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 19. 다해_ 대림 4 주일
미가 5:1-4상 / 루가 1:46하-55(성모송가) / 히브 10:5-10 / 루가 1:39-45(46-56)
“하느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
채야고보 신부 / 성공회 제주한일우정교회, Artist
오늘 읽은 성모송가(Magnificat)는 저녁기도 때 자주 부르는 곡으로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노래입니다. 아마도 원시기독교공동체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던 것을 루가가 수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루가복음에만 나오는 ‘루가의 특수자료’입니다. 수사법적으로 서로 상반된 것을 대비시켜 주제를 드러내는 ‘대비법’을 사용합니다. ‘비천한 신세’와 ‘마음이 교만한 자’,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와 ‘마음이 교만한 자’, ‘권세 있는 자’와 ‘보잘것없는 이’, ‘배고픈 사람’과 ‘부유한 사람’ 등입니다. 이러한 대비를 통해 이 노래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것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빈자의 영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 마치 ‘편애’를 하시는 것처럼 루가복음은 일관되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울어져 있습니다. ‘빈자의 복음서’ 답게 루가복음은 “가난한 자들, 아나윔 Anawim”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과 자비를 강조합니다. 물론 마태오복음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만, 루가가 외적인 억압과 가난을 주로 말하는데 반해 마태오는 영적이고, ‘내적인 핍절’에 더 중점을 둔다는 점이 다른 차이점입니다. 그러나 저는 성모송가가 언급한 ‘부자들’이나,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 ‘권력을 가진 사람들’, ‘하느님이 두렵지 않은 자들’이 루가복음을 읽는다면 과연 어떤 느낌일까? 종종 생각합니다. 특히 저는 부자가 아니라 상상이 잘 안 됩니다만, 부유한 사람들이 이 루가복음을 제대로 읽는다면 과연 어떤 느낌일지 궁금합니다. 아마 건성으로 읽으면 특별한 것을 느끼지 못하겠지만, 루가복음을 진지하게 읽는다면 남보다 부유하다는 것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물론 복음서가 말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무조건 착하고 의롭고, 반대로 부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는 분명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가난의 영성’은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멸망하면서 팔레스타인에는 늘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이분법적인 착취의 구도가 형성되어 왔습니다. 피지배층은 늘 정치적, 국가적 위기 속에서 자신의 삶의 기반을 잃고, 새롭게 등장하는 지배층에 의존하려 했지만, 그러한 기대는 늘 피지배층의 좌절로 끝이 났습니다. 그들은 늘 지배층으로부터 착취를 당했고 누구도 그들을 그러한 억압에서 건져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불평등적 착취 구조는 늘 가난한 자들만의 독특한 관점과 공동체의 염원이 담긴 구원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꿈꾸게 했을 것입니다. ‘메시아’, 즉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이러한 압제자들로부터 구원해줄 구원자의 등장으로 자신들의 고달픈 삶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희망. 아마도 그러한 ‘메시아 대망 사상’은 이러한 ‘가난한 자’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이 루가복음은 ‘가난한 자들’이라는 삶의 자리를 그 배경으로 하고 ‘가난의 영성’을 그 기초로 합니다. 마태오와 루가가 이러한 ‘가난한 자’에 대한 구원의 선포를 한 것은 ‘예수 어록’을 따른 것이며, 이는 ‘이사야서 61:1’을 그 뿌리로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루가복음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루가복음 7장 22절은 이러한 이사야서 61장 1절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눈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루가 7:22)
공동번역성서의 번역이 옛날 것이라 매우 거친 장애인 비하의 표현들이 있어 ‘표준새번역’으로 읽었습니다. 여기에서 거론된 ‘시각장애인’, ‘지체장애인’, ‘나병 환자’, ‘청각장애인’, ‘죽은 사람’, ‘가난한 사람’이라는 평행법적 나열은 모두 마지막에 있는 ‘가난한 사람’이란 말로 수렴됩니다. 이 ‘가난한 사람’은 히브리어로 ‘아나윔 Anawim’이라 합니다. 그 뜻은 ‘가난’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온유’, ‘겸손’으로도 번역 가능합니다. 여기에서 루가는 이 ‘가난’을 헬라어 ‘πτωχός 프토코스’를 사용했습니다. 문맥상 루가는 이를 ‘영적인 가난’보다 실제적 ‘가난’으로 이해했습니다. ‘아나윔’에는 앞에 언급된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포함해서, 유대교에서 흔히 ‘죄인’으로 취급된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이를 요아킴 예레미야스는 ‘(사회적, 종교적으로) 나쁜 평판을 가진 자’, ‘부도덕한 자’, ‘경멸을 받는 직업에 종사하는 자’ 들이라 요약한 바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리’나, ‘소작료징수인’, ‘고리대금업자’ 등과 같이 유대 사회에서 죄인으로 취급받는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그들은 단순히 가난한 자들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경멸을 받고 자신들의 공동체와 유대교로부터 소외된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아나윔’은 “굶주린 자들, 절망에 빠진 자들, 병든 자들, 수고하고 지친 자들,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게를 짊어진 자들, 삶의 희망을 잃은 자들, 모욕받는 자들, 따돌림당하는 자들, 그리고 종교로부터 소외된 죄인들”을 모두 포함합니다. 그러고 보면 ‘가난한 자’는 경제적인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가난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 없이는 단 한순간도, 단 하루도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자들은 아마도 여기에 포함된 것 같지가 않습니다. 이것이 성모송가에 담긴 ‘빈자의 영성’입니다. 이러한 ‘가난한 자들’의 반대편은 그들을 억압하는 세력입니다. 그러므로 루가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원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것은 단순히 자신의 공동체의 ‘삶의 자리’만을 배경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보편구원’을 드러내는 루가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루가복음의 가장 중요한 화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서 61장 1절에 표현된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할 기쁜 소식”입니다. 이제 ‘아나윔’으로 불리던 이런 “가난한 사람들”은 단순히 피지배층으로 분류되어 서러움을 받는 계층이 아니라 자신들이 하느님 안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자각하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하느님께 자신들을 의탁하는 무리”가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자신의 자비의 자리로 소환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대림 4주일을 보내며 세상의 구원자로 오실 아기 예수님의 출현을 기다립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가 2:14)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과 처음으로 화해의 선포를 하신 하느님의 영광이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인 목자들을 통해 세상에 선포된 것은 루가복음의 주제와 가장 부합됩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늘 읽은 성모송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백과 선포를 담고 있습니다. 억눌리고 핍박받고 수탈당하던 자들이 이제 한 아기로 말미암아 희망을 노래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노래를 불렀던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얼마만큼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주체적으로 해방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절망 가운데서 다시 희망을 노래할 수 있었다는 점은 위대한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잘난 자’와 ‘못난 자’로 대비되는 이 성모송가에는 이와 같이 고난 받는 민중의 애환과 희망이 서려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역의 시작이 이러한 ‘아나윔들’과 함께 시작되고 주님께서도 친히 그들의 친구가 되어 줌으로써 복음은 어두움을 밝히는 자비의 빛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대림절의 시작을 가장 어두운 색의 초를 밝히고 점점 밝은 색의 초로 매주일 하나씩 켜가는 것은 이러한 복음의 빛, 그리스도의 빛이 어둠을 하나씩 밝힌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빛은 늘 가난한 자들을 향하고, 그 빛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제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자들이 됩니다.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
우리는 과연 어느 편에 속한 사람들입니까? 성모송가가 노래하는 두 편의 사람들 중 우리는 어느 편에 속했습니까? 대림 4주를 보내며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각자에게 진지하게 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성모송가를 부르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과연 ‘하느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까?’ 이 설교를 준비하며 끊임없이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된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통해 나의 위치, 나의 마음을 새롭게 할 회개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성탄의 밝은 빛과 기쁨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정말 진지하게 돌아보고 각자 회개의 시간을 가져보시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한 회개 가운데 성령의 하염없는 자비가 함께 하셔서 커다란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이 가득하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전례독서: (다해) 대림 4 주일
본기도
은혜로우신 하느님, 성자께서는 이 땅에 오시어 은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나이다. 비오니,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그 복된 날을 맞이할 때 기쁨으로 놀라우신 구원의 은총을 찬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미가 5:1-4상
12 그러나 에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 너는 비록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 보잘것없으나
. 나 대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너에게서 난다.
. 그의 핏줄을 더듬으면,
. 까마득한 옛날로 올라간다.
23 그 여인이 아이를 낳기까지 이사 7:14
.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내버려두시리라.
. 그런 다음 남은 겨레들이
.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면,
34 그가 백성의 목자로 나서리라.
. 야훼의 힘을 입고
. 그 하느님 야훼의 드높은 이름으로
. 목자 노릇을 하리니,
. 그의 힘이 땅 끝까지 미쳐
45a 모두 그가 이룩한 평화를 누리며 살리라.
라틴어 성서는 4:14에서 5장이 시작됩니다. 작은 절 번호는 라틴어 성서 기준입니다.
루가 1:46하 – 55 (성모송가)
1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오며, ◯
. 내 마음이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을 기뻐합니다.
2 주께서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으니, ◯
. 이제부터 온 백성이
. 나를 복되다 할 것입니다.
3 전능하신 분께서
. 내게 큰 일을 행하셨으니 ◯
. 주님의 이름 거룩하십니다.
4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
. 대대로 구원의 자비를 베푸십니다.
5 주께서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
.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6 권세있는 자들을
.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
. 보잘 것 없는 이들을
. 높이셨습니다.
7 굶주린 사람을
.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
. 부요한 사람을
. 빈 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8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
. 주님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9 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 약속하신 대로, ◯
.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 영원토록 자비를 베푸십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히브 10:5-10
5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 하느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당신은 율법의 희생제물과 봉헌물을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 그래서 저를 참 제물로 받으시려고 인간이 되게 하셨습니다.
6 당신은 번제물과 속죄의 제물도
.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7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 ‘하느님,
. 저는 성서에 기록된 대로
.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
.
시편 40:6-8
8 그리스도께서 처음에는 “당신은 희생제물과 봉헌물과 번제물과 속죄제물을 원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율법을 따라 바쳐지는 것인데도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9 다음에는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나중 것을 세우기 위해서 먼저 것을 폐기하셨습니다. 1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단 한 번 몸을 바치셨고 그 때문에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루가 1:39-45(46-55)
39 며칠 뒤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걸음을 서둘러 유다 산골에 있는 한 동네를 찾아가서 40 즈가리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을 드렸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받았을 때에 그의 뱃속에 든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 42 큰소리로 외쳤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A] 43 주님의 어머니[B]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44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45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46 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47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 이 마음 설렙니다.
48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C]
.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
. 주님은 거룩하신 분,
50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D]
51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53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54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55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집에서 석 달 가량 함께 지내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A] 성모송으로 알려진 기도문은 루가 1:28, 42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 주께서 함께 하시니 여인중에 복되시며,
. 마리아에게 나신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 하느님의 모친되신 마리아여,
. 이제와 임종시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 – 성공회 기도서
[B] “주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테오토코스를 참조하십시오.
[C] 칠십인역 사무상 1:11
[D] 시편 103:1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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