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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스파이더맨인가?

James Chae 2011. 9. 3. 00:52

 

왜 스파이더맨인가?

‘장관壯觀’을 통한 상품화된 ‘감동’

 

채창완

 

 

 

 
▲ 스파이더맨3 이미지. 영웅의 적은 바로 '자신'_포스터 이미지의 CG는 영화의 화려함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자료출처 http://www.spiderman3movie.co.kr)

 

 

요즘, 극장가가 때아닌 ‘스파이더맨 III’ 열풍이다. 전작들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는 평을 받았는데도 벌써 흥행에서 전작의 기록들을 갱신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불법으로 영화를 다운받아 보는 사람들조차도 스파이더맨 만은 극장에서 봐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왜 그럴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 중요한 것이 바로 “블록버스터”라든가, “총 제작비 3억 달러”, “화려한 액션과 CG” 등과 같은 ‘과장된’ 광고문구들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문구들 속에는 사람들에게 벅찬 ‘감동’을 주는 그 무엇인가가 영화 속에 숨어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러한 ‘감동’을 위해 기꺼이 영화표를 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현대의 문화적 특징은 ‘거대함’, ‘대량’, ‘웅장함’, ‘최고 또는 최초’, ‘첨단’ 등과 같은 수식어에서 보는 것과 같이 어떤 ‘과장’과 ‘과시’를 나타내려는 경향이 크다. 대량 생산과 복제가 가능한 시대이기에 더욱 차별화된 어떤 것을 찾고자 하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것과 차별화된 스케일, 내용, 효과, 가치 등을 부각시켜 사람들에게 어떤 ‘감동’을 만들어 낸다는 전략이 그 속에 숨어 있다. 결국 이러한 현상은 ‘포스트모던’의 특징을 정의한 현대 미학자 리오타르의 ‘숭고미’의 개념과 연결된다. 물론 현대 문화를 ‘숭고’라는 개념 하나로만 정의하는데 한계가 있지만 그 일면을 이해하기에 유용한 것이 사실이다.

 

 

 

 

 

 

 

▲ 스파이더맨3 이미지. 21세기의 영웅은 외롭다? _ 고뇌하는 21세기의 새로운 영웅상의 등장 (자료출처 http://www.spiderman3movie.co.kr)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말한다. “뻔한 내용인데 재미있다”라고. 여기서 말하는 “재미”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한다. 한시도 숨을 돌릴 수 없는 현란한 액션 장면과 사운드 효과, 그리고 21세기를 대표할 새로운 영웅의 등장 등, 그러한 과장된 영화의 표현들과 효과를 통해 관람자들은 현실에서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장관壯觀’을 영화를 통해 보게 되는 것이다.

 

모두가 그것이 ‘허구’임을 안다. 그렇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을 흥분케 하는 스릴은 현대인의 ‘상상’과 ‘감동’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내용이나 이성을 통한 감동이 아닌 시각적 감각에 의해서만 말이다.

 

이러한 ‘감동’을 미학적 용어로 ‘숭고미’라고 한다. 이와 같이 ‘숭고’는 우리가 거대한 자연 풍경 앞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끼듯이 우리의 이성보다는 직관이나 감정과 관계하며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얻어지는 ‘감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파이더맨 영화를 통해 시각적 효과 만으로도 거대한 ‘흥분’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 다다익선, 백남준作. 국립현대미술관을 장식(?)한 작품. 이러한 작품은 유지비 만도 매년 왠만한 봉급자의 연봉의 4배는 족히든다. '자본'의 도움없이는 이러한 작품이나 백남준은 결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과히 자본주의 시대를 대표할 만한 작가와 작품이다. 이것이 소위 '블럭버스터' 작품이라는 것이다. (자료출처 http://www.yahoo.co.kr)

 

현대 미술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쉽게 발견된다. 먼저 관중을 압박하는 듯한 거대한 스케일의 작품 이미지들은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들어선 관객들의 시선을 압도한다. 작가가 표현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우리는 그러한 작품 앞에서 왜소함을 느끼고 사뭇 겸손(?)해지고 만다. 그래서 현대 미술은 더욱 관객들을 작품 앞에서 당황하게 만들고 작품 앞에서 겸손하게 만들고 싶어하는 듯 하다.

 

물론 그러한 거대한 ‘블록버스터’형 작품은 자본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한 작품을 보기만 해야 하는 작가들이나 관객들은 또 한번 ‘자본’의 위력 앞에 고개를 떨군다. 주눅이 든다고 해야 할까?

 

 

 

 

 
▲ Some/one, 서도호作. 군번표를 모아붙여 만든 작품이다. 이 많은 군번표를 작가가 혼자서 다 붙인 것일까? 이 또한 많은 시간과 자본없이는 불가능한 작품이다. 이 거대한 작품을 우리는 우러러(?) 볼 수 밖에 없다. 왜? 크니깐. (자료출처 http://kr.blog.yahoo.com/hyeon0125/577)

 

18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낭만주의의 ‘숭고’는 이런 면에서 오늘날의 그것보다 더 인간적이고 소박했다는 생각이 든다. 터너의 안개를 뚫고 질주하는 증기기관차의 광경이나, 밀레의 ‘만종’의 숙연하면서도 애절한 분위기를 통해 우리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그 너머의 세계에 대한 아련한 감동을 아직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그 당시의 작가들은 작품을 통하여 현실 저 너머의 세계로 우리의 상상과 시선을 이끌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작품들 속에서 느껴지는 ‘숭고미’도 그러한 18세기의 느낌과 맥을 같이 하기는 하지만 분명 인간과 자연의 훈훈한 정감은 많이 사라진 것이 사실이다. 기계적이고 ‘상품화된 숭고미’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2007년_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