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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공회 관구 설립의 역사(1965-1992)

James Chae 2021. 7. 30. 12:44

 

*이 글은 2017년 성공회 신학대학원 '성공회역사' 발제로 작성된 글입니다.

 

대한성공회 관구 설립의 역사 1965-1992

 

채창완 야고보

 

 

대한성공회의 관구설립의 논의는 이미 3 주교인 트롤로프(조마가) 재임기간인 1930년대 이전부터 제기되었던 현안이었다. 그것은 한국 교회가 독립할만한 성장의 가능성이 있고, 여러면에서 일본이나 중국성공회에 속할 없을 뿐만 아니라, 캔터베리대주교의 관하에 두기는 거리상으로나, 문화적 배경으로나 어렵다는 관점에서 비롯되었다.(1) 이러한 관구설립의 역사는 김요한 주교가 초석을 놓고 이천환주교와 노대영주교가 가교역할을 하면서 이루어질 있었다. 이에 대한 과정을 순차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1951 117 김요한 주교의 5 교구장 승좌식의 연설을 살펴보면서 시작한다.

 

"우리의 사명은 토착화된 한국 교회를 건설함으로써 자정, 자전, 자립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선교부와 교회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해외에서 온 우리는 모두 토착화된 교회의 틀 안에서 함께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2)

 

김요한 주교는 자신이 제시한 비전대로 한인주교 선출 계획을 차근히 진행하여, 결국 1963 524일에 열린 교구 상임위원회에서 "현재의 선교교구를 나누어 개의 교구를 설정한다." 선포한다. 서울교구는 서울 또는 북부교무국 관할 구역으로 변경하고, 한인주교를 세워 관할하게 한다. 대전교구는 선교교구로 하고 본인이 사역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 그는 이러한 분할의 "궁극적인 목표는 한국에 관구를 성립시키는 "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3)

 

1965년은 대한성공회의 역사의 희년이라 있다. 126일에 열린 교구상임위원회에서 서울교구와 대전교구의 분할이 결정되었고, 527일에는 캔터베리대주교의 승인을 받아 이천환(바우로)주교가 최초의 한인 주교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대한성공회는 관구설립을 위한 주춧돌을 놓게된다.

 

주교로 성품되고 맞이하는 이듬해 신년사에는 이천환 주교는  자신의 감회와 대한성공회의 비전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비장한 각오까지 느껴지는 그의 글을 간략히 소개한다.

 

"특히 새해를 처음으로 맞이하는 우리 한국 성공회 자치교구로서는 더욱 그 의의가 깊습니다.....중략.....우리가 바라는 것은 많고, 우리의 현실적인 조건들은 그리 순탄한 것이 못됩니다.....중략.....이 고난의 사명을 승리적으로 완수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교회의 성쇠가 좌우됩니다......중략.....우리 교회는 지금  어느 때보다도 성직자들의 자립적인 의지와 철저한 주체적 태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중략.....끝으로 우리가 한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 전체 한국 성공회의 완전자치교구확립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 대전교구만은 아직 선교 교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불원(오래지 않아) 남부교구 역시 한국인의 자치교구로 돌아 와야 할 것이고, 또한 그 일을 위해 우리 모두가 합심하여 준비해야 하겠습니다......중략.......그렇다면 남부교구의 한국인 자치회를 위해 지금부터 준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준비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든 성직자들과 교우들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철저한 주체의식을 갖추고 자치의 능력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공회월보 1966.1. 제2호]

 

그가 사용한 단어 중에 "자치", "자립", "주체"라는 말이 특별히 눈에 띈다. 이러한 이천환 주교의 자립에 대한 의지는 그의 치리 기관 속에서 일관성 있게 주장되고 실천된다. 

 

그러나 서울 자치교구의 시작부터 커다란 난관에 봉착한다. 아니 처음부터 황무지에서 시작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 "물질적으로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나 영적상태에 있어서 역시 그러합니다." 그리고 그는 과거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우리의 과거 선교 역사는 한국인 신자들의 간곡한 문제와 요청을 너무도 몰랐습니다. 결과는 바로 한국 성공회의 현실황이 말해 줍니다."(4)

 

서울교구의 피나는 자립 노력과 아울러 김요한 주교는 영남지방 교구 설립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는 영남 지방에 교구를 설립하기 위한 계획을 호주 성공회에 타진했으나 호주 성공회는 이를 거절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김요한 주교는 영남지역을 새로운 교구 설립지로 생각했을까? 이에 대한 답은 그를 이어 2 대전교구장이 노대영 주교의 글을 통해 엿볼 있다. 여기에서 "삼겹줄" "삼위일체" 거론하며 교구 분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서 무척 흥미롭다.

 

"우리 대전교구는 지리적으로 자연적인 통일을 가진 구역이 아닙니다. 2년 전 서울교구가 생겼을 때, 서울교구 구역을 제외한 한국의 나머지 지역이 대전 교구 구역이 되었기 때문에 자연적 구역이 아닙니다. 교구 분할 당시에는 가능한 시일내에 세째 교구를 세울 계획이 있었습니다. 성공회는 세째 교구가 필요합니다. 구약 전도서에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 하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한 성삼위 일체의 사랑을 더 뚜렷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우리는 세째 교구가 필요합니다.......우리 교우들은 주로 호서지방과 영남지방에 분포하고 있습니다. 이 두 지방의 성교회 역사와 실태는 서로 다릅니다. 성공회 선교사들이 처음 한국에 와서 경기도의 몇 곳에서 성공회를 창설한 다음에 1906년부터 호서지방교회를 시작 했습니다. 현재 그 지방에 있는 우리 교회들은 50년 이상의 역사를 가졌습니다. 어느 곳에는 냉담교회도 있는데, 냉담하게 된 교회는 성직자가 모자라고 전도구역이 너무 넓은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현재 호서지방의 교회가 필요로하고 있는 당면 계획은 우선 영적 생활이 좀 더 깊어지고 넓은 전도구를 분할하며, 열렬한 성직자들을 파견하는 일입니다.......영남지방 교회들은 대략 해방 전의 일본인 교회였습니다. 한국인 교회로서 제일 역사가 깊은 교회인 상주가 30년이 넘었지만, 다른 교회들은 20년 이하입니다. 또한 호서지방에는 촌교회가 많은 반면, 영남지방에는 도시 교회로 되어 있으며, 그 수는 많지 않습니다. 영남지방에서는 새 전도지를 개척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주로 그 지방의 발전하는 도시에 집중시켜야 할 것입니다. "(6)

 

1967 김요한 주교가 한국을 떠나면서 자립교구를 위한 양교구의 노력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신임 대전교구장으로 노대영 주교가 승좌했고, 서울교구는 "자치교구기금" 적립하는 사업을 추진했다.(7) 또한 대전 교구는 천안전도구를 천안, 병천, 둔포로 분할을 단행했다.(8) 그리고 이천환 주교는 자립적 전교 활동을 위한 "계단식 실천 목표 수행" 제안하며 향후 단계적인 자립 사업 추진을 계획했다.(9)

 

서울교구의 자립을 위한 노력과 더불어 대전교구도 "1975년에 재정적 자립" 결의한다. 물론 여기에서 "자립" 성직자의 봉급을 선교비에 의존하지 않고 교회 자체적으로 해결한다는 의미이다. 1970 46 대전 교구의회는 이러한 안을 결의했다. (10)

 

김요한 주교가 언급했던 "교구분할 10" 다가오면서 "부산교구" 신설 문제가 이슈가 되기 시작했다.  1972 2 8 "3 전국의회"에서 문제가 거론되었고, 이천환 주교는 개회 설교에서 "민족적 교회 , 우리의 구체적 역사와 문화적 풍토 속에 토착화되고 민족의 정치 사회적 현실 속에서 참여하는 교회, 생명력을 발휘하는 교회" 설파했다. "부산교구 신설과 대한성공회 관구 설립안" 추미가엘 의원의 동의와 이석형 신부의 재청으로 재석 90 찬성 52표로 가결되었다. 대한성공회 관구설립의 논의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11)

 

그러나 당시 한국 성공회의 실정은 관구설립요건에 미달이었다. 예를 들어 1 교구는 적어도 20여개의 전도구를 갖추어 하고,  재정적자립이 가능하여야 하며,  세계성공회협의회의 견해로는 4 이상의 교구가 관구로 승격할 있다는 것이다.(12) 또한 아울러 재산분할, 성직자의 소속분할로 부터 주교의 선임 방법과 이에 따르는 제반 법적인 보완 작업 넘어야 과제가 너무 산적해 있었다.(13)  대전교구는 같은 4 30 8 대전교구의회를 열어 이러한 문제들을 깊이있게 논의했다. 내한한 세계성공회 심의회 사무총장 하우주교가 옵서버로 참석하여 여러 의견을 개진했다. 이날 교구 분할의 안건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부산교구 설립의 문제는 1972 430일부터 5일까지 6일간 싱가폴에서 열린 "동남아 성공회 의회"에서도 논의되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대회에 이천환 주교와 노대영 주교가 참석했다. 그리고 부산교구와 관구설립을 인가하고, 결의안을 동남아의회 의장 이름으로 요청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천환 주교와 노대영 주교가 보낸 공동 서안에는 "대전교구창설 당시 10 내에 재분할해야 것이라는, 원칙론이 나타나 있으며, 또한 부산교구로 편입될 경상교무구의 문화적 특이성과 지역적 난점을 제시하고 있다.(14) 

 

그러나 관구설립요건에 미달되는 당시 한국 성공회의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이에 대한 당시 헌장법규개정위원이었던 이재정 신부의 언급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명칭" 문제, 대한성공회의 영문 명칭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다. 미국식으로 "Episcopal Church" 라고 수도 없고, 일본식의 "Nippon Sei Ko Kai"라고 따를 수도 없었다. "The Anglican Church in Korea"라는 표현은 영국교회의 인상을 풍기기 때문에 또한 쉽지않다. 한국인의 주체성을 살리면서 또한 동시에 세계성공회공동체에 일원으로서의 정체성 또한 담을 있는 명칭이어야 한다. 교구장 선임에 대한 문제에서는 다음과 같은 고민들이 엿보인다.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부산교구를 신설하는 경우, 교구장의 선임 방법이다. 미국식을 따르는 경우, 해당교구에서 일단 선임하여 다른 교구 상임위원회의 인준을 받게 하는 방법과 , 일본식을 따르는 경우 해당교구의 사제단과 평신도단이 각각 선거하여 선임하고, 전체 주교단의 선거를 통하여 결정 짓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경우 부산교구는 불과 5개의 전도구로서 출발할 밖에 없는 실정이며, 교구의 장래가 한국성공회 전체의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있다는 점을 고려할 , 어느 방법을 따르느냐 하는 것이 어려운 문제로 대두된다. 물론 아직 대의원 수로나, 성직자의 수로 보아 전국의회에서 직접 선임할 수도 있겠으나, 경우 (1)해당교구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할 없고 (2) 분할되는 대전교구의 입장을 고려하기가 어려우며 (3)일반 평신도 대의원이 주교후보를 정확히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없다. 결국 이런 요인을 살펴볼 , 우리의 특수 입장을 따라 이번 부산교구신설에 따르는 교구장의 선임방법은 약간 변칙적인 수단으로 한국성공회 입장을 십분 살릴 있는 방안이 새로 구상되어야 할것이다."(15)

 

"약간 변칙적인 수단"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지만, 이후 한국 성공회는 자격요건을 갖추려 노력하면서 관구설립의 절차를 착실하게 추진해 나간다. 결국 캔터베리 대주교가 부산교구 설립 안을 정식으로 승인하고 직접 한국을 방문한다. 1973년의 일이다. 여기에서 당시 승인된 분할안 요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목적: 전도사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세계성공회안에서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행정적으로 재정적 독립을 위한 관구 승격이 필요하다. 이를 위하여 대전교구를 분할하여 교구를 설립하고 서울교구와 합하여 관구를 설립하고자 한다.
  2. 조건: 재정적 독립이 가능하며, 교구분할 세개의 교구운영을 위한 충분한 지도자 양성이 되어 있다.
  3. 계획(인사,재정): 2 교구로 분할후 1 교구는 대전교구장이 1개교구는 방인주교를 세워 관할하며, 교구분할시 교구 성직자 인사문제는 양교구장 결정에 의한다. 대전교구가 갖고있는 성직자 퇴직기금 성직자 보조기금은 교구분할시 양교구 소속 성직자수 비율에 의거 등분한다. 
  4. 절차(구역, 주교선출) 구역(7228 전국의회 결의의거): 서울교구: 서울특별시, 경기도, 강원도, 강원도 일부(북부) / 대전교구: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강원도 일부(남부) 기타지역 / 부산교구: 경상남북도 / 주교선출: 전국의회의 의결을 거쳐서 캔터베리 대주교의 승인을 받은 법규에 의거 선출한다. 새주교 선출은 1973 10월이내에 한다.(16)

 

관구설립의 초석을 놓고, 캔터베리 대주교가 방한한 역사적인 순간에 대한 당시의 감회와  결의를 담은 성공회 신문의 사설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의 상황을 조금은 짐작할 있을 것이다.

 

"....우리로써는 이번 기회가 결코 소홀히해서는 안되는 중대한 분기점이라고 확신한다......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첫째로, 80여년 캔터베리 관하에서 성장해 온 우리의 모습을 램지대주교가 제대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용기와 신앙과 소망을 분명하게 보여 주어야 한다. 대전교구의 분할과, 관구설립이라는 대명제가 우리의 발전을 스스로 꾀해 보려는 하나의 안간힘이며, 신념이라는 것을 나타내야 한다." 

 

 "하나의 안간힘"이란 표현에 당시의 힘겨운 한국 성공회의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 같아 가슴 뭉클하다. 그리고 1973년 3월에는 부산 서면에 가정교회가 설립된다. 이는 부산 전도구(관할 박종기 신부)에서 교세확장의 일환으로 설립되었으며, 한달에 두번씩 미사를 드렸다.(17)

 

이후 1 기간 동안에 걸쳐 마련된 "헌장 법규개정안" 197366일에 전국의회를 통과한다. 그리고 같은 6월에는 호남지방 선교확장을 위한 "전주 교회" 설립된다. 그리고 서울과 대전 주교들은 다양한 해외성공회 형제교회와의 교류를 확대해 나간다. 1973 9월에 이천환 주교는 서울교구 행정기구 개편을 단행한다. 이에 따라 기획, 선교, 인사위원회가 각각 신설되고, 교구행정에 일대 변화가 이뤄진다. 이날 그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 성공회가 명실공히 한국의 성공회로 독립되어 한국의 기독교와 민족 속에 자주적인 교회로서 민족의 운명과 발전에 기여할 있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사실은 단순한 우리 교회만의 일이 아니요, 한국민족 전체의 일이며, 실로 1889 한국에 처음으로 성공회의 주교가 임명된 이래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획기적이며 중대한 시기라고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18)

 

그리고 이듬해 1974년에 노대영 주교가 영국성공회로 전임되면서 이제 한국 성공회는 선교사 시대를 종식하고 새로운 한국 성공회로 거듭날 기회를 맞이한다.

 

이후 같은 315일에 대전교구는 대전 성베네딕트성당에서 교구의회를 개최하고, 노대영 주교의 후임으로 1명을 선출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은 캔터베리 대주교의 지시와 관례에 따른 것이다. 아울러 부산 교구장 주교에는 3명의 후보(김진만, 최철희 신부, 김성수 신부) 등록을 하여 4 2 전국의회에서 선출하게 된다. 그러나 1974 21일에 공포한대한 성공회 헌장 법규 캔터베리에 계류 중이라 3 2 전국 상임위원회는 헌장법규 효력을 당분간 정지하기로 결의한다. 결과 대전교구 주교후보는 서울교구 자체의 소관으로 가능했지만, 부산교구 신설은 전국의회의 주관하에 실시하게 된다. 

 

부산신설교구 주교 선거에 즈음하여 전국의회 의장으로서 이천환 주교는 다음과 같은 교서를 발표한다. “...우리는 이미 서울 자립교구의 경험을 통하여 교구자치의 중요성과 긴요함을 실감했고, 동시에 이에 따른 책임과 사명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외국인에 의한 선교교회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교회의 침체상만 연장하는 것입니다. 발전하고 성장하는 교회는 선교교회 기간을 될수록 속히 종결 시킬 있는 교회입니다. 몸과 옷과 마음은 한국인인데 머리만 서양인이라면 부조리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회의 본방인 자치 문제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 성공회는 타교단에 비하여 자치를 성취한 속도가 느렸다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 교회도 1965년을 기하여 새역사가 시작되었고 지금은 자치화의 역사를 완성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19)

 

여기에서 우리는 이천환 주교의 외국인 선교교회에 대한 입장과 관구설립의 목적이 무엇인지 엿볼 있다. 그가 일관되게 진행해온 복음사역과 교회일치, 그리고 교회자치의 노력이 가시적인 결실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관구설립임을 있다. 주체적인 한국인의 교회가 아니면 진정한 복음화와 교회일치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자치가 없다면 자정또한 어렵다. 그러므로 관구설립은 모든 노력이 결집된 총체적 결실이 것이다. 결국 캔터베리 대주교는 대전교구에 배두환 신부를, 부산교구에는 최철희 신부를 각각 임명하고 61 서울대성당에서 주교 서품식을 거행한다. 선교사시대가 끝나고 한인주교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캔터베리에 계류 중이던 헌장과 법규의 승인이 1974111 자로 이뤄진다. 일부 수정을 요구한 내용은 헌장 2 15 1항의 규정인 교구의 분할과 신설에 관하여는 전국의회 의결에 캔터베리 대주교의 승인을 받아야한다는 규정의 추가이다. 그동안 주교선출 절차 부산교구의 창설과 교구간의 경계등 승인을 받을 일부의 조항만이 발효되었다.(20) 이와 동시에 교구는 교구법규 제정을 추진하게 된다. 그리고 헌장 법규는 12 25 공포된다. 

 

이후 1975 부터는 교구가 교세확장운동과 선교에 치중한다. 아울러 새로운 교구법규제정에 박차를 가해서 서울교구는 14 114조에 달하는 교구법규를 10 교구의회(1975.3.1)에서 승인한다.(21) 부산교구는 1976 44 3 부산교구의회에서 교구법규를 제정 공포한다.(22) 1975 1227 대전교구 임시교구의회에서대전교구 각교회 재정자립 결정한다. 이로서 대전교구도 자립교구를 발전하기 위한 중요한 계기를 만든다.(23) 아울러 197655일에 대전교구 교구법규도 제정된다.(24)

 

교구분할이란 고개를 넘었지만, 이제 세개의 교구는 관구설립에 대한 의견을 조율해야 했다. 관구설립과 관련한 이슈를 처음 제기한 측은 서울교구였다. 서울교구는 1977103 6 전국의회에서선교100주년 정책수립 결의하면서 4교구 후보지를 호남지역으로 결정하고, 100주년 기념사업기구 구성을 위한 준비위원회도 조직하였다. 1983421일에 모인 8 전국의회는선교백주년까지 관구를 설립토록 하며 구체적인 방안은 교무원에서 연구하도록 결의함으로써 관구설립과제가 선교100주년에 이루어야 가장 중대한 사업으로 채택된다. (25)

 

관구승격 논의가 급진전하게 것은 1986 85-6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런시 캔터베리 대주교와 미국성공회 브라우닝 의장주교, 그리고 한국 측의 3교구장(김성수, 배두환, 최철희)과의 회합에서 대한성공회의 관구승격의 필요성의 확인과 이의 추진을 위한 5개국선교협력자문위원회’(미국,영국,호주,카나다,일본) 구성원칙에 합의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에 따라 5개국 선교협력 자문회의는 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하고 다음과 같은 관구승격 문제에 대한 의견을 개진했다. 

  1. 자문회의는 한국의 교구가 대한성공회의 선교계획을 입안하는 일에 상호 협동관계를 유지하도록 최선의 협력을 한다. 
  2. 대한성공회가 독립된 관구를 형성하기 위하여 추진하는 일체의 작업을 한국인의 독자적인 결단과 의지에 맡기도록 한다.
  3. 자문회의는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회원국간의 유기적 관계를 도모한다.

그러나 관구에 대한 교구의 신학적, 선교적 이해의 차가 발생한다. 새로 임명된 대전교구의 윤환주교는 호남교구를 증설한 여건이 자연스럽게 관구설립이 추진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는 일찍이 ACC 4차회의가 제시한 바와 같이 관구가 되려면 4개의 교구가 있어야 한다는 권고사항을 따르는 것이고, 반면 앞에서 언급한선교협력자문회의 교구의 수나 자립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교회가 관구형성을 위한 어떤 의지가 있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선교에 대한 시각의 차이는 분명해서 서울교구가 선교 100주년을 관구설립시기로 설정하면서 하나의 역사적 전환점을 삼으려는 반면에, 대전교구는선교100주년과 관구설립 문제는 별개의 이며, 시급한 것은성직자의 자질 향상과 생활지원이라고 내세웠다. (26)

 

이러한 시각차에도 교구대표 3인과 성공회신학교 대표 교무원장 등으로관구설립준비위원회 구성되었고, 1989 87 관구헌장 초안이 만들어졌다. 초안에는 헌장9 133조와 법규 8 45조로 되어 있는데, 서문과 교리, 전례에 관한 기본적 선언이 다시 작성되었으며, 자치관구의 헌장법규라는 관점에서 현행 헌장법규 전반에 걸쳐 수정되었는데, 현행 헌장에 구애받지 않는 가운데 관구와 교구간의 독립성의 균형을 포용하면서 교구의 대등성을 반영하고, 세계 성공회의 다양한 전형을 연구 참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27)

 

관구설립의 논의는 1987 10 런시 캔터베리 대주교의 방한에 즈음하여 더욱 활기를 띈다. 과거 1973 램지대주교가 방문했을 때와 유사하게 한국 성공회는 다시 한번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서게 된다. 로버트 런시 대주교는선교협력자문회의 개회사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피력한다. “...우리 모두는 대한성공회가 독립적인 성공회 공동체의 관구로서 당연한 지위를 갖는 것을 보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 모두는 대한성공회가 협력 교회를 위하여 독특한 기여를 하기를 기원하면서, 여타 공동체로 부터 참여한 우리들은 지역 선교를 위하여 논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확신을 드리는 바입니다.” (28)그리고 주교원을 중심으로 하는 3 교구의 합의와 협동을 강조했다.

 

19901023-25일까지 있었던 대전교구 성직자 세미나의 분위기는 분명 서울교구와는 달랐다. 물론 대전교구 성직자들은, 원칙적으로 관구설립은 해야 과제임을 동의했지만, 당시의 여러가지 여건으로 볼때 아직은 이르다는 의견들을 개진했다. 서울교구가 대전과 부산 교구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것에 소홀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도 표명했다. 아울러 관구설립 논의가 진행된 이래로 호남교구 설립과 지원 약속이 지지부진함을 비판했다. 그리고  3교구로 분리된 이후 생겨난 교구간의 불균형이 누적된 결과로 인한 교구간의 감정이 비타협과 대화의 단절이라는 극한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여기에 영국선교사들이 구입해 놓은 토지를 매각한 자금으로 건립된 서울교구 건물과 회관에서 나오는 수입을 3 교구가 공정히 분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대로 윤환 주교의 생각과 일치한다.  먼저 이러한 산적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한 후에 관구를 설립하자는 것이 요지이다. (29)

 

이러한 분위기가 그대로 반영이 되어 1990 1월하순과 2월에 걸쳐 각각 개최된 3 교구의회에서 관구헌장법규상정안이 서울과 부산에서는 가결됐지만, 대전교구는 3분의 2 참석자 미달로 인해 다음 임시교구의회에서 논의하기로 했다. (30)

 

여기에서 관구설립에 대한 대한성공회월보에 실린 다양한 목소리를 잠깐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당시 관구설립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와 여론을 확인해 보기 위함이다.

 

“관구형성을 도모하는 진정한 의미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인 선교의 과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자는 것이어야 한다. 현재 한국성공회는 선교가 너무 정체되고 오히려 취약점이 심화되고 있으므로 관구형성을 앞당겨서라도 일치와 연합을 강화하여 교회의 정체성과 선교적 자세를 확립해야 할 것이다.” (정철범 신부_마태_연건동교회 관할사제) 

 

“대한성공회가 하나의 관구가 된다는 것은 대한성공회가 스스로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는 독립국가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된다. 독립국가는 모든 것을 자주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데 그 기쁨이 있는 것이다.” (최명기_마가_서울교구 청년연합회장)  

 

“일부 성직자와 평신도들은 관구설립의 최대장애로 경제적 문제를 거론하고 있으나 언제까지 우리가 외국형제들의 도움을 바램해야 할 것인가를 자문하도록 하자. 오히려 지금이 스스로의 자립의지를 시험할 시기라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곽근수_마가_부산대성당 신자회장) 

 

“관구형성이 인간의 성인됨으로 본다면, 이제는 일관된 신앙양심과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는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습관적으로 모방된 외래신앙이나 예전, 신학 전반에 걸쳐 마땅히 스스로의 모습을 검토해보고, 스스로 재정비하는 분기점을 받아들여야 한다.”(김영철 신부_스테반_상주교회 관할사제) 

 

“선교 2세기를 맞아 대한성공회가 성장하는데 역점을 두고 3개 교구가 공존하며 선교하여야 한다. 나혼자는 살수 없는 것과 같이 내 교회, 내 교구 혼자만 성장할 수 없다. 3개 교구가 서로 양보하면서 세계성공회에 동참하여야 한다.” (최성애_안젤라_부산교구 어머니연합회장) 

 

“그러나 설립시기의 문제가 중요한 것은 아니며, 관구설립을 위한 외형상의 기본적인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지만 관구설립에 관한 논의가 진지해져가는 이때에 관구설립에 관한 필요성을 교인 모두가 공유하여 선교 2세기를 맞이하는 우리 모두의 관심과 참여속에 이루어져야 한다.”(성경식_사무엘_부산교구 청년연합회장) 

 

“우리는 관구설립이 의미하는 자치성과 자율성이 정치적 행정적 자치와 자율이 아니고, 또한 다른 형제교회의 억압과 불의에서의 탈출이 아니고, 보다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에 따른 우리 자신들의 구원과 완성을 상징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며, 나아가 상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정 우리의 구원과 완성이 이루어지는 순간으로 만들어 나아가야 할 것이다.”(김행자_막달라마리아_대전교구 어머니연합회장) 

 

“요즈음 한창 논의되는 ‘관구설립’이라는 문제도 결국 세계성공회에서 자주적이고 독자적 위치를 확보하자는 것을 지향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대한성공회가 관구로 되는 진정한 의미는 이러한 ‘외교적 위치’라는 측면보다는 대한성공회 역사의 내용을 충실히하는 측면이 강조되어야 할 것같다.”(오동균_키프리아_대전교구 청년연합회장) 

 

“100년이라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교회로서 아직도 자립을 못하고 다른 나라 교회의 간섭과 보호를 받는다는 것은 한번 생각해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이것은 곧 우리 성공회 관계자 여러 사람들이 여태껏 고통없이 현상유지에만 안주해 왔음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닐런지.”(문용여_세실리아_서울교구 어머니연합회장) (31)

 

1990510일로 예정됐던 대한성공회 헌장 법규 개정을 위한 전국의회는 3 교구 서울과 부산교구 2 교구 만이 의안을 상정하는 바람에 정회됐다가,  7 12일에 열린 임시전국의회에서 결국은 3개교구 단일안을 가결시켰다. 개정된 헌장법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교단 영문명칭: The Anglican Church of Korea (2) 교구서열의 삭제 (3)북한지역을 공동선교지역으로 (4) 재단법인 조항 중에, 법인재산에서 수입되는 자산은 법인이사회에서 관리한다는 내용을 신설 (5)의장주교의 임기는 2년이며 1회에 한하여 연임할 있다. (6)의장주교 직무권한 조항 중에, 재단법인에 속한 수익사업의 공동관리와 운영에 관한 책임을 진다는 내용 신설 (7)보좌주교제도 등이다.

 

대한성공회100주년이 되는 1990 9월에 관구설립은 되지 못했지만, 헌장과 법규 개정안은 이미 712 임시전국의회 결의 후에 바로 캔터베리관구장에게 보내졌으며, 또한 관구설립에 관한 교구장의 의견을 묻는 캔터베리 대주교의 서한에 교구장들은 개인별로 그리고 공동문서로 관구설립 희망에 대한 긍정적인 답신을 보냈다. 캔터베리 대주교가 제안한 가지 수정안에 대한 실무작업과 의견조정을 남겨놓고 100주년의 해를 넘긴다. 그리고 1992 421일에 개최된 11 전국의회에서 세 교구 단일안으로관구설립 헌장법규개정안 통과된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810 이를 공식 승인한다. 1992 929 대한성공회 헌장과 법규가 공표되며 명실공히대한성공회 관구 설립된 것이다. 그리고 1993219 12 전국의회에서는 초대관구장으로 김성수 주교가 선출된다. 

 


[각주]

1 대한성공회 백년사, 이재정 편저. 대한성공회출판부, 서울, 1990. p.337

2 Ibid. p.244 재인용

3 Ibid. p.265 재인용

4 이천환 주교의 제2회 서울 교구의회 개회 설교 중에서[성공회월보 1966.4. 제5호]

5 [성공회월보 1967.12; 1968.1 제23호]

6 [성공회월보 1968.4. 제26호]

7[성공회월보 1968.5. 제27호]

8[성공회월보 1968.5. 제27호]

9 [성공회월보 1968.5. 제27호]

10[성공회월보 1970.5. 제51호]

11 [성공회월보 1972.3. 제72호] 참조

12 [성공회월보 1972.4.30. 제73호] 참조

13 [성공회월보 1972. 4.30. 제73호] 교구분할의 문제점_사설 참조

14 [성공회월보 1972. 5.30. 제74호] 캔터베리에 공한 보내_부산교구 신설

15 [성공회신문 1972.8.30. 제77호] 헌장 및 법규개정의 필요성과 문제점_이재정(부제, 헌장법규개정위원)

16 [성공회신문 1973. 2. 28. 제79호] 참조

17 [성공회보 1973.3.24. 제80호]

18 [성공회신문 1973.9.30. 제85호] 

19 [성공회보 1974.3.25. 제91호]

20 [성공회보 1974.11.30. 제99호]

21 [성공회보 1974.3.29. 제103호]

22 [성공회보 1976.4.18. 제116호]

23 [성공회보 1975.12.25. 제112호]

24 [성공회보 1976. 5.20. 제117호]

25 대한성공회 백년사, 이재정 편저. 대한성공회출판부, 서울, 1990. p.338

26 Ibid. pp.339-340

27 [대한성공회월보 1989.8.27. 제276호]

28 [성공회보 1987.10.31. 제254호]

29 [대한성공회월보 1990.1.21. 제281호]

30 [대한성공회월보 1990.2.25. 제282호]

31 [대한성공회월보 1990.4.29. 제284호]

 

 

 

[참고자료]

성공회신문 1965~1992

이재정 편저, 대한성공회 백년사. 대한성공회출판부, 서울

정철범, 대한성공회 독립관구 승격 역사. 기독교사상, 37(6), 257-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