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7. 가해_연중33주간_화요일_아침 감사성찬례 - 대전교구 성직자 연피정 (미리내 성모성심수도회)
휴고(수사, 링컨의 주교, 1200년경)
묵시 3:1-6, 14-22 _ 시편15 _ 루가19:1-10
“욕망의 자리매김”
채야고보 신부 / Artist, 성공회 사제
오늘 복음서 이야기의 주인공인 사캐오의 직업은 세리(τελώνης 텔로네스)입니다. 물론 세리들의 리더인 세리장(ἀρχιτελώνης)입니다. 현대에나 과거에나 세금을 기쁘게 낼 사람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금 징수원’을 싫어합니다. 특히 예수님 시대에 세리들은 유대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유대교의 랍비들은 세리들을 부당하게 돈을 버는 사람들로 규정하여 부정한 자로 취급하였습니다. 그래서 ‘도적’ 또는 ‘강도’처럼 사람들에게 취급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사회적으로 ‘증인’이 될 수 있는 권리도 없었고, 그들의 가족들도 세리와 비슷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에서는 세리들이 개심하고자 한다면 조건을 달았는데, 부정하게 사취한 것을 사취당한 사람들에게 돌려줘야 했고, 부정 수단으로 얻은 이익은 일반 사람들에게 기부해야만 했습니다. 오늘 예수를 만난 사캐오가 예수를 영접하고 난 후 갑자기 자신의 재산을 반환하겠다고 선언한 행동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도 극소수의 세리들은 자신들의 업무를 정직하게 수행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사캐오가 아주 극악무도한 세리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킷텔 원어사전 참조)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루가는 복음서를 집필하면서 전반적으로 마르코 복음의 구성을 따랐습니다. 여기에 ‘예수 자료(Q자료)’를 통해 예수의 말씀들을 집중적으로 모아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루가 특수 자료’를 통해 루가가 속한 공동체의 신학적 내용을 첨부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루가의 특수자료를 잘 살펴보면 루가의 신학적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루가의 특수 자료’는 전반적으로 ‘윤리적.역사적’ 측면을 드러냅니다. 이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돌봄”입니다. 루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 등이 그러한 예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루가의 구원론과 밀접하게 관계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이야기는 껄끄러운 두 가지 내용을 하나로 묶어 놓은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외된 사람이면서 부자인 사람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오늘의 주인공 사캐오일 겁니다. 그는 부자이면서도, 천대받는 ‘세리’였기 때문입니다.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내치셨습니다.)”(루가1:53하)
마리아 송가의 한 구절입니다. 루가는 부자들에게 매우 인색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것은 루가의 경제윤리가 들어 있는 구절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루가는 ‘물욕의 포기’를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부자가 구원받는 길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고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입니다. 루가복음 9장57절~62절(예수를 따르는 데 필요한 조건), 12장33절~34절(보물을 하늘에 쌓아라), 14장12절~14절(가난한 이들을 초대하라), 14장33절(내 제자가 되는 조건), 16장19절~31절(부자와 라자로 이야기) 등 입니다. 그래서 루가복음을 ‘빈자의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루가는 하느님께서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분이시기에 비록 부자이고 세리이지만 그러한 사람도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유대교에서도 세리가 입문을 하려 하면 자신의 재산을 나눠줘야 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아마도 사캐오는 예수의 말씀을 통해 회심을 한 후 그러한 실천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단순히 통과의례 차원을 넘어설 정도로 파격적입니다.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남을 속여서 취한 재물이 있다면 그 네 배까지 갚아주겠다고 선언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남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입혔을 경우 손해액의 오분의 일을 변상하던 것에 비하면 정말 파격적입니다. 자캐오는 이를 통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여라.”(루가3:8상)
루가 복음 3장의 세례자 요한의 외침입니다. 이는 행동 자체가 구원을 향한 강한 의지의 표현이란 것을 잘 보여줍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회개의 가시적 표지’ 말입니다. 오늘 말씀 구절에서 이러한 구원을 위한 적극적인 행위와 관련된 단어를 찾으면 ‘어서’와 ‘얼른’이라는 단어입니다. 물론 이 두 단어는 공동번역에서 각각 다르게 번역했지만 헬라어 원문에서는 같은 단어입니다. ‘스페우사스σπεύσας’ 는 스페우소 σπεύδω의 부정과거 능동태 분사로 ‘서둘러’, ‘애써서’ 등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행위자의 적극적인 의지가 반영된 단어입니다. 또 다른 단어는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9절)에서 ‘오늘’입니다. ‘σήμερον 세메론’은 말 그대로 ‘오늘’입니다. 이 단어는 ‘얼른 (스페우사스)’이란 단어와 짝을 이루며 루가가 말하고자 하는 ‘구원의 현재성’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말들입니다. 루가의 시간관은 복음서 전반에 걸쳐 ‘이미, 그러나 아직’이란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즉 구원의 시작은 바로 ‘지금 또는 오늘’이지만, 그 완성은 마지막의 때입니다. 그 마지막 때는 루가의 관점에 의하면 복음이 “땅 끝에 이르기까지”(사도1:8)입니다.
루가는 부자이면서도 소외받는 세리의 구원에 대해 고민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고민의 결론이 결국 오늘 자캐오의 이야기로 표현됩니다. 루가의 편집을 따라 가면 이러한 점을 더욱 확실히 발견하게 됩니다. 루가는 먼저 18장 9절~14절에서 “바리사이와 세리”의 의로움을 비교합니다. 이 비교를 통해 하느님 앞에 겸손한 세리가 부각됩니다. 그리고 같은 장 18절~27절까지 부자가 구원받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합니다. 재물에 대한 욕망이 구원에 걸림돌이 됩니다. 그리고 오늘 자캐오 이야기에서 이 둘을 결합하여 결론에 이릅니다. 부자이고 천대받는 세리는 유대인의 관점에서 구원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그러나 루가는 ‘욕망의 자리매김’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하느님께서 소외받는 사람들의 하느님이시지만 그들의 ‘욕망’까지 용서하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인간이 가진 욕망은 부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위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있는 본능입니다. 결국 루가는 이 주제에 가장 적합한 부자 세리 사캐오를 통해 ‘욕망을 하느님의 나라에 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루가12:21)
루가 12장에 나오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재물을 모으는 어리석은 부자의 예입니다. 내일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고 오늘 하루를 흥청망청하며 욕망 속에 삽니다. 이 부자는 자신의 ‘욕망의 자리’를 잘못 찾았습니다. ‘욕망의 자리’는 물질적인 세상이나 우리 마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라는 것을 루가는 강조합니다. 인간이 욕망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루가는 욕망을 없애는 대신 그 ‘욕망의 자리’를 하느님의 나라에 두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욕망의 새로운 자리매김’입니다. 루가의 이상주의적 경제관이 오늘 말씀에 그대로 반영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제관이 반영된 모습은 사도행전 4장에 나오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사도4:32)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교회 공동체. 어떤 이는 이를 통해 ‘공산주의’ 이념을 추구했지만, 인간의 ‘욕망’의 문제를 간과하는 한계를 보였습니다. 욕망과 탐욕의 해결 없이는 온전한 교회 공동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루가는 오늘 말씀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묵시3:6)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귀 있는 자”입니까?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는 정말 욕망과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운 가요? 우리의 욕망이 교회의 선교를 가로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욕망을 가지고 하느님을 섬길 수 없다는 루가복음의 메시지는 분명하게 우리에게 울려옵니다. 오늘 하루 우리 자신에게 이러한 질문을 진지하게 하며 성찰의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구원의 섭리로 이끌어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굳건한 믿음으로 이 땅에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며,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영광의 날에 참여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묵시 3:1-6, 14-22
사르디스 교회의 천사에게 이 글을 써서 보내어라. 하느님의 일곱 영신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잘 알고 있다. 네가 살아 있다는 말이 있지만 실상 너는 죽었다. 2 그러므로 깨어나거라. 너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완전히 숨지기 전에 힘을 북돋아 주어라. 나는 네가 하는 일이 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완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3 그러므로 네가 그 가르침을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를 되새겨 그것을 굳게 지켜라. 그리고 네 잘못을 뉘우쳐라.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않으면 내가 도둑처럼 너에게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내가 어느 때에 너에게 나타날지를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4 그러나 사르디스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몇 있다. 그들은 하얀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5 승리하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며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결코 지워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6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시편 15
1 주여!
. 당신 장막에서 살 자 누구이며, ◯
. 당신의 거룩한 산에 머무를 자 누구입니까?
2 허물없이 정직하게 살며 ◯
. 마음으로부터 진실을 말하고
3 남을 모함하지 않으며 ◯
. 이웃을 해하거나,
. 친지를 모욕하지 않는 사람,
4 주님 눈 밖에 난 자를 얕보되
. 주님 두려워하는 이는 높이는 사람, ◯
. 손해를 볼지라도 맹세한 것을 지키고,
5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주지 않으며,
.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지 않는 사람, ◯
. 이렇게 사는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루가 19:1-10
1 예수께서 예리고에 이르러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2 거기에 자캐오라는 돈 많은 세관장이 있었는데 3 예수가 어떤 분인지 보려고 애썼으나 키가 작아서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4 그래서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길을 앞질러 달려가서 길가에 있는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다. 5 예수께서 그 곳을 지나시다가 그를 쳐다보시며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6 자캐오는 이 말씀을 듣고 얼른σπεύσας 나무에서 내려와 기쁜 마음으로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셨다. 7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 하며 못마땅해 하였다. 8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은 갚아주겠습니다.” 하고 말씀 드렸다. 9 예수께서 자캐오를 보시며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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