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2.6. 연중5주일 감사성찬례
이사 6:1-13 / 시편 138 / 1고린 15:1-11 / 루가 5:1-11
‘심리적 현실’에서 ‘영적 현실’로 돌파하기
채야고보 신부 / 성공회 제주한일우정교회, Artist
“모든 영적 현실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분명한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모든 심리적(정신적) 현실의 기초는 인간 정신의 어둡고도 불투명한 충동과 갈망이다.” (디트리히 본회퍼 / ‘신도의 공동생활 성서의 기도서’ 중에서)
예수께서 수제자들을 부르신 ‘소명사화’는 네 복음서가 모두 기록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기본적인 틀은 마태오, 마르코, 루가가 유사하고, 요한복음은 전승자료가 조금은 다릅니다. 가장 오래된 전승은 마르코의 것으로 마태오와 루가는 아마도 마르코 복음을 참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소명사화’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았다는 ‘자연이적사화’를 덧붙인 것은 오늘 읽은 루가복음과 요한복음뿐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 ‘자연이적사화’를 예수님 부활 이후에 있었던 예수님과 제자들의 갈릴리 해변에서의 만남 이야기와 연결시킵니다(발현사화). 즉 요한복음 기자는 ‘자연이적사화’를 ‘부활발현사화’와 연결시킨 것입니다. 이에 반해 루가는 ‘자연이적사화’를 ‘소명사화’와 연결을 시킵니다. 이러한 차이점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자연이적사화’가 그 사실 관계의 진실보다는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내러티브의 진실이 더 중요함을 말해줍니다. 좀 더 풀어 설명하면, 루가복음의 ‘자연이적사화’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부르신 ‘소명사화’를 주제로 하고 있고, 요한복음의 것은 예수의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소명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둘 다 진짜 물고기를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제자들의 소명 이야기가 핵심입니다.
루가복음은 ‘소명사화’를 전개하는 데 더욱 섬세함을 보여줍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되는 단계’ 또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단계’라고 부를 수 있는 ‘영적 성장’의 두 단계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루가복음은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등이 밤새도록 고생만 하고 고기를 못 잡아 허탈한 마음으로 그물을 씻고 있는 장면을 배경으로 설정합니다. 이 부분은 원본인 마르코복음과 차이가 납니다. 이러한 설정은 루가복음의 내러티브에 더욱 사실적 생동감을 불어넣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베드로의 배를 빌려 육지에서 약간 떨어져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다는 상황도 추가됩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라!” 아마도 설교를 듣고 있던 베드로는 마음에 감동이 있었던지 즉시 순종을 합니다.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 (루가 5:5)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이미 잘 아실 것입니다. 여기에서 베드로의 이러한 반응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베드로는 심리적이고 경험적인 차원에서 변명 아닌 변명을 합니다. 이는 전형적인 ‘심리적(정신적) 현실의 단계’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를 심리적, 정신적 차원에서 영접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무엇엔가 마음이 열리고 감동도 있고, 순종하고 싶은 충동도 생깁니다. 아마도 복음의 씨앗이 그 안에 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계는 아직 ‘영적인 현실’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이 단계는 자신의 자아 중심적이고 자신의 가치와 판단을 중시합니다. 복음의 메시지 중 자신의 처지와 상태에 가장 잘 맞는 것에만 반응을 합니다. 그러니 복음에 대해 정신적 또는 심리적으로 거부할 이유도 없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한 것에 대한 허탈함과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주님께서 던지신 말씀은 그 허탈감과 절망 속에서도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정도의 말씀이었습니다. 즉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도 들 수 있었을 겁니다. 밤새 아무것도 못 잡았는데 한번 속았다 치고 도전해보자!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혹시 물고기를 못 잡는다 해도 이제 자신의 책임은 아니고 예수의 책임이니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얕은 물보다 깊은 물에서 고기가 잘 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예수의 말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전형적인 ‘심리적(정신적) 현실’의 단계에서 볼 수 있는 순종의 예입니다.
‘심리적(정신적) 현실’이란 말은 디트리히 본회퍼의 표현입니다. 이 단계의 사람은 타자를 자신에게로 흡수하려 하고 자신의 주장을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두려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상황과 처지가 다른 어떤 것보다 앞서는 것이지요. 이런 단계에서도 공동체의 사귐과 사랑이 있고, 봉사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입장과 관점이 방해를 받는다 싶으면 금방 자신의 주장만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러한 단계에서는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이 결국 자신의 의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신의 선행을 남들이 알아주길 바라고, 사람들의 관심과 칭찬을 구합니다. 즉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이 단계의 순종은 자신의 이성과 경험에 합당할 때만 순종이 가능합니다. 자신의 경험이나 관심 밖의 일에는 무관심해지기 십상입니다. 참여보다는 간섭과 판단, 충고를 더 선호합니다. 그들의 말은 합리적이고 매우 이성적이라 많은 부분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심리적(정신적) 현실’의 단계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에 서로 간에 문제가 생기면 중재해줄 그 무엇도 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 현실’의 단계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직 그리스도만 계십니다. 이 단계에서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친분이나 혈연이나 다른 기타 세속적인 인연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사람과 사람을 잇는 연결고리가 되는 단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 사이에 계시지 않으시면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단계가 바로 ‘영적인 현실’의 단계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것은 곧 그분의 말씀이 관계의 전부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 단계에 들어선 사람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루가 5:8)
‘영적인 현실’의 단계에 들어선 베드로는 제일 먼저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현존을 깨닫는 순간 제일 먼저 자신의 존재도 동시에 깨닫습니다. 즉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커다란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그 두려움은 그를 하느님 앞에 ‘고해’하게 만듭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이러한 고해를 통해 그는 자신의 전존재를 휘감는 ‘두려움’을 극복하려 고군분투합니다. ‘두려움’. 그렇습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하느님을 만났을 때 느꼈던 공통된 절망감입니다. 거룩한 하느님 앞에 인간이 죄인으로 드러남으로써 느끼는 절망감. 그래서 야훼 하느님을 처음 만난 모세는 하느님이 두려워 자신의 얼굴을 가렸습니다.(출애 2:6) 절대적 거룩함 앞에서 인간은 두려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반드시 ‘고해’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거룩한 빛 앞에서는 더 이상 숨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두려워하고 하느님께서는 그 두려움을 자비로 품어주십니다. 두려움이 결국에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돌파(突破, penetration)’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준다. 내가 도와준다. 정의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준다.” (이사 41:10)
이사야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 말씀에서도 예수께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베드로에게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 (루가 5:10)
‘영적 현실’을 경험한 사람은 하느님 앞에, 그리고 사람 앞에 서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반드시 경험합니다. 자신이 그동안 믿고 의지하고 살아왔던 가치관, 자존심, 경력, 지식, 지혜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경험입니다. 자신의 전존재가 분해되고 해체되는 경험. 그 결과 선악과를 따먹고 벌벌 떨고 있던 아담과 하와의 자리에까지 자신이 소환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립니다. 자신이 벌거벗은 것을 들킬까 두렵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세상에 드러날까 봐 두렵습니다. 그러한 두려움을 알기에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하느님 앞에 자신을 비하시킵니다.
“나는 사람도 아닌 구더기, 세상에서 천더기, 사람들의 조롱거리…” (시편 22:6)
‘자기 비하’ 즉 ‘케노시스κένωσις’. 이것은 그리스도론의 핵심입니다. 하느님이신 성자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자신을 낮춰 인간이 되신 ‘자기 비하’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는 ‘영적인 현실’에서는 반드시 ‘자기 비하, 케노시스’가 따릅니다. 여기에서는 두려움이 인간의 전존재를 휘감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두려움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은 주님의 은총과 소명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돌파’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두려워하며 ‘고해’하는 베드로에게 ‘두려워 말라’고 하시면서 곧바로 ‘소명’을 주십니다. 이렇게 ‘영적인 현실’의 단계에서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돌파’를 통해 ‘소명’을 주님께 받으므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전의 가치관과 이전의 경험, 이전의 판단기준들이 이제는 하느님의 말씀과 소명에 맞춰 새로운 판으로 짜집니다. 물고기를 잡는 어부가 이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것이지요. ‘자기’라는 존재는 죄인의 모습 그대로이지만, 그의 인격은 새로운 자아로 탄생한 것입니다. 그 인격은 결코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설명될 수 없는 ‘영적인 인격’입니다.
이와 같이 ‘영적인 현실’에서는 모든 관계가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이 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리스도를 빼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이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빼고 나면 2천 년 전의 사도 바울로와 사도 베드로는 우리와 전혀 관계가 없는 낯선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저와 여러분의 관계도 그리스도를 빼고 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들도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스도를 빼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매 주일 이렇게 모이는 것도 우리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단순히 ‘심리적(정신적) 단계’에 머무르는 종교적 사교모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것은 우리 안에 ‘심리적(정신적) 현실’과 ‘영적인 현실’이 뒤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교회 내 관계에서 매우 섬세하고 진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리적(정신적) 현실’과 ‘영적인 현실’이란 표현도 사실 매우 위험한 것인데, 이를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준거로 사용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적 성장의 단계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의 잣대로 사용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그 잣대로 판단하는 자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교회 내 공동체의 관계에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사이에 계시는 그리스도 때문에 매우 신중하고 상호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 두려움은 상대를 넘어지게 만들까 염려하는 두려움이며, 동시에 자기 자신이 쉽게 남에 의해 무너질까 조심하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두려움은 주님께서 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히 ‘돌파’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늘 우리의 관계 속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은사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며 매일 형제와 자매를 향해 나아갈 용기를 가집니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늘 원수들 사이에서 생활하셨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보다 자신을 업신여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 오래 계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 위에 달리실 때는 모든 제자들이 도망을 가고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적들의 비난과 참소를 홀로 견뎌야 하는 철저한 고독과 수치도 겪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이, 우리의 일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십자가의 주님보다 힘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친구들이 있으며,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교회 공동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심리적(정신적) 현실’에서 ‘영적인 현실’로 돌파하기. 그것이 오늘 베드로가 보여준 영적인 성장의 단계입니다. 이성과 정신, 그리고 자신의 경험이 먼저였지만, 결국 베드로는 ‘고해’를 통해 이러한 ‘영적인 돌파’를 경험합니다. ‘돌파’는 우리의 의지와 하느님의 은총이 만나는 지점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성장을 뜻합니다.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편견과 지식, 경험, 자존심 등이 한순간에 ‘돌파’되는 경험. 그래서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십니다.” (에페 4:6) 이것이 성령께서 이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존재 양태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견고한 아집을 ‘돌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영적인 돌파’가 우리 가운데 가능하게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 사이에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계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전례독서: (다해) 연중5주일
본기도
거룩하신 하느님, 주님의 영광이 하늘과 땅에 가득하고 천군천사들은 경배하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은혜로 우리의 입술을 정결하게 하시어 주님의 말씀을 증언하고, 주님의 구원을 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 이사 6:1-13
1 우찌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야훼께서 드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보았다. 그의 옷자락은 성소를 덮고 있었다. 2 날개가 여섯씩 달린 스랍들이 그를 모시고 있었는데, 날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둘로 훨훨 날아다녔다. 3 그들이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 만군의 야훼,
.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
4 그 외침으로 문설주들이 흔들렸고 성전은 연기가 자욱하였다. 5 내가 부르짖었다.
. “큰일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여 살면서
.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
6 그러자 스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뜨거운 돌을 불집게로 집어가지고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
. “보아라, 이제 너의 입술에 이것이 닿았으니
. 너의 악은 가시고 너의 죄는 사라졌다.”
8 그 때 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내가 여쭈었더니 9 주께서 이르셨다.
.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일러라.
. ‘듣기는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 보기는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마라.’
10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 귀를 어둡게 하며 눈을 뜨지 못하게 하여라.
.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 돌아와서 성해지면 어찌 하겠느냐?”
11 나는 “주여,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고 여쭈었다. 주께서 대답하셨다.
. “도시들은 헐려 주민이 없고
. 집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고
. 농토는 짓밟혀 황무지가 될 때까지다.
12 야훼께서 사람을 멀리 쫓아내시고 나면
. 이 곳엔 버려진 땅이 많으리라.
13 주민의 십분의 일이 그 땅에 남아 있다 하더라도
. 그들마저 상수리나무, 참나무가 찍히듯이 쓰러지리라.
. 이렇듯 찍혀도 그루터기는 남을 것인데
. 그 그루터기가 곧 거룩한 씨다.”
2절, 스랍은 천상에서 하느님을 모시는 천신 가운데 하나로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고 있는 자’를 의미합니다.
4절, “나는 죽었다.”는 “나는 아무 말도 못하게 되었다.”라고 옮길 수도 있습니다.
9절, “마라.”는 “못하리라.”라고 옮길 수도 있습니다.
성시_ 시편 138
1 주여,
. 내 마음 다하여 감사기도 드립니다. ◯
. 당신을 모시고 서 있는 이들 앞에서
. 당신을 찬양합니다.
2 거룩한 당신의 궁전 향하여 엎드려 ◯
. 인자함과 성실함을 우러르며,
¶ 당신의 이름 받들어 감사기도 드립니다. ◯
. 언약하신 그 말씀,
. 당신 명성보 다 크게 퍼졌습니다.
3 내가 부르짖을 때 당신은 들어주시고 ◯
. 힘을 한껏 북돋우어주셨습니다.
4 주여,
. 당신의 언약 말씀을 듣고서 ◯
. 세상의 모든 왕들이 당신께 감사노래 부릅니다.
5 그들이 주께서 밟으신 길을 찬양하며 ◯
. “주 그 영광 크시다” 노래합니다.
6 주여,
. 당신은 높이 계셔도 낮은 사람 굽어보시고 ◯
. 멀리 계셔도 거만한 자 아십니다.
7 내가 고생길을 걸을 때에 이 몸 살려주시며,
. 손을 드시어 살기 띤 원수들을 치시고 ◯
. 오른손으로 붙들어 이 몸 구해주십니다.
8 주여,
. 모든 일 나를 위해 하심이오니,
. 이미 시작하신 일에서 손을 떼지 마소서. ◯
. 당신의 사랑 영원하시옵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 1고린 15:1-11
1 형제 여러분, 전에 내가 전해 준 복음을 여러분의 마음속에 되새겨주려고 합니다. 이 복음은 여러분이 이미 받아들였고 또 여러분의 믿음의 기초가 되어 있습니다. 2 그러므로 여러분이 헛되이 믿는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 내가 전해 준 복음 그대로 굳게 지켜 나간다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3 나는 내가 전해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과 4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서에 기록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과 5 그 후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뒤에 다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6 또 한번에 오백 명이 넘는 교우들에게도 나타나셨는데 그 중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7 그 뒤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또 모든 사도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8 그리고 마지막으로 팔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9 나는 사도들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이요 하느님의 교회까지 박해한 사람이니 실상 사도라고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 10 그러나 내가 오늘의 내가 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의 덕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과연 나는 어느 사도보다도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된 것입니다. 11 내가 전하든지 다른 사도들이 전하든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고 있으며 여러분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복음서_ 루가 5:1-11
1 하루는 많은 사람들이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는 예수를 에워싸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2 그 때 예수께서는 호숫가에 대어둔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고 있었다. 3 그 중 하나는 시몬의 배였는데 예수께서는 그 배에 올라 시몬에게 배를 땅에서 조금 떼어놓게 하신 다음 배에 앉아 군중을 가르치셨다. 4 예수께서는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 하셨다. 5 시몬은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 하고 대답한 뒤 6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엄청나게 많은 고기가 걸려들어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다. 7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같이 고기를 끌어올려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두 배에 가득히 채웠다. 8 이것을 본 시몬 베드로는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9 베드로는 너무나 많은 고기가 잡힌 것을 보고 겁을 집어먹었던 것이다. 그의 동료들과 10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똑같이 놀랐는데 그들은 다 시몬의 동업자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시몬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시자 11 그들은 배를 끌어다 호숫가에 대어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글모음 > 설교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류 보편적 지혜 - 평지설교 2 (0) | 2022.02.19 |
---|---|
소유에서 존재로 - 평지설교 1 (0) | 2022.02.12 |
믿음의 계보-설명절별세기념성찬례 (0) | 2022.02.01 |
소명 (2) (0) | 2022.01.29 |
소명 (1) (0) | 2022.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