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30. 주의 봉헌 축일_연중4주일 감사성찬례
말라 3:1-5 / 시편 24:(1-6)7-10 / 히브 2:11-18 / 루가 2:22-40
“소명 (2)”
채야고보 신부 / 성공회 제주한일우정교회, Artist
유대인들은 ‘정결법’(레위 12:1-8)에 따라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남아일 경우는 40일 후에, 여아일 경우에는 80일 후에 일년생 어린양 한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를 각각 바쳐야 했습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는 ‘빈자의 제물’이라 해서 비둘기만 바칠 수 있었습니다. 이 경우 부정함의 당사자인 여자만 성전에 방문하면 되는데 오늘 이야기는 요셉까지 함께 했다고 기록됐습니다. 또 ‘속량법’(출애 13:2,12-13,15; 34:20; 민수 3:12-13; 18:15-16)은 맏아들을 낳을 경우 맏아들은 하느님의 소유로 여겼기 때문에 하느님 소유의 아기를 맡아 기른다는 의미로 성전 비용 5세켈(20데나리온)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 경우는 한 달 안에 봉헌하면 되는 것이고, 부모가 모두 성전에 방문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 읽은 루가복음의 기록과 상충됩니다. 이는 루가 기자가 유대 풍습에 정통하지 않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이었을 가능성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러나 루가 기자가 사실 관계에 맞지 않은 것을 기록한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사무엘을 성전에 바친 ‘한나의 이야기’(1사무 1:24-28)에서 영향을 받아 이야기를 각색했기 때문일 겁니다. 이를 기반으로 루가는 ‘정결법’과 ‘속량법’을 동시에 치르는 것으로 기록을 하고, 또 시므온의 축복과 예언자 한나의 이야기를 여기에 덧붙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봉헌 이야기가 결과적으로 더욱 풍성한 내러티브를 획득합니다. 이는 루가의 신학적 의도가 반영된 결과입니다. 그는 자신의 특수자료를 통해 예수의 탄생부터 성장기를 기록하면서 예수께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할 하느님의 구원사의 소명을 감당하실 분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는 구약이 예언한 그리스도이시기에 예루살렘과 성전은 바로 하느님의 구원사의 주 활동 무대여야 했습니다. 루가복음에서 예수는 어린 시절에 자주 예루살렘과 성전에 등장하시고, 그 이후 갈릴래아에서 성장하신 후 그곳에서 사역을 시작하시고 마지막에는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시다가 그곳에 죽으시고 또 그곳에서 부활하셔서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아에서 승천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구속사가 펼쳐지는 역사적 장소인 것입니다. 이는 즈가리야 12장에 기록된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예언과도 일치합니다. 한 구절만 읽어보겠습니다.
“그날이 오면, 나는 유다 부족들을 장작더미 가운데 있는 가마같이, 짚단들 사이에서 타오르는 횃불같이 만들어, 오른쪽, 왼쪽 할 것 없이 그 주위에 있는 백성을 모두 태워버리리라. 그 뒤에 예루살렘은 다시 제자리에 남아, 사람들이 그 안에서 마음 놓고 살게 되리라.” (즈가 12:6)
이렇게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의 소명이 실현되는 장소입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루가 2:32)
시므온은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자로서의 소명을 노래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었던 구원의 특권이 이제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만민에게 기회로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만민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획득하셨을 때,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의 인간 또한 그분의 영광 안에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열린 것입니다. 부정한 것이 거룩함을 덧입을 가능성 말입니다. 예수님 이전에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 획기적인 일이 예수의 성육신 사건으로 말미암아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은총을 거부했습니다. 어떻게 요셉의 아들이 메시아일 수 있지? 라면서 그들은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이 그 영광에 참여할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마치 야곱이 아버지 이사악으로부터 형 에사오 대신에 ‘장자권’을 획득한 것처럼, 또 야곱이 자신의 ‘장자권’을 요셉의 첫째 아들 므낫세 대신 그 둘째 아들 에브라임에게 줬던 것처럼, 야훼의 ‘장자권’은 늘 장자가 아닌 사람들을 통해 계승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 원가지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접붙임을 받은 가지들이 그러한 구원의 ‘장자권’을 획득합니다.
오늘 시므온의 예언과 한나의 이야기는, 예수의 소명이 세례시에 예수와 세례자 요한에게 계시됐던 것처럼, 아기 예수의 소명이 그의 부모에게 드러난 사건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예수의 부모에게만 국한되는 소명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를 들었던 루가 공동체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가 전파되는 곳마다 이러한 소명을 들은 모든 교회 공동체에게도 주어진 소명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소명의 이야기는 우리 교회 공동체에 주어진 공동체의 소명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의 부모는 모든 교회 공동체를 대표하고, 또 모든 교회 공동체는 예수의 부모를 통해 과거의 그 자리를 현재로 소환해 냅니다. 예수의 부모는 그 예언에 감격하였지만, 이내 “예리한 칼에 찔리는듯한” 고통 또한 느껴야 했습니다. 아이가 성장하여 자신의 때를 맞이 할 때까지 오늘 소명의 예언은 예수의 고난의 아픔까지도 오롯이 그 부모와 우리 교회 공동체의 몫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소명을 가슴에 새기며, 감동과 함께 고통 또한 품어야 했습니다. 자신의 자식이 가야 할 그 소명의 길이 어떤 길인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어도 그들은 어렴풋하게 그 길은 영광과 고난이 동시에 공존하는 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묵시록의 말씀처럼 “입에는 달지만 속에는 쓰린 것”(묵시 10:10 비교)과 같습니다. 그것이 기쁨과 고통이 동시에 어우러진 ‘예수의 소명’에 담긴 역설입니다. 예수의 부모는 아기 예수의 소명을 순종으로 자신들 안에 겸손히 품었습니다. 소명이 쓰린 고통을 앞섭니다. 이해보다는 믿음과 순종이 그들을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도 비록 ‘쓰라리지만’ 또한 영광스러운 소명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리 각자는 자기 안에서 발견되는 하느님의 말씀으로만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나를 포함하여 다른 형제 안에서도 동시에 발견되며, 다른 형제 안에 있는 말씀으로 오히려 우리는 더 온전해집니다. 공동체의 소명은 절대로 개인 안에만 갇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내 안에만 머물지 않고, 다른 형제 안에도 머물 수 있도록 끊임없이 공동체 안에서 순환되어야 합니다. 이는 끊임없이 복음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순환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저 발길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희소식을 전하는”(이사 52:7) 자의 발걸음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이사야는 외칩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드러난 하느님의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은 우리 각자 안에, 그리고 우리 형제 안에, 그리고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동시에 거하십니다. 이것이 같은 소명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들의 소명이고, 오늘 예수의 부모가 시므온을 통해 받은 소명과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소명을 이어갈 공동의 책임을 진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소명이 각 개인에게, 또 우리 공동체에게 임했을 때 우리는 예수의 부모처럼, 또 예수의 제자들처럼, 자신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소명을 우리 공동체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동체 내에서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함으로써 드러나는 은사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의미는 하느님의 소명에 믿음과 순종으로 응답하는 적극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주님께 봉헌함으로써 자신들의 소명을 깨닫게 된 것처럼, 우리 자신도 복음의 빚을 진 사람들로서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지 않고는 자신의 소명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소명은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놓을 때 주어지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순종과 믿음 없이는 그러한 봉헌은 불가능합니다. 봉헌은 우리의 전인격과 전존재를 하느님의 소명의 강물에 ‘침잠沈潛’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봉헌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또 우리가 그의 안에, 우리 공동체가 하느님 안에 ‘상호 거주’함을 확인하게 됩니다. ‘침잠’은 그리스도와의 합일의 은유적 표현입니다. 각 개인의 온전한 봉헌으로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친밀감으로 든든한 합일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봉헌과 소명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이 드러납니다. 자발적인 봉헌과 헌신은 각자의 소명을 향하는 지름길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올 한 해 하느님과 우리 교회 공동체를 섬기기 위해 자신을 봉헌하시고자 결단을 하셨습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번잡한 일에까지 많은 분들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드리고자 서원하셨습니다. 각자의 생업과 일상으로 모두 바쁘시지만 그래도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하느님과 교회 공동체를 위해 봉헌해주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그러한 헌신 봉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소명이 우리 각자와 우리 교회 공동체 가운데 흐르고 넘쳐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전례독서: (다해) 주님의 봉헌 축일(연중4주일)
본기도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느님, 오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성전에 봉헌되셨나이다. 겸손히 비오니, 우리도 정결한 마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봉헌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말라 3:1-5
1 “보아라. 나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 그는 너희가 애타게 기다리는 너희의 상전이다. 그가 곧 자기 궁궐에 나타나리라. 너희는 그가 와서 계약을 맺어주기를 기다리지 않느냐? 보아라. 이제 그가 온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2 그가 오는 날, 누가 당해 내랴? 그가 나타나는 날, 누가 버텨내랴? 그는 대장간의 불길 같고, 빨래터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자리를 잡고 앉아, 풀무질하여 은에서 쇠똥을 걸러내듯, 레위 후손을 깨끗하게 만들리라. 그리하면 레위 후손은 순금이나 순은처럼 순수하게 되어 올바른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게 되리라. 4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이 바치는 제물이 옛날 그 한 처음처럼 나에게 기쁨이 되리라. 5 나는 너희의 재판관으로 나타나 점쟁이와 간음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 하늘 두려운 생각없어 날품팔이, 과부, 고아, 뜨내기의 인권을 짓밟는 자들의 죄를 당장에 밝히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시편 24:(1-6)7-10
1 이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모두 주님의 것, ◯
. 이 땅과 그 위에 사는 것이 모두 주님의 것
2 주께서 바다 밑에 기둥을 박으시고 ◯
. 이 땅을 그 물 위에 든든히 세우셨다.
3 어떤 사람이 주님의 산에 오르랴? ◯
. 어떤 사람이 그 성소에 들어서랴?
4 행실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
. 허망한 데 뜻을 두지 않고 ◯
. 거짓 맹세 아니하는 사람이다.
5 이런 사람은 주님께 복을 받고 ◯
. 하느님께 구원받을 사람이다.
6 이런 사람이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며 ◯
. 야곱의 하느님 앞에 나아갈 사람이다.
7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
. 영광의 왕께서 드신다.
8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 힘세고 용맹하신 주님이시다. ◯
. 싸움에 용맹 떨치신 주님이시다.
9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
. 영광의 왕께서 드신다.
10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
. 만군의 주께서 영광의 왕, 그분이시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히브 2:11-18
11 사람을 거룩하게 해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같은 근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거리낌없이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시고 12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당신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며
. 회중 가운데서 당신을 찬미하겠습니다.” 시편 22:22
13 또 “나는 그분을 신뢰하겠습니다.이사 8:17(2사무 22:30 참조)” 하고 말씀하셨고 또 다시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 나와 함께 여기 있습니다. 칠십인역 이사 8: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4 자녀들은 다같이 피와 살을 가지고 있으므로 예수께서도 그들과 같은 피와 살을 가지고 오셨다가 죽으심으로써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악마를 멸망시키시고 15 한평생 죽음의 공포에 싸여 살던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16 예수께서는 천사들을 보살펴 주신 것이 아니라 분명히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셨습니다. 이사 41:8-9 17 그러므로 그분은 모든 점에서 당신의 형제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자비롭고 진실한 대사제로서 하느님을 섬길 수가 있었고 따라서 백성들의 죄를 없이 할 수 있었습니다. 18 그분은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다.
루가 2:22-40
22 그리고 모세가 정한 법대로 정결 예식을 치르는 날이 되자 부모는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23 그것은 “누구든지 첫아들을 주님께 바쳐야 한다. 출애 13:2(13:12, 15 참조)”는 주님의 율법에 따라 아기를 주님께 봉헌하려는 것이었고 24 또 주님의 율법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정결례의 제물로 바치려는 것이었다. 레위 5:7, 12:8.
25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성령이 머물러 계셨는데 26 성령은 그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죽기 전에 꼭 보게 되리라고 알려주셨던 것이다. 27 마침내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전에 들어갔더니 마침 예수의 부모가 첫아들에 대한 율법의 규정을 지키려고 어린 아기 예수를 성전에 데리고 왔다. 28 그래서 시므온은 그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29“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30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31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32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33 아기의 부모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을 듣고 감격하였다. 34 시므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아기는 수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35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36 또한 파누엘의 딸로서 아셀 지파의 혈통을 이어받은 안나라는 나이 많은 여자 예언자가 있었다. 그는 결혼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같이 살다가 37 과부가 되어 여든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없이 단식과 기도로써 하느님을 섬겨왔다. 38 이 여자는 예식이 진행되고 있을 때에 바로 그 자리에 왔다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이 구원될 날을 기다리던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의 이야기를 하였다.
39 아기의 부모는 주님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다 마치고 자기 고향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날로 튼튼하게 자라면서 지혜가 풍부해지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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