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11. 나해_부활2주일_감사성찬례
사도 4:32-35 / 시편 133 / 1요한 1:1-2:2 / 요한 20:19-31
“바라 봄의 영성” (2)
채야고보 신부 / artist, 성공회 사제
오늘은 제8요일(The Eighth Day)입니다. 이날은 전통적으로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날을 상징합니다. 이는 첫째 날과 마지막 날을 포함시키는 유대식 날수 계산법을 따른 것으로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로부터 8일째 되는 다음 주일까지를 말합니다. 곧 이날 예수께서는 토마에게 나타나셔서 못 박힌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셨다고 오늘 말씀은 증언합니다. 바로 이 8요일, 즉 매주의 첫째 날을 주님의 날로 교회는 전통적으로 기념하고 지켜왔습니다. 토마가 오늘 예수께 고백했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은 주일마다 우리가 예수님께 드리는 우리 교회의 고백입니다.
지난주 설교에서 저는 ‘바라 봄은 사랑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보는 것’과 ‘믿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것’은 하나라는 의미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오늘은 이어서 그 보는 것에 대해 한 걸음 더 나가고자 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부활에 관하여 신학적으로 요한복음에 많이 의존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우리 교회의 부활에 대한 신앙에 중요한 부분임으로 신중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복음서는 편집적으로 몇 가지 전승들이 결합된 구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크게는 첫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둘째로 “토마에게 나타나심”,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책의 목적”을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는 총 다섯 절로 되어 있는데, 19-20절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 21절에 ‘파송에 대한 이야기’, 22절에 ‘성령을 받으라는 이야기’, 23절에 ‘용서에 관한 이야기’ 등으로 되어있습니다. 즉 총 네 가지 전승 자료가 합쳐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토마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를 빼고 부활 이야기를 바로 30절과 31절에 연결해도 내용에 하등 문제가 없이 결말을 지을 수 있는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즉 “토마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는 요한이 다른 전승을 여기에 삽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토마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완벽한 서사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편집 작업을 통해 요한은 기존의 부활 전승 자료에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덧붙이고 자 했던 것 같습니다.
정리해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파송과 성령 그리고 용서에 관해 제자들과 후대 교회에 메시지를 남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20장 30,31절에서 이 책을 쓴 이유를 밝히며 마무리가 됩니다. 뒤에 나오는 21장을 후대에 추가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의심 많은 토마의 이야기’는 나자로의 사망 소식을 듣고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던 믿음 있는 토마의 모습과 무척 상반됩니다. 토마는 이 이야기를 통해 “의심 많은 토마”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실제로 요한은 그의 의심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예수의 제자들과 원시 기독교 교회에 팽배했던 부활에 대한 불신의 정서를 드러낸 것입니다. 사실 부활에 대한 불신의 정서는 모든 복음서가 전하고 있습니다. 마태 28장 17절; 루가 24장 41절; 마르 16장 14절 등입니다. 이러한 불신의 언급은 원시 기독교 교회의 정서를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요한은 사도 토마의 의심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불신에 나름대로의 답을 찾고자 했던 것입니다.
지난주에 제자들과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야기에서 ‘본다는 것’의 중요성을 말씀드렸습니다. ‘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호라오ὁράω’가 보는 것과 믿는 것을 하나로 통합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러한 요한의 견해는 정확하게 오늘의 말씀에서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20절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여기에서는 모든 제자들을 의미합니다.)에게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5절에 제자들은 토마에게 자신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진술합니다. 그리고 토마는 직접 ‘보고’ 만져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고 말합니다. ‘보았다’는 앞의 진술들이 곧 믿음과 연결되는 서술 구조를 보여줍니다. ‘보는 것’이 제자들의 믿음을 추동했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실제로 토마가 예수의 상처에 손까지 대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성 이그나티우스를 비롯한 초대교회 전승들은 토마가 직접 예수를 ‘보고’ 또 그 상처를 만져봤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초기 전승 자료들은 모두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육체 가운데 계셨음을 ‘보았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로 부활하셨다는 것이 강조됩니다. 그만큼 ‘보는 것’은 원시 그리스도교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육신이 없는 부활은 바로 영지주의의 가현설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환상이나 환영은 여기에서 철저히 배제됩니다.
27절에 예수께서 토마에게 자신의 상처를 만져보고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책망의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토마의 믿음을 추동하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토마는 그 후에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위대한 개인적 고백이면서, 또 우리 교회의 고백을 여기에서 최초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부활의 일차 증인들이 모두 예수의 부활을 직접 ‘보고’ 믿음을 가진 것을 전제하며, 이제 요한공동체와 후대의 교회를 위한 분명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왜냐하면 요한공동체를 비롯해서, 현재의 우리 교회에도 부활을 직접 본 사람이 전혀 없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들 또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29절에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선포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선포는 토마에게 책망하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이 말은 이 글을 읽고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가 전체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태오복음 5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마태 5:8)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모두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라는 ‘복되다’, ‘행복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의 ‘보다’도 요한이 자주 사용하는 ‘호라오’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과 마태오복음의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결국 같은 사람임이 드러납니다. 요한은 이렇게 부활의 제일 세대 증언 이후에 발생할 부활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고, 또 믿는 것이 곧 보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는 곧 하느님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마음이 깨끗하여 의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실 보는 것은 매우 영적이고 또 믿음과 직결됩니다. 그래서 동방정교회에서는 이콘을 보고, 이콘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나아간다고 믿습니다. 만약 이콘이 없다면 인간의 상상력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다양한 이미지를 만들어 냈을 겁니다. 그렇게 개인이 만들어낸 각자의 이미지는 교회의 일치를 이루기보다 오히려 우상들을 만들 위험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는 것’에 어느 정도 기준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이콘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를 상상할 수 있는 자료를 얻습니다. 그리고 그 이콘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로 우리의 시선을 확장할 수 있는 이미지의 방향성이 설정된 것입니다. 그것이 이콘이 주는 중요한 기능 중 하나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활한 주님에 대한 이미지를 개인마다 다르게 상상하는 위험을 차단한 것입니다. 영적인 것과 종교적 상상은 늘 분별과 질서를 요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지는 우리 인간의 생각과 영혼을 순식간에 혼돈 속에 빠트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듣는 것’이 ‘보는 것’보다 더 위험합니다. 듣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상상에 제한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청각에 의한 상상이 어디까지 나아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조현병의 시작이 환자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환청’에서 시작하여 ‘환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요한이 끊임없이 ‘보는 것’과 ‘믿는 것’을 통합하려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듣는 것’만으로는 믿음은 불완전합니다. 부활의 1차 증인들은 ‘듣는 것’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지난주에 읽은 요한복음 20장 15절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듣는 것’의 한계입니다. ‘보는 것’은 곧 관조(contemplation)의 영성과 연관된다고 지난주에 설명을 드렸습니다. ‘보는 것’은 대상의 외면뿐만 아니라 존재의 이면까지 우리의 시선을 확장시킵니다. 그것이 기독교 관조 영성의 핵심입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보지 않고 마음대로 상상하기보다는 보고 믿는 신앙. 그것이 관조가 우리를 이끄는 신앙입니다.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고, 주변에 있는 대상들을 통해, 또 그 대상들에 대한 사랑스러운 관심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훈련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보는 것’과 ‘믿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것’은 결국 우리 의지의 발현입니다. 이것이 부활 증인들의 목격담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교훈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제대로 보고 제대로 믿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우리 주변의 사람들, 우리 주변의 대상들, 하늘과 구름과 꽃들과 나무들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그러한 것들을 살필 마음과 관심과 여유가 있느냐?입니다. 우리 모두가 같은 대상을 똑같은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가 보고 싶은 것, 아는 것, 볼 수 있는 것만을 우리는 볼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더 높고, 더 깊고, 더 세세한 것을 보기 시작한다면, 우리의 시선은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동방정교회에서는 이콘을 바라보며 이콘의 이면까지 우리의 시선이 닿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하고 관조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던 토마의 시선을 우리 또한 우리 삶 속에서 관조의 영성으로 이끌어 내길 바랍니다. 그러할 때 여러분이 보시는 세상은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새로운 세상으로 다가올 것이라 믿습니다. 아멘.
부활2주 (나해) 전례독서
본기도
부활하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오시어 평화를 전해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도 새 생명의 기운을 부어주시어 부활의 소망과 믿음을 온 세상에 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사도 4:32-35
32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33 사도들은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며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신도들은 모두 하느님의 크신 축복을 받았다. 34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35 사도들 앞에 가져다 놓고 저마다 쓸 만큼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다.
시편 133
1 이다지도 좋을까,
. 이렇게 즐거울까! ◯
. 형제들 모두 모여 한데 사는 일!
2 아론의 머리에서 수염 타고 흐르는, ◯
. 옷깃으로 흘러내리는 향긋한 기름 같구나.
3 헤르몬 산에서 시온 산 줄기를 타고 ◯
. 굽이굽이 내리는 이슬 같구나.
. 그 곳은 야훼께서 복을 내린 곳, ◯
. 그 복은 영생이로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1요한 1:1-2:2
1 우리는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 말씀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실제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보았습니다. 2 그 생명이 나타났을 때에 우리는 그 생명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 3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목적은 우리가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를 여러분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4 우리는 충만한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이 글을 써 보냅니다.
5 ¶ 우리가 그분에게서 듣고 그대들에게 전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하느님은 빛이시고 하느님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6 만일 우리가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하느님과 사귀고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좇아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7 그러나 하느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가운데서 살고 있으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줍니다. 8 만일 우리가 죄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9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느님께 고백하면 진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모든 불의를 깨끗이 씻어주실 것입니다. 10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을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2:1 나는 믿음의 자녀인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여러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그러나 혹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친히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요한 20:19-31
19 안식일 다음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20 그리고 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21 예수께서 다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고 말씀하셨다. 22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중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던 토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었다.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토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토마도 같이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27 그리고 토마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28 토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대답하자 29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다.
30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기적들도 수없이 행하셨다. 31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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