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 두베의 제국주의적 텍스트 비판 방법에 따른 성서 다시 읽기[1]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2]에 나타난
제국주의적 문학적-수사적 표현에 대한 비판
성서 텍스트들은 기독교 신자들이 비 기독교 신자들의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취하도록 권한을 부여해 왔다. - 무사 W. 두베[3]
[들어가는 말]
무사 두베는 제국주의 문학적-수사적 구축에 대한 비판의 질문들을 던지며, 매리 루이스 프랏이 명명한 “반정복”의 패턴들과 “접촉 지대”의 패턴들을 적용하여 성서를 포함한 문학적 작품들 안에 나타난 제국주의적 문학적-수사적 함의를 드러내 보였다. 출애굽기와 마태복음 다시 읽기를 통해 보여준 그녀의 날카로운 제국주의 문학적-수사적 구축에 대한 비판은 매우 급진적이어서 내 개인적으로 처음에 너무 당황했지만, 식민지 지배 하의 상황에서 피식민자들이 그와 같은 텍스트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주의 깊게 생각해 볼 경우 어느 정도 납득을 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전통적인 해석을 뒤집어엎는 새로운 해석은 텍스트를 접하는 현재의 자리에서, 그리고 현재의 상황 하에서 텍스트들이 재해석 또는 달리 해석되어야 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식민지 상황에 처한 피식민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텍스트들이 보여주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전통적 위치 선정은 분명 다르게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구약성서해석에서 피정복자, 피지배자의 위치에 놓여 있던 이스라엘의 입장은 무사 두베의 해석에 의해 완전히 그 반대가 된다. 평등과 비권위적 상징의 예수에 대한 이미지도 그의 해석에 의해 완전히 다른 이미지로 구축된다. 그러한 해석을 수용하느냐 수용하지 않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적한 것처럼 이미 이 지구촌에서 전개되고있는 제국주의의 행보는 범세계적이어서 아무도 그러한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 밖에 남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은 제국주의를 그대로 놔둘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비판하고 대안을 찾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비판과 대안을 찾는 쪽을 선택한다면, 무사 두베와 같이 제국주의와 문화적 텍스트들 사이의 연관성을 밝히는 일은 분명 우리에게 새로운 방향성과 비전을 제시해 주는 것일 수 있다.
나는 이 글에서 무사 두베가 제국주의적 텍스트들을 분석하기 위해 던지는 질문들에 집중하며 마태복음의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와 몇몇 비유들에 그 방법을 적용해보고자 한다. 어떻게 그 비유들이 그 동안의 전통적 해석과 달리 제국주의적 문학적-수사적 전략을 구축하고 있는지 나름대로 밝혀 보고싶다. 지면의 한계 때문에 다양한 비유들을 검토하지 못하고 주로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에 집중하며, 이와 관련해서 다른 몇몇의 비유들은 부차적으로 언급하며 넘어가고자 한다.
1. 이 비유가 그 시대의 정치적 제국주의에 대해서 한 명백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
2. 이 비유가 멀리 떨어진 사람들의 거주하는 땅으로의 여행을 조장하는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스스로 그것을 정당화하는가?
3. 이 비유들이 차이를 어떻게 구축하는가: 대화와 서로 간의 상호의존이 있는가, 아니면 모든 이국적인 것에 대한 저주와 대치가 있는가?
4. 이 비유들은 예속과 지배의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성적인 표현들을 사용하는가?[4]
이러한 질문들은 무사 두베가 제국주의적 텍스트들을 분석하는데 사용하는 질문들이다. 나 또한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면서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두 번째 질문은 식민주의자들이 “여행하고, 침략하고, 소유할 권리”를 보장하는 “반정복 이데올로기” 전략과 관계하고, 세 번째 질문은 지리적 역사적으로 떨어진 민족간의 상호 조우하는 “접촉지대”와 관련한다. 먼저 이 비유를 설명하는 전통적 해석을 간단히 정리하고 그 후에 이 비유가 식민주의를 어떻게 합리화 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1.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에 대한 전통적 해석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는 마태복음(21:33~46)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12: 1~12)과 누가복음(20: 9~19)에서도 언급되어있다. 각 복음서에 나타난 비유의 비교연구는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섬으로 여기에서는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설명할 것이다. 각 복음서 간에 이 비유에 대한 진술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제국주의적 문학적 수사를 찾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먼저, 벵겔의 [신약주석][5]에 의하면, 이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비유”라고 말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포도원은 구약에서도 종종 언급되듯이 “이스라엘”을 뜻하고, “울타리”는 이스라엘을 이방인들로부터 보호하는 “율법”을, “포도즙을 짜는 확”은 “예루살렘”을, “망대”는 “성전” 등을 각각 상징한다고 한다. 또 계속해서, “종들”은 하느님의 특별한 “사역자들”로, 그리고 “농부들”은 그냥 “보통의 농부들”로 설명했다. 이러한 설정에 의하면 주인은 “하느님”이라 할 수 있고, 그가 보낸 “종들”은 “선지자들”이 된다. 결국 하느님의 선지자들을 죽이며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심판에 대한 비유로 벵겔은 결론 짓는다.
에드워드 슈바이처의 [국제성서주석][6]에 의하면, 예언자들의 죽임 당함과 예수의 죽음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 “종들”과 “아들”에 대한 핍박은 과거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에 대한 핍박과 앞으로 일어날 예수의 죽으심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이 비유에서 시편 1편 3절[7]을 도입하여 소출을 바치지 않는 농부들의 부도덕성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43절에서 그 소출을 “열매”의 정당성과 연결함으로 그 농부들이 당연히 바쳐야 할 소출을 바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여 그 농부들의 부도덕성과 배은망덕함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은 정당화된다. 이와 같이 슈바이처도 이 비유를 철저히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를 상정하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F.B.마이어의 [마이어 주석][8]에서는 이 비유를 이사야서 5장 1절~7절과 비교한다. 이에 따르면 “농부들”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되고,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종들”은 “선지자들”을, “아들”은 그러므로 “메시아”를 각각 상징한다. 이러한 설정은 앞의 주석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마이클 그린의 [마태복음 강해][9]에서도 마이어의 주석과 비유적 설정은 동일하게 나타난다. 다만 마이클 그린은 그 농부들에게 “위탁에 대한 책임뿐 아니라 자유까지 주어졌다”는 점을 강조하여 그 “농부들”이 자유를 누린 만큼 그에 대한 책임도 반드시 져야 한다는 점을 환기시킴으로 그들의 최후의 날의 심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그리고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강도를 막는 망대”와 “야생동물로부터 보호하는 울타리”를 만들어주었다는 점을 언급하여 하느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배려를 상징한다고 설명한다.
Abingdon-Cokesbury출판사에서 펴낸 [The Interpreter’s Bible][10]에서도 앞의 [마이어 주석]과 비슷한 설정을 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또한 정양모의 [마태복음이야기][11]에서는 마태의 삽입구라고 추정되는 몇몇 구절을 생략하고 이 비유에서 예수 자신의 “극적 죽음을 예감하고 예고하셨다”는 점을 밝힌다. 그러나 그 또한 포도원 주인과 종들, 그리고 농부들에 대한 비유의 해석은 다른 주석서와 별 차이가 없었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마태복음 주석서들이 이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설명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비유에서 유일하고 보편적인 해석을 찾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비유가 예수의 실제 말씀이었는가, 아니면 후대에 교회의 창작인가 하는 질문이나, 이 말씀이 메시아와 도래할 하느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인가에 대한 답변을 찾는 것 보다, 이러한 성서 본문이 내포 독자들에게 그 성서 본문이 내포하는 “지배와 피지배”의 설정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일 것이다. 이러한 문학적-수사적 설정은 자연스럽게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데 사용될 수 있음을 우리는 너무 쉽게 간과한다. 이 비유의 배경 설정과 전개는 과히 폭력적이어서 다른 부분에서, 특히 산상수훈에서 보여지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너무나 상반된다. 이제 이러한 점들을 다음에 살펴볼 것이다.
2.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에 나타난 제국주의적 문학적-수사적 전략들
내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 같이 이 비유가 지닌 지배자의 폭력성에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전통적 해석에서 이 글이 메시아와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한 것으로 치부하여 사실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와 폭력성이 자연스럽게 정당화를 받는 듯 싶지만, 이 글을 피지배자의 위치에서, 즉 식민지 지배를 받는 피식민자의 위치에서 다시 읽는 다면 결코 전통적 해석 만으로 충분히 해석될 수 없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폭력성을 드러내고 지배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이 비유는 “보복하지 말고”(마5:38~42), “원수를 사랑하라”(마5:43~48)는 산상수훈의 예수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다. 물론 이 비폭력적 표현들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지 않고, 간디가 말한 바 비폭력적 저항과 관련될 경우에 한해서만 그렇다는 것이다(산상수훈의 비폭력적 발언에서 감지되는 제국주의적 문학적-수사적 전략은 이 글의 한계상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나는 이 글에서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중심으로 “혼인 잔치의 비유”(마22:1~14), “열 처녀의 비유”(마25:1~13) 등을 언급하고자 하는데, 이들 비유 모두, 당시의 지배와 피지배의 사회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상호 연관성을 가지며, 그리고 그러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정당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지배의 단념”을 말한 로핑크의 평등하고 비권위적인 예수에 대한 해석과도 정면으로 대치된다.[12] 평등한 공동체를 지향했던 예수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설정한 비유를 얘기한 까닭이 무엇일까? 그것은 정말 예수의 발언이었는가 아니면 후대에 마태저자나 교회의 창작일까? 이러한 역사적, 문헌적 해석학의 질문에 답하기 보다 이러한 비유들이 문학적 수사로써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지적하고 싶다. 이 비유에서 보여지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설정은 무사 두베의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즉, 이 비유는 분명히 제국적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고 이를 정당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비유가 외국의 세력들에게 “여행하며, 침략하고, 소유할 권리”를 정당화하고 있는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설명한 전통적 해석에 반해서 다음과 같은 새로운 비유의 해석이 성립될 수 있다. “어떤 집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식민주의자 또는 제국주의자”로, “포도밭”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식민지”로, 주인의 “종”들은 “선지자”들이 아닌 “식민지를 관리하는 자”로, 주인의 “아들”은 “메시야”가 아닌 “식민지 관료”로, “농부”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아니라 “피식민자”로 해석할 경우 제국주의적 문화적-수사적 전략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나 씩 살펴보자.
이 비유에서 포도원의 주인은 분명 타지 사람임에 틀림없다. “멀리 떠났다”, “보냈다” 라는 표현은 이 주인이 본토인이 아니라 외부인임을 상징한다. 그가 자신의 고향이 아닌 타지에다가 어떻게 포도원을 일궜는지에 대해서는 이 비유는 ‘침묵’한다. 그가 강제로 빼앗은 것인지 아니면 돈으로 정당하게 산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는 자신의 본거지가 아닌 타지에 포도원을 만들고 포도를 심고,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 그것을 “세로 주고” 멀리 떠났다. 아마도 자신의 본거지로 간 것 같다. 세로 주었다는 것은 본토에 있는 자들을 소작농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그 주인이 그 포도원의 수확을 얻을 정당성을 확보한다. 그러나 그 주인이 정당한 절차에 의해 그 포도원을 산 것이라면 문제가 다르겠지만, 만약 그 포도원 주인이 정당한 절차가 아닌 폭력적이거나 불법적인 방법으로 그 곳을 획득한 것이라면 이 이야기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무사 두베가 지적한 것처럼 “그 땅으로 여행하는 것”은 그가 그 땅을 “세로 주고” 떠났으므로 그 수확을 위해 다시 여행해서 돌아오는 것은 정당화된다. 그 땅으로의 여행은 그 주인의 종들이나 아들이 대신한다. 그 포도원이 자신의 것이기에 그는 그 소출을 받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 것이고, 그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정당화된다. 그러나 소작농이나 피식민자의 입장에서도 그것이 정당화 될 수 있을까? 사실 그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을 만든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그 땅에서 수확을 위해 수고하고 고생한 것은 토착민들이었다. 그는 그 포도원을 책임지고 관리할 자신의 사람조차 두지 않고 “추수할 때”가 되어서만 자신의 사람들을 보냈다. 그것은 소작농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함이었는가? 아니다. 그가 소작농들을 그렇게 인권적이고 평등하게 대우했다면 “그 악한 자들을 가차없이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 비유에서는 그 종들과 아들이 그 포도원에 와서 어떤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어 안타깝다. 그렇지만 그 종들과 아들은 수고한 것도 없이 그 수확물, 즉 주인의 몫을 가져가기 위해서 그 땅으로 여행했다. 그 종들과 아들이 의로웠는지 아니면 그들이 소작농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여기서도 마태저자는 ‘침묵’ 또는 ‘생략’으로 그들의 정체성을 감춰버린다. 이에 반해, 이 비유는 토착민의 폭력성 만을 더욱 강조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렇게 함으로 소작농들의 잘못을 부각시켜 그 주인으로 하여금 그 땅을 침략하고 그 소유 전부를 빼앗을 정당한 권리를 가지게 한다. 심지어 그 소작농들은 그 주인의 아들조차도 죽이는 파렴치한으로 그려진다. 이 얼마나 나쁜 사람들인가?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은 분명 무사 두베의 세 번째 질문과 일치하며 식민지 사람들과 제국주의자들 간의 “접촉지대”를 형성한다. 피식민자들 즉 소작농들의 폭력성과 부도덕성이 부각됨으로 그들은 파렴치하고 멸망 받을 존재로 그려진다. 반면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묘사는 ‘침묵’ 또는 ‘생략’됨으로 그들의 도덕성은 철저히 은막 속에 보호 받는다. 오직 그들은 포도원의 정당한 소유권에 의해 권리가 보장 받는 듯하다. 결과적으로 이 비유는 소작농들 즉 피식민자들의 부도덕성과 비인간성을 강조함으로 그들에 대한 처벌과 정복을 은연중에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 포도원의 주인이 불법적으로 그 포도원을 장악한 것이라면, 만약 그가 먼 땅으로 여행해서 침략하고 소유하는 제국주의자였다면, 그 소작농들의 행동은 다르게 해석될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본 것 같이 이 비유에는 포도원 주인과 그 종들 그리고 아들의 행위는 완전히 ‘생략’되어 내포 독자들에게 전혀 알려주는 것이 없다. 그들의 정당성은 ‘침묵’에 의해 이 비유 속에서 이미 전제된다. 오직 포도원 소작농의 악함만 강조되었다. 만약 포도원 소작농들이 피식민자들이라면 그들의 행동은 자신들의 자치권과 재산권을 지키기 위한 행동으로 정당화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최소한 그 주인의 나라로 주인을 멸하기 위해 여행하지는 않았다. 분명한 것은 그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게으르지 않았다. 그들이 일을 하지 않고 게을렀다는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소작농이지만 최선을 다해서 일을 했고 추수의 기쁨도 누렸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인은 자신의 몫을 위해 자신의 사람들을 파견한 것이다. 그러나 그 동안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더니 추수 때가 되어서 갑자기 찾아온 포도원 주인의 종들이 그들의 노력을 평가 절하하고 그들의 수확을 달라고 했을 때 그 소작농들이 느꼈을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보통 소작농들은 매우 적은 분량의 몫을 받을 뿐이기 때문이다. 자연 재해가 있어 흉년이 든 해에는 자신들의 몫 뿐만 아니라 주인에게 오히려 빚을 지기도 다반사였다. 태풍과 가뭄을 이겨내며 애써 가꾼 포도를 정당한 보수도 없이 빼앗겨야 하는 피지배자들의 심정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행동은 아마도 당연한 자신들의 자치권 행사였을 것이다. 자기의 땅을 지키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자신의 땅의 수확물을 지키는 것이 그들에게는 최대의 도덕이요 가치였을 것이다. 그러한 소작농들의 바람은 폭력적인 포도원 주인에 의해 가차없이 짓밟혔다. 늘 가진 자들은 가지지 않은 자들을 업신여기고 핍박하기 마련이다.
이와는 반대로 ,이미 언급한 것 같이, 식민주의자들의 이미지는 이 비유에서 ‘침묵’과 ‘생략’으로 내포 독자들에게 감춰진다.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포도원을 소유하게 되었는지 이 비유는 ‘침묵’한다. 그리고 그 종들과 아들이 어떤 방법과 매너로 소작농들을 대했는지도 ‘생략’되었다. 소작농들의 이미지는 “이 사람은 상속자다. 그를 죽이고, 그의 유산을 우리가 차지하자”라는 말로 매우 부도덕하고 폭력적인 이미지로 드러난 반면 주인과 종들 그리고 아들에 대한 이미지는 어떠한 설명도 ‘생략’함으로 말미암아 교묘하게 식민주의자들의 정체성을 숨긴다. 그렇게 함으로 식민주의자들과 피식민주의자들 간의 이미지의 대비를 통해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전략을 구축하고 자신들의 침략의 도덕적 정당성을 암암리에 획득하는 것이다. 파렴치한 피식민자들은 멸망 당하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내포 독자들로 하여금 수긍하게 만든다.
이와 같이 이 비유는 암암리에 제국주의자들로 하여금 다른 나라로 “여행하여, 침략하고, 소유할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내포 독자는 그러한 제국주의의 의도에 자연스럽게 공모한다. 식민주의자들의 다른 나라의 땅의 침탈과 경제적인 수탈을 지켜 만 볼 수 없는 피식민자들의 최소한의 저항은 늘 식민주의자들의 강력한 폭력성 앞에 철저히 제압되곤 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제국주의자와 같이 자신들의 경제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정당화 받는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포도원의 주인이 되었는지에 대한 언급이나, 그 종들과 아들이 어떻게 그 소작농들을 대우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생략하는 것은 제국주의가 다른 나라에 대한 경제 수탈의 전략을 교묘히 감추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3.여성의 젠더적 차별에 대한 제국주의적 문학적 수사적 전략들과 잔치의 비유들
무사 두베의 네 번째 질문은 제국주의의 문학적-수사적 전략에서 어떻게 젠더적 차별이 사용되는가 하는 점인데, 이 비유에서는, 재미있게도, 여성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이 비유의 저자의 의도적 ‘생략’이든 아니면 이 비유와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이든, 분명한 것은 이러한 제국주의적 문학적-수사적 비유에서 교묘하게 여성의 존재를 취급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는 포도원의 주인과 종들 그리고 아들의 행위에 대한 언급을 ‘생략’함으로 얻었던 효과와 비슷하게 여성의 존재를 ‘생략’함으로 여성의 젠더적 위치를 격하시키는 효과를 얻고 있다. 여성은 이러한 식민주의와 피식민주의 담론에서 철저히 소외된다. 그 “농부들”이란 표현 속에 분명히 남성과 여성이 동시에 존재하지만 여기서는 총체적으로 “농부들”이란 표현을 사용함으로 여성과 어린아이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은 철저히 숨겨진다. 식민주의자들은 피식민자들을 상대할 때 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들, 부자와 가난한 자 등과 같은 구별보다는 “피식민자”라는 단일한 묶음으로 그 식민사회의 다양성을 애써 단순화시킨다. 그들에게는 그러한 구별보다 그 모두를 ‘피지배자’의 위치에 자리하게 하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들은 그대로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도 두드러진다.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열어 사람들을 초대했다가 거절 당하자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만나는 대로 다 데려왔다”. 이러한 방법은 식민지 사람들을 다루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그들을 모아 놓았을 때 발생할 그 식민지의 문화적 사회적 혼란은 식민주의자들에게는 관심 밖의 문제이다. 그러나 식민지의 문화와 전통을 배려한다면 그와 같은 행동은 삼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주인은 그러한 배려가 전혀 없다. 물론 주인이 처음에 구별된 사람들을 청한 것은 사실이다. 아마도 그 초대 받은 사람들은 식민지의 엘리트 즉 지배 계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들이 왜 거절했는지 이 비유에서는 사적인 이유 만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라 누가 감히 자신의 임금이 초대한 ‘영광스러운 잔치’에 참석하지 않을 자가 있는가? 그렇게 자신의 나라의 임금을 두려워하지 않은 백성이 있을 수 있는가? 군주제 사회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왕의 식탁에 부름을 받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늘날 대통령의 초대에 응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그 대통령이 독재자나 폭군일 경우는 그 저항의 일환으로 불참을 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 비유에서 그 임금의 정체성에 대한 언급이 생략됨으로 자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그 임금이 본토의 임금이 아니라 타국에 의해 임명된 허수아비 임금이었던가, 아니면 폭군이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 임금은 제국주의와 관련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 비유에서도
식민지로의 여행은 임금의 종을 “보냄”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식민주의자들과
피식민자들의 “접촉지대”는 두 부류의 갈등으로 첨예화된다. 여기서
피식민자들에 대한 이미지는 앞에서 본 비유와 마찬가지로 매우 폭력적으로 묘사된다. 결혼 잔치에 초대를
받고도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전혀 응하지 않는 못된 사람의 이미지가 그들에게 부여된다. 그들의 만행은
의도적으로 과장되는데 “임금이 보낸 종들을 붙잡아서, 모욕하고 죽였다”라고 묘사된다. 결혼에 초대하면 안가면 그만이지 그들을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멸망 받아 마땅한 존재로 취급된다. 임금은 자신의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도시를 불살라 버렸다”(만약 그 나라가 임금 자신의 나라였다면 그 도시를 불살라버릴 정도의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자신의 영토에 그와 같은 짓을 하겠는가? 불참자들을 찾아 벌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여기서 임금의 폭력성, 즉 식민주의자의
폭력성은 자연스럽게 정당화된다. 왜냐하면 피식민자들은 호의를 무시한 부도덕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 후 임금은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 관계없이 마구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그리고 그들 중에 예복을 입지 않았다 하여 그를 “손발을 묶어서, 바깥 어두운 데로 내던져”버린다. “최후 심판”과 “구원의 때”[13]를
상징하는 전통적 해석에서 이러한 심판의 비유가 정당화될 지 모르지만 이러한 문학적-수사는 충분히 내포독자로
하여금 그러한 폭력성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결국 이러한 문학적-수사적 방법에 의해 교묘하게 제국주의적 폭력은 그 비유 속에 은폐된다. 제국주의자의
식민지적 ‘잔치’에 불참하는 자들은 벌을 받는 다는 해석이 여기서 정당성을 얻는다. 식민주의자들에게
이러한 비유는 자신들의 식민주의 ‘잔치’를 정당화하며, 피식민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정책에 순종할 것을 암암리에 강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신부’에
대한 언급이나 여성들에 대한 언급을 생략함으로 자연스럽게 여성의 존재를 무시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길게 언급하지 않겠지만 그 원리는 앞의 비유에 대한 젠더적 설명과 거의 일치한다. 제국주의자들이 여성의
젠더적 위치를 어떻게 교묘하게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데 사용하는지는 지금까지 언급한 두 비유보다 다음의 “열 처녀의 비유”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전통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14]와 관련된 것으로 알려진 “열 처녀의 비유”[15]는 제국주의자와 피식민지 사람들 간의 ‘접촉지대’를 설정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결혼 풍속[16]을 담고 있는 이 비유는 적절하게 피식민자들의 이미지를 왜곡하는데 사용된다. 무사 두베가 설명한 ‘라헬’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이 비유에서 나타나는 여성들의 이미지는 전적으로 피식민자들의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식민지의 사람들은 신랑을 간절히 기다리는 “처녀”로 묘사되고, 식민주의자들은 언제 올지 모르는 “신랑”으로 묘사함으로, 식민주의자와 피식민주의자 간의 접촉지대를 교묘하게 형성한다. 그렇게 함으로 식민주의자들의 식민지 침략과 찬탈은 정당화 된다. 왜냐하면 피식민자들은 밤을 지새우며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와 같이 자신들을 지배해줄 지배자들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식민주의자들에 대한 영접을 제대로 하지 못한 ‘미련한 처녀들’은 버림을 받는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자신의 친구이자 자신의 민족에게 조금의 동정도 없다. 그들은 ‘미련한 처녀들’의 기름을 준비 못함을 탓하며 그들에게 기름을 나누어주지 않는다. 식민주의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이기주의를 엿보는 대목이다. 이는 정확하게 마태복음 5장 40절의 말씀에 반한다.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라고 했던 예수의 말씀을 상기한다면, 이 비유에서 칭찬을 받은 ‘슬기로운 처녀들’의 행위는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이를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연결하여 종말의 긴박성을 표현한다고 하지만, 이 비유의 표현은 분명 제국주의적 문학적-수사적 구축을 보여준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이미지는 결국 제국주의자를 간절히 기다리는 식민지 사람들과 상응하며 자연스럽게 제국주의 지배를 정당화 시키는 문학적 수사에 다름 아니다. 제국주의는 문학적-수사적 전략으로 여성들의 수동적 이미지를 식민지 사람들에게 부여함으로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해왔다.
[나오는 말]
이와 같이 앞에 살펴본 비유들에서 분명 제국주의의 ‘반정복 이데올로기’가 정당화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비유에서 나타나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제국과 식민지의 이미지를 형성한다. 식민지의 사람들은 늘 부도덕하고 배은망덕하고 폭력적으로 나타난다. 반면 제국주의자들의 정체성은 감추어짐으로 자연스럽게 도덕적 정당성을 암시한다. 젠더적 상황을 그대로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와 연결하여 제국주의를 간절히 기다리는 이미지로 식민지 사람들을 그림으로써 자신들의 정당성을 보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포 독자들은 이 비유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제국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하게 생각하게 되고, 제국주의자 자신들 또한 식민지를 지배할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으로 여긴다.
이 비유에 대한 전통적인 방식의 해석은 어디까지나 “지배와 피지배”의 상황을 전제할 때 성립된다. 그것들은 너무나 그러한 설정들을 당연한 것으로 삼으므로 아무도 전혀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메시아의 도래와 하느님의 최후의 심판을 가정할 경우 분명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설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메시아와 선지자들을 무시한 자들은 ‘악인들’로서 벌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고 영접한 자들은 ‘의인들’로서 상을 받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있다. 이러한 설정은 자연스럽게 내포 독자로 하여금 선과 악의 이분법, 지배와 피지배 그리고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수용하게 만든다. 예수의 다른 가르침들과 달리 이러한 비유들이 가지는 폭력성에 전통적 해석들은 문제제기를 전혀 하지 않는다. 이 비유들이 정말 예수가 한 것일까라는 의문 조차도 가지지 못할 정도로 ‘종말론적’ 관점은 그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내포 독자들에게 암암리에 정당화된다. 왜냐하면 종말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판은 늘 폭력적이다. 제국주의의 문학적-수사적 전략은 이러한 애매모호한 비유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지배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비유는 더욱 정당성을 가지며, 피지배자의 위치에서는 ‘종말론적’ 세계관에 의해 또 다시 자신들을 억압하는 이 비유들을 그대로 수용하게 만든다. 지배자이든, 피지배자이든 관계 없이 내포 독자들은 이 비유를 통해 자연스럽게 지배와 피지배를 제국과 식민지의 관계성 속에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사 두베가 지적하는 것 같이 성서를 새로운 관점, 즉 피지배자나 피식민자의 위치에서 재해석해야 할 필요가 여기서 대두된다. 전통적 해석이 묵인하는 식민지 지배의 문학적 수사들을 철저히 벌거벗겨서 피지배자 또는 피식민자들의 관점과 문화적 사회적 맥락에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너무나 쉽게 폭력적인 성서 해석에 빠질 수 있는 우리의 오류를 경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Musa W. Dube, Postcolocial Feminist Interpretation of the Bible, Chalice Press, St.Louis, Missouri, 2000, p.p.47~95 참조
[2] 마 21: 33~46, 막 12:1~12, 눅 20: 9~19 참조
[3] Musa W. Dube, Postcolocial Feminist Interpretation of the Bible, Chalice Press, St.Louis, Missouri, 2000, p.17
[4] Ibid., p.57
[5] J.A.벵겔, 벵겔 신약주석,고영민 역, 도서출판 로고스, 서울, 1992
[6] 에드워드 슈바이처, 국제성서주석, 한국신학연구소, 서울, 1986
[7]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
[8] F.B.마이어, 마이어주석, 도서출판 엠마오, 서울, 1995
[9] 마이클 그린, 마태복음 강해, 김장복 역, IVP, 서울, 2005
[10] The Interpreter’s Bible vol.7, Abingdon-Cokesbury Press, New York, 1951
[11] 정양모, 마태오복음이야기, 성서와 함께, 서울, 1999
[12] G.로핑크,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분도출판사, 경북 왜관, 1996, p.p.195~205 참조
[13] 에드워드 슈바이처, 국제성서주석, 한국신학연구소, 서울, 1986, p.p. 438~445
[14] Ibid., p.p. 488~493
[15] 마 25:1~13
[16] 베들레헴 지방에서는 세기가 바뀔 무렵에도 야간 결혼 행렬 시에 횃불, 즉 올리브 기름에 적신 헝겊으로 감싼 막대기를 사용하여 그 횃불이 꺼질 때까지 처녀들은 춤을 추었다. 이 비유에 사용된 말은 거의 언제나 횃불을 의미한다. (에드워드 슈바이처, 국제성서주석, 한국신학연구소, 서울, 1986, p.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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