰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마르코는 최초의 ‘복음 εὐαγγέλιον ’을 세레자 요한부터 시작을 하는 것일까요? 여러 이유들이 있을 테지만, 분명한 것은 마르코 복음의 전반적인 기조에 따르면, 마르코는 마태오와 루가가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연결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콘첼만) 마태오와 루가처럼 그는 구약의 구절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인용하더라도 매우 간접적으로 사용합니다. 마태오복음처럼 구약의 ‘성취 인용문’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유일하게 있다면 오늘 읽은 1장 2-3절에 나오는 이사야의 기록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용에 있어서도 마르코는 오류를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출애굽기(23:20)와 이사야(40:3)와 말라기(3:1)의 예언이 혼합된 말이기 때문입니다. 마르코가 이를 “예언자 이사야의 글”이라 표현한 이유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예언의 출처가 아니라 그 예언이 가리키는 대상이 누구인가?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가 아니라 ‘세례자 요한’입니다. 마르코는 구약의 예언의 성취를 ‘세례자 요한’에게 연결시킵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이 예언한 “광야에서 외치는 이”입니다. 그리고 마르코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그의 외침의 내용입니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마르1:3하) 바로 구약이 예언한 ‘세례자 요한’의 외침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향합니다. 이로써 예수는 이스라엘 역사를 넘어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가 되시는 겁니다. 마르코에게 이스라엘은 단지 예수를 죽인 “적대적 존재”(콘첼만)일뿐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가 가리키는 대상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마르1:3하)
마르코는 자신이 선포하는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동시에 복음을 듣는 청자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 그리고 그들의 부활 증언을 듣고 갖은 핍박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던 초대 교회 사람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마르9:1) 는 주님의 말씀은 시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고, 로마의 핍박은 더욱 거세만 갔습니다. 사도들은 하나둘씩 피를 흘려 순교하고, 많은 사람들이 핍박 속에 죽어가는 데도 주님은 오시지 않습니다. 살아갈 일이 막막하고, 마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 듯 절망의 어둠 속에서, 이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마르코는 진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전승 자료들을 살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또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두서없이 흐트러져 있던 전승 자료들을 정리하고, 구전 자료들을 모으며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재구성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 전승 자료들을 근거로 ‘복음’을 통해 삶의 희망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마르코는 예수의 전기를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내용을 교회에게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수치와 고통의 상징인 십자가가 어떻게 절망을 이기는 희망이 되는 것인지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실패자 같은 예수의 삶이 사실은 철저히 숨겨진 하느님의 경륜을 드러내는 신비임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마르코 복음이 16장 8절 ‘빈 무덤 사화’에서 갑자기 끝이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마르코는 마태오와 루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설명하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정확히 알리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마르코 복음에서 이틀 간의 수난 사화가 예수의 공생애보다 더 많은 분량으로 다뤄진 이유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다 파괴될 것이니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제2 베드로의 편지 3장 11절 말씀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코로나 19의 고통이 우리를 짓누르고, 경기는 침체되어 살아갈 일이 막막합니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가 빨라지면서 자연재해에 대한 공포는 날이 갈수록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교회와 예수님의 권위는 땅에 팽개쳐지고, 많은 사람들의 냉소와 무관심 속에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단지 우리의 신앙이 내적인 위안을 소비하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위안의 소비자’일뿐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자랑거리가 되지 않는 시대에서 우리 스스로도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감추고 산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신앙을 취미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갑자기 ‘복음’의 선포로 시작해서, 16장의 ‘빈 무덤’ 이야기로 갑자기 끝을 맺는 마르코의 복음 이야기. 그가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간절한 내용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리기 위함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는 우리의 주님이시고, 우리의 그리스도이십니다.” ; “그의 죽음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너무 자주 들어 이미 식상해진 복음 이야기. 막막함과 두려움 속에서 어떻게 살지를 고민할 때, 우리는 우리의 질문을 다시 원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마르코가 최초의 복음을 쓰면서 의도한 바입니다.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에도,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제자들이나 어느 누구도 이 지상에서 예수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철저히 “감춰진 그리스도”. 제자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것은 부활 이후입니다.(불트만, 콘첼만) 왜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하신 것일까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마르4:9, 23) 마르코는 이 말을 4장에서 두 번이나 강조해서 말합니다. “감춰진 그리스도”는 ‘복음’을 듣고 깨닫는 자에게만 그 진리를 열어 보인다는 뜻이 아닐까요? 이에 대해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지혜로운 경륜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전하는 소위 어리석다는 복음을 통해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1고린1:20하-21) 이것을 좀 어려운 표현이지만 “종말론적 구원의 계시의 은폐”(고펠트)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복음에 담긴 “하느님의 지혜로운 경륜”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값싼 복음’에 넌더리가 납니다. 그러나 역으로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그러한 ‘값싼 복음’ 조차도 우리 삶과 분리시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복음이 단지 ‘축복’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우리는 ‘축복과 은총’에 너무 익숙해져 가고 있습니다. ‘복음’이 본질이고 나머지는 모두 부수적입니다. 이것이 마르코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메시지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특별한 방법이 있을까 아무리 몇 주 동안 궁리를 해봐도 생각은 늘 제자리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특별한 방법이나 지혜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복음’을 접한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결국 답은 너무나 익숙해진 말에서 드러납니다. 오늘 2 독서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심판날을 기다릴 뿐 아니라 그 날이 속히 오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1베드 3:11하-12상) 키워드는 ‘거룩함’, ‘경건함’, ‘심판의 날’ 그리고 ‘그 날이 속이 오도록 힘씀 즉 복음 전파’입니다. 마르코와 같이 베드로도 분명히 말합니다.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라고, 그것이 복음을 ‘듣고 아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에 더해서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소망하며 그때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말합니다. ‘그 날이 속히’ 오기 위해서는 복음이 세상 끝까지 전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정확히 마르코 복음의 핵심과 일치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마르코는 말합니다. “그때가 언제 올는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어라.”(마르4:33) 여기에서 마르코는 “깨어있다”라는 의미의 ‘그레고레오’γρηγορέω (to be awake, to watch)라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말 그대로 잠자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그만큼 절박함이 담긴 표현입니다. “사람들이 태평세월을 노래하고 있을 때에 갑자기 멸망이 그들에게 들이닥칠 것입니다.”(1데살5:3) 결국 재림의 때는 아무도 예외 없이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르코는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로 13장에서 ‘재림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늘 깨어 있어라.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또한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마르 13:37)
너무 단순하고 직접적입니다. 마르코는 마치 갑자기 사람을 놀라게 하는 ‘사자’처럼 거칠게 청자들을 당황케 만듭니다. 거두절미하고 “깨어 있으라” 말합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새겨듣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라고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핵심적인 말 이외에는 침묵하는 마르코. 정리하면 “늘 깨어 있어 주님이 오실 때까지 복음을 전하라.”입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다시 오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부활과 재림의 사이는 ‘교회의 시대’이고, 이것이 이 시대를 향한 하느님의 경륜이라는 것입니다.
대림 2주일을 맞이하며 우리는 진지하게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저도 마르코처럼 오늘 말씀을 여기에서 갑자기 끝내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전례독서: 나해_대림2주일
본기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회개를 선포하시고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에 귀 기울여 모든 죄를 멀리하고, 다시 오실 구세주 예수를 맞이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이사 40:1-11
.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2 “예루살렘 시민에게 다정스레 일러라.
.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났다고,
. 그만하면 벌을 받을 만큼 받았다고,
. 야훼의 손에서 죄벌을 곱절이나 받았다고 외쳐라.”
3 한 소리 있어 외친다.
. “야훼께서 오신다.
. 사막에 길을 내어라.
.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
. 벌판에 큰 길을 훤히 닦아라.
4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내려라.
.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넓혀라.
5 야훼의 영광이 나타나리니
. 모든 사람이 그 영화를 뵈리라.
. 야훼께서 친히 이렇게 약속하셨다.”
6 한 소리 있어 명하신다. “외쳐라.”
. “무엇을 외칠까요?” 하고 나는 물었다.
.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 그 영화는 들에 핀 꽃과 같다!
7 풀은 시들고 꽃은 진다,
. 스쳐가는 야훼의 입김에.
. 백성이란 실로 풀과 같은 존재이다.
8 풀은 시들고 꽃은 지지만
.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9 너, 시온아.
. 높은 산에 올라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
. 너, 예루살렘아.
. 힘껏 외쳐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
.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질러라.
. 유다의 모든 도시에 알려라.
. 너희의 하느님께서 저기 오신다.
10 주 야훼께서 저기 권능을 떨치시며 오신다.
. 팔을 휘둘러 정복하시고
. 승리하신 보람으로 찾은 백성을 데리고 오신다.
. 수고하신 값으로 얻은 백성을 앞세우고 오신다.
11 목자처럼 당신의 양떼에게 풀을 뜯기시며,
. 새끼 양들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으시고
. 젖먹이 딸린 어미 양을 곱게 몰고 오신다.
시편 85:1-3, 8-13
1 주여, 당신 땅을 어여삐 여기시어 ◯
. 귀양살이 야곱을 돌아오게 하시고,
2 당신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시며 ◯
. 저희 모든 허물을 덮어 주셨으니,
3 당신의 격분을 말끔히 거두시고 ◯
. 타오르던 진노를 잊어 주옵소서.
8 나는 들었나니, 주께서 무슨 말씀 하셨는가? ◯
.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 그것은 분명히 평화로다.
¶ 당신 백성과 당신을 따르는 자들,
. 또 다시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않으면 ◯
. 그들에게 평화를 주시리로다.
9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정녕 가까우니 ◯
. 그의 영광이 우리 땅에 깃드시리라.
10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
.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11 땅에서는 진실이 돋아 나오고 ◯
. 하늘에서 정의가 굽어보리라.
12 주께서 복을 내리시리니 ◯
. 우리 땅이 열매를 맺어 주리라.
13 정의가 당신 앞을 걸어 나가고, ◯
. 평화가 그 발자취를 따라 가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베드 3:8-15상
8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잊지 마십시오. [A]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9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미루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갑자기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천체는 타서 녹아버리고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11 이렇게 모든 것이 다 파괴될 것이니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면서 12 하느님의 심판날을 기다릴 뿐 아니라 그 날이 속히 오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하늘은 불타 없어지고 천체는 타서 녹아버릴 것입니다. 13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B]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정의가 깃들여 있습니다.
14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그 날을 기다리고 있으니만큼 티와 흠이 없이 살면서 하느님과 화목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15a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것도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시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
[A] 시편 90:4
[B] 이사 65:17
마르 1:1-8
1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 2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 “이제 내가 일꾼을 너보다 먼저 보내니
. 그가 네 갈 길을 미리 닦아놓으리라.”
. 말라 3:1
하였고, 3 또
.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들린다.
.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 칠십인역 이사 40:3
하였는데, 기록되어 있는 대로 4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하고 선포하였다. 5 그 때 온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이 그에게 와서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다. 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다. 7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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