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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존의 한계를 넘어...

James Chae 2021. 4. 16. 11:17

성 안드레아와 성 요한 세례자_by Circle of Juan Sanchez de Castro_in the Museum of Fine Arts of Seville

 

 

 

 

2020.12.13. 나해_대림3주일 

루시아(시라쿠스의 순교자, 304)

이사 61:1-4,8-11_ 시편 126 _ 1데살5:16-24_ 요한 1:6-8, 19-28

 

 

 

인간 실존의 한계를 넘어-세례자 요한

 

 

채야고보 신부 / Artist, 성공회 사제

 

사람이 태어나서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가장 축복이 아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모두가 바라는 바이지만, 모두에게 허락된 것은 아닌 듯합니다. 인간은 본래 조그마한 권력이나 자기 자신이 남보다 조금이라도 잘난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우월감을 느끼고 남을 낮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 자신의 본분과 한계를 망각하여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까지 세례자 요한에 대한 말씀을 접합니다. 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은 이러한 인간의 본분과 한계를 깨달은 사람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메시아, ‘다윗의 자손, ‘인자 아닌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철저히 뒤에 오시는 소개하기 위해 왔고 그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회개를 선포하고 세례를 베풀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오늘 그의 공생애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우리가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할 때는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있습니다. 그것은역사적 측면과 구원사적 측면입니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세례자 요한의 탄생 이야기’( 루가1:39~45, 57~80), ‘그의 죽음 이야기’(마르6:14-29; 마태14:1-12;루가9:7-9) 잠시 논외로 하고 나면 그의 삶의 역사적인 측면이 더욱 명확해집니다. 마르코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이 활동한 곳은광야 세례를 베푼요단강입니다. 구체적인 장소는 여리고성 남쪽에 있는 요단 평야로 추측됩니다. 그곳에서 남쪽으로 걸어서 2~3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에세네파들의 은둔지였던쿰란 있습니다. 이곳 사막 언덕 동굴에서 질항아리에 담겨 있던사해문서 발견됐습니다. 사해문서는 기원전 2세기부터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며 종교적,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사본들입니다. 이러한 지리적 근접성과 그의 전승을 기초로 많은 학자들은 세례자 요한과 에세네파 사이에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사해문서에 의하면 에세네파 사람들은 본인들 스스로이사야 40 3 나오는 사막에서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라는 말을 성취하는 자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밖에도회개로의 급진적인 부름, 세례, 위로부터의 임박한 개입 대한 기대가 세례자 요한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서 자기 자신을 특정했다는 점에서 그들과 차이가 납니다. 다른 점은 에세네파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뤄 활동한 것과 달리 세례자 요한은 주로 혼자 활동했습니다. 이유는 에세네파 사람들은 자신들을이스라엘의 회개한 자들”, “범죄함으로부터 돌이킨 사람들 부르며 개인 활동보다는 공동체 생활을 선호했기 때문입니다.(고펠트) 그리고 세례를 자신들의 공동체 입문의 조건으로 생각했던 것도 세례자 요한과 차이가 납니다.

 

예수님이 활동하던 시절에는 젊은 이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스승의 분파를 찾아다니는 것이 요즘 젊은 이들이 댄스그룹을 따라다니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세례자 요한도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분파의 대표자였다고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많은 세례 지도자 중에 오직 요한의 세례만을하늘에서 권한을 받아한 ” (마르11:30) 으로 인정했고, 친히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마르1:7) 복음서와 여러 정황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진술들은역사적 측면에서 모두 사실일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가 자신의 주님이신 예수께서 다른 사람의 세례를 받았다고 진술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메시아가 사람에게 세례를 받을 있지?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도 이를 기록한 이유는 진술이 사실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요한의 세례를 받아야 했을까요? 이제 자연스럽게 세례자 요한의구원사적 측면 살펴봐야 것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살펴보면구원사적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가지 특성이 드러납니다: 1) 임박한 심판의 기대, 2) 회개로의 부름 3) 세례 4) ‘뒤에 오시는 대한 증언 (마태3:11) (고펠트)

 

모두가 예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아야 했을까?” 대한 중요한 답변이 있는 사안들입니다. 그러나 모두를 살펴보기에는 시간상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져 간단히 언급하고, 마지막 번째뒤에 오시는 대해서만 다뤄야 같습니다. 첫째임박한 심판의 기대’,  둘째회개로의 부름’, 셋째세례에 대한 메시지등은 이미 살펴본 에세네파와 매우 유사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다만 세례자 요한이 언급한회개 매일, 매주 반복되는회심 차원을 넘어 인간의 인격적인 방향의 전환 의미하고, 이것이 구약의 선지자들이 언급한 회개와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를 히브리어로 슈브(shub), 헬라어로  μετάνοια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에세네파처럼 공동체에 입문하는 표지로서의 세례가 아니며, 바리사이파처럼 계속 반복되는 정결례도 아닌 단번에 과거의 모든 죄를 사하는 하느님의 은총의 표지이며, 종말의 완성에 대한 표지로써의 세례를 말합니다.  아쉽지만 여기까지만 기억해 주시고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뤄보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말한뒤에 오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이며 모든 것을 분리시킬심판자 묘사되고 있습니다. 마르코복음 1 8절에는 그분은성령으로 세례를 베푼다고 했고, 마태오복음 311절에는성령과 세례를 베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의 출처가예수 어록임을 감안하면성령과 아마도 초기 전승에 가까울 겁니다. 여기에서맹렬한 심판 상징하는 심판자로서의그분 표현하는 말입니다. ‘성령 사람을 전인격적으로 변화시켜 마음, 사람,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으로 만듭니다.(고펠트)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물세례 성령 세례 언급함으로 자신의 사역의 한계를 정한 것일까요? 물의 세례만 언급했다면 세례자 요한은 에세네파의 분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미회개로의 부르심’, ‘ 세례’, ‘ 종말에 대한 기대등은  유대 사회에 넘쳐나는 담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기대와 약속은 넘쳐났지만 그러한 것의 실제적인, 눈으로 있는 증거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세례도 약속 이상을 사람들에게 수가 없었습니다. 세례 자체가 완전한 회개를 보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례 받은 자일 지라도 죄를 짓지 않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러한 인간 실존의 한계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구약의 예언의 모든 한계가 본인에게서 끝을 맺고 이제 자신의 뒤에 오실 분이 약속을 완성하실 분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고펠트라는 신학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예언을 대표했지만 또한 자신이 예언의 한계에 대한 증인이기도 했다.” 구약의 모든 예언은 이제 세례자 요한에게서 끝이 납니다. 그리고 그는뒤에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자신의 본분을 다합니다. 

 

자신의 한계와 본분을 명확히 알았던 사람, 세례자 요한. 분명 그는 예수보다 유명했고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아론의 자손이며 사제 즈카리야의 아들이었습니다. 루가복음 1장에는 그의 탄생에 대한 상세한 전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전승을 통해 우리가 있는 것은 예수님 당시에 세례자 요한이 가장 인정받는 선지자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사제들과 레위지파 사람들을 보내서 요한이 누구인지를 알아보게 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자기 자신을 내세우고 자기 자신의 주장을 충분히 펼칠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그는 세상의 인정과 명성, 그리고 자신의 사상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의 공생애는 철저히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이어야 했습니다.이분은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이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몸이오.”(요한1:27)라고 말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한계와 권한을 분명히 인식한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분수를 알았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세레자 요한을 알아보셨고, 선지자의 예언이 요한에게서 끝이 남을 간파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께서는 그에게서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예수는 사람의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육신 하신 예수님도 인간 실존의 한계에 있는 세례자 요한을 통해 인간의 한계점에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은총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인간 실존의 한계는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인간은 모두 멸망한다는 . 그래서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 사람은 인간 실존의 한계점을 깨달은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고 하느님의 새로운 구원의 시간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한계점에 젊은 청년, 세례자 요한과 성육신 하신 예수. 한계점이 교차하는 순간이 바로 세례의 순간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공생애가 끝이 나고 이제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공생애는 요한이 깨달은 인간 실존의 한계를 넘어 이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새로운 실존을 열어 보인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경륜은 자신의 외아들의 죽음을 통해 인간 실존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새로운 운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이 오래전에 깨달은 인간 실존의 한계를 이미 배운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한계를 깨달은 사람같이 지금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조금만 남보다 자신이 나은 듯하면 자랑하고 싶고, 우쭐대고 싶은 우리들. 자기 자신보다 남을 높이려 해도 그것이 말같이 쉽지 않음을 우리는 매일의 속에서 경험합니다. 은총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우리의 본분을 너무 쉽게 망각합니다. 자신의 능력과 의로 모든 은총을 얻은 것처럼 행동할 때도 많습니다. 사람보다는 내가 낫지. 사람만 아니면 내가 속이 시원하겠지. 사람만 달라지면 내가 좋아질 텐데. 나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다른 사람이 내게 잘못을 같고, 잘못된 세상은 우리를 괴롭히기만 하는 같습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의 한계와 본분을 깨닫지 못하고 혼동할 때가 많은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한계는 무엇입니까? 많은 것이 있겠지만 가장 절박한 것은시간의 한계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주인이 도끼를 들어 나무뿌리를 내리칠 정도의 순간의 시간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주더냐?”(마태3:7) “임박한 심판의 기대는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았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말합니다.(비교 마태3:10) 도끼를 한번 휘두르면 모든 것이 끝이 납니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이 말한 시간의 한계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말했던 찰나의 시간이 어느덧 2 년이 지나면서 우리는 무뎌질 대로 무뎌졌지만, 세례자 요한의 절박한 외침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사가들이 세례자 요한을 통해 후대의 교회에 남기고자 메시지입니다. 그러한 임박한 재림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초대 교회의 순교는 불가능했을 겁니다. 부활과 재림이 없으면 순교는 무의미합니다. 이러한 시간의 한계가 현재의 우리 실존을 정의합니다. 그리고 시간의 한계 위에 우리의 대림절이 놓여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처럼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세례자 요한이 말한 임박한 시간은도끼를 내리칠 찰나 남은 것입니다. 그리고 찰나의 시간이 우리 교회의 시간이고 복음이 전파될 시간이며, 우리가 회개할 시간입니다. 요한의 증언이 단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만 향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외침을 듣는 우리에게도 향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주지한다면, 우리는 나름 내적인 결단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다시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메타노이아는 우리의 인격의 방향을 돌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인격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행동의 한계를 정하고, 자신의 몫을 명확히 인식하며 실천하기. 새로운 인격이 그분에게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노력하기. 그러한 실천의 기쁨이 대림 3주일을 보내는 여러분에게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전례독서: 나해_대림3주일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세례자 요한을 보내시어 성자 예수의 오심을 예비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지혜와 믿음을 주시어, 평화와 정의를 위하여 영광과 권능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이사 61:1-4, 8-11

1.    야훼의 영을 내려주시며

.     야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고

.     나를 보내시며 이르셨다.

.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     찢긴 마음을 싸매 주고,

.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2    야훼께서 우리를 반겨주실 ,

.     우리 하느님께서 원수갚으실 날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여라.

.     슬퍼하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여라.

3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어라.

.     재를 뒤집어썼던 사람에게 빛나는 관을 씌워주어라.

.     상복을 입었던 몸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주어라.

.     침울한 마음에서 찬양이 울려 퍼지게 하여라.

.     그들을 이름하여정의의 느티나무 이라 하여라.

.     야훼가 자기의 자랑거리로 손수 심은 ,

4    그들은 성터를 재건하고

.     오래 전에 허물어진 폐허를 다시 세우리라.

.     무너진 도시들을 새로 세우고

.     옛날 선조 헐린 집들을 신축하리라.

.    

8     야훼는 공평을 좋아하고

.     약탈과 부정을 싫어한다.

.     나는 그들에게 고생한 대가를 어김없이 갚아주며

.     영원한 계약을 그들과 맺으리라.

9    그들의 후손은 만방에 알려지고

.     자식들은 백성 가운데서 이름을 날리리라.

.     그들을 보는 자마다

.     야훼께 복받은 종족임을 알게 되리라.”

10  야훼를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다.

.     나의 하느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뛴다.

.     그는 구원의 빛나는 옷을 나에게 입혀주셨고

.     정의가 펄럭이는 겉옷을 둘러주셨다.

.     신랑처럼 빛나는 관을 씌워주셨고

.     신부처럼 패물을 달아주셨다.

11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     동산에 뿌린 씨가 움트듯

.     야훼께서는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     정의가 서고 찬양이 넘쳐흐르게 하신다.

 

 

 

시편 126

1   주께서 시온의 포로들을 풀어 주시던 ,
.     꿈이든가 생시든가!

2     우리의 입에서는 함박 같은 웃음 터지고
.     흥겨운 노랫가락 입술에 흘렀도다.

    이교 백성 가운데서 들려오는 말소리,
.   놀라와라, 주께서 사람들에게 하신 일들!”

3    주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하셨으니
.     우리는 얼마나 기뻤던가.

4    주여, 네겝 강바닥에 물길 돌아오듯이
.     우리의 포로들을 다시 데려 오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뿌리는 ,
.     기뻐하며 거두어들이리라.

6    씨를 담아 들고 울며 나가는 ,
.     곡식단을 안고서 노랫소리 흥겹게 들어오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1데살 5:16-24

16 항상 기뻐하십시오. 17 기도하십시오. 18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19 성령의 불을 끄지 말고 20 성령의 감동을 받아 전하는 말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21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좋은 것을 붙드십시오. 22 그리고 악한 일은 어떤 종류이든지 멀리하십시오.

23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온전히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의 심령과 영혼과 육체를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완전하고 흠없게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24 여러분을 불러주신 분은 진실하셔서 일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요한 1:6-8, 19-26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빛을 증언하러 왔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증언을 듣고 믿게 하려고 것이다. 8 그는 빛이 아니라 다만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말씀이 빛이었다.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19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대사제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게 하였다. 요한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20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그는 조금도 숨기지 않고 분명히 말해 주었다. 21 그들이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다시 묻자 요한은 아니라고 대답 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기다리던 예언자요?” 그들이 다시 물었을 요한은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22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해 말이 있어야 하겠으니 당신이 누군지 알려주시오.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소?” 이렇게 다그쳐 묻자 23 요한은 그제야나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대로주님의 길을 곧게 하여라이사 40:3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하고 대답하였다.

24 그들은 바리사이파에서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그들은 요한에게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예언자도 아니라면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는 거요?” 하고 물었다. 26 요한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다만 물로 세례를 베풀 따름이오. 그런데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 분이 당신들 가운데 계십니다. 27 이분은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이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몸이오.”

28 이것은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요르단 건너편 베다니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