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26. 나해_연중 26주일
모든 한국의 순교자들
스바 3:14-20 / 시편 130 / 로마 8:33-39 / 요한 12:20-32
“이제 다 이루었다.”(요한 19:30)
순교와 배교에 대한 신학적 단상
채야고보 신부 / 성공회 제주한일우정교회, Artist
오늘은 ‘모든 한국의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박해의 상황 속에서도 믿음과 신념을 용기 있게 지키다 순교하신 분들을 기리는 날이죠. 특히 우리 대한성공회의 순교자들은 대부분 6.25 동란 때 순교하신 분들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들을 기억하시고 증언하실 분들이 이미 돌아가시고, 역사적 자료도 변변찮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순교자의 피 위에 하느님의 교회가 세워진 역사를 생각해 볼 때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순교자들의 역사를 경히 여겨왔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죄송한 마음 큽니다. 이원창, 윤달요, 조용호, 리도암, 임문환 모세 신부, 홍갈로 신부, 마리아 클라라 수녀를 위시하여, 기록에 누락된 북한 지역 성직자들과 교인들을 생각하면 더 많은 수의 순교자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 대한성공회는 그러한 분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순교자의 날에 역설적이게 배교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간과해왔던 배교자에 대한 이야기로 순교와 배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기 위함입니다. 과연 믿음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순교와 배교를 단순히 승자(또는 강자)와 패자(또는 약자)의 구도로 인식하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일까? 우리의 믿음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배교자와 같이 연약하고 의지가 박약한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일까?
약속했던 주님의 재림이 늦춰지고 기독교의 오랜 역사가 지속되는 가운데, 기독교는 그동안 많은 순교자들뿐만 아니라 배교자들 또한 배출해왔습니다.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늘 각색되고, 재창조되기도 하며, 신화화되어 우리에게 잘 전달되는데 반해, 배교자들의 이야기는 철저한 역사적 침묵 속에 그 흔적조차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변할 수 없는 사실은 여러 환란의 시대에 누군가는 자신의 믿음과 소신대로 생을 마감했지만, 누군가는 배교 행위로 생을 연명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진실입니다. 그리고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순교자보다 배교자의 수가 훨씬 많았을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 쉽게 추측이 됩니다. 늘 역사는 승자와 패자 중 승자에 대한 기록만 남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는 순교와 배교를 이렇게 승자와 패자라는 이분법적인 구도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4세기 초, 로마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가 끝나갈 무렵 박해에서 살아남은 교회는 배교자 문제로 많은 갈등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논쟁이 바로 유명한 ‘도나투스 논쟁’입니다. 도나투스파 사람들은 교회의 순결성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배교자들을 교회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심지어 배교자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은 자들의 세례도 무효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의 대부분의 주교들은 배교자들에 대한 관용정책을 폈고(확실히 배교자들의 수가 더 많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한 도나투스파 사람들을 오히려 탄압했습니다. 그리하여 316년에 도나투스파는 ‘도나투스’를 카르타고의 주교로 세웠고 이후 카르타고에는 주교가 두 사람이나 나와 갈등에 휩싸였습니다. 이러한 도나투스파에 반대하여 히포의 어거스틴은 ‘세례는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모든 베풀어진 세례는 유효함을 주장하며 결국 도나투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했습니다. (사효성(事效性)과 인효성(人效性) 문제는 이미 그때부터 예견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비그리스도인들에게 핍박을 받던 교회가 박해에서 풀려나자 이제 내부로부터 이단 논쟁에 휩쓸려 서로가 서로를 정죄하고 비판하는 슬픈 형국이 빚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는 교회의 역사 속에서 계속 되풀이 됐습니다.
박해의 시대가 아니니 우리는 순교자들이나 배교자들이 처했던 ‘삶의 자리’를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쉽게 배교자들을 판단할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배교자들의 이름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그들의 이름이 남아 있었다면 아마도 그 후손들은 결코 교회에 남아 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 우리가 친일파 후손들을 비난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순교자가 승자로 취급받는 교회 역사의 분위기 속에 배교자의 존재는 믿음을 저버린 수치스런 패배자로 낙인이 찍힙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때부터 배반과 배교가 기독교 역사의 시작이란 점을 우리는 너무 쉽게 간과한 듯합니다. 가롯 유다, 사도 베드로, 그리고 모든 제자들… 제자들 중에 여자 셋 만을 제외하면 모두 주님을 버리고 떠난 자들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 모두 한 때 ‘배교자들’이었던 거죠. 심지어 가롯 유다는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사도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 아니 ‘배교’를 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는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 대해 잠시 언급하고자 합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만든 영화 ‘사일런스’로 더 잘 알려진 소설입니다. 아마도 많이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혹시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은 책이나 영화로 꼭 한번 보셨으면 합니다.
배교자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이 소설 ‘침묵’은 순교와 배교에 대해 이러한 우리의 섣부른 판단에 경종을 울립니다. 순교자와 배교자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우리의 편협함과 비굴함을 감추기 위한 장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저의 뇌리를 붙들었습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매우 간단합니다. 17세기 일본에서 선교하던 포르투갈 예수회 소속 ‘페레이라’ 주교의 배교 소식을 듣고, 그를 믿고 따르던 두 명의 신부가 사실 확인을 위해 일본 땅을 밟으며 겪게 되는 일본 기독교 박해의 시대를 그린 이야기입니다. 두 명의 신부는 ‘가르페’와 ‘로드리고’입니다. 그들은 ‘페레이라’ 주교가 이교도들에게 굴복했다는 것을 결코 믿을 수가 없었고,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싶었습니다.(아마도 그들의 내면에는 식민지 제국의 자존심도 어느 정도 깃들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렵게 일본에 상륙한 그들은 참혹한 박해의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노우에’라는 영주는 아주 영악하고 효과적으로 기독교인들을 배교자로 만들어 갔습니다. 핍박의 상황 속에서 결국 ‘가르페’ 신부는 순교를 하고, 다른 한 명의 신부, ‘로드리고’는 배교를 하게 됩니다. ‘로드리고’의 배교에는 그들이 그토록 믿고 따르던 ‘페레이라’ 주교의 설득이 주효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이노우에’ 영주의 간교함이 빛을 발합니다. 그리고 ‘로드리고’ 신부의 주변에 자주 등장하여 그를 팔아 넘기기도 하며 배교와 회개를 반복하는 일본인 신자 ‘키치지로’의 이야기가 더해집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됨으로 여기서 줄입니다. 꼭 기회가 되시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 중 특별히 ‘키치지로’라는 배교자의 캐릭터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비굴하게 목숨을 연명했지만, 죽는 순간까지 ‘로드리고’ 신부와 교회의 주변을 배회하며 참회와 배반을 반복했던 배교자 ‘키치지로’. 사실 소설 속의 그는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혐오감을 주는 신뢰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를 믿지 못할 정도로 야비하고, 저속하며, 궁상맞은 사람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으로서의 자부심도, 절개도, 순결함과 정결함도 없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편협하고, 옹졸하며, 치사한 인물입니다. 너무나 가볍고 천박하여 박해자들은 그를 죽일 가치조차 없는 존재로 여깁니다. 그러나 저는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읽을 때까지 그를 함부로 미워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아니라고 애써 부인했지만, 제 마음 한편에서 내게도 그와 비슷한 연약함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불굴의 의지도 없고, 성령의 충만함도 없으며, 자신의 절개를 지킬 용기조차 없는 나약한 사람이 만약 박해의 시대에 예수님을 믿는다면 과연 어떤 모습일까? ‘키치지로’의 모습 속에서 예수를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의 모습도 떠오르고, 예수를 버리고 도망친 제자들의 모습 또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엔도 슈사쿠도 ‘키치지로’를 베드로를 연상하며 썼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우리의 믿음으로 가려져 있는 우리의 깊은 곳에 숨은 어둠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나는 정말 나의 목숨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키치지로’와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그와 다르게 행동할 용기가 정말 있는 것일까? “후미에(성화상, 밟는 그림)”를 밟기만 하면 살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 상황 속에서 나는 정말 ‘후미에’를 밟지 않고 순교할 용기가 있는가? ‘로드리고’ 신부가 ‘후미에’를 밟고 배교한 이유에 대해 소설은 어느 정도 설명을 하기 때문에 그의 배교의 이유는 정상참작이 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키치지로’라는 연약한 인물의 배교와 배반에 대해서는 이 소설은 침묵을 합니다. 마치 그리스도인들이 핍박과 고난을 받는 순간에 왜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는지에 대한 답을 이 소설이 침묵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 못 박히시는 순간에도 있었던 ‘하느님의 침묵’이 이 소설 속에서도 반복됩니다. 그래서 소설의 제목이 ‘침묵’입니다. 하느님은 사랑하는 신자들이 고난 받는 순간에 과연 어디에 계셨던 것일까요?
이제 오늘 복음 말씀을 잠깐 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서 20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헬라 사람들’은 “경건한 자들”(사도 10:2, 13:43)이라 불린 유대교로 전향한 헬라인들을 말합니다. 아마도 예수님 제자들 중 필립보와 안드레아의 이름이 헬라식 이름인 것으로 봐서 이들은 그리스어를 할 줄 알았고 헬라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던 제자들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요한은 일곱 개의 예수의 표징 사화를 통해 예수의 정체를 드러낸 다음, 오늘 12장에서 드디어 예수의 수난과 영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제 헬라인들에게까지 예수의 복음이 전해졌다는 것을 언급함으로써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 때가 다가왔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헬라인들이 정확하게 어떤 질문을 예수께 했는지는 기록이 안 되어 있지만, 아마도 그들은 필립보에게 예수에 관하여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자 예수를 직접 만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의 대답으로 그들의 질문을 역으로 유추해보면 아마도 ‘보편 구원’에 관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즉 메시아에 대한 질문 말입니다. 예수를 만난 헬라 사람들이 유대인 디아스포라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인이란 점을 생각하면, 그들은 분명 유대인과 이방인을 모두 구원하는 하느님의 보편 구원의 계획에 대해 흥미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구원에 대한 전제 조건인 ‘메시아의 죽음’에 대해,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희생과 헌신’에 대해 오히려 말씀을 하십니다. 아마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그리스도의 비밀 사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당황하는 표현이 생략되어 있지만, 분명 그들은 자신들이 알아왔던 유대교의 메시아와 다른 ‘고난 받는 메시아의 이야기’를 들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신 “한 알의 밀알”이야기는 중의적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는 예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를 뜻하면서, 동시에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희생과 헌신에 대한 요구입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죄가 이 땅에 온 것같이 이제 한 사람의 죽음으로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보편 구원은 이와 같이 헬라인의 등장과 함께 표면 위로 드러납니다. 죽음과 영광을 연결시키는 요한복음 신학의 정수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셨습니다. 나를 섬기고자 하는 사람은 나를 따르라고. 그러한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철저한 ‘자기 포기’입니다. 예수께서 본인의 하느님 되심을 포기하고 낮아지신 ‘케노시스 κένωσις’를 따라 자기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예수께서 얻게 될 영광의 자리, 곧 종말적인 천상의 자리를 약속하십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언급하신 ‘내가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성자를 영예롭게 하신 것같이 자기를 포기하고 예수를 따른 사람도 영예롭게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나면 요한복음은 정말 순교자와 승리자들의 이야기로 끝이 났을 겁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그다음 구절을 통해 또 다른 깨달음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 주소서.’ 하고 기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 (요한 12:27)
성육신하신 예수께서도 자신의 때, 즉 십자가의 고통의 시간에 대해 많은 번뇌와 고통을 느끼셨다는 기록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는 순간에 느끼게 되는 주님의 깊은 번뇌를 반영합니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께서 이러한 번뇌를 느끼셨다면 우리 같은 연약한 인간들은 어떠할까요?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난의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셨다는 점 또한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고뇌에 찬 기도에 오히려 위안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도 그 순간에 ‘하느님의 침묵’을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 말씀에는 하늘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렸다고 기록됐지만,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순간에는 철저히 어둠과 침묵만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하느님의 침묵’ 속에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이제 다 이루었다.”(요한 19:30)라고 선포하시면서 숨을 거두십니다.
요한복음은 바로 그러한 예수의 고백 위에 기록된 복음서입니다. 요한복음서는 다른 복음서들이 예수의 정체를 처음부터 숨기는 방식을 사용하는데 비해 처음부터 예수의 하느님 되심을 당당히 선포한 복음서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구원은 철저히, 완전하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능함을 선포한 복음서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려 이 땅에 파송되셔서 고난과 죽음을 통해 하느님과 인간을 화해하게 만들었다는 주장도 요한복음의 주장입니다. 요한복음은 전합니다. “이제 다 이루었다.”라고. 이 말에서 우리는 순교와 배교의 문제를 풀 실마리를 찾습니다. 즉 우리의 구원은 이미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순교나 배교의 행위에 좌우되지 않는 확고부동한 하느님의 계획에 의해 이미 완성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러니 우리는 배교를 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이 말은 우리 모두 순교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순교와 배교에 상관없이 이미 십자가 위에서 완성된 하느님의 뜻은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율법의 준수로 구원이 주어진 것이 아니듯이 우리의 행위로는 구원을 약속받지 못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바울로로부터 어거스틴, 루터 그리고 칼 바르트로 이어지는 정통 교의학의 가장 흔들리지 않는 흐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순교와 배교를 선택할 수 없다는 점을 요한복음은 분명히 합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구원을 얻는 길은 철저히 차단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요한 3:16)
우리가 너무나 자주 들어 식상해져서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된 것 같지만, 이 말씀은 요한복음서 신학의 핵심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우리 의지대로 순교나 배교를 선택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순교는 은사임이 분명합니다. 믿음이 우리로부터 나온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으로 온 것이기에 우리는 순교자나 배교자 누구도 자랑할 것이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순교자들의 삶이 교회의 좋은 본이 되고 우리의 교회는 그들의 순교의 피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구원은 승자와 패자, 강자와 약자를 구분하지 않는 전적인 은총 구원입니다. 4 복음서 중 유일하게 성령을 ‘파라클레토스 παράκλητος’라 표현한 요한복음서는 성령에 대해 가장 인격적으로 잘 묘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파라클레토스’, ‘변호자’, ‘보혜사’ 즉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 우리는 오직 성령의 도움으로만 믿음을 가질 수 있고, 또 순교할 용기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인간의 공로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신칭의’,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그들에게 무죄를 선언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신데, 누가 감히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로마 8:33-34)
순교자들과 배교자들을 판단하고 상을 베푸실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자비의 자유’에 따라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우리는 철저히 성령의 은총에 의해 예수를 믿는 사람들로서 우리의 용기를 함부로 시험하거나 속단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아시는 주님께서 ‘키치지로’와 같이 연약한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신’ 일을 우리의 어떠한 행위로도 무효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면 그렇다고, 아니면 아니라고 솔직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부족하면 우리의 ‘파라클레토스’에게 간청하십시오. 만약 믿음이 충만하다면 그것이 우리의 것이 아님을 알고 겸손해지십시오. 하느님의 교회는 모든 사람들, 산 자와 죽은 자, 순교자와 배교자 모두의 것입니다. 순교자들을 기리고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나 동시에 순교자들의 그늘에 가리어진 ‘비굴한’ 배교자들을 함부로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요한 4:16)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로마 8:35)
하느님의 교회는 승자도, 패자도, 강자도 약자도 모두 주님의 은총으로 구원받는 곳입니다. 구원은 철저히 하느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은총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 또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몫입니다. 사랑은 끝까지 믿고 책임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은사가 사라져도 끝까지 남을 것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에 강건함을 주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연중 26주일 / 모든 한국의 순교자들 축일 전례독서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주께서는 한인 순교자들이 모든 위협과 고통 앞에서도 담대히 신앙을 고백하며 순교할 수 있는 은총과 힘을 주셨나이다. 비오니, 이제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추모하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열심히 증거하여 그들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스바 3:14-20
14 수도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 이스라엘아, 큰소리로 외쳐라.
⋅ 수도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며 축제를 베풀어라.
15 야훼께서 원수들을 쫓으셨다.
⋅ 너를 벌하던 자들을 몰아내셨다.
⋅ 이스라엘의 임금, 야훼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니
⋅ 다시는 화를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16 그 날이 오면, 예루살렘에 이렇게 일러주어라.
⋅ “시온아, 두려워 마라.
⋅ 기운을 내어라.
17 너를 구해 내신 용사 네 하느님 야훼께서
⋅ 네 안에 계신다.
⋅ 너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리니
⋅ 사랑도 새삼스러워라.
⋅ 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
18 “나는 너에게 내리던 재앙을 거두어들여
⋅ 다시는 수모를 받지 않게 하리라.
19 그 때가 되면,
⋅ 너를 억누르던 자를 다 없애버리고
⋅ 절름발이는 고쳐주며
⋅ 길 잃은 자들을 찾아내어
⋅ 고국으로 데려오리라.
⋅ 그 때가 되면, 온 세상에서
⋅ 내 백성은 칭송을 자자하게 받으며 이름을 떨치리라.
20 그 때가 되면,
⋅ 내가 너희를 데려오리라.
⋅ 너희를 이리로 모아들이리라.
⋅ 내가 너희의 면전에서 너희에게 광복을 안겨줄 때,
⋅ 너희는 세계 만방에서
⋅ 칭송을 자자하게 받으며 이름을 떨치리라.”
⋅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시편 130
1,2 주여, 깊은 구렁 속에서
⋅ 당신을 부르오니,
⋅ 주여, 이 부르는 소리 들어주소서. ◯
⋅ 애원하는 이 소리, 귀 기울여 들으소서.
3 주여, 당신께서 사람의 죄를 살피신다면, ◯
⋅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4 그러나 용서하심이 당신께 있사오니 ◯
⋅ 이에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5 나는 주님 믿고 또 믿어 ◯
⋅ 나의 희망 그 말씀에 있사오니,
6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보다 ◯
⋅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옵니다.
7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
⋅ 이스라엘이 주님을 기다리옵니다.
¶ 인자하심이 주님께 있고 ◯
⋅ 풍요로운 속량이 그에게 있으니
8 그가 이스라엘을 속량하시리라. ◯
⋅ 모든 죄에서 구하시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로마 8:33-39
33 하느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그들에게 무죄를 선언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신데 34 누가 감히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35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36 우리의 처지는,
⋅ “우리는 종일토록
⋅ 당신을 위하여 죽어갑니다.
⋅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받습니다.”시편 44:22
라는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요한 12:20-32
20 명절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왔던 사람들 중에는 그리스 사람도 몇이 있었다. 21 그들은 갈릴래아 지방 베싸이다에서 온 필립보에게 가서 “선생님, 예수를 뵙게 하여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22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가서 이 말을 하고 두 사람이 함께 예수께 가서 그 말을 전하였다. 23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24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같이 있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
27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주소서.’ 하고 기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 28 아버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그 때에 하늘에서 “내가 이미 내 영광을 드러냈고 앞으로도 드러내리라.”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29 거기에 서서 그 소리를 들은 군중 가운데는 천둥이 울렸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천사가 예수께 말하였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30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위해서 들려온 음성이다. 31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게 되었다. 32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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