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19. 나해_연중25주일
성 탈수스의 데오도르(캔터베리 대주교, 690년)
잠언 31:10-31 / 시편 1 / 야고 3:13-4:3, 7-8상 / 마르 9:30-37
서로에게 작은 자들
채야고보 신부 / 성공회 제주한일우정교회, Artist
오늘 이야기는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예고’, 다른 하나는 ‘제자들 사이의 수위권 다툼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은 자를 영접하는 이야기’입니다. 세 이야기 상에 어떤 연관성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발설하셨을 것으로 여겨지는 전승자료에 다양한 각색을 한 문장들입니다. ‘두 번째 수난 예고 이야기’는 전형적인 마르코의 편집 기법을 반영하고 있으며 나머지 이야기들도 전승과정에서 예수님 말씀에 상황을 첨언하여 편집된 것입니다. 특히 두 번째 이야기와 세 번째 이야기는 주제적으로 약간의 연관성도 가집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섬겨야 한다’는 주제와 ‘작은 자를 영접하라’는 주제가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이야기로 볼 수도 있습니다. 참 해석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명시한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예수님 일행은 ‘그곳’을 떠나 갈릴래아 지방을 거쳐 가파르나움에 도착하는 여정을 밟았습니다. 가파르나움은 예수님의 거처가 있는 곳입니다. 두 번째 수난과 부활 예고는 이동 중에 말씀하신 것이고 나머지 두 이야기는 예수님의 거처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행 중에 예수의 일행 가운데 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오늘 말씀은 전합니다. 이 다툼은 열 두 제자들 사이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자 그룹 전체에서 생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특별히 열둘을 따로 불러 가르치셨습니다(제자 특수 교육).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이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그런 후에 어린아이 하나를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 작은 자를 예수님 이름으로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여기에서 ‘어린이’로 번역된 말의 헬라어는 ‘παιδίον 파이디온’입니다. 이는 ‘어린이’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더 정확히 ‘작은 자’로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전반적인 문맥상 어울립니다. 왜냐하면 이 ‘작은 자’는 바로 제자들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의 로기온 자료에 상황을 덧붙이는 과정에서 ‘파이디온’이란 말을 ‘어린이’로 해석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이 작은 자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라는 말은 여러 제자들 가운데 열 두 제자들을 특별히 세우시는 말씀으로 보시면 무난합니다. 예수 제자 그룹 속에서 누가 높으냐로 서로 다툰 문제에 대한 최종 결론이라 생각합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또 지극히 작은 자들인 제자들 중 하나를 영접하는 자가 하느님을 영접하는 자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르코의 편집 의도를 깊이 묵상하다 보면 그가 이런 설정을 구상한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수난 예고를 두 번째로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 말씀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짓을 하고 있습니다. 수난 예고의 심각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또한 자신들에게 닥칠 거센 운명을 전혀 인지 못하면서 그들은 누가 높으냐, 누가 예수의 수제자인가를 놓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말씀 즉 수난 예고에 대해 묵상하고 곰곰이 생각하며 질문하는 자는 하나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고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 (마르 9:32)
이 말씀은 물론 마르코의 편집적 설정이지만, 이 말씀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아무도 진리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또 질문하지도 않았다. 제자들의 모습은 마르코 공동체의 삶의 자리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핍박의 상황 속에서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세속적 욕심으로 교회 내 수위권 다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교회 내 분열의 모든 것이 이러한 다툼에서 시작되는 것을 보면 오늘 말씀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옵니다. 성공회의 역사를 봐도 성서의 권위는 인정하면서도 그 해석의 권위는 누가 갖느냐? 는 것으로 많은 다툼이 있었습니다. 왕이냐 아니면 주교이냐? 결국 신앙의 기본이 되는 성서의 해석을 누가 하느냐의 문제는 교회 내 권력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와 같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 메시지에 대해서는 깨닫지도 또 흥미조차도 느끼지 못하고 오직 자리다툼으로 2차 수난 예고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예수님의 진지한 말씀이 제자들 사이에서는 단지 공허한 메아리가 된 것입니다.
누가 더 옳고, 누가 더 잘났느냐를 가지고는 다퉈도, 누가 더 하느님 앞에서 바른가를 가지고는 분쟁이 나지 않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누가 더 하느님 앞에서 바른가? 는 실천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데 먼저 앞장서는가? 누가 더 사람들의 시선이나 칭찬이 없는 곳에서도 열심히 하느님의 일을 하는가? 누가 먼저 교회와 교우들을 더 잘 섬기고 있는가? 누가 먼저 휴면교우에게 전화나 따뜻한 관심을 더 보일 것인가? 누가 먼저 아픈 교우들을 위해 기도를 더 할 것인가? 이런 일로 서로 먼저 하겠다며 다투는 것을 우리는 교회 내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한 일은 모두 양보를 너무 잘합니다. 누가 옳고, 누가 잘 못 됐고, 누가 더 높고, 누가 더 잘났느냐 등으로 모든 교회의 다툼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작은 자’를 영접하라고 하신 말씀의 진위는 분명해집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작은 자’가 되라는 메시지입니다. ‘작은 자’가 어디 예수님의 제자들뿐이겠습니까? ‘작은 자’는 어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 ‘작은 자’이고 우리 주변의 형제 자매들이 모두 ‘작은 자’입니다. 너와 나가 모두 주님 앞에서 ‘작은 자’들입니다. 마르코가 오늘 이런 여러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어 놓은 것은 정확히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작은 자들’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높음을 주장하며, 누가 누구에게 당신은 옳지 않고 내가 옳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야고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시기심과 이기적인 야심이 있는 곳에는 분란과 온갖 더러운 행실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야고 3:16)
오늘 제자들 간의 다툼의 근원에는 바로 ‘시기심과 이기적인 야심’이 있다고 야고보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분란과 온갖 더러운 행실’이 발생하는 원인이 바로 그러하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작은 자의 영접’에 대한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작은 자로 여기고, 서로가 서로를 자신보다 더 낫게 여기며 품어주라고. ‘상호 섬김’, ‘상호 존중’, ‘상호 높임’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는 첫째 순결하고 다음은 평화롭고 점잖고 고분고분하고 자비와 착한 행실로 가득 차 있으며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야고 3:17)
오늘 야고보서는 수위권을 놓고 다툰 제자들을 포함하여 우리 교회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지혜를 덧입으라고 말입니다. 그 지혜는 서로 간에 평화를 만들고 편견과 위선을 없애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가 서로를 ‘작은 자’로 여길 때, 우리가 서로가 서로를 마치 귀여운 ‘어린아이’를 대하듯 할 때, 아마도 우리는 서로의 잘못이나 실수도 귀엽게 여겨 넘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길 겁니다. 사랑하는 어린 손자나 어린 자녀가 뭘 해도 귀여울 때가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러한 너그러운 마음을 서로에게 가지라고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말하고 계십니다. 지난주 제가 묵상했던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바울로의 편지의 한 부분을 읽어드리는 것으로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이보다 더 멋진 설교가 있을까 싶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힘을 얻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습니까?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는 일이 있습니까? 서로 애정을 나누며 동정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사랑을 나누며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 되십시오. 그렇게 해서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주십시오.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제 실속만 차리지 말고 남의 이익도 돌보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필립 2:1-5)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연중25주 (나해) 전례독서
본기도
주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낮아지심으로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겸손과 순종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며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잠언 31:10-31
10 누가 어진 아내를 얻을까?
⋅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다.
11 남편은 넉넉히 벌어들이는 아내를 믿고
⋅ 마음이 든든하다.
12 백 년을 한결같이
⋅ 속 썩이지 않고 잘해 준다.
13 양털과 모시를 구해다가
⋅ 손을 놀리니 즐겁기만 하구나.
14 마치 상선과도 같아
⋅ 멀리서 양식을 구해 온다.
15 아직 어두울 때 일어나
⋅ 식구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고
⋅ 여종들에게 일을 맡긴다.
16 밭을 사도 잘 생각해서 사고
⋅ 제 손으로 벌어 포도원을 장만한다.
17 허리를 동인 모습은 힘차고
⋅ 일하는 두 팔은 억세기만 하다.
18 머리가 잘 돌아 하는 일마다 잘되고
⋅ 밤에 등불이 꺼지는 일도 없다.
19 손수 물레질을 해서
⋅ 손가락으로 실을 탄다.
20 불쌍한 사람에게 팔을 벌리고
⋅ 가난한 사람에게 손을 뻗친다.
21 온 식구를 두둑히 입혀서
⋅ 눈이 와도 걱정이 없다.
22 손수 이부자리를 만들고
⋅ 모시와 붉은 털로 옷을 짜 입는다.
23 남편은 지방 어른들과 함께
⋅ 성문에 앉아 존경을 받는다.
24 모시로 옷을 지어 팔고
⋅ 띠를 만들어 상인에게 넘긴다.
25 몸매무새에는 힘과 위엄이 나타나고
⋅ 앞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26 입을 열면 지혜로운 말이 나오고
⋅ 혀를 놀리면 친절한 가르침이 나온다.
27 항상 집안 일을 보살피고
⋅ 놀고 먹는 일 없다.
28 그래서 아들들이 일어나 찬양하고
⋅ 남편도 칭찬하기를,
29“살림 잘하는 여자가 많아도
⋅ 당신 같은 사람은 없소.” 한다.
30 아름다운 용모는 잠깐 있다 스러지지만
⋅ 야훼를 경외하는 여인은 칭찬을 듣는다.
31 그 손이 일한 보답을 안겨주고
⋅ 그 공을 성문에서 포상해 주어라.
시편 1
1 복되어라.
. 악을 꾸미는 자리에 따라 가지 않고
.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않으며 ◯
.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
2 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
.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3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으니 ◯
.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 제철 따라 열매 맺으리.
4 사악한 자는 그렇지 아니하니 ◯
.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아,
5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머리조차 들지 못하고, ◯
. 죄인이라 의인들 모임에 끼지도 못하리라.
6 악한 자의 길은 멸망에 이르나, ◯
. 의인의 길은 주께서 보살피신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야고 3:13-4:3, 7-8상
13 여러분 가운데 지혜롭고 지식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답게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한 생활을 함으로써 그 증거를 보여주도록 하십시오. 14 여러분은 마음속에 고약한 시기심과 이기적인 야심을 품고 있으니 공연히 잘난 체하지 마십시오.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15 이런 지혜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이며 동물적이며 악마적인 것입니다. 16 시기심과 이기적인 야심이 있는 곳에는 분란과 온갖 더러운 행실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17 그러나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는 첫째 순결하고 다음은 평화롭고 점잖고 고분고분하고 자비와 착한 행실로 가득 차 있으며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18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평화를 심어서 정의의 열매를 거두어들입니다.
1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서로 싸우고 분쟁을 일으킵니까? 여러분의 지체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욕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2 여러분은 욕심을 내다가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남을 시기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싸우고 분쟁을 일으킵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 7 그러므로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대항하십시오. 그러면 악마는 여러분을 떠나 달아날 것입니다. 8a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
마르 9:30-37
30 예수의 일행이 그 곳을 떠나 갈릴래아 지방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예수께서는 이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31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따로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잡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그들에게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고 일러주셨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고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가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께서는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에게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제자들은 길에서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35 예수께서는 자리에 앉아 열두 제자를 곁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고 말씀하신 다음 36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앞에 세우시고 그를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또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만을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곧 나를 보내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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