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11. 나해_연중15주일
성 베네딕트(몬테 카씨노의 수도원장, 서방 수도원의 교부, 550년경)
사무하 6:1-5, 12-19 / 시편 24 / 에페 1:3-14 / 마르 6:14-29
헤로데의 치부(恥部)
채야고보 신부 / 제주 한일우정 교회, Artist
치부(恥部)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했으면 하는,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것을 누구나 하나씩은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다양함 만큼 서로가 느끼는 치부 또한 각양각색입니다. 누구에게는 숨기고 싶은 것이 누구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남의 치부를 건드리게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곤 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예민하게 굴면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기 쉽고, 소심하게 굴면 자신이 하염없이 작게만 느껴집니다. 시인의 표현처럼 “육체가 없었으면”(이성복) 느끼지 않았을 비루함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고통과 감정을 우리와 같은 완전한 ‘육체’로 오신 우리 주님께서도 과연 느끼셨을까? 아마 그러셨을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묵상하면 제 자신도 조금은 위안을 받습니다. 비루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육체. 우리의 육신은 주님의 성육신으로 거룩함의 가능성을 약속받았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의 죄된 육신을 거룩하게 하신 성육신의 신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서에 등장한 헤로데는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입니다. 그는 기원전 4년부터 기원후 39년까지 요르단 강 서쪽 갈릴래아 지방과 강 동쪽 베레아 지방을 다스렸습니다. 그는 이복동생인 또 다른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을 했습니다. 이는 유대교에서 금하는 근친결혼이었습니다(레위 20: 21). 그런데 마르코가 기록한 “필립보”라는 이름은 사실 헤로디아의 남편이 아니라 딸 살로메와 결혼한 사위의 이름입니다(루가 3:1). 마르코 공동체에 전해진 구전 자료의 한계로 생긴 오기일 가능성이 큽니다. 요세푸스가 기록한 “유대고사”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헤로데가 겁을 내서 그를 ‘마케루스 천연요세’로 이송하여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마르코는 전설로 내려오는 구전전승을 근거로 오늘 이야기를 기록한 것 같습니다. 비록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역사가의 기록과 마르코의 기록이 차이는 있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세례자 요한의 영향력이 어떠했는지는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에 대한 3가지 소문, 즉 ‘부활한 세례자 요한이다’, ‘엘리야의 환생이다’, ‘예언자 중의 한 분이다’라는 견해는 아마도 당시의 대중적 소문에 근거한 전승일 것으로 보입니다. 마르코는 이러한 구전전승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전승자료를 편집하여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을 했습니다. 물론 헤로데의 견해를 중간에 삽입함으로써 두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연결합니다. 이러한 편집 구성 덕분에 우리는 이 이야기에 담긴 의미의 또 다른 진실에 다가갈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헤로데를 통해 드러난 한 인간의 치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정치적 이유에서든, 아니면 개인적 이유에서든 헤로데에게 세례자 요한은 하나의 ‘치부’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대중적 인기 때문에 그는 요한에게 정치적인 열등감을 느꼈습니다. 이에 더해서 근친결혼을 한 가족사의 부끄러움도 있었습니다. 그에게 요한은 자신의 열등감을 비춰주는 거울이었습니다. 그를 피하고 싶어도 요한이 끊임없이 대중 앞에서 자신을 비판하며 자신의 치부를 드러냈기 때문에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대중이 무서워 대중의 지지를 받는 세례자 요한을 함부로 죽일 수도 없었습니다. 진퇴양난의 상태. 이러한 그의 심리 상태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후에 죄책감 때문에 더 심해져서 ‘예수의 소문’만 들어도 덜덜 떠는 망상증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 왕은 “바로 요한이다. 내가 목을 벤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마르 6:16)
예수에 대한 다양한 소문들을 듣고 유독 그를 자신이 목을 벤 요한이라고 단정 짓습니다. 자격지심입니다. 그래서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믿어 버린 것입니다. 망상증입니다. 자신의 치부를 숨기려다 결국 자기 자신마저 망상 안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결국 헤로데가 요한의 목을 친 것은 요한의 머리가 아니라 자신의 치부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치부를 없애려 자신의 ‘육체’ 밖에서 치부를 잘라내려 했지만, 결국 잘린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의 치부를 타자에게 투사하는 ‘심리 투영 (心理 投影, psychological projection)’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참담합니다. 아마도 헤로데는 예수마저도 요한처럼 목을 베려고 했을지 모릅니다. 헤로데와 예수가 직접 만났다는 기록은 오직 루가복음만 전하고 있어서(루가 23:6-12) 그 신빈성에 약간의 의문이 제기됩니다. 아마도 헤로데는 예수의 소문만 들었지 직접 만나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마르코가 전한 헤로데의 상태로 봐서는 만약 그가 예수를 만났다면 반드시 그의 목도 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는 자신의 치부에 대해 회개하기보다는 그것을 감추거나 없애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치부를 남에게 투영한 사람은 그러한 망상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치부를 가리기 위해 남을 해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해를 끼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비극입니다. 단테의 신곡에서나 볼 듯한 인간 실존의 비극입니다.
여기에서 잠시 사막의 은수자들을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사막의 은수자들이 세상을 등진 사람들이라고 흔히들 생각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그들은 세상을 등짐으로써 세상을 오히려 품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결코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공동체성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활동은 단순한 ‘영적인’ 차원이라는 추상성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친밀함을 얻기 위해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을 그러한 수련의 과정으로 채택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막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수련을 했습니다. 그들이 추구했던 영성은 진리와 사랑을 깨닫고 이를 실제적으로 이웃과의 삶 속에서 실현해내는 것이었습니다. 로완 윌리암스는 사막의 교부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막에서 공동체를 일군 초기 수도사들과 수녀들은 당시 (제도적) 교회가 진실로 무엇에 관한 곳인지, 무엇이 되어야 할 곳인지가 ‘일상’에서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사막의 지혜, 비아, 2019)
즉 사막의 수도자들은 “어떠한 인간성을 지녀야, 어떠한 인간이 되어야” 예수 그리스도와 교감하고 이웃과 교감하는 사람이 되는지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최초의 사막 은수자로 불리는 성 안토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죽음은 이웃과 더불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얻으면 하느님을 얻지만,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그리스도를 거슬러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막의 지혜, 비아, 2019)
세상을 등진 것 같은 수도자들이 “이웃과 더불어 삶”을 강조한 것은 아이러니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수도자들이 ‘도피한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지 못했던 제도적 기존 교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일상의 삶에서 이루는 방법을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사막에서 다양한 영적 수행을 실행한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사막은 그들의 “성령의 실험실”(로완 윌리암스)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웃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결국 이웃에 대해 우리 자신이 죽어야 가능함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예수와 사막의 교부들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늘 원론적으로 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차피 그렇게 살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살려고 결단을 해도 현실은 늘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과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그 거리를 좁히자니 우리의 의지가 너무 박약합니다. 남을 위해 헌신하면 자신만 손해를 보는 것 같고, 자신만 작아지고 소외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서로가 서로를 서로로부터 소외시키게 됩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적당히 바라보며, 적당히 무시하면서 서로 간에 유리벽을 세웁니다. 보이지 않는 단절, 즉 무관심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반대말이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란 말은 매우 설득력 있는 말입니다.
수도사들이 기존의 삶과 가치관으로부터 ‘도피’했듯이 우리 자신의 일상을, 우리 자신의 생각을, 이러한 경직된 일상에서 도피하지 않고서는 결코 그러한 가르침을 현실에 적용하기 쉽지 않습니다. 로완 윌리암스는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판단하는 힘, 정죄하는 권력을 내려놓는 것”이 곧 이웃을 위해 죽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자신의 죽음’은 우리의 모든 경직되고 어그러진 부분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도피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이웃의 영적인 상태와 이웃의 자유에 대해 판단할 권리가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리는 이웃을 사랑하고 기도하라는 권리입니다. 이웃을 판단할 권리를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형제를 실족케 하는 자는 연자 맷돌을 달고 물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권리를 정의의 이름으로 우리는 너무 쉽게 주장하지만, 정작 정의의 다른 이름인 사랑은 외면합니다.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시편 85:10)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는 하나이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정의는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이제 오늘의 주제인 ‘치부’로 다시 돌아갑니다. 누구에게든 감추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제 자신도 남에게 말하기 싫은 치부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아내에게도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몰랐으면 하는 치부. 은연중에 그러한 치부를 누군가가 건드리면 저도 참을 수 없는 수치와 분노를 느낍니다. 그러나 저는 역설적이게도 저의 치부로 인해 늘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용기를 얻습니다. 내 안의 가시가 저를 하느님과 늘 연결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치부는 은밀히 하느님 앞에 내어놓아야 할 것이지, 남들 앞에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혹 우리가 다른 이의 치부를 발견한다면, 지그시 눈을 감고, 입을 닫으며, 조용히 덮어줘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9장을 보면 노아가 술에 취해 아랫도리를 드러내고 잠이 들었을 때 셈과 야벳은 아비의 치부를 보지 않고 뒷걸음쳐 들어가 조용히 옷으로 아비를 덮어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 함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아비의 치부를 보고 밖에 나가 떠들어 댔습니다. 그것이 함이 아비로부터 저주를 받는 계기가 됐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치부는 숨기면서 남의 치부는 드러내고 싶은 유혹에 쉽게 빠집니다. 또한 자신의 치부를 오늘 헤로데처럼 남에게 투영시키기도 합니다. 숨기고 싶은 자신의 치부는 자신의 내면에 꼭꼭 감춰둔 채 우리는 결국 남의 목을 베기 위해 시선을 자신 밖으로만 돌립니다. 자신의 치부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은 늘 두렵기 때문입니다. 오늘 헤로데의 비겁함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의 비겁함은 결국 어린 살로메의 도움을 받아 치부를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망상이었습니다. 치부는 자신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 회개의 핵심은 이러한 치부를 가지고 하느님께로 완전히 돌아서는 것입니다. 기존의 습성, 가치관, 욕심들로부터 자신을 ‘도피’시켜 ‘하느님 앞에 선 개인’으로 당당하게 하느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치부를 덮어주시지 바깥으로 드러내시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치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덮어지고 가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치부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육체가 없었으면’ 느끼지 않았을 고통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의 치부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의미이고, 그분의 수치로 말미암아 우리가 나음을 받은 은총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지닌 의미이고 신비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은총이 자신의 치부를 덮고, 남의 치부를 가려주며,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느님께로 향하기로 결심한 모든 분들에게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연중15주일_전례독서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우리 마음에 은혜의 말씀을 심어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베푸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이웃과 함께 주님의 축복을 나누고, 주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며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사무하 6:1-5, 12-19
1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정병 삼만 명을 소집했다. 2 다윗은 이 전군을 거느리고 유다 바알라에 가서 하느님의 궤를 옮겨오려는 것이었다. 그 궤는 거룹을 타고 계시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으로 불리는 궤였다. 3 그들이 언덕 위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느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나올 때, 아비나답의 아들 우짜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몰았다. 4 우짜는 궤 옆에서 따르고, 아효는 궤 앞에서 인도했다. 5 다윗과 온 이스라엘 백성은 수금과 거문고를 뜯고 소구와 땡땡이와 바라를 치면서 마음껏 노래부르며 춤을 추었다.
12 오베데돔의 집에 하느님의 궤를 모셔두었기 때문에 야훼께서 그 집 식구들과 모든 재산에 복을 내려주신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 왕은 너무나도 기뻐 하느님의 궤를 오베데돔의 집에서 자기 도성으로 모시고 올라왔다. 13 야훼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옮긴 다음 다윗은 살진 황소를 잡아 바쳤다. 14 그리고 다윗은 모시 에봇을 입고 야훼 앞에서 덩실거리며 춤을 추었다. 15 다윗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나팔을 불고 함성을 지르며 야훼의 궤를 모시고 올라왔다. 16 야훼의 궤가 다윗의 도성에 들어올 때 다윗 왕이 야훼 앞에서 덩실 덩실 춤추는 것을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려다보고는 속으로 비웃었다. 17 다윗은 미리 성막을 쳐서 마련해 놓은 자리에 야훼의 궤를 모셔놓고 야훼께 번제와 친교제를 드렸다. 18 이렇게 번제와 친교제를 드린 다음 다윗은 만군의 야훼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복을 빌어주었다. 19 그리고 모여든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녀를 가리지 않고 떡 한 개, 마른 대추야자 한 뭉치, 건포도떡 한 개씩을 나누어주었다. 백성들은 모두 이것을 받아가지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시편 24
1 이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모두 주님의 것, ◯
. 이 땅과 그 위에 사는 것이 모두 주님의 것
2 주께서 바다 밑에 기둥을 박으시고 ◯
. 이 땅을 그 물 위에 든든히 세우셨다.
3 어떤 사람이 주님의 산에 오르랴? ◯
. 어떤 사람이 그 성소에 들어서랴?
4 행실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 허망한 데 뜻을 두지 않고 ◯
. 거짓 맹세 아니하는 사람이다.
5 이런 사람은 주님께 복을 받고 ◯
. 하느님께 구원받을 사람이다.
6 이런 사람이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며 ◯
. 야곱의 하느님 앞에 나아갈 사람이다.
7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
. 영광의 왕께서 드신다.
8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힘세고 용맹하신 주님이시다. ◯
. 싸움에 용맹 떨치신 주님이시다.
9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
. 영광의 왕께서 드신다.
10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
. 만군의 주께서 영광의 왕, 그분이시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에페 1:3-14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4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 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6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이 영광스러운 은총에 대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죄에서 구출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풍성한 은총으로 8 우리에게 온갖 지혜와 총명을 넘치도록 주셔서 9 당신의 심오한 뜻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시켜 이루시려고 하느님께서 미리 세워놓으셨던 계획대로 된 것으로서 10 때가 차면 이 계획이 이루어져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 될 것입니다. 11 모든 것을 뜻하신 대로 이루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따라 우리를 미리 정하시고 택하셔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습니다. 12 그러므로 맨 먼저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13 여러분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복음 곧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어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확인하는 표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약속하셨던 성령을 주셨습니다. 14 성령께서는 우리가 받을 상속을 보증해 주시고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하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르 6:14-29
14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그 소문이 헤로데 왕의 귀에 들어갔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 하고 말하는가 하면 15 더러는 엘리야라고도 하고, 또 더러는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라고도 하였다. 16 그러나 예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 왕은 “바로 요한이다. 내가 목을 벤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17 이 헤로데는 일찍이 사람을 시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그것은 헤로데가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였다고 해서 18 요한이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누차 간하였기 때문이었다. 19 그래서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원한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그것은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여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간할 때마다 속으로는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그것을 기꺼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마침 헤로디아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 왕이 생일을 맞아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요인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나와서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매우 기쁘게 해주었다. 그러자 왕은 그 소녀에게 “네 소원을 말해 보아라. 무엇이든지 들어주마.” 하고는 23 “네가 청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주겠다. 내 왕국의 반이라도 주겠다.” 하고 맹세하였던 것이다. 24 소녀가 나가서 제 어미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고 의논하자 그 어미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하여라.” 하고 시켰다. 25 그러자 소녀는 급히 왕에게 돌아와 “지금 곧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가져다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왕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지만 이미 맹세한 바도 있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어서 그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27 그래서 왕은 곧 경비병 하나를 보내며 요한의 목을 베어 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감옥으로 가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건네자 소녀는 다시 그것을 제 어미에게 가져다 주었다. 29 그 뒤 소식을 들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다가 장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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