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신학이야기

예술과 기독교

James Chae 2013. 3. 11. 22:44

 

 

김문환 편역, 20세기 기독교와 예술 (대한기독교서회,1986,서울)를 읽고

 

 

 

예술과 기독교

 

채야고보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미적 본질을 묻는 질문과 구별되어야 한다. 예술의 존재론적 질문은 와 달리 구체적인 형식과 가시적인 존재양식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미술, 음악, 문학 등을 예술이란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러나 예술과 기독교를 함께 논할 경우 우리는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보편성, 절대 가치와 같은 형이상학이 사라진 오늘날의 예술과 그러한 가치를 믿고 있는 기독교를 하나로 묶는 작업은 과거에는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현대에서는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가능한 범위에서 이러한 예술의 본질을 예술, 기독교 예술, 그리고 교회 예술이란 차원에서 설명해보고자 한다. 김문환이 편역한 20세기 기독교와 예술에서 1~4장에 언급된 리처드 H. 리터, 레오 톨스토이, 클라이브 벨, W. 딕슨2세 등의 글을 중심으로 이를 간단히 정리 비판해본다.

 

 

1. 예술이란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가?

이들 네 명의 저자가 말하는 예술의 핵심에는 인간의 마음이 자리한다. 리터는 예술을 인간 마음의 표현이라 했고, 톨스토이는 타자와 교감하는 예술을 진정한 예술이라 했으며, 벨은 좋은 마음의 상태, 그리고 마지막으로 딕슨은 감수성에 대해 언급했다.

리터의 예술에 대한 정의는(교회 예술에 대한 그의 언급을 제외하고는) 너무 단순하고 진부하여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말한 예술의 감염성은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톨스토이는 진정한 예술사이비 예술이 있으며 이를 구별하는 잣대가 예술의 감염성이라고 말한다. 예술의 주요한 특징이자 위대한 매력은 바로 분리와 고립으로부터 인간의 개성을 해방시키고 남들과 일체가 되게 하는 데 있다(21)라고 그는 설명한다. 톨스토이는 계속해서 진정한 예술에는 종교적 감정모든 사람을 하나의 공통된 감정으로 묶는 특징(43)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예술이 모든 인간의 감정을 하나로 묶는 그러한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가? 그렇게 예술을 이분법적으로 쉽게 정의할 수 있는가? 톨스토이의 말에는 당연히 그가 살았던 시대성이 반영되어있다. 그 자신이 사실주의(realism) 범주의 작가임을 고려할 때 그가 정의하는 예술은, 미술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인상주의 이전의 밀레나 꾸르베 같은 자연주의사실주의, 즉 모더니즘 이전에 머물러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민중의 삶이 담긴 진솔한 예술을 보편적인 예술로 정의한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정의는 후기 인상주의를 필두로 미술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기 시작한다. 예술이 수단을 넘어 예술 자체를 목적으로 하며 더 나아가 예술의 목적조차도 해체해 버리는 포스트 모더니즘 앞에 그의 논의는 이제 설자리를 잃는다.

 

후기 인상주의의 옹호자였던 벨의 주장을 살펴보면 톨스토이의 언급과 상반되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 상태를 사랑 또는 생각 안에 고립시키라. 이렇게 하는 것이 그것이 지닌 모든 가치를 잃게 하도록 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그것이 지닌 가치가 감소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분명히 다른 사람 속에 좋은 마음 상태를 산출해 내는 수단으로서의 그 가치를 상실한다. 그러나 어떤 가치, 즉 내적인 가치는 존속한다. 사랑이나 생각에 사로잡힌 한 사람의 마음 상태는 그 자체로서 충분하다. 우리는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이것은 어떤 유익한 목적에 봉사하는가? 누구에게 유익한가? 그리고 어떻게? 우리는 직접적으로,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이것은 좋다.(52)

 

사랑이나 생각에 사로잡힌 한 사람의 마음 상태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라는 그의 발언은 매우 모더니스트답다. 후기인상주의 작가들을 옹호했던 그는 작가 개인의 감정과 표현을 존중한다. 그러나 그도 여전히 모더니즘의 한계에 머문다. 그는 아직도 예술의 본질을 그 목적과 수단에서 찾으며 예술의 정의가 가능함을 자신 있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마음 상태만이 목적으로서 좋은 것이고 예술은 (그러한) 좋은 마음 상태를 위한 수단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오늘날 어느 누가 이러한 방법으로 예술을 정의하는가? 앞에 언급한 저자들의 주장은 아직도 예술이 재현할 무엇인가가 있다는 신념 위에 있다. 그들은 예술 표현이 실재 세계와 반드시 연관성을 갖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뒤샹이 변기를 작품으로 사용하고, 앤디 워홀이 마를린 먼로와 켐벨 통조림의 이미지를 작품에 도용하면서 더 이상 예술은 무언가의 재현으로부터 이별을 고한다. 더 이상 예술은 실재 세계의 재현이 아니다. 워홀이 표현하고자 한 것은 단순히 예쁜 여배우나 켐벨 통조림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그는 무한 복제의 예술로서의 가능성과 예술이 예술 자체의 목적이 될 수 있음을 증거 한 것이다. 대상과 재현으로부터 해방된 예술은 더 이상 실재와 연결성을 갖지 않으며 작품 자체의 실재성만 갖는다. 대상의 모방은 그 대상과 연결이 끊어짐으로 실재가 사라진 완전한 시뮬라크르가 된다. 시뮬라크르는 이제 실재 대상이 없는 그 자체로 실재가 되는 것이다.

 

어디 예술뿐이겠는가? 오늘날의 전쟁과 핵 위기, 테러에 대한 위협 등도 실제로 그러한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에 실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니터나 언론매체에서 전해주는 정보 자체가 그 사건을 대신함으로 실재가 된다. 현대사회는 그러한 위기의 발생을 실제로 해결하기 보다 가상 공포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 저지 시스템의 구축을 더 신뢰한다. 실제 위기보다 가상 공포는 늘 인류의 주요 관심이다. 매스컴을 통해 전해지는 편집된 정보와 몽타쥬 기법에 의해 조작되는 다큐멘터리의 시뮬라크르가 우리에게 더욱 신뢰를 준다. 아니 그것이 실재가 된다.

 

 

 

2. 예술과 기독교, 그 어색한 만남?!

예술가와 교회의 화해는 가능한가? 모더니즘이후, 특히 미술에서, 예술가들은 더 이상 교회나 기독교를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예술가들이 존재하였지만 (음악의 경우를 제외하고 특히 시각예술에 있어서) 그들은 늘 키치kitsch 수준에 머문 것이 사실이다. 이는 서문에서 이미 언급한 것 같이 현대 예술과 기독교의 현격한 차이에서 기인한다. 기독교 예술에 대해 언급한 이 책의 저자들은 모두 모더니즘의 범주에서 이를 설명하고 있는바 현대 예술에까지 적용시키기에는 많은 한계성을 가지지만 이들을 중심으로 간단히 정리해본다.

 

딕슨은 예술가와 교회의 접촉지점을 설정하는데 그것을 감수성이라 정의했다.

 

감수성이란 자극을 받은 말초신경의 동물적인 반응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고양된 인식과 이해를 암시한다. (59)

 

그는 교회의 감수성육화(肉化, Incarnation)에 대한 교회의 응답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물질적인 자연과 연결되며 그 지점이 예술가가 교회와 만날 지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가는 자연을 통해 예술의 감수성을 얻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작품은 자연 질서와의 유대로부터 생겨나며”, 성육신의 교리를 가진 교회는 그러한 예술가들의 감수성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긍정적인 전망을 그는 내놓는다.

 

톨스토이는 사회가 목적한 최고의 선종교적 지각이라고 정의하며 기독교적 예술, 즉 우리들 시대의 예술은 이원적인 의미에서 카톨릭적, 즉 보편적이어야 하며, 따라서 모든 사람을 결합시켜야 한다.(34)라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라는 보편성을 담보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예술은 분명 일반 예술과 구별된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종교적 지각기독교적 지각과 동일시하며 일반적인 예술에까지 기독교적인 보편성을 주장하지만, 그의 주장은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 그가 얘기하는 종교적 감성은 결국 교회 예술에서 그 설득력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예술과 교회 예술은 다른 것일까? 톨스토이는 기독교 예술을 종교적 감정을 전달하는 예술, 그리고 민중 예술에 국한 시키고 있다. 그는 인간의 종교성이란 더 넒은 틀을 예술에 적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에 반해 교회 예술은, 리터의 언급대로, 교회 안에서 사용되는 제한적인 기독교 예술이다교회 예술이란 종교적 신념에 대한 집단적 체험을 전제하며 이러한 집단 사고나 집단 정서를 표현해주는 예술이라고 그는 정의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예술은 교회 예술보다 더 넓은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교회 예술에 대한 리터의 언급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진다. 사실 톨스토이가 말한 종교적 감정도 이러한 교회 예술의 범주에 오히려 어울릴 것 같다. 기독교 예술이 반드시 종교적 감정을 불러 일으켜야 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를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소위 현대 기독교 미술이라 규정되는 작품들이 모두가 종교적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예술이란 무엇인가? 딕슨이 말한 것에 근거하여 정의하자면 기독교 예술은 성육신의 표현이다. 딕슨이 말한 육화 성육신은 기독교의 핵심이며 이는 기독교 예술을 정의하는 하나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또한 성육신이 자연계의 인간이란 형상에 제한성을 가지는 것 같이 이 가시적인 세계는 분명 피조된 세계라는 한계성을 가진다.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여기에 천지창조의 감수성이 자리할 여지가 생긴다. 예술가의 창조성은 분명 아담이 만물의 이름을 짓는 그 창조성과 연관되어있다. 이런 차원에서 메튜 폭스가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누구나 예술가인 것이다. 다시 말해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인간은 모두 예술가이다. 인간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때론 인류에게 유익한 것을, 때론 인류를 파괴할 무기와 같은 치명적인 것을 말이다. 이러한 인간의 창조성이 기독교 예술이 가지는 보편성이며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예술은 결국 모든 창의적인 예술에 적용된다.

 

그러나 기독교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가 사라진 현대 예술이 어떻게 기독교와 합할 수 있을까? 이데아의 그림자로서, 재현의 도구로서의 예술의 가치가 사라진 현대에서 절대 가치를 추구하고 보편성을 주장하는 기독교가 어떻게 형식적으로 내용적으로 예술과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무의식의 세계, 신적 이상, 천재의 재능, 실재의 재현 등과 같은 것으로부터 독립되어 예술 자체의 실재만 남아 있는 현대 예술이 어떻게 기독교적 가치를 담아낼 수 있을까? 나는 여기서 기독교 예술이란 말의 허구성을 지적한다. 현대에서 이 말은 매우 이율배반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기호와 대상 간의 거리가 사라진다는 것은 그 기호의 의미의 상실을 뜻하듯이 기독교와 예술의 거리가 사라지는 곳엔 오직 예술이란 의미만 남게 된다. (그 반대는 완전히 예술이란 것이 사라지고 기독교 만 남기 때문에, 예술의 존재를 인정하는 한, 여기서는 예술이 예술로서 의미를 가지게 하자. 경계가 사라진 곳, 모든 이분법적인 의미가 사라진 곳에 현대 예술은 자리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이란 말 앞에 기독교란 말이 오는 것은 매우 어색해 보인다. 물론 형이상학의 죽음을 고한 니체 이전에는 그러한 정의가 가능했으리라. 기독교 스포츠, 기독교 제과, 기독교 과학, 기독교 신발 이 얼마나 어색한 조화인가? 그러므로 기독교 예술은 없다. 너무 극단적인가? 그렇다면 최소한 포스트모던 예술에서는 없다라고 하자. 그냥 예술만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기독교란 말이 교회라는 제한된 범위에서 사용되는 것이라면 특정 집단의 예술을 총칭하는 것으로 기독교 예술이란 말이 가능할 것이다.)

 

 

 

 나오는 말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한가? 그렇지 않다. 실제로 창조 신앙성육신 신앙을 도그마적이고 카리스마적인 범주로 제한하는 예술가들이나 기독교인들이 존재하는 한 기독교 예술이란 말은 분명히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아이러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을 기독교의 범주 안에 두고 자신의 작품을 기독교 예술로 불려지길 원한다. 그런 차원에서 기독교 예술은 그 실재가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감추는 제3단계의 시뮬라크르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예술의 또 다른 변질된 이름일 지도 모른다. 나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예술에서 기독교 예술과 일반 예술의 양식적이고 형식적인 차이를 찾지 못하겠다. 그러한 구별은 현재 작가들의 작품 동기나 진술에 의존하고 있다. 결국 그들의 창작 동기에서 겨우 기독교라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것은 결국 그의 신앙과 연결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들에게는 예술이 자신의 신앙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예술은 그 이상을 지향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성과 성육신 이론 또한 예술 전반에서 이 피조세계와 인간 문명과 조우(遭遇)하며 그 관계성을 하나씩 포착해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예술이 하나의 문화적 양식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거시적인 문화적 차원의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예술과 종교를 동일하게 문화라는 큰 틀에 놓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 둘 간의 상관관계는 바로 오늘,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예술자체가 목적이 되기도 하고, 아예 목적 자체가 없는 예술이 등장하는 이러한 시기에 소위 기독교 예술은 아직도 기독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씨름을 하고 있다. 기독교가 현대 예술을 소외시킨 것일까 아니면 현대 예술이 기독교를 소외시킨 것일까? 답은 분명하지 않지만 현대 기독교는 급변하는 현대 예술에 너무 진부하게 대처하고 있다. 교리적인 잣대로만, 또는 기독교 윤리의 잣대로만 울타리 뒤에 숨어 현대 예술을 비판하는 모습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예술작품을 단순히 윤리적 잣대로만 판단하려하고 단순히 복음 전파의 도구 정도로만 생각하는 작금의 한국교회의 태도는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예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그 비판력까지 상실한 기독교의 무능은 오래전에 있었던 다빈치 코드라는 삼류소설에 대한 교회의 반응에서 이미 증명이 됐다. 예술에 대한 비판을 하려면 먼저 예술을 품에 안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차가운지, 뜨거운지 알 수 있고, 품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