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 21. 나해_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
사무하 23:1-7 / 시편 132:1-12(13-18) / 묵시 1:4하-8 / 요한 18:33-37
‘거룩한 편가르기’
채야고보 신부 / 성공회 제주한일우정교회 사제, Artist
처음 빌라도는 예수 편도 아니고 유다인 편도 아닌 모호한 위치에 섰습니다. 물론 뼛속까지 정치꾼이었던 그의 성향은 힘 있는 편으로 이미 기울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의 속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에 대한 기소 사실은 그에게도 모호하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정치적 문제라면 모를까 종교적 문제는 그의 관심 밖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교 최고회의인 산헤드린의 요청을 총독으로서 무시할 수 없었을 겁니다. 빌라도를 찾아간 유다인들은 자신들에게는 죄인을 죽일 권한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예수의 처형을 로마에 부탁합니다. 비굴하게도 자신들이 혐오하는 로마의 권력에 머리를 조아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7장에서 산헤드린 앞에서 증언했던 스테반 부제를 돌로 쳐 죽인 것은 로마인들이 아니라 유다인들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테반 부제를 돌로 쳐 죽일 때 유다인들이 총독의 재가를 받았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은 합법적으로는 사람을 처형할 수 없었지만, 종교적으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를 직접 죽이지 않고 로마 법정에 세우려 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빌라도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예수의 처형을 요청하는 유다인들의 모습은 더욱 비겁하게 보입니다. 요한복음 18장 28절에서 19장 16절까지의 기록에 의하면 빌라도는 예수를 은밀하게 두 번 심문을 했고, 한 번은 조롱과 채찍질을 했으며, 세 번 예수를 유다인 앞에서 놓아 주려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그의 행동은 그가 예수의 처형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또 그가 성격상 우유부단했다는 점과 유다인들의 환심을 얻고 싶어 했고 또 동시에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 전가하려 했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참 복잡한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서 말씀은 빌라도가 행한 두 번의 심문 중 첫 번째 심문입니다.
요한복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이미 선재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처음부터 선포한 것입니다. 이는 공관복음들이 예수의 정체를 밝히는 데 관심을 가진 것과 비교해 요한복음의 다른 점입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에게 묻습니다. 이제 진리가 명확히 드러났으니 당신은 어느 편에 서겠습니까? 진리의 편입니까? 아니면 그 반대편입니까? 즉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지 말지를 결정하라는 요청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빌라도는 정확하게 진리의 반대편에 섭니다. 그는 예수를 풀어줄 듯하면서도 결국은 유다인들 편에 섭니다. 오늘 예수와 나눈 빌라도의 대화는 그가 진리의 자리에 설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기획은 철저히 요한복음 기자의 편집 구성일 텐데, 최소한 요한복음 기자는 로마에 어느 정도 우호적인 성향을 가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예수 처형의 책임을 빌라도보다 유다인들에게서 찾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는 요한복음 공동체의 삶의 자리가 반영된 결과일 겁입니다. 요한복음을 자세히 읽어보면 요한공동체가 처음에는 유다교 회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차츰 유다교 회당 세력과 대치하는 상황으로 나아가다 결국에는 결별을 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요한복음의 감춰진 행간에서 읽히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유다인들에게 매우 적대적인 경향을 띱니다. 사실 ‘유다인’이란 표현은 전적으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폄하해서 부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조차도 ‘이스라엘’이란 호칭보다 ‘유다인’이란 적대적 호칭을 사용하십니다. ‘유다인’이란 표현이 ‘이스라엘’보다 더 자주 사용됩니다. 오늘 빌라도는 “네가 이스라엘의 왕이냐?”라고 묻지 않고 “유다인의 왕”이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요한복음서의 반 유다적 감정을 드러낸 표현입니다. 유다인 회당에서 쫓겨나는 상황을 맞이한 요한공동체의 심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요한의 공동체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을 설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요한 공동체에 가해진 핍박은 바로 유다인들로부터의 핍박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삶의 자리를 그 배경으로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따라 유다인들에게 그들과 똑같은 반감을 가질 이유은 없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을 서구 기독교는 교묘하게 이용하여 유다인 핍박의 근거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매우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건 요한복음의 삶의 자리를 고려하지 않고 요한복음을 문자적으로 잘못 해석한 기독교의 오류였습니다. 그 결과 2차 세계대전에서 인간의 악이 모두 결집된 아우슈비츠의 홀로코스트를 인류는 경험하게 됩니다. 증오는 이토록 무서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다시 빌라도에게로 돌아갑니다. 빌라도가 예수께 건넨 첫 질문은 진리에 대한 정답이었습니다.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 말을 한 빌라도의 진의를 다시 확인하십니다. “그것이 너의 생각이냐 아니면 남의 생각이냐?” 그러자 그는 마치 못 먹을 것을 씹은 듯한 표정으로 혐오성 발언을 합니다. “나를 유다인인 줄 착각하지 마라!” 여기에서 빌라도는 진리로 다가갈 한 걸음을 놓칩니다. 진리란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모두 진리인 것이 진리입니다. 진리는 인종과 신분을 넘어 누가 발설했든 상관없이 진리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라고 불릴 수 없습니다. 그는 진리를 들먹였지만 사실 진리에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께서 자신의 통치는 세속적인 통치와 다르고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진리에 속함을 주장하자, 이를 단순히 종교적 발언으로 취급하며 귀찮은 듯 불쾌감을 드러내며 “아무튼 네가 왕이냐?”라고 또 질문을 합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말을 받아, 이를 그의 고백으로 되돌리며 ‘이것은 너의 말이다’라고 다시 한번 그의 진리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킵니다. 그리고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듣는다”라는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세 번의 기회를 무시하고 빌라도는 결국 진리의 반대편에 서기로 결심을 합니다. 우이독경. 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직접 자신 앞에 서서 진리를 전했는데도 그는 눈과 귀를 막고 그 반대편에 섭니다. 교만과 오만 그리고 무지는 그렇게 사람의 눈과 귀를 멀게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누가 와서 어떤 말을 전한 들 그에게 진리는 늘 닫힌 문일 뿐입니다. 그래서 들을 귀 있는 자가 복된 것입니다.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은 종말론적인 메시아의 출현을 상정하며 미래를 향한 우리 교회의 열린 고백입니다. 또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끝까지 ‘유다인의 왕’으로 경멸적으로 치부했지만, 그는 진리 앞에 서서 진리를 알아보지 못한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인가?”(요한 18:38)라고 예수께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그는 이 질문으로 진리의 편과는 거리가 먼 곳에 서게 됩니다. 주님 또한 이 말에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으십니다. 진리에 대한 논의가 여기에서 끝이 납니다.
진리에 대해 요한복음만큼 명확하게 우리에게 말씀하는 복음서는 없습니다.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요한 17:17)
이 말씀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 당신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이는 요한복음 17장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고별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마치 유언처럼. “이 ‘하느님의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이 진리 그 자체이시다”라는 요한복음의 선포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라는 요한복음 1장 1절의 말씀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진리임이 세상에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의 신학의 진수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마지막 유언은 제자들이 이러한 진리를 위해 거룩하게 헌신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진리의 편에 서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제자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설 ‘존재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존재의 자리’는 결국 ‘진리의 자리’가 됩니다.
사는 게 갑갑하고 세상의 분주함에 휩쓸려 우리는 가끔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혼동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의 일상이 버겁게 느껴져 마치 침대가 우리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듯 몸이 자유롭지가 않습니다. 스트레스와 마음 속에 점점 넓어지는 공허는 하루의 일상을 버겁게 시작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열심히 살고 있지만, 과연 어느 편에 서 있는 것일까요? 진리의 편입니까? 아니면 그 반대편입니까? 무엇이 우리를 이러한 일상의 허무에서 요한이 발견했던 진리의 진술로 우리를 이끌어 갈까요?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의 내러티브는 항상 쳇바퀴 돌듯이 반복되고, 단어도 단순하고, 일상의 플롯 또한 단조롭습니다. 참 재미없는 일상입니다. 일상은 늘 우리가 원했던 방향으로 나아갈 듯하면서 우리를 매일 배반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저녁이면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은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밤을 맞이합니다. 우리의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늘 해는 정확한 시간에 지고 떠오릅니다. 태고적부터 입력된 질서대로 자연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우리의 주변을 휘감습니다. 일상의 규칙성은 우리를 늘 정해진 틀 안에 가둡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틀을 벗어나 또 다른 자리에 서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진리를 앞에 두고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던 빌라도처럼 우리는 진리가 우리 앞에서 사라진 후에야 그 진리를 그리워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잃고 나서야 그것의 귀함을 깨닫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귀하고 중요하고 소중한 것들은 늘 우리 곁에 함께 자리합니다. 그것이 진리의 자리이고 진리의 편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마음껏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우리는 코로나 이전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진리의 자리에 속한 것들은 일견에 중요해 보이지 않는 것들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 소망, 사랑이란 것이 늘 우리와 함께할 것으로 알고 그것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합니다. 톨스토이의 동화 같은 소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천사 미하일’은 하느님으로부터 인간들 속에서 세 가지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그들과 함께 지내도록 인간 세상에 추방당한 천사입니다. 그가 선한 구두수선공을 만나 세상에 대해 눈을 떠가면서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하느님의 질문에 답을 찾게 됩니다. 그가 깨달은 세 가지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사람의 마음에는 사랑이 있다.”입니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사랑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을 그는 발견합니다. 그다음은 “사람에게는 내일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입니다. 내일 일을 모르면서 오늘을 막사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입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각자가 기회가 되실 때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아무리 악하고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도 결국에는 “사랑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는 톨스토이의 메시지입니다. 인간은 매 순간 빌라도처럼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의 순간 우리 안에 작동하는 기재는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빌라도처럼 수시로 그러한 내면의 소리를 무시하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 중에 누군가는 그러한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런 장황한 저의 설교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진리의 편에 서는 것은 오직 사랑으로 가능하다는 것. 또 사랑타령을 하는 것 같이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사랑에서 마침표를 찍게 마련입니다. 다른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늘 새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이렇게 우리와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지금 이 순간 결단을 하면 바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매일 쳐다봐서 지겹게 여겨지던 남편이나 아내도 사랑의 편에 서서 바라보면 사랑스럽게 보이는 법입니다. 사랑의 편에 서면 누구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진리의 자리를 빌라도처럼 우리가 애써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의지이고, 진리의 편에 서는 것도 우리의 의지입니다. 진리는 단순하게 감 떨어지듯 기다리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총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 진리의 편에 서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지막 유언으로 제자들을 거룩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거룩'은 단순히 신령한 사람처럼, 신심 깊은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거룩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편에 선 자는 거룩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거룩한 편에 서서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진리 앞에서 진리를 보지 못했던 빌라도처럼 되지 말고, 진리를 찾아 우리 주변에, 가까운 우리 이웃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진리는 늘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앞에 있으며, 우리 뒤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편에 서는 것이 말같이 쉽지 않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성령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한 성령의 은총이 우리와 함께하시어 우리를 모두 진리의 편에 서게 하시길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례독서: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하느님은 우리 주님이시며 왕이신 그리싀도 안에서 만물을 회복하시나이다. 구하오니, 죄로 인하여 갈라진 이 세상을 주님의 온유한 사랑으로 하나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사무하 23:1-7
1 이것은 다윗이 남긴 마지막 말이다.
. 야곱의 하느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자요,
. 이스라엘의 수호자가 귀여워하시는 자,
. 이새의 아들 다윗의 말이다.
. 가장 높으신 분이 세우신 영웅의 말이다.
2 야훼께서 나에게 영감을 주시어 말씀하셨다.
. 당신의 말씀을 내 혀에 담아주셨다.
3 야곱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 이스라엘의 바위 되시는 이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 “백성을 정의로 다스리는 자,
. 하느님 두려운 줄 알고 왕노릇 할 자,
4 그는 아침에 터져 오는 햇빛,
. 구름이 걷힌 아침의 해 같아,
. 이슬을 머금은 푸성귀가 땅에서
. 이 빛을 받아 자란다.”
5 야훼께서 나와 영원한 계약을 맺으시고,
. 조목조목 잘 지켜주셨는데
. 하느님께서 붙드시는 나의 왕실이 어찌 흔들리랴?
. 하느님께서 나를 좋아하시어 번번이 구해 주셨는데,
. 나의 왕실이 어찌 번성하지 않으랴?
6 그러나 하늘 두려운 줄 모르는 자들은
. 마치 빈들의 가시나무 같아
. 사람들이 집었다가도 곧 내버린다.
7 쇠꼬챙이나 창대를 가지지 않고는
. 건드리지 못할 것들,
. 불에 살라 태워버릴 수밖에.
시편 132:1-12(13-18)
1 주여,
. 다윗을 생각해주소서. ◯
. 얼마나 애썼는지 생각하소서,
2 주님께 맹세하며,
. 야곱의 전능하신 분께 선서하며 ◯
.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3 “주님 계실 장막을 마련하기까지 ◯
. 야곱의 전능하신 분이 계실 곳을 찾을 때까지,
4 나는 내 집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
. 잠자리에 들어 편히 쉴 수도 없습니다.
5 눈붙이고 잠들지 못하겠습니다. ◯
. 눈시울에 선잠조차 붙일 수가 없습니다.”
6 계약궤가 있다는 말을 에브라다에서 듣고 ◯
. 야알 들에서 그것을 찾았습니다.
7 그분 계시는 곳으로 들어가자. ◯
.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자.
8 주여, 당신 쉬실 곳으로 가십시오. ◯
. 당신의 힘 깃들인 계약궤와 함께 가십시오.
9 당신의 사제들은 정의의 옷 펄럭이고 ◯
. 당신을 믿는 이들 입에서는
. 기쁨의 환성 터지게 하소서.
10 당신의 종 다윗에게 하신 맹세 ◯
. 몸소 기름부어 세우신 왕을 물리치지 마소서.
11 주께서 다윗에게 하신 맹세, ◯
. 어길 수 없는 진실한 맹세이십니다.
¶ “네 몸에서 난 후손을 ◯
. 너에게 준 왕좌에 앉히리라.
12 네 후손이 나와의 계약을 지키고
. 내가 가르쳐 준 법대로 살면 ◯
. 대대로 네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리라.”
[13 주, 시온을 택하시어 ◯
. 여기에 계시기로 정하시며 이르기를,
14“이 곳은 영원히 나의 안식처, ◯
. 여기가 좋으니 나 여기 살리라.
15 시온에서 먹을 복을 듬뿍 내리고 ◯
. 그 가난한 자들을 배불리 먹게 하리라.
16 그 사제들은 구원의 옷을 입고 ◯
. 신자들은 즐거운 환성을 올리리라.
17 여기에서 다윗이 뿔이 돋아나게 하고 ◯
. 내가 세운 왕의 등잔에 불을 켜 주리라.
18 그의 머리에는 빛나는 면류관을 씌워 주고 ◯
. 그의 원수들에게는 누더기를 입혀주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묵시 1:4하-8
4 … 지금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그분과 그분의 옥좌 앞에 있는 일곱 영신께서, 5 그리고 진실한 증인이시며, 죽음으로부터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시며, 땅 위의 모든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은총과 평화를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피로써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6 우리로 하여금 한 왕국을 이루게 하시고 또 당신의 하느님 아버지를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그분께서 영광과 권세를 영원 무궁토록 누리시기를 빕니다. 아멘.
7 그분은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다니 7:13
.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이며
.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입니다.
. 땅 위에서는 모든 민족이 그분 때문에
. 가슴을 칠 것입니다. 즈가 12:10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8 지금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18:33-37
… 33 빌라도는 다시 관저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를 불러놓고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 하고 물었다. 34 예수께서는 “그것은 네 말이냐? 아니면 나에 관해서 다른 사람이 들려준 말을 듣고 하는 말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5 빌라도는 “내가 유다인인 줄로 아느냐? 너를 내게 넘겨준 자들은 너희 동족과 대사제들인데 도대체 너는 무슨 일을 했느냐?” 하고 물었다. 36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다인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 37 “아무튼 네가 왕이냐?” 하고 빌라도가 묻자 예수께서는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했다.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듣는다.” 하고 대답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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