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27. 나해_연중13주일
사무하 1:1, 17-27 / 시편 130 / 2고린 8:7-15 / 마르 5:21-43
일상성(日常性)의 회복 3
채야고보 신부 / 제주 한일우정의 교회, Artist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 식사를 하고 마음껏 웃고 떠들던 우리의 일상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여행도, 산책도, 쇼핑도 모두 어색한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더 멀리 느껴지고, 성당에 새로운 사람이 와도 이전처럼 마음껏 반기기가 어렵습니다. 예전에는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을 벗어나고자 몸부림 친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단조롭더라도 편안하게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도 하고, 일을 하는 그러한 일상이 너무 그립습니다. 코로나 19는 이렇게 우리의 일상을 멀리 “외출” 시켜버렸습니다.백신 접종으로 몇몇 나라들의 희망적인 소식이 들려오다 최근에는 델타 바이러스로 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있습니다. 마음껏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던 여행의 자유가 언제 우리의 품으로 돌아올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두려움과 경계심, 조바심, 염려가 현재의 일상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묵묵히 우리의 달라진 일상을 견디며 하루하루를 맞이 합니다.
여기 한 여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녀의 이름도 모르지만, 자신의 일상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린 가여운 여인입니다. 평온하던 가정도 가족 중 한 사람만 아프면 모든 일상이 중지됩니다. 질병은 신분이나 빈부의 차이 없이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입니다. 오늘 이 여인은 열두 해 동안 하혈증으로 고통받고 자신의 일상을 잃어버린 여인입니다. 심지어 병을 고치려고 가산까지 모두 탕진해서 이제는 가난한 처지에 놓였고, 가족과 친척들도 모두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 듯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녀를 괴롭힌 것은 유대교로부터 이미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이 찍혔다는 사실입니다. 레위기 15장 26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 여인이 하혈하는 동안 누웠던 잠자리는 월경 때 누웠던 잠자리와 마찬가지로 불결하다. 또 그 여인이 걸터앉았던 곳도 월경 때 부정하듯이 부정하다. (레위 15:26)
그녀의 병은 그녀를 부정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게 했습니다. 그녀는 병이 치료되기 전에는 평범한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어렵게 그를 찾아왔지만 당당하게 그분 앞으로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예수의 뒤쪽으로 다가갔을 겁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하느님 저의 일상을 돌려주세요”라는 간절한 기도와 함께. 그 순간 예수님의 일상성에 변화가 생겼고, 주님은 이를 감지하셔서 뒤를 돌아보며 그 원인을 찾았습니다. 예수의 일상성에 여인의 고통과 아픔이 교차되는 순간입니다. 열두 해를 잊고 지냈던 그녀의 일상, 고독하고 지난했던 시간들, 이제 병의 치유와 함께 그녀의 일상은 다시 돌아왔습니다. 주님께서는 “안심하고 가라”라고 하십니다. 다른 어떤 것도 묻지 않으셨고, 또 어떤 설명도 덧붙이지 않으셨으며, 단지 그녀의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자비가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주님의 일상성은 결국 그분의 자비였던 것입니다.
나는 야훼다. 야훼다.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출애 34:6)
주님의 일상성은 하이데거가 말했던 벗어나야 할 현존재의 ‘일상성’, 즉 한 개인의 “주체적 일상성”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앙리 르페브르가 말한 자본주의 생산성에 파괴된 인간소외를 극복하는 일상성도 아닙니다. 그분의 일상성은 늘 소외된 자들을 찾고 그들과 자비를 나누는 일상성입니다. 예수님의 일상은 잃어버린 양들과 함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우리는 “자비의 일상성”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전승자료들은 예수께서 일상 속에서 잠을 주무셨거나 쉬셨다는 기록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며,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시고, 소외된 자들과 먹고 마시셨으며,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는 기록들 뿐입니다. 지난주의 복음서 말씀처럼 뱃고물에서 잠시 눈을 붙이신 이야기가 우리가 아는 주님의 휴식 이야기 전부입니다. 12 제자들이 늘 주님 곁에 있었으면서도 이러한 일상의 전승을 남기지 않은 것이 너무 신기할 따름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일상성을 묵상하다 보면 다음과 같은 성녀 에디트 슈타인의 말이 생각납니다.
“‘이웃’은 예외 없이 내 가까이로 오는 사람입니다.” (내적 침묵으로 향하는 길)
주님께서는 한 번도 자신의 일상 속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여인과 회당장의 경우처럼 모두가 절박한 상황에서 주님을 찾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자신을 찾아온 자들이 굶주리는 것이 안타까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들을 먹이시기도 하셨습니다. 주님의 일상이 그러했듯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이웃들의 ‘일상성’이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 자신의 일상성과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한 사람이 오는 것은 그 사람의 전 인생이 오는 것이라 노래한 것 같습니다.(정현종의 ‘방문객’) 각자의 일상성과 타인의 일상성들이 만나 결국 우리는 ‘삶’이라는, ‘실존’이라는 인간 존재의 거대한 강을 이루게 됩니다. 물이 넘치면 새로운 방향으로 흐름을 바꾸듯이 우리의 일상성들이 만나 넘치게 되면 또 다른 실존의 방향성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대와 협력이 늘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코로나 19 이후에는 이전의 일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일상성을 획득하게 될 것으로 조심스럽게 전망해 봅니다. 그러한 일상성이 주님의 일상성처럼 우리를 이전보다 더 사랑과 그리움으로 가득하게 만들고, 또 이전보다 더욱 경건하고, 거룩한 일상이 되길 소망합니다. 이웃을 소외시키거나 반대로 이웃으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는 일상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은혜로우신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2고린 8: 9)
오늘 주님을 만난 여인과 회당장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일상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자비가 넘치시는지를 깨달은 자들은 이전과 다른 전혀 새로운 일상을 회복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부유함과 우리의 가난을 맞바꾸신 분이십니다. 자신의 평온함을 우리의 불안과 맞바꾸신 분이십니다. 주님의 가난과 고통으로 우리가 풍요로움과 기쁨을 누리게 됐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일상성이 우리의 일상성과 교차하면 발생하는 ‘일상성의 역전’입니다. 주님의 일상성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합니다. 부정하다 손가락질받던 여인도,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던 회당장도 본인들의 일상성이 무너진 순간 주님의 일상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일상성의 회복은 결국 완고했던 우리의 일상성이 무너져야만 가능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늘 복음서 등장인물들처럼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 19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우리의 일상의 소중함을 결코 깨닫지 못했을 겁니다. 전염병이 우리에게 준 일상의 역설입니다.
이제 우리의 품으로 다시 돌아올 새로운 일상성을 생각해봅니다. 사람들에게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도 사람들 사이에서 자비로운 모습으로 일상을 묵묵히 보내셨던 주님을 또한 묵상해봅니다. 자신의 불편함과 가난함, 그리고 개인의 휴식조차도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과감히 내려놓으신 그분의 일상성. 자비의 일상성. 이제 우리의 일상성이 그분의 일상성과 교차하는 지점을 하나씩 찾아가길 바랍니다. 그분을 따르고 그분을 조금이라도 닮아갈 수 있다면… 떨리는 손으로 그분의 옷자락을 만지는 심정으로 우리 일상의 여려 결들을 조금씩 다듬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일상이 조금은 더 거룩하고 따뜻한 방향으로 회복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서 다시 찾아올 코로나 19 이후의 우리의 일상이 조금은 더 주님의 일상성을 닮아가길 바랍니다. 아멘.
연중13주일 (나해) 전례독서
본기도
주 그리스도여, 주님은 어려움 중에 있는 우리를 보살펴주시나이다. 비오니, 어떤 처지에서든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기도하여 주님의 도우심을 얻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사무하 1:1, 17-27
1 사울이 죽은 뒤였다. 다윗이 아말렉 군을 쳐부수고 시글락에 돌아와서 이틀을 묵고, …
17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여 조가를 지어 18 유다 사람들에게 가르치게 하였다. (이 노래는 야살서고대 시들을 모은책으로, 여호 10:13에서도 인용에 기록되어 있다.)
19 너 이스라엘의 영광이
. 산 위에서 죽었구나.
. 아, 용사들은 쓰러졌구나.
20 이 소문을 갓에 알리지 말라.
. 아스클론 거리에 퍼뜨리지 말라.
. 불레셋 계집들이 좋아하고,
. 오랑캐 계집들이 좋아 날뛸라.
21 길보아 산악에는
.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아니하고,
. 소나기도 쏟아지지 아니하리라.
. 거기서 용사들의 방패는 더러워졌고,
. 사울의 방패는 기름칠도 않은 채 버려졌구나.
22 요나단이 한번 활을 쏘면
. 사람들은 피를 쏟으며 쓰러졌고,
. 그 살에는 적군 용사들의 기름기가 묻고야 말았는데.
. 사울이 한번 칼을 휘두르면
. 사람들은 피를 쏟으며 쓰러졌고,
. 그 칼에는 적군 용사들의 기름기가 묻고야 말았는데.
23 사울과 요나단은
. 살았을 때 그렇게도 정이 두텁더니,
. 죽을 때도 갈라지지 않았구나.
. 독수리보다도 날쌔고,
. 사자보다도 힘이 세더니.
24 이스라엘의 딸들아,
. 주홍색 옷을 입혀주고 그 옷에 금장식을 달아주던
. 사울을 생각하고 통곡하여라.
25 아, 용사들이 싸움터에 쓰러졌구나.
. 요나단이 산 위에서 죽었구나.
26 나의 형, 요나단, 형 생각에 나는 가슴이 미어지오.
. 형은 나를 즐겁게 해주더니.
. 형의 그 남다른 사랑,
. 어느 여인의 사랑도 따를 수 없었는데.
27 아, 용사들은 쓰러지고,
. 무기는 사라졌구나.
시편 130
1,2 주여,
. 깊은 구렁 속에서 당신을 부르오니,
. 주여, 이 부르는 소리 들어주소서. ◯
. 애원하는 이 소리, 귀 기울여 들으소서.
3 주여,
. 당신께서 사람의 죄를 살피신다면, ◯
.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4 그러나 용서하심이 당신께 있사오니 ◯
. 이에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5 나는 주님 믿고 또 믿어 ◯
. 나의 희망 그 말씀에 있사오니,
6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보다 ◯
.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옵니다.
7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
. 이스라엘이 주님을 기다리옵니다.
. 인자하심이 주님께 있고 ◯
. 풍요로운 속량이 그에게 있으니
8 그가 이스라엘을 속량하시리라. ◯
. 그 모든 죄에서 구하시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고린 8:7-15
7 여러분은 모든 일에 뛰어났습니다. 믿음이나, 언변이나, 지식이나, 열성이나, 우리에 대한 사랑에서 여러분을 따를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은혜로운 모금 사업에 있어서도 뛰어나기를 바랍니다.
8 이것은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이 일에 열성을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여러분의 사랑은 얼마나 진실한가를 알아보려는 것뿐입니다. 9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은혜로우신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10 이 구제 사업에 대해서 내 의견은 이렇습니다. 이 일은 일 년 전에 여러분이 먼저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또 자원해서 한 일이니 여러분이 완성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1 이제 그 일을 마무리하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처음에 품었던 의욕을 실천에 옮겨 자기 힘이 자라는 대로 그 일을 완성하라는 말입니다. 12 마음이 내켜서 하는 일이라면 가진 것에서 얼마를 바치든지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받으실 것입니다. 없는 것을 억지로 내라는 말은 아닙니다. 13 내가 지금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해주면서 여러분에게만 괴로운 부담을 주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공평하게 하려는 것뿐입니다. 14 지금 여러분이 넉넉하게 살면서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준다면 그들이 넉넉하게 살게 될 때에는 또한 여러분의 궁핍을 덜어줄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공평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15 이것은 성서에,
.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았고
.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출애 16:18
고 기록된 대로입니다.
마르 5:21-43
21 예수께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다시 가시자 많은 사람들이 또 모여들었다. 예수께서 호숫가에 계셨을 때에 22 야이로라 하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를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제 집에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살려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를 따라 나서시었다.
24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밀어대며 따라갔다. 25 그런데 군중 속에는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증으로 앓고 있던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여러 의사에게 보이느라고 고생만 하고 가산마저 탕진했는데도 아무 효험도 없이 오히려 병은 점점 더 심해졌다. 27 그러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군중 속에 끼여 따라가다가 뒤에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그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손을 대자마자 그 여자는 과연 출혈이 그치고 병이 나은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 30 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돌아서서 군중을 둘러보시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제자들은 “누가 손을 대다니요? 보시다시피 이렇게 군중이 사방에서 밀어대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32 그러나 예수께서는 둘러보시며 옷에 손을 댄 여자를 찾으셨다. 33 그 여자는 자기 몸에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예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말씀 드렸다. 34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 예수의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저 선생님께 더 폐를 끼쳐드릴 필요가 있겠습 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은 체도 아니하시고 회당장에게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게 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으로 가셨다. 예수께서는 거기서 사람들이 울며불며 떠드는 것을 보시고 39 집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왜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코웃음만 쳤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다 내보내신 다음에 아이의 부모와 세 제자만 데리고 아이가 누워 있는 방에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탈리다 쿰.”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소녀야, 어서 일어나거라.’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어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놀라 마지않았다. 43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시고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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