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설교문

부활의 의미

James Chae 2021. 5. 17. 00:20

 

2021. 4. 25.  나해_부활4주일_감사성찬례

사도 3:12-20 / 시편 4 / 1요한 3:1-7 / 루가 24:36-48

 

 

 

부활의 의미

 

 

채야고보 신부 / artist, 성공회 사제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실제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보았습니다.” (1요한 1:1c)

 

이는 부활에 대한 요한의 증언의 결론입니다. 이를 통해 그는 가현설의 주장도, 부활에 대한 불신도 끊으려 했던 같습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본다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 목격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보고 그것을 이해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것입니다. 진정으로 본다는 것은 마음으로 보는 것이고, 마음으로 보는 것은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9:39)

 

결국 요한은 부활을 믿는 사람은 예수를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눈으로 직접 사람처럼 부활의 증인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난 부활 1주일에서 3주일까지 부활의 증언에 대한 결론입니다. 부활 1주와 2주에서 우리는 부활의 목격담을 살펴봤고, 부활 3주일에 성령의 은총으로만 이러한 부활을 믿을 있음을 살펴봤습니다. 이제 오늘 요한은 그러한 부활의 증언에서 나아가 부활의 신학적인 부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학적이라 해서 요한은 이론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논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너무 간단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입니다. 부활은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부활은 희생을 전제로 합니다. 희생은 철저히 사랑에 근거한다고 요한은 말합니다. 그리고 부활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형제를 위해 내놓는 사람입니다. [사랑의 기술]이란 책에서 에리히 프롬이 장황하고 어렵게 설명했던 , 사랑은 단순히 감정이 아니라 개인의 결의이고 판단이고 약속이라는 것을 요한은 간단하게 정리합니다. 사랑은 형제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이라고. 

 

쪼개지지 않은 온전한 빵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빵은 쪼개지고 나뉘어야만 우리의 몸과 하나가 있습니다. 쪼개진 빵이 물리적으로 잘게 부서져 우리 몸에 흡수되어 우리 몸과 하나가 되듯이, 목숨은 쪼개져야만 우리와 하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쪼개신 것은 그가 우리와 함께하기 위함이고, 이를 통해 우리도 성부와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찬례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빵을 떼어 주님의 성체를 나눕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나 빵을 나누며 몸을 이룹니다.”

 

빵이 쪼개지듯 우리의 목숨이 쪼개질 우리는 온전한 부활의 몸으로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입니다. 쪼개짐이 먼저이고 그다음이 하나 됨입니다. 그러므로 희생 없는 부활은 있을 없으며, 희생 없는 사랑 또한 있을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에 대해, 부활에 대해 많은 말과 이론을 만들어도, 목숨을 내놓는 희생 없이는 다른 어떤 것도 부활을 제대로 설명할 없습니다. 사랑은 동사이지 명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부활도 일회적인 사건이나 신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끊임없이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일어나는 사랑과 희생의 사건인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은 계약을 짐승의 몸을 둘로 갈라 계약이 성사됨을 확증했습니다. 히브리어로쿼라קָרַע라는 쪼개는 행위는 다른 둘이 하나가 되기 위한 쪼갬입니다. 온전한 몸은 아무런 일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몸이 쪼개질 목숨의 희생으로 다른 목숨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짐승의 몸을 둘로 쪼개서 계약을 맺은 사람은 순간 서로가 몸이 되는 것이고, 계약을 파기할 없음이 확증됩니다. 사랑으로 하나 됨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아픔과 고통이 먼저이고, 그다음이 하나 됨입니다. 그래서착한 목자 자신의 양들과 하나 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립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쪼개심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셨습니다. 쪼개지심 하느님과 우리 간에 사랑의 계약의 증거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로 우리에게 향하신 하느님의 사랑은 완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의 영광이고, 이를 믿는 우리의 영광이 됩니다. 

 

우리는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있냐고 질문하지만, 반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세상이 불의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우리 밖에서 원인을 찾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사랑이 없는 이유를 우리 안에서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먼저 희생하고, 먼저 사랑하면 바보가 되는 세상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손해보지 않기 위해 사랑하지 못하는 다양한 이유들을 만들어 냅니다. 세상이 부정해서, 세상에 악이 넘쳐서, 나만 손해 없어서, 정의를 부르짖으며 세상의 개혁을 부르짖지만, 결국 우리는 결과로 다른 악과 고통을 봅니다. 세상을 공평하게 만들자던 공산주의자들을 통해 우리는 다른 인간의 탐욕과 잔인함을 보았고, 세상에서 자유를 외쳤던 자본주의자들을 통해 우리는 자본의 자유에 희생당한 인간의 소외를 목격했습니다. 인간의 변화 없는 사회 시스템의 개혁은 이러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은 거대 담론이 아니라 인간의 일상에서, 밥을 먹을 때나, 길을 걸을 , 그리고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드러난 것입니다. 

 

인간 실존의 가장 두려운 순간에, 절망의 순간에, 의심의 순간에 부활은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실존하는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있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아픔을 통해 우리가 사랑할 있는 힘을 얻는다는 사실 또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받는 자와 함께할 , 남의 어려움을 도와줄 , 남을 위해 희생할 우리는 다른 인간관계의 가능성을 발견하곤 합니다. 진화론자들은 호머 사피엔스가 어떻게 호머 에렉투스를 능가하여 진화했는지를 현존하는 원시부족을 통해 연구를 했습니다. 호머 사피엔스는 며칠을 걸어서 곳에 있는 누군가를 만나러 다닌 최초의 종족이라고 합니다. 며칠을 걸어서 한두 시간의 만남을 하고 다시 자신의 처소로 돌아간 종족. 말은 무슨 뜻입니까? 사냥이나 삶의 터전을 구하려고 이동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누군가가 보고 싶고, 만나고 싶어서 이동했던 종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누군가가 보고 싶고 누군가를 그리워했기에 사람이 죽으면 매장을 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인류의 매장문화는 이렇게 탄생한 것입니다. 누군가가 보고 싶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이 사랑임을 우리는 압니다. 결국 사랑의 관계가 우리 인류의 조상들의 생존율을 높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의신원선언 전형적인 내용을 보여줍니다. 신원선언이라 함은 예수의 정체에 대해 알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나는 양의 문이다.”(요한 10:7);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나는 포도나무다”(요한 15:1). “에고 에이미 ἐγώ εἰμι”. “나는 ~이다.” “나는 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와 다르게 예수의 정체성을 선언하는 집중합니다. 그래서 2~3세기에 많은 신학적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복음서입니다. 그러면서도 기독교 신학의 중심에 놓인 복음서입니다. 이러한 요한복음서는 선포합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요한 10:11) 

 

간단명료하면서도 엄숙한 선언이 아닐 없습니다. 비장한 느낌마저 듭니다. 왜냐하면 이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죽음과 자기의 정체성을 하나로 묶는 선포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예수의 죽음의 이유와 부활을 선포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결국 나는 다시 그 목숨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10:17)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유는 인류를 위해 자신이 희생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자신을 다시 살리실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스스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셔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지못해 하신 것이 아님을 밝힌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하신 일도 아닙니다. 하느님께 그저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께서 세상에 이유이고, 예수의 정체이며, 그리고 예수의 영광이라고 요한복음은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의 첫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순종하신 것처럼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c)라고. 

 

남을 비판하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익숙한 우리가 자신을 먼저 희생하여 남을 세워주는 것이 힘든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핑계는 핑계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명령에서 결코 자유로울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착한 목자로 우리를 사랑하여 자신을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십자가에서 쪼개신 분이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쪼개어 남을 위해 희생하길 바라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명령 앞에서 양가적 감정에 괴로워합니다. 세상이 험악해지면 험악해질수록 우리는 그러한 명령에 순종하기가 결코 쉽지 않음을 자각합니다. 그러나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아주 작은 빛이라도 선명하게 빛나는 법입니다. 우리가 약하지만 주님께서 보내주신 성령의 힘으로 미약한 빛이라도 비출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한은 복음서 중에서 유일하게 성령을 우리를 돕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 조력자, 보혜사, 변호자. 요한의 인식에 의하면 성령은 분명히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힘입어 사랑할 있는 힘을 얻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간절히 구할 그러한 사랑은 우리에게 은사로 주어질 것입니다. 2021년의 부활절기가 우리에게 희망이 되길 바랍니다. 그것이 희생에 근거한 사랑으로 드러날 그리스도의 영광이 부활을 통해 증명될 것을 믿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부활4 (나해) 전례독서

 

 

본기도

예수 그리스도여, 주님은 착한 목자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를 무리로 모아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의 무리를 벗어나지 않게 하시고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인도를 따라 살게 하소서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사도 4:5-12

5 이튿날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 6 자리에는 대사제 안나스를 비롯하여 가야파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밖에 대사제 가문에 속한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7 그들은 사도를 앞에 세워놓고당신들은 무슨 권한과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 하고 물었다. 8 성령으로 가득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원로 여러분, 9 오늘 여러분이 우리가 불구자에게 착한 일을 사실과 그가 어떻게 낫게 되었는가 하는 경위에 관해서 심문을 하는데 10 불구자였던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것은 바로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힘입어 것입니다. 분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입니다. 여러분과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은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11 예수는 짓는 사람들 여러분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시편 118:22). 12 이분에게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있는 이름은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시편 23

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     아쉬울 없어라.

2    푸른 풀밭에 놀게 하시고
.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3    지쳤던 몸에 생기가 넘친다.

.     이름 목자이시니
.     인도하시는 , 언제나 곧은 길이요,

4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없어라
.     당신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     인도하시니 걱정할 없어라.

5    원수들 보는 앞에서 상을 차려주시고,
.     기름 부어 머리에 발라주시니,

.     잔이 넘치옵니다.

6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
.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1요한 3:16-24

16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17 누구든지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의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고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18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우리는 말로나 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19 우리는 이렇게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질 있습니다. 20 우리가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1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때에는 하느님 앞에서 떳떳합니다. 22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느님께로부터 받을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있으며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3 우리가 명령받은 대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24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살고 하느님께서도 사람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보아서 있습니다.

 

 

요한 10:11-18

11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12 목자가 아닌 삯꾼은 양들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도망쳐 버린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가고 양떼는 뿔뿔이 흩어져버린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14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양들을 알고 양들도 나를 안다. 15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16 나에게는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양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러면 그들도 음성을 알아듣고 마침내 떼가 되어 목자 아래 있게 것이다.”

17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결국 나는 다시 목숨을 얻게 것이다. 18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 나에게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에게서 내가 받은 명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