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신학이야기

교회 내 여성혐오와 일상적 언어폭력

James Chae 2021. 6. 29. 00:10

사진출처: JUANDARIEN VIA GETTY IMAGES

 

교회 내 여성혐오와 일상적 언어폭력

-삼위일체적 인간학의 길을 모색하며-

 

 


* 이 글은 2017년 성공회 신학대학원 여성신학 발제로 작성된 글입니다.

 

채창완 야고보

 

1.들어가는 말: 연자맷돌

1-1.

ς δ’ ν σκανδαλίσ να τν μικρν τούτων τν πιστευόντων ες μέ, συμφέρει ατ να κρεμασθ μύλος νικς περ τν τράχηλον ατο κα καταποντισθ ν τ πελάγει τς θαλάσσης.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자기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 깊숙이 잠기는 편이 낫다.  [마태 18:6]

 

성서에는 하느님께 용서받지 못할 죄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마태오123절의 성령을 모독한 죄이고( 그러 성령 모독하는  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 다른 하나가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실족케 하는 죄이다. 작은 자를 죄짓게 하느니 차라리 자기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자살하는 게 더 낫다는 뜻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그만큼 용서받지 못할 짓이라는 의미의 수사적 표현이다. 

 

1-2.하버드대의 마틴 H. 타이처(Martin H. Teicher) 교수팀의 연구 결과를 보면 언어폭력을 겪었던 피험자들은 우울, 불안, 분노-적대감 수준이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보다 유의미하게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들의 뇌에서도 이상 소견이 발견되었다. 뇌스캔을 했더니 뇌들보(뇌량, corpus callosum)가 위축된 것으로 나타났다. 뇌들보는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큰 신경 다발로 좌우 대뇌반구의 정보를 교환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 어린 시절 언어폭력을 당했던 사람은 성인이 된 후에도 뇌에 흉터가 남고, 이것이 정서 조절 이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결과이다.[1]

 

1-3. 이런 연구결과를 보면 마태복음의 연자 맷돌의 비유가 결코 가볍게 다가오지 않는다. 작은 자를 실족케 하는 것은 그에게 평생의 상처를 남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폭력을 일삼는 자는 수법이 교묘해서 피해자가 증거를 찾기 어려울 때가 많다. 증거가 남을 수 있을 상황은 피해 가고, 차 안 같은 단 둘이 있는 장소에서 폭언을 내뱉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교묘한 말로 모욕을 주기 때문에 언어폭력이라는 것을 피해자가 나중에야 깨닫게 되기도 한다. 만약 문제가 되어도 언행을 정당화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경우가 많고, 잘 안 되면 술김에 모르고 했다거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뻔뻔하게 변명한다. 이런 실정이니 피해자가 겪을 상처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것일 것이다. 오죽했으면 그런 잘못을 저지르느니 차라리 연자 맷돌을 매달고 죽으라 성서는 말했을까? 지극히 작은 자를 실족케 하는 것은 결국 한 영혼의 몸과 영혼을 동시에 죽이는 것이다.

 

 

2. 언어 폭력의 정의

2-1.“언어는 폭력을 서술하거나 전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행사할 수도 있다. 조롱 투의 표현이나 모욕적인 욕설까지 언어 자체가 폭력행사의 수단이 될 수 있다.[2]그러나 말한다는 것이 상대방을 수용하고 또한 상대방과 관계하는 것임을 생각할 때, 그 안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언어행위에 수반되는 언어폭력을 우리 사회가 크게 문제로 다루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진다. 언어폭력의 피해가 발생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담이었어” 또는 “ 뭐 그런 것 가지고 그래” 또는 “넌 너무 예민한 것 아니야” 등의 반응을 보이며, 언어폭력의 피해자의 예민함에 오히려 더 점을 맞춤으로써 언어폭력의 본질을 흐리게 하곤 한다.

 

2-2. “오스틴(1979.51)은 ‘말하기와 행위는 다른 것이 아니라 말하기 자체가 바로 행위의 한 형태’라고 전제한다.[3] 우리는 언어폭력을 극복하기 위하여 언어 자체에 담겨있는 폭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모든 발화된 말은 상처를 줄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3. 언어폭력은 다른 폭력과 달리 “언어기호”를 통해 실행된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 기호의 의미에 의해 폭력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발화하는 언어 주체의 권력에 의해 그 폭력성이 규정된다는 데 있다. 이 말은 언어폭력이 단순한 말의 의미를 포함하면서도,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사회적 관계, 그리고 말이 발화되는 상황들과 집단의 관계 등에 의해 다양한 양상을 띤다는 의미이다. 

 

2-4. “폭언으로 무엇이 손상되는가? 말로 폭력이 행사된다고 전제할 때 이 폭력은 무엇을 위한 폭력인가? 우리의 명예를 겨냥하는 것인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폭력인가? 아니면 우리의 신체에 대한 폭력인가? 언어적 손상은 얼마나 치명적인가? 이러한 언어적 손상은 수신자에게 단지 외적으로 가해지는 것인가 아니면 수신자의 존재를 위협할 만큼 치명적인 위협을 유발하는가? 언어폭력의 영향은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가? 이러한 언어폭력의 상처를 견디는 것을 비유적으로만 다루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러한 발화의 의미를 사실적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어떤 조건에서 이러한 언어폭력이 성공을 거두는 것인가? 모든 욕설이 경멸적 표현이라는 것은 아니다. 어떤 표현에서는 수신자보다 발화자가 더 비웃음을 받기도 한다. 그렇다면 모욕이나 경멸이 어떠한 경우에 언어폭력이 될 수 있는가?[4] 수신자와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언어폭력과 육체적 폭력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가시적인 외형적 상처보다 마음과 정신에 가해지는 비가시적 상처가 오히려 피해자에게 더 치명적일 수 있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우리는 너무 쉽게 언어폭력의 치명성을 무시하는지도 모른다. 

 

2-5. 언어폭력의 다양한 원인들이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언어 자체에 내재된 폭력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언어의 본질이 어떤 것을 개념화하는 것이라면, 바로 그때 언어의 폭력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5] 아도르노는 “개념으로 참된 본질을 드러내기 어려운 대상을 개념화하려는 것이 언어의 본질이라는 관점에서, 언어철학이란 언어의 폭력에 대한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데리다는 “모든 민중 선동이나 수사학에 로고스(logos)로서 언어의 독자적 폭력성이 전달된다. 폭력성의 개념적이고 술어적 구조를 통해 언어는 타자를 그 개념으로 분류시키고 이런 과정을 통해 타자의 다름을 잘못 보게 한다”라고 말한다. 푸코는 “말할 수 있는 것은 통제의 과정과 담론의 제한에 의해 조정될 수 있기 때문에” 폭력적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주장은 많은 부분 상이점을 가지지만, 공통점은 언어행위 이전에 폭력성이 언어에 선재해 있음을 모두 말하고 있다.[6] 결국 인간이 언어의 주체인 한 이러한 폭력성의 출발은 인간 자체에서 기인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폭력성에서 자유로운 언어행위는 존재할 수 없다.

 

2-6. 언어폭력의 발생 유형을 나눠보면 다음과 같다. a) 관계적 폭력(책임의식) : 우리는 타자에 대해 항상 ‘대답을 함으로 책임을 지게되는 관계’에 있다. 즉 우리는 타자의 요구에 늘 응답하거나 반응해야 함을 의미한다. 타자의 물음이나 말은 우리에게 응답이나  반응을 늘 요구한다. 이러한 타자와의 비대칭 관계의 구조에서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모욕이나 상처를 입게 된다. b) 유사언어폭력(간접성) : 유사언어폭력은 너무 광범위하다. 생각이 부족한 표현에서부터 의도적인 인신 공격에 이르기까지, 멸시뿐만 아니라 때로는 ‘침묵’도 폭력이 될 수 있다. 웃음이나 신체와 관련된 가벼운 농담까지도 의도치 않은 폭력이 될 수 있다. 특히 집단 속에서 한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행해지는 유사언어폭력은, 예를 들어 경시나 평가절하 등과 같은 행위는 시간이 경과하면 할수록 피해자에게 강력한 폭력성을 더할 수 있다. 왕따나 은따의 문제가 바로 이러한 유사언어폭력에서 기인함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c) 수사적 폭력(문법성) : ‘분리’, ‘유형화’, ‘평가절하’라는 3단계의 언어적 수사가 작동하는 수사적 폭력. 이러한 경우 표현에 내재된 화용론적 관점, 즉 ‘누가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특히 어떻게 말했는지’에서 담화의 폭력성을 밝힐 수 있다.[7] 이러한 경우 많은 수사를 통해 폭력성이 드러나기 때문에 단순하게 발화된 말에 의해 그 폭력성을 가름하기 어렵다. 같은 은유적 표현도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청소부를 비하하는 표현을 누군가가 발화한다고 치자. 듣는 수신자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릴 수 있지만, 그중에 그 비하된 청소부와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결코 그 수사가 단순한 비유로 들려지지 않고 모욕이나 수치로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수사적 은유도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폭력성을 띨 수 있다.

 

 

3.교회 내 여성혐오와 언어폭력의 실태

3-1. 언어폭력의 피해자들을 살펴보면 마음이 여리고 심성이 착한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타인을 배려하고 돌보아주는 사람이 오히려 언어폭력의 타깃이 되곤 한다. 그래서 남성보다는 여성이 더 많다. 그리고 피해를 당하고도 저항하지 않고 감내하며, 분노와 억울함을 속으로 억압하는 경향도 여성이 더 많다. 반면 언어폭력의 가해자들은 대부분 “권력 욕구와 통제 욕구”가 충만한 사람일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일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며 타깃을 하나 정해서 공격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순종도 함께 이끌어낼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너희는 “내게 굴종해야 한다”는 은밀한 메시지를 모두에게 던지는 것이다.[8]

 

3-2. 언어에 의한 성차별은 다음과 같은 특징으로 나타난다. a) 언어에서 여성과 여성의 업적이 무시될 경우, b) 언어에서 여성이 단지 남성에 의존 내지 종속되어 기술될 경우, c) 언어에서 여성이 단지 판에 박힌 역할에서만 나타나고 그것을 벗어난 여성의 관심사와 능력이 인정되지 않을 경우, d) 언어에서 여성이 모욕적인 언사로 멸시받거나 조롱거리로 될 경우 등이다.[9]

 

3-3. ‘요염한 여자’, ‘여자의 수다’, ‘여편네들’ 등은 여성을 총칭하는 차별적 언어로 이러한 경우 여성을 진부한 역할만 하는 존재로 비하된다. 여성을 단순하게 남성의 부속물 정도로 취급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매들은 짧은 옷을 삼가해달라. 그것이 배려이고 지혜로움이다, 여자가 걸음걸이가 그게 뭐냐?, 엉덩이가 커서 애를 잘 낳겠네 , 커피는 젊고 예쁜 ᄋᄋ가 좀 타 줘야지”등이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너무 쉽게 접하기 때문에 의식도 못하고 넘어갈 경우가 많은 표현들이다. 

 

3-4.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녀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의 경우는 어떠할까? 한 인터넷신문의 인터뷰 기사[10]의 내용을 살펴보자. H씨는 말한다. 대학교에서 CCC에 있을  캠퍼스 대표는 항상 남성이 맡고 대표는 성이 맡았다. 부대표는 '기도의 어머니' 불렸다. 여자에게는 대표 자리를 제안하지 았다.  단체 안에서 이상적으로 설정해 놓은 남성성, 여성성이 있는 다.” 목사인 P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목회 수련  음식 준비하는데  자리에 있는 여성들  목사 아내와 여성 목회자가 총동원됐다. 남자 목사들은 그냥 소파 아서 토론하고 있는 그 상황이 너무 싫었다. 는 목사로서 주방  하지 않는  선택했다. 주방에 계신 들에게 안한 음은 있었지만 남자 목사 수발드는 존재 취급받 지 않았다. 다른 여성들도 싫어하셨지만 내색은 로 안 했다.” H씨의 또 다른 증언은 이렇다. 청년부에서 성교육받을 때 방 안에 남녀가 단둘이 있으면 안 다. 이런 종류 이야기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자 청년은 여자 청년보다 성욕이 50  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남자 입장에서 쓰인 을 선교 단체나 교회에서 성교육할 때 교재로 다. 남자는 성욕을 조절할 수 으니 여자가 조심해야 하고 남성은 단순한 존재라서 ""라고 이야기해야 하고 에서 챙겨야 하고 자존심을 세워 줘야 한다는 류의 이야기들, 부 다 교회에서 배우는 거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 내에서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분리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다. 쉽게 말해서 여성은 밥하고 남성은 교회를 운영한다는 것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라고 세상과 결코 다른 점이 하나도 없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3-5. 뉴스앤조이(2017.03.25)가 실시한 한 설문조사는 한국 교회에서의 여성 혐오의 문제가 심각함을 보여준다. 전체 응답자 중 83.3%가 교회나 기독교 단체에서 여성 혐오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직접 경험은 하지 않았지만 그러 한 사례를 알고 있다고 응답한 사람이 10.5%이고 전혀 경험하지 못했다고 한 사람은 6.2%에 불과했다. 이러한 수치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교회 내 여성 혐오 문제가 매우 심각함을 보여준다. 그 사례를 살펴보면 (1) 외모 복장나이를 언급하는 문화(79.3%), (2) 성 역할 고정 및 차별(67.4%), (3) 여성 차별 설교(47%), (4) 기타 (11%)이다. 

 

3-6. 그 실제 사례들을 유형별로 정리해보면 현재 한국 교회 내의 여성혐오와 차별의 실태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아마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여겨진다. 여성차별이나 혐오에 있어 진보나 보수의 차이가 없다.

 

a) 외모,복장,나이 언급하는 문화 : "여름이라 그냥 반팔에 약간 찢어진 스키니 진을 입고 (예배당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남자 집사님이 저더러   점잖게 입으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입으면 형제들이 어떻게 시험을 이기느냐면서, 성폭행은 그렇게 일어나는 거라고 얘기했죠."

 

"기도하고 있었더니 전도사가 와서 무슨 기도하냐고 물어봤어요. 그냥 인생이 너무  풀려서 힘들다고 했더니, 나이를 묻더라고요. 2X살이라고 했더니 '아 그럼 이제 슬슬 기도 빡시게 해야겠네! 슬슬 자궁 말라비틀어질 나이잖아'라고 하셔서 황당했던 기억이..."

 

"청년이 거의 1,000명 나오는 교회였어요. 목사는 자매들에게 예쁘게 꾸미고 다니라고 말했고, 전도사들은 연말에 장기자랑 대회를 열면, 심사평으로 참가자 외모를 품평해 상당히 기분이 나빴던 기억이 납니다."

 

"찬양팀 싱어였는데, 연습 시간에 찬양 인도하는 목사님이 저를 보며 글래머러스하다고 말했어요.  자리에 있던 팀원들이 저를 위아래로 쳐다보는데 매우 수치스러웠어요."

 

b) 성 역할 고정 및 차별

"교회 주방에는 대부분 결혼한 여성들이 일해요. 가끔 일하는 남성도 있는데  남성들은 교회에서 센스 있는, 혹은 칭찬할 만한 남성으로 불립니다."

 

"청소년부 시절 전도사님이 나에게 여자는 신학교 가면  된다고 했어요."

 

"남성 장로나, 남성 전도사는 단상에 올라와도 되지만 여성 전도사는  된다고 했어요."

 

"교회에서 회장을 맡았는데, 집사님이 '어, 여기는 여자가 회장이네?'라고 말했습니다. 청소년부 임원 선출할 때, 어떤 사람이 여자가 청소년부 '회장' 하기에는 너무 약하니까 부회장 하자고 발언했습니다."

 

"기독교 여성 기관 면접  '커피 타야 하고 걸레질해야 하는데 괜찮냐' 질문하더라고요. 실제로 근무할   모든 일은 여성이 했습니다."

 

"목사가 자기 며느리  사람이 생긴다면 집에 재워서 새벽에 일어나는지 보겠다고 했어요. 어머니는 새벽에 일어나서 남편에게   주고 기도해 줘야 하는 존재라나 뭐라나."

 

"여자가 먼저 대시해서 연애하고 결혼하는  성경에 반하는 일이라 깨지기 쉽다고 했어요. 여성 성기는 몸속으로 들어가 있는 형태이기에 여성에게 성욕이 있는 건, 원래 지어진 바와는 반하는 일이라고 했어요. 맞벌이도 성경에 반하는 일로, 여자는 남자가 밖에서  일할  있도록 정신적, 가사적, 성적으로 도와줘야 한다고 했습니다."

 

c) 여성 차별 설교

"목사가 설교 도중, 여자는 남자를 돕기 위해 만들어졌고 남자는 자신을 도와주는 여성을 사랑하게 된다고 말했어요. 불행히도 요즘 세상은 맞벌이하지 않고서는 먹고살 수가 없어 여자들도 직장에 가서 일하는데, 직장에서 남성들을 돕다 보니 불륜이 많이 일어난다고 했어요."

 

"목사가 설교 중에 웃자는 의도로 '여자들이 화장  하면 교회 분위기가 칙칙하다' 말했습니다. 교회에 강사로 왔던 목사 역시 '짧은 치마는 창녀가 입던 옷이라서 여성 교인들은 교회   그런  입지 말라' 설교했습니다."

 

"여성이 원죄의 이유이기에 잠잠해야 하고, 가르치는 직분을 맡으면  되고, 특히나 남자들을 가르치는 일은  하게 했어요."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칩니다. 바로   구절에 '서로' 순종하라고 나와 있는데도 저녁 메뉴 정할  남편  따르라고 합니다."

 

"전도사에게 성폭행 피해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중보 기도한다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사실을 알려 '2차 가해'를 했습니다."

 

3-7. 이러한 언어폭력은 교회 내 여성 목회자들에게는 더 심각한 실정이다. 우선 목회자들 사이에서 성별을 넘어 무차별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폭력의 실태를 살펴본다. 그 대상과 내용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a) 담임목회자: 목회관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으로 인한 언어폭력, 비인격적이고 무시하는 말투(부목회자는 담임목회자의 부속품이라는 인식), 여성 부목회자에 대한 성차별적 발언. b) 동료목회자: 경쟁으로  인한 비난과 무시, 선임 부목회자에게 받은 비인격적 언어폭력, 남성 부목회자의 성차별적 언어폭력, c) 평신도: 생각과 신념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비난, 욕설), 교회의 분쟁으로 인한 인신공격 등.[11]

 

3-8. 또한 목회자 사이의 언어폭력 유형과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a) 무시: 말이 많네!, 나이도 어린 게 덤빈다!, 똑바로 하라고! 제대로 해!, 거기 고개 똑바로 드세요!, 니가 갈 데가 있겠냐!, 여자가 무슨 안수냐! 축도냐!, 여자가 무슨 설교냐!, b) 인격적 모독: 평신도보다 못한 놈! 당장 그만둬!, 우리를 괴롭게 하지 마!, 칼로 찔러 죽이겠다!, 혀를 갖다가 뽑아 버리겠다!, 니가 목사냐!, 이 자식!, 책상 빼버리겠다!, c) 비난: 니들이 쓰레기 같고 도움이 안 된다! [12].  이러한 말들이 정말 목회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든다. 이러한 언어폭력은 특별히 여성 목회자들에게는 성적 차별이 더해져서 더욱 가중적인 상처를 입힌다. 교회 내 여성 목회자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무장해제시키는 발언들은 대부분이 사역의 제한성, 목회자의 기능 상실, 성적 차별이 주를 이룬다. 또한 여성 목회자에 대한 경쟁심과 경계심이 더욱 여성 목회자를 차별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아마도 여성 목회자는 교회 내 여성 신도들보다 더한 이중적 차별(여성이면서 목회자라는 신분 때문에)을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4.여성혐오에 대한 신학적 접근

4-1. 한국교회(보수 진보 구분 없이)에서 성차별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생소한 어젠다(agenda)에 속한다. 이는 남성 교부, 남성 신학자, 남성 목사들에 의해 명맥을 이어온 보수신학의 범주에서 여성의 입장과 의견수렴이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기저귀 차고 어딜 강단에 올라가? 안돼라는 어느 목사의 말은 한국 교회 내 성차별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한 예로 유명하다. 심지어 이 성도가 내성도인지 알아보려면...젊은 여집사에게 빤스를 내려라...라는 성희롱적 설교도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얘기가 됐다. 이러한 말을 쉽게 내뱉을 수 있다는 것은 아마도 발화했던 목회자들의 자질에도 문제가 있지만, 이러한 말이 쉽게 통용되는 교회 내 남성 중심적 문화와 시스템이 더 문제로 지적된다. 하물며 이런 언어폭력을 행사한 당사자들은 성경적 진리를 선포했다는 당당함 조차 가지고 있었고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이러한 말을 전혀 문제시하지도 않았다. 최소한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결코 그들은 그런 말은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4-2. 사실 기독교 전통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즉 많은 교부들의 여성차별적 발언은 어쩌면 이러한 여성 혐오의 기초를 놓았는지도 모른다. 터툴리안은 여성 때문에 우리는 죽음의 형벌을 받는 것이며... 당신들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이 죽어야 했다 고 했다. 또한 어거스틴은 여성 자체를 놓고 볼 때, 여성은 하느님의 형상이  아니다. 오직 남성만이 하느님의 형상이다라고 하였다.[13] 중세기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여성은 불완전하고 형편없는 존재라고 하였고, 루터는 여성은 하수구 위에 세워진 성전이다. 모임에서 여성이 말을 하는 것은 자연의 순리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다라고 했으며, 킹 제임스는 여성이나 여우를 가르치는 것은 더욱 교활하게 만들 뿐이다라고 했다.[14] 이쯤 되면 앞에서 언급한 보수 교회의 목회자들의 발언이 결코 배경 없이 나온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기독교는 너무 오랫동안 남성중심주의에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4-3. 존재론적 평등, 기능적 종속: 이 말은 성서는 남녀평등을 말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보수적 교회의 답변이다. 애매한 이 대답은 논리적으로도 모순이 되며 성서적으로도 맞지 않는 말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 대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존재론적이면서도 기능적인 전인격성을 모두 포함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는 어떠한 기준이나 차별도 없다. 

 

4-4. 해석학적 표현에서 전제 없는 해석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선입견에 대한 말로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은 문화적,Ÿ 역사적,Ÿ 사회적 선입견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성서 해석에 선입견으로 작용할 때 여성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쉽게 용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15]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바울로의 외침은 교회 내에서 문화와 진리를 혼동한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한국 교회는 이를 만고불변의 진리로 삼고 이를 교회 내에서 당당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최갑종 교수는 바울로의 여성 관련 본문에 대한 해석은 고린도 교회와 에베소 교회의 여성도들 중에 복음의 자유를 남용하거나 곡해해 남녀 구분과 남편과 아내의 질서까지 부정하여 가정과 교회를 혼란스럽게 한 여성들에게 주는 바울로의 특별 교훈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16] 물론 이러한 성서 해석도 나름 여성차별을 해소하는 데 어느 정도 기능을 할 수 있지만, 이러한 해석이 진리에 가까운 해석이라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분명 바울로는 당시의 문화적 한계(가부장적인 문화) 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바울로 자신도 문화의 지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발언은 분명 여성에 대한 비하를 어느 정도 담고 있었다고 보아야 진실에 가까운 해석이 될 것이다. 

 

4-5. 나는 여기에서 복음서와 예수에게서 나타나는 여성신학적 관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들에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성들에게 우호적인 많은 내용들을 복음서와 예수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서 여성 혐오에 대한 신학적 접근을 삼위일체론적 인간학을 통해 제시하고자 한다. 가장 가부장적인 의심을 품게 만드는 성부, 성자, 성령이 어떻게 여성 혐오에 대한 대안이 되고 새로운 인간학의 기초가 될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4-6. 삼위일체는 하나의 우시아(οσία)이면서 동시에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가지 휘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로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휘포스타시스는 인격으로 번역될 수 있지만 그 함의하는 바는 본질, 실체 등 다양한 뜻을 포함하는 번역하기 까다로운 개념이다. 중요한 것은 이 어휘가 많은 변천을 겪으면서 라틴어의 페르소나(인격persōna)와 결합하면서 카파도키아 교부들에 의해 인격 또는 위격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이 초대 교부들은 휘포스타시스라는 개념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도출해내면서 사벨리우스 주의의 양태론과 아리우스의 단성론을 피하면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합의의 과정을 완수할 수 있었다.

 

4-7. 휘포스타시스에 담긴 많은 함의들과 그 의미를 여기에서 모두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고백한다. 중요한 것은 이 어휘가 우리를 존재론적 지평에서 관계론적인 지평으로 옮겨놓는다는 사실이다. 휘포스타시스로 표현되는 인격은 삼위일체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느님이라는 본질과 실체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존재 양태인 것이다. 성부는 성자를 낳고 성령을 발현하시는 제1원인으로서의 인격이다. 하느님이 인격이 됨으로 말미암아 하느님 자신도 존재론적인 필연성으로부터 자유해진다. 헬라 사상은 이 세상과 하느님 조차도 존재론적으로 필연성에 가두어 두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헬라 철학의 관점에서 이 세계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이미 선재해 있기 때문이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이러한 존재론적 필연성으로부터 자유한 무로부터의 창조ex nihilo를 주장함과 동시에 하느님이 바로 인격이시다는 개념을 주장했던 것이다. 

 

4-8. 이 삼위의 인격은 철저히 관계론적이다. 여기에 존재론적인 있음의 자리는 없다. 각 위격은 철저히 타자성(otherness)과 유일성(uniqueness)을 지님으로 서로 섞이지 않는 인격이 된다. 그것이 가능함은 삼위의 위격 간에 사랑의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타자끼리 만날 때 가능하다.  가 만나는 사건이 곧 사랑이다.  가 만나 하나가 되고 나면 사랑의 사건과 긴장이 사라지고 만다. 왜냐하면   서로에게 융합되어 버리면 절대 타자로서의  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타자성과 유일성도 없다. 그리고 거리두기가 사라짐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긴장 또한 사라지는 것이다.  가 되고  가 되는 순간은 결코 사랑이라 할 수 없다.  가 각각 서로에게 타자로서 바로 설 때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에마뉘엘 네비나스는 사랑은 곧 타자의 경험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타자 간의 차이가 결국 특별한 경험을 생성해 내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사랑은 진리를 세우는 과정(알랑 바디우)이라 말할 수 있다.

 

4-9. 휘포스타시스로서의 성부, 성자, 성령은 단순한 언어적 표현을 넘어서는 인격에 대한 표현이다. 여기에는 젠더에 대한 의미가 전혀 전제되지 않는다. 성부와 성자라는 말은 젠더를 함의하는 말이 아니라 인격(휘포스타시스)을 드러내는 말이다. 이는 하느님의 존재 양태로서의 인격을 표현한 것일 뿐이다. 영원한 타자로서의 인격은 타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포함시켜 사라지게 하지도 않는다. 서로는 타자로서 적당한 거리두기를 통해 관계적 긴장을 유지한다. 여기에는 어떠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격으로서의 존재는 이미 존재론적 필연성에서 자유해져 관계론적 실존 양태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영원한 타자들은 결국 자신들의 자유의지에 의해 상호 간에 사랑의 결속을 만든다. 여기에 서로에 대한 차별이나 구별은 사라지고 인격적인 유일성만이 존재한다. 

 

5. 결론: 지극히 작은 자를 위하여

5-1. 우리는 지극히 작은 자를 괴롭히거나 아니며 강한 무엇에 통합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보호라는 미명 하에 약자를 타자로서가 아니라 다른 타자에 의존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휘포스타시스는 인격과 인격의 타자성과 관계성을 담지한 말이다.  가 서로에게 흡수됨이 없이 영원한 타자로 남을 때 그 관계는 차별이 사라지는 사랑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에게 편입되거나  에게 편입됨은 사랑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폭력이다. 우리는 그동안 하나 됨이 사랑인양 너무나 많은 작은 타자들의 타자성을 빼앗아 왔다. 그 결과 그들을 유일성을 지닌 인격적 존재로 세우지 못했다.

 

5-2.도 아니고 도 아닌 제3의 위치에서 서로를 바라보기. 그렇게 함으로써 타자성이 사라지지 않고 유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그것이 타자 간에 거리두기이다.  거리두기는 차별을 위함이 아니라, 삼위가 각각의 유일성과 타자성을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우시아를 공유하는 신비와 같은 것이다. 작은 자들에 대한 차별이나 구별이 없는 세상은 바로 이러한 삼위일체적 관계성과 타자성에 의해서 확보될 수 있다. 교회 내 언어폭력과 여성 혐오는 여성과 남성을 절대 타자인 인격으로 바로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문화와 관습의 지평을 허무는 것은  가 영원한 타자로서 적절한 거리두기를 할 때 가능해진다. 하나가 다른 하나 속으로 흡수되어 사라지게 함은 휘포스타시스에 가해지는 폭력일 뿐이다.

 

 


[각주]

[1] 김병수, 은밀한 살인-언어폭력-心心한 뉴스-인물과 사상(10월호), 2017.  pp.169-170

[2] 김미연, 언어폭력에 대한 이론적 고찰-독어교육 제63. 한국독어독문학교육학회,2015.  p.31.

[3] 김미연, 언어폭력에 대한 이론적 고찰-독어교육 제63. 한국독어독문학교육학회,2015. p.33.

[4] 김미연, 언어폭력에 대한 이론적 고찰-독어교육 제63. 한국독어독문학교육학회,2015. p.34.

[5] 김미연, 언어폭력에 대한 이론적 고찰-독어교육 제63. 한국독어독문학교육학회,2015. p.37.

[6] 김미연, 언어폭력에 대한 이론적 고찰-독어교육 제63. 한국독어독문학교육학회,2015. p.38.

[7] 김미연, 언어폭력에 대한 이론적 고찰-독어교육 제63. 한국독어독문학교육학회,2015. pp.40~45

[8] 김병수, 은밀한 살인-언어폭력-心心한 뉴스-인물과 사상(10월호), 2017. pp. 175~176 참조

[9] 김종수, 언어에 의한 성차별과 언어폭력-독어교육 제22. 한국독어독문학교육학회, 2001. p.84.

[10] 교회 언니들이 말하는 내가 겪은 여성 혐오’, 미주뉴스앤조이[www.newsnjoy.us], 2016.5.25 기사.

[11] 노성동, 부목회자의 언어폭력 상처경험과 회복탄력성에 관한 연구-한국기독교상담학회지 Vol. 27, No.1, p.143.

[12] 노성동, 부목회자의 언어폭력 상처경험과 회복탄력성에 관한 연구-한국기독교상담학회지 Vol. 27, No.1, p.144.

[13] Gene Edwards, Women Freed From Second-Class Citizenship in the Kingdom of God, 임정은 역, [하느님의 딸들]. 죠이선교회, 서울, 2009, p.10-46 재인용. 

[14] Gene Edwards, Women Freed From Second-Class Citizenship in the Kingdom of God, 임정은 역, [하느님의 딸들]. 죠이선교회, 서울, 2009, p.10-46 재인용

[15] 강호숙, 보수교단 내 성차별적 설교에 대한 여성신학적 고찰. 한국여성신학 2016 여름 83. p. 149

[16] 강호숙, 보수교단 내 성차별적 설교에 대한 여성신학적 고찰. 한국여성신학 2016 여름 83. p. 150

 

 

 


[참고자료]

김병수, 은밀한 살인-언어폭력-心心한 뉴스-인물과 사상(10월호), 2017. 

김미연, 언어폭력에 대한 이론적 고찰-독어교육 제63. 한국독어독문학교육학회,2015. 

김종수, 언어에 의한 성차별과 언어폭력-독어교육 제22. 한국독어독문학교육학회, 2001. 

교회 언니들이 말하는 내가 겪은 여성 혐오’, 미주뉴스앤조이[www.newsnjoy.us], 2016.5.25 기사.

노성동, 부목회자의 언어폭력 상처경험과 회복탄력성에 관한 연구-한국기독교상담학회지 Vol. 27, No.1.

강호숙, 보수교단 내 성차별적 설교에 대한 여성신학적 고찰. 한국여성신학 2016 여름 83. 

존 지지울러스, 친교로서의 존재, 이세형/정애성 옮김. 삼원서원, 강원 춘천,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