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 5. 다해_ 대림 2 주일
말라 3:1-4 / 루가 1:68-79 (즈가리야 송가) / 필립 1:3-11 / 루가 3:1-6
‘ 자비의 내장 σπλάγχνα ἐλέους ’
채야고보 신부 / 성공회 제주한일우정교회 사제, Artist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길을 주의 백성들에게 알리게 되리니 이것은 우리 하느님의 지극한 자비의 덕분이라.” (루가 1:77-78a)
여러분은 자비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오늘 우리는 자비에 대해 한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방금 읽은 구절에서 “하느님의 지극한 자비”라는 말은 원래 직역하면 ‘자비의 내장 σπλάγχνα ἐλέους’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의 내장’은 자비를 표현하는 가장 적극적인 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내장’은 우리 몸 안의 ‘오장’을 말하는 것으로 사랑과 미움 등과 같은 인간의 감정을 우리 내장을 빗대어 표현한 말입니다. 우리말에도 ‘애간장이 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인즉 창자와 간이 불에 타는 정도의 아픔을 말합니다. 즉 이러한 ‘내장’을 빗댄 표현은 인간의 가장 극심한 감정과 느낌의 가시적이고 통각적인 은유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가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가 이해 가능한 선에서 유비로 말씀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자비 때문에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우리에게 빛”이 비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절망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화의 길”을 그분의 자비 안에서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이것이 오늘 읽은 성시 즈가리야의 노래가 우리에게 전하는 ‘하느님의 자비’로 인한 ‘하느님의 구원’이라는 주제입니다. 여기에는 유대교의 ‘공로 개념’이나 ‘결의론’이 들어올 여지가 원천적으로 차단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준수와 죄에 대해 매우 민감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은 각 사람의 잘못은 각 개인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뿌리 깊었습니다. 책임감 있는 민족성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나름대로 자신들의 죄를 상쇄시킬 방법이 있었으니, 그것이 ‘공로 개념’과 ‘결의법’입니다. ‘공로 개념’은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이에 상응하는 ‘공로’가 그 죄를 상쇄시킬 수 있다는 개념입니다. 자신의 죄보다 더 큰 공로를 쌓으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뜻이지요. 여기에는 인간의 노력과 행위가 반드시 수반됩니다. 죄에 대한 유대인의 책임감이 이런 ‘공로 개념’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번에는 결의법에 대해 잠깐 살펴봅니다. ’결의법(決疑法, Casuistry)’은 ‘결의론’에 따라, 사안의 정도, 개인의 행위와 양심, 죄의 크고 작음을 가려 처벌을 정하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소소한 죄보다 대죄만 저지르지 않으면 되는 처벌을 피해 갈 길이 생기는 것이지요. 즉, 거짓말하는 것보다 살인이 더 무거운 죄이니 거짓말에 대해서 좀 더 관대한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결의론에 의해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푸는 율법의 준수보다 대신 하느님의 제단에 재물을 바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인정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결의법과 공로 개념에 의해 인간이 죄의 경중과 공로를 따지게 되고, ‘죄’에 대해 점점 무감각하게 되면, 법 해석에 자의적 해석이 끼어들게 됩니다. 이래 가지고는 죄를 지은 한 개인의 온전한 회개는 불가능하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무서울 정도로 ‘자기 합리화와 자기 확신(self-assurance)’, 그리고 자신에게 지나치게 관대하고, 낙관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요즘 표현으로 “남이 하면 부정이고 자신이 하면 로맨스가 되는 것”과 같은 논리입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은 예수께서 가장 싫어하는 ‘외식하는 자(hypocrisy)’로 판명이 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공로 개념’과 ‘결의법’을 완전히 해체시키셨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사들이 그토록 예수님으로부터 공격받고 무시를 당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의론적’으로 자신들의 의를 극대화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경건은 모든 가난하고 나약한 사람들을 자신들로부터 제외시키는 데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리와 창녀 그리고 고아와 과부들을 자신들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신앙적 경건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건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타인을 죄인의 위치에 놓으려고 의도적으로 더 엄격한 율법의 적용을 강조했습니다. 물론 결의법에 따라 자신들의 부정은 늘 합리화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 자기 자신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소외되고 말았습니다. 성서신학자 요아킴 예레미야스는 이러한 자들이 “자기 의적인 소경 됨(self-rightous blindness)” 속에서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겉만 번지르한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우리 주님께서는 ‘죄’나 ‘죄인’에 대해 결의론적으로 발언하신 적이 전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죄의 경중을 따지시기 보다 오히려 ‘간음하는 자’와 ‘음욕을 품는 자’의 구분을 해체시키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간음하는 것이나, 음욕을 마음에 품는 것이나 똑같은 죄인 것이지요. 주님 앞에서 유대교적 결의론과 공로 주의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특별히 강력하게 비난하고 공격했던 부류들은 유대교에서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나 창녀, 문둥병자 등과 같은 소외계층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공동체에서 그러한 소외계층들을 죄인 취급하며 비난하고 손가락질을 하던 소위 ‘경건주의자’들을 더 경멸하셨습니다. 그들은 ‘탕자의 비유’에서 처럼 자기 자신을 아버지의 자비로부터 소외시킨 자비 없는 큰아들과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의적인 경건’은 가졌지만 ‘자비’를 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어떠한 조건도 편견도 판단도 없이 자신의 작은 아들을 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비’의 본질입니다. 자비가 없는 경건은 하느님이 가장 혐오하시는 것입니다. ‘자비’에는 어떠한 판단도 어떠한 결의론적인 잣대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비’는 말없이, 조건 없이 품고 안아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간음한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요한 8:11)
주님께서는 자신에게 나아온 자들의 과거를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그 자비의 시작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 우리는 늘 현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보여주신 ‘자비의 내장’과 같은 마음으로 한 영혼을 품는 사랑입니다. 자기의 공로, 자기의 경건, 자기의 의를 생각하는 순간 우리의 내장은 심각하게 병들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또 사람들 앞에서 함부로 ‘자기 확신’을 자랑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자기 확신’이 의기소침을 물리치고 삶의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정도면 괜찮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결국 ‘자기 기준’으로 남을 판단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공동체에 치명적인 분열의 결과를 낳습니다. 세상에는 경건한 자들보다 평범한 사람들로 넘쳐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경건’에 대한 강요가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특히 교회에서 신앙 생활이나 경건 생활이 깊은 사람들이 늘 주의해야 하는 점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거기에는 저와 같은 성직자도 포함됩니다. 주님께서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정말로 혐오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저도 그러한 비판 가운데 서 있음을 늘 자각하려 노력합니다.
하느님의 구원사를 노래하는 아름다운 ‘즈가리야 송가’는 이러한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즈가리야 송가’는 아침 기도의 독서 후 송가로 우리 성공회 신자들에게 잘 알려진 곡입니다. 이는 아마도 유대 그리스도인들 중 가난한 민중들이 자신들의 구원의 은총을 노래한 것이 그 기원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구전으로 전해오던 이 곡은 갖은 핍박과 고통 속에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발견하고 하느님의 자비의 밝은 빛을 체험한 사람들의 노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떳떳하게’ 당당한 존재감을 가지고 하느님을 섬기게 됐습니다. 더 이상 죄책감으로 자기 비하에 빠질 이유가 없어진 것이지요. 구전으로 전해지던 이 노래는 헬라어로 번역되어 외국에 살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전해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루가복음 기자는 이 원곡에 76절과 77절을 삽입함으로 이를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연관을 시킵니다. 이 즈가리야 송가의 핵심 주제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너무나 명확합니다. 예로부터 예언자들을 통해 예언되어 온 자비의 구원자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진 것은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제 예수를 믿음으로 모든 죄와 실존의 속박에서 벗어나 ‘두려움 없이’ 하느님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로 된 것이 아니라 저 높은 곳에서부터 어둠 속으로 하느님의 빛이 비치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그는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그는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2 디모 2:13)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 하느님의 속성이고 그분은 절대로 자기 부인을 하실 수 없으신 분이십니다. 대림 2주일을 보내며 우리는 우리 안에 이러한 하느님의 변함없는 자비가 충만함을 경험하길 바랍니다. 또한 주님의 자비가 어떻게 우리 삶에 적용되는지 살피고 또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조건 없는 자비를 우리가 베풀 수 있게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특히 날이 추워지니 더욱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노숙자들이나, 독거노인들, 가족도 없이 홀로 지내는 많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대림절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코로나로 우리가 적극적으로 그들과 접촉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래도 그들을 생각하고 우리보다 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을 도울 방법들을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루가복음은 아기 예수 탄생의 최초의 목격자들을 가장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이었던 ‘목동’들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 경건주의자들로부터 소외받던 계층이었습니다. 마태오가 화려한 ‘동방박사’를 등장시킨 것과는 너무 대조적입니다. ‘빈자의 복음’이란 별명처럼 루가복음은 우리를 끊임없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비의 시선을 돌리게 만듭니다. 그리고 실제로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과 늘 함께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가 6:36) 주님은 자신의 몸으로 손수 자비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비 덕분에 오늘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대림절이 이러한 주님의 자비로 충만해지고, 또 우리가 그분의 자비를 닮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전례독서: 대림2주일(다해)
본기도
구원의 하느님, 우리의 잘못된 마음과 행실을 올바르게 고쳐주시나이다. 구하오니, 우리의 삶을 정결하게 하시어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말라 3:1-4
1 “보아라. 나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 그는 너희가 애타게 기다리는 너희의 상전이다. 그가 곧 자기 궁궐에 나타나리라. 너희는 그가 와서 계약을 맺어주기를 기다리지 않느냐? 보아라. 이제 그가 온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2 그가 오는 날, 누가 당해 내랴? 그가 나타나는 날, 누가 버텨내랴? 그는 대장간의 불길 같고, 빨래터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자리를 잡고 앉아, 풀무질하여 은에서 쇠똥을 걸러내듯, 레위 후손을 깨끗하게 만들리라. 그리하면 레위 후손은 순금이나 순은처럼 순수하게 되어 올바른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게 되리라. 4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이 바치는 제물이 옛날 그 한 처음처럼 나에게 기쁨이 되리라. …”
루가 1:68-79 (즈가리야 송가)
68“찬미하여라,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을!
. 당신의 백성을 찾아와 해방시키셨으며,
69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 있는 구세주를
. 당신의 종 다윗의 가문에서 일으키셨다.
70 예로부터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빌려
.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71 원수들의 손아귀에서
. 또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서
. 우리를 구해 주려 하심이요,
72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시고
73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대로
74 우리를 원수들의 손아귀에서 구해 내시어
75 떳떳하게 주님을 섬기며 주님 앞에 한 평생을
. 거룩하고 올바르게 살게 하심이라.
76 아가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예언자 되어
. 주님보다 앞서 와서 그의 길을 닦으며
. 이사 40:3; 말라 3:1
77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길을
. 주의 백성들에게 알리게 되리니
78 이것은 우리 하느님의 지극한 자비의 덕분이라.
. 하늘 높은 곳에 구원의 태양을 뜨게 하시어
79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우리에게
. 빛을 비추어주시고
. 우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주시리라.”
. 이사 9:2, 58:8, 60:1-2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필립 1:3-11
3 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4 기도할 때마다 언제나 여러분 모두를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간구합니다. 5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첫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복음을 전하는 데 협력해 온 것을 나는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6 여러분들에게 훌륭한 일을 시작하신 하느님께서는 그 일을 계속하실 것이며 마침내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완성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신념입니다. 7 여러분은 내가 갇혀 있을 때나 복음을 수호하고 입증할 때에 나와 함께 은총을 나누어 받으며 고생을 같이 해 온 사람들로서 항상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으니 내가 여러분을 그런 생각으로 대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8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지극한 사랑으로 여러분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하느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9 내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원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참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추어 점점 더 풍성해져서 10 가장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릴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순결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게 되고 11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올바른 일을 많이 하여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루가 3:1-6
1 로마 황제 티베리오가 다스린 지 십오 년째 되던 해에 본티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있었다. 그리고 갈릴래아 지방의 영주는 헤로데였고 이두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는 헤로데의 동생 필립보였으며 아빌레네 지방의 영주는 리사니아였다. 2 그리고 당시의 대사제는 안나스와 가야파였다. 바로 그 무렵에 즈가리야의 아들 요한은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3 그리고는 요르단 강 부근의 모든 지방을 두루 다니며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하고 선포하였다. 4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의 책에 기록된 말씀대로였다.
.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5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은 눕혀져
. 굽은 길이 곧아지며
.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
6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칠십인역 이사 4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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