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설교문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James Chae 2021. 11. 26. 21:54

 

2021.11. 28. 다해_ 대림 1 주일

예례 33:14-16 / 시편 25:1-10 / 1데살 3:9-13 / 루가 21:25-36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채야고보 신부 / 성공회 제주한일우정교회 사제, Artist

 

이제 전례력으로 새해가 시작됐습니다. 전례력의 시작(대림절) 주님에 대한 우리 교회의 기다림을 신학적으로 표현합니다. 교회는 가지의 기다림을 말합니다. 하나는 다시 오실 재림 예수에 대한 기다림이고, 하나는 세상을 구원할 아기 예수의 탄생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재림 예수 대한 기다림은 부활과 승천하신 주님의 약속에 기반하고, 메시아의 탄생은 구약의 예언에 기초합니다. 평화와 구원을 선포하신 아기 예수의 탄생은 우리와 세상에게 기쁜 소식이었지만, 다시 오실 재림은 모든 인류에게 반가운 소식은 아닌 듯합니다. 재림 예수는 세상의 심판자로 그리스도인을 구원하실 구원자로 동시에 오시기 때문입니다. 번째 오심은 모두에게 반가운 기다림이었지만, 번째 오심은 기쁨과 절망이 교차하는 기다림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살아 있는 자들의 하느님 오늘의 하느님이시므로 주님의 오심은 끊임없이 미래가 현재로 침투하는 사건이 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때는 언제나지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서가 말하는 종말의 때는지금 여기(here & now)’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자비의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2고린 6:2b)

 

 

오늘 읽은 복음서도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온 것이다.”(루가 21:28)

 

여기에서구원 헬라어로아폴루트로시스 ἀπολύτρωσις , redemption’라고 합니다. 이는 정확하게속량으로 번역되는 것이 원래 의미에 가깝습니다. , 죄수가 돈을 주고 면죄부를 받는다는 의미가 바로아폴루트로시스이기 때문입니다. 단어는 복음사가 중에 오직 루가만 사용한 용어입니다. 이는구원이란 뜻의소테리아 σωτηρία’ 더불어 루가복음의 예수에 대한 관점을 드러내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소테리아또한아폴루트로시스 더불어 루가만 사용한 단어입니다. 이는 루가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구세주 봤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루가 1:69, 71, 77). 루가복음 1장에즈가리야 송가에는 이러한 구원에 대한 루가의 신학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루가의 관점은 그가 것으로 추정되는 루가복음에서부터 사도행전까지 일관되게 그의 구원 사관을 반영합니다. 성서신학자 콘첼만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는 구약시대로부터 세례자 요한의 시대까지를이스라엘 시대’, 예수의 탄생에서 승천까지를예수의 시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순절 성령 강림의 때부터 재림의 때까지를교회의 시대 부릅니다. 이것이 루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 세상에 드러난하느님의 구속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은총의 사역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루가복음은 세상에서 역사의 시간이 끝이 나는임박한 종말 대해 경계합니다. 루가는 세대가 없어지기 전에 종말이 온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대 언제인지는 어느 누구도 특정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은 루가복음이 쓰였던 당시의 시간보다 훨씬 지연됩니다. 이러한 관점은임박한 종말 기대했던 마르코나 초기 바울로 서신과도 다른 루가만의 시간관입니다. 이를지연된 종말이라 신학자들은 설명합니다. 루가의 관점에서 종말의 때는 사람들이세상에 닥쳐올 무서운 일을 내다보며 공포에 떨다가 기절”(루가 21:26) 정도로 무서운 것이지만, 바로그때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복음을 증언할 때이다.”(루가 21:13 비교)라고 종말의 때에 복음 선포의 중요성을 루가복음은 강조합니다.

 

루가는 종말의 예언을 마르코복음 13장을 참조하여 작성했습니다. 마르코복음에 약간의 가필을 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구절은 생략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마르 13:32)

 

 

마태오가 마르코를 따라 구절을 착실히 기록한 것과는 대조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께서 그날을 모른다는 것은 구속 사관을 가진 루가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루가의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에 세상을 심판하시는심판주이시면서 또한 동시에 믿는 이들을 구원하실구세주이십니다.

 

이렇게 루가의 신학적 관점을 제가 장황하게 설명을 하는 이유는 해의 주일 전례 독서가루가복음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루가복음의 신학을 이해하는 것은 2022 해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관점을 제공할 것입니다. 루가는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루가복음 17장과 오늘 읽은 21장에 기록을 합니다. 물론 출처는 각각 다릅니다. 루가복음 17장은예수 어록 따른 것이고, 오늘 읽은 루가복음 21장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마르코복음 13장을 따른 것입니다. 지난번에 설교했던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다음에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한 예고가 나오는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또한 마르코복음의 틀을 루가는 유지했습니다. 마르코가성전 파괴 예언 종말 사건과 연결시킨 것과 대조적으로 루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루가는 담담하게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해 진술합니다. 그런 후에재난(ὠδίνες, 해산의 고통) 시작 알립니다. ‘해산의 고통 시작되듯이 종말은 여기저기에서거짓 그리스도들이 출현하고, 전쟁의 소식이 끊이지 않으며, 자연재해와 기근, 전염병들이 창궐합니다. 그리고 무슨 표징인지는 모르지만, 하늘에 무서운 일들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 대한 대박해가 시작되고, 바로 그때가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증언할 때라고 말합니다. 루가는 성령을 강조한 복음사가답게 그러한 박해의 시대에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언변과 지혜 주시고,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는다 보호의 약속도 합니다. 그런 후에 예루살렘의 멸망이 오고, ‘사람의 아들 재림하십니다. 그분의 권능으로 인해 여러 표징들이 땅에 나타나고, 기이한 자연현상에 사람들은 두려움에까무러칠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날이 두려운 심판의 날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기쁨이 넘치는구원의 이므로허리를 펴고 고개를 (당당히) 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슬픈 일이지만, 심판받을 자와 구원받을 자의 운명이 마지막 때에 이렇게 갈립니다.

 

이러한 종말의 프로세스를 묵상하다 보면, 황당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즘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재해와 기후변화, 환경파괴와 전염병 그리고 기아와 전쟁 그러고 보면 이러한 일들이 너무 자주 일어나니 이제 무덤덤해지고 놀랍지도 않게 됩니다. TV 통해 보는 호주와 미국의 산불 소식이나 바다에 침몰하여 죽는 난민들의 처지는 남의 일같이 느껴지고, 아프가니스탄이나 미얀마 사태에 대해서는 마치 뉴스의 사건 기사처럼 대수롭지 않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마치해프닝처럼 취급되어 일회적인 사건이 되고 맙니다. 사건들이 갖는 중요성이나 의미, 경각심 등은 무시되기 일쑤입니다. 마치 우리의 일상과는 전혀 무관한 것처럼. 그러니 우리는무화과나무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운 징조임을 아는 간단한 때의 분별력 조차도 이미 잃은 같습니다. 불감증이라 할까요? 너무 무뎌졌습니다. 만연한 자연재해와 환경오염 소식, 그리고 많은 사건과 정보들의 홍수가 우리의 모든 감각을 무감각하게 만든 아닌지 생각됩니다.

 

이와 같이 전례력의 시작을 우리는 종말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은 심판과 구원이라는 심각한 양가성(ambivalence) 지닙니다. 양가성은 구원받을 자와 심판받을 모두를 포함합니다. 그래서 종말의 심판은 모든 모호한 것과 분명한 것을 가르고, 희미한 것과 선명한 것을 가릅니다. 어둠과 빛을 나누고, 사망과 생명을 나눕니다. 어둠과 사망의 권세는 이상 구원의 앞에 힘을 잃고, 두려움은 모든 심판받을 자들을 휘감을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의 메시지가 분명 성서에 기록된 예언이지만, 우리는 그러한 메시지에 마냥 즐거워할 수도 자랑할 수도 없게 됐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잘못된 가르침과 이단들이 이러한 종말의 때를 왜곡하여 가르치는 바람에 우리의 판단이 더욱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종말과 구원의 때를 얘기하면 교회에서 오히려종말론자 오해를 받습니다. 현실감각 없이 현실을 외면하고 내세만 추구하는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예고가 분명 성서의 기록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종말이 주는 핵심 메시지는 심판보다는 구원에 방점이 찍혀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종말론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것이므로 유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종말에는 시대의 종말뿐만 아니라개인의 종말또한 포함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개인의 종말 다른 말로죽음이라 있습니다.

 

종말의 처참한 상황을 말하면서도 루가는 깨어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오히려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우리는 두려움에까무러치는 사람들 달리 몸을 일으켜머리를 높이 치켜들라 말합니다. 그동안 받아 왔던 억압과 삶의 짓눌림, 의기소침에서 벗어나 당당히 고개를 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이제 구원의 , ‘하느님의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루가는 우리가 당당할 근거로 다음과 같이 가지를 제시합니다. 하나는성령이고, 다른 하나는기도입니다. 

 

그때야말로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때이다. 이 말을 명심하여라. 그때 어떻게 항변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마라. 너희의 적수들이 아무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주겠다. (루가 21:13-15)

 

 

다른 복음사가 보다 루가복음은 성령을 매우 강조합니다. 루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성령이란 단어는 무려 100 넘게 사용됩니다. 마리아의 잉태에서부터 루가복음 전체를 관통하여 사도행전에 이르기까지 성령은하느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물론 루가복음에서는 요한복음처럼 성령이 아직인격화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기운과 능력을 드러내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방금 읽어드린 말씀처럼 성령께서는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도 알려주십니다. , 우리가 필요할 견딜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루가의 구원관에서 재림하실 예수께서는 미래성을 대변하지만, 성령은 하느님의 현재성을 대변합니다. 성령께서는 바로지금 여기에 우리를 도우시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활동하십니다. 그래서 루가는 성령을 존재론적으로 파악하기보다 하느님의 구원사에 있어서 특별한 역할과 기능으로 설명합니다. 그러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의 때까지교회의 시대 주어진 복음 전도의 사명을 감당할 있게 것입니다.

 

루가복음에서 성령과 단짝을 이루는 단어는 바로기도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앞으로 닥쳐올 이 모든 일을 피하여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가 21:36)

 

종말의 때에깨어서 기도하라라고 강조합니다. 주님께서도 틈만 나시면 제자들과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홀로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오순절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도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기도할 때였습니다. 루가는 기도가 우리와 성령을 연결시키는 고리임을 간파했습니다. 오직 기도만이 성령의 역사를 현재의 시간과 장소로 이끌어 온다고 믿은 것이지요. 그러므로성령과 기도 하느님의 구원사의 역할을 감당함과 동시에 우리 그리스도인에게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부심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됩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권능을 덧입기 위해 스승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는 이야기를 보면 구약의 시대에 성령은 특별한 사람에게 한정적으로 주어지는 하느님의 능력이었고, 누군가에게 전수될 있는 능력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대한 요엘 선지자의 예언처럼 그러한 능력이 모든 이들에게 부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루가의 성령론이고 그것이 가능해진 것은 예수의 부활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에 나는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아들과 딸은 예언을 하리라.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리라. 그날, 나는 남녀 종들에게도 나의 영을 부어주리라. (요엘 3: 1-2)

 

 

주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 성령께서는 모든 믿는 이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련의 일들이 가능함은 우리의 때가 바로 종말의 때인교회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말의 두려움 때문에 혼절하는 사람들같이 존재론적으로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능력에 의해 자부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종말의 때에 담대하게 우뚝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과 핍박, 삶의 고단함과 실존의 배반이 아무리 우리를 짓누르고, 세상이 우리를 속이고 무시해도 우리는 의지할 한가닥 희망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부어주신 성령의 은총은 우리를 깊은 두려움의 골짜기에서도 길을 잃지 않게 하는 희망의 지팡이가 됩니다. 바로 이것이 은총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좌절하여 포기하는 법을 성령 안에서 배우지 못했습니다. 희망은 우리 자부심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대림절은 그러한 희망을 우리가 재확인하는 시간입니다. 머리를 꼿꼿이 들고 당당하게 우리는 종말의 때를 맞이하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살아야 것입니다. 오늘이 바로마지막 이라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종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로 침투해 들어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루가의 관점에서 오늘은 종말 됩니다. 루가가 종말의 때에 대해갑작스러움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개인적 종말이갑작스럽게개인에게 닥치는 것과 유사합니다. 아무도 종말을 예측할 없습니다. 미래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래는 끊임없이 기도하는 자를 통해 현재로 침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우리가 모른다고 두려움 속에서 의기소침하지 맙시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론적인 근원에서 이미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을 확증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확증은 예수의 십자가로 환원됩니다. 그러므로 멸망받을 사람들처럼 고개를 떨구고 어깨가 처지지 않도록 힘을 냅시다.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당당히 우리에게 허락된종말의 오늘 살아냅시다. 대림절의 기다림의 시간이 우리의 당당함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아멘.

 


 

전례독서: 대림1주일(다해)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밤이 깊을수록 아침이 가까워지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항상 깨어 주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모든 성인들과 더불어 경배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예레 33:14-16

14 야훼가 선언한다. 장차 내가 약속한 복을 이스라엘 국민과 유다 국민에게 그대로 내릴 날이 온다. 15 내가 다윗의 정통 왕손을 일으켜줄 , 때가 온다. 그는 세상에 올바른 정치를 것이다. 16 유다는 길이 열려 예루살렘에서는 모두들 마음놓고 살게 되리라.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가리켜야훼 우리를 되살려주셨음.’이라고 부를 것이다.

 

 

시편 25:1-10

1    주여,
.     영혼이 당신을 우러러 뵈오며
.     나의 하느님당신만을 믿습니다.
2    그러므로 부끄러운 당하지 않게 하시고
.     원수들이 으시대지 못하게 하소서.
3    당신만을 믿고 바라면 망신을 당하지 않으나,
.     당신을 함부로 배신하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4    주여, 당신의 길을 가리켜주시고
.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쳐주소서.
5    당신만이 나를 구해 주실 하느님이시오니,
.     당신의 진리 따라
.     나를 인도하시고 가르치소서.
.     날마다 당신의 도움만을 기다립니다.
6    주여, 당신의 자비와
.     한결같으신 사랑을 기억하시고
7    젊어서 저지른 나의 잘못과 죄를 잊어주소서.
.     주여, 어지신 분이여,
.     자비하신 마음으로 나를 생각하소서.
8    주여, 당신은 바르고 어지시기에
.     죄인들에게 길을 가르치시고
9    겸손한 옳은 길로 인도하시며
.     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십니다.
10  당신의 계약과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     당신의 모든 길이 사랑이며 진리입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1데살 3:9-13

… 9 우리는 여러분의 일로 해서 우리 하느님 앞에서 기쁨을 맛보고 있습니다. 모든 기쁨을 생각하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10 우리는 여러분을 다시 만나 여러분의 믿음에 부족한 것을 채워줄 있게 되기를 밤낮으로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11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예수께서 친히 우리의 길을 열어, 우리가 여러분에게 있게 되기를 빕니다. 12 그리고 주님께서 여러분의 사랑을 키워주시고 풍성하게 해주셔서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듯이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기를 빕니다. 13 그리하여 여러분의 마음이 굳건해져서, 우리 예수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다시 오시는 , 우리 아버지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으로 나설 있게 되기를 빕니다.

 

 

루가 21:25-36

25 “ 때가 되면 해와 달과 별에 징조가 나타날 것이다. 지상에서는 사납게 날뛰는 바다 물결에 놀라 모든 민족이 불안에 것이며 26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올 무서운 일을 내다보며 공포에 떨다가 기절하고 것이다.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27 그러나 때에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것이다(다니 7:13-14). 28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어라.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것이다.

29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런 비유를 들려주셨다. “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들을 보아라. 30 나무에 잎이 돋으면 그것을 보아 여름이 벌써 다가온 것을 알게 된다. 31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온 알아라. 32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대가 없어지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나고야 것이다. 33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4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날이 갑자기 닥쳐올지도 모른다. 조심하여라. 35  날이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덫처럼 들이닥칠 것이다(이사 24:17). 36 그러므로 너희는 앞으로 닥쳐올 모든 일을 피하여 사람의 아들 앞에 있도록 깨어 기도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