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서 진리의 드러남이란?
채창완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스러지는 땅 위의 것이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된다는 점에 바로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中 에서]
세상의 만물 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드러난다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하고 있다. 그것을 미학적으로 말하자면 “진리의 자기현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하이데거의 말이다. 그는 예술 작품이 작품 자체의 진리를 포함하며 그것을 관람자에게 스스로 드러낸다고 했다. 고호가 그린 <끈이 달린 구두> 그림은 농촌 아낙네의 삶의 진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고 한다. 즉 그림 속의 구두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존재의 진실을 말해준다 : 농부들의 힘겨운 삶과 대자연의 위협 앞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강인한 의지가 그 안에 담겨있다. 그림이라는 ‘존재자’를 통해 드러나는 ‘존재’의 진리는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림 자체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도판 1] 빈센트 반 고흐(Gogh,Vincent W. van), <끈이 달린 구두>, 캔버스에 유채, 37.5x45cm, 1886.
현대미술의 거장 클레는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 하이데거의 개념과 같은 선상에 있다. 클레나 하이데거에게 예술은 존재를 드러내는 하나의 매개체일 뿐이다. 화가도 존재가 드러나도록 하는 하나의 통로일 뿐이다. 이제 의미는 작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에 있다. 자연을 그대로 모방하고 재현했던 현대 이전의 미술은 그림 자체의 진리를 자연적 대상과의 연관성에서 찾았지만, 현대 미술에서는 철저히 작품 자체가 진리를 드러낸다. 작품이 진리를 드러낼 때 그것은 단순히 도구의 차원을 뛰어 넘어 존재의 진리를 확립한다.
[도판 2] 파울 클레(Klee,Paul), <세네치오>, 유채, 40.5×38cm, 1922년
세상 만물 속에 내재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사도 바울이나 예술 작품 속에서 존재의 진리를 찾았던 하이데거의 사유는 2000년의 시간적 간격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일치한다. 진리는 만물에 대한 관조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사실 말이다. 오직 예술작품 스스로가 자신의 진리를 감상자에게 말하는 것이다. 예술 작품 속에 은폐되어 있던 존재의 진리가 드러나는 사건, 이것이 “진리의 자기현시”이다. 이러한 진리의 드러남을 우리는 기독교적인 용어로 ‘계시’라고 이해한다.
[도판 3] <판토크라토르 그리스도(Christ Pantocrator) 이콘>, 성 카타리나 수도원.
“진리의 자기현시”나 “계시”는 과거 기독교 미술, 특히 비잔틴 미술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비잔틴 시대의 이콘(Icon, 성화상)들은 하나같이 이러한 진리의 드러남 속에서 그림의 기능을 찾았기 때문이다. 비잔틴 교회는 그림의 형식에서 우상숭배의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자연의 실재 대상을 초월적 존재의 표현에 적용하는 것을 금해야 했다. 그 결과 우리가 이미 아는바, 이콘 속의 인물들은 기하학적이고 기이한 형상을 띠게 된 것이다. 비잔틴 교회는 이콘을 통해 초월적 세계가 우리에게 현시된다고 믿었다. 이콘의 신비는 이러한 비잔틴 교회의 초월적 신앙과 함께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스러지는 땅 위의 것인 ‘그림’이 존재의 진리를 드러낸다는 생각은 미술을 이해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물론 이것을 미술 감상 전반에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그림을 감상하는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우리가 그림 앞에 설 때 그림에 대한 여타의 선입견을 버리는 겸허한 마음일 것이다. 그림이 우리에게 말을 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존재에 대한 새로운 체험이 가능해 질 것이다. 초월적인 것은 결코 우리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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