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3. 연중 3주일 감사성찬례
느헤 8:1-3, 5-6, 8-10 / 시편 19 / 1고린 12:12-31상 / 루가 4:14-21
“소명 (1)”
채야고보 신부 / 성공회 제주한일우정교회, Artist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소명을 받고 아비 친척집을 떠나 낯선 땅 팔레스타인 지방으로(창세 11:31) 자신의 가솔들을 이끌고 갑니다. 그 후 그는 기근을 겪고, 이집트에서는 아내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또 함께 갔던 조카 롯과 갈라서고, 종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 때문에 가정에 불화도 겪게 됩니다. 그러는 와중에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사악을 얻은 대신 첫째 아들인 이스마엘을 쫓아내야 했고, 심지어 사랑하는 아들인 이사악을 제물로 야훼께 바치는 시험도 통과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와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정착했다가, 그후 그곳에서 첫 소명을 받은 것이 75세라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산전수전 다 겪고 가나안에 정착한 후 90이 넘는 늦은 나이에 다시 하느님의 소명을 듣습니다. 이번에는 밤하늘에 수없이 빛나는 별들을 보면서 그는 하느님의 소명을 재차 확인합니다. 그는 자신의 후손에게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감합니다. 밤하늘의 별같이 많은 자손에 대한 다산의 축복이 아니라 그러한 별들의 영광을 모두 합해도 감당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소명으로 확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의 아버지가 되는 소명을 받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은 하느님의 소명은 한순간이 아니라 한 개인의 전 생애를 통해 이뤄진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마귀의 시험을 광야에서 받으셨다는 진술 뒤에 루가는 예수의 갈릴래아 사역을 요약하는 ‘집약문’을 이어서 기록합니다. 요는 예수께서 ‘성령이 충만’하여 회당을 돌면서 가르치셨는데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셨다.”라는 기록입니다. 이는 시간의 경과와 성장을 설명하는 전형적인 루가의 표현방법입니다. “예수는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루가 2:52)라는 진술과 비슷한 뉘앙스를 가집니다. 여기에서 잠깐 유대인 회당에서의 예배 형식이 어떠했는지 살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쉐마(셔마) 낭독(신명 6:4-9, 11:13-21; 민수 15:37-41), 2) 쉬모네 에스레 기도 (총 18개 조항 기도문), 3) 파리쉬(토라 독서), 4) 하프타레(예언서 독서), 5) 드라샤 (성서 낭독 및 해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성서를 읽고 해설을 하신 부분이 바로 다섯 번째 순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드라샤’는 유대인 남자라면 누구나 말씀을 읽고 해석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성서를 읽고 설교를 하신 일은 유대인 회당에서는 흔히 있는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해석에서 뭔가 다른 점이 오늘 드러났습니다. 이사야 61장의 예언이 오늘 그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는 선포입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을 직역하면 “너희 귀에서 이루어졌다”입니다. 이는 ‘지금’이라는 현재성이 무척이나 강조된 표현입니다. 루가의 시간은 ‘지금 여기’입니다. 그러니 모두가 놀라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몰라서 당황했을 겁니다. 그리고 오늘 읽지 않은 뒷부분의 이야기는 예수가 평범한 요셉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의 소명은 고향인 나자렛에서 결국 유대인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이미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으셨을 때에 그분의 소명이 1차적으로 확인됐다는 사실을 지난 전례 독서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소명을 받자마자 광야에서 40일 동안 육체의 한계와 마귀의 유혹을 친히 견디셔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전 생애를 걸쳐 드러난 소명의 시간이나,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40년 동안 광야의 시간이나, 예수님의 40일 동안 광야 시간은 모두 하느님의 소명이 체화되고 내면적으로 숙성되는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소명에는 반드시 전 생애든, 40일이든, 40년이든 하느님의 뜻이 준비되는 절대적인 시간이 요구됩니다. ’40’이란 수는 단순히 시간을 나타내는 수적 개념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소명이 숙성되는 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시간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속한 시간이므로 소명을 받은 사람 개개인의 시간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하느님의 소명이 이사야서 61장을 통해 예수께 임하셨음을 오늘 말씀에서 확인합니다. 이제 예수의 소명과 그의 타고난 운명이 이 시간 이후로 하나로 겹쳐집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사망의 어두운 그림자는 향후 예수의 공생애 내내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그를 반기는 무리들과 그를 대적하는 무리들 사이에서 예수는 늘 자신의 중심을 오직 성부께만 두었고, 자신의 소명만을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칠 시간이 그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지요. 예수는 이미 끝이 정해진 시간을 이 땅에서 소명으로 받으셨습니다. 그 끝은 십자가입니다. 결론이 정해진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해진 운명에 순응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 마지막을 넘어서야 결국에 하느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드러나기에 그는 거부할 수 없는 그 소명에 순종을 택합니다. 육신의 제한 가운데 계셨던 주님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와 같은 완전한 육신을 가진 인간이셨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은 다 같이 피와 살을 가지고 있으므로 예수께서도 그들과 같은 피와 살을 가지고 오셨다가 죽으심으로써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악마를 멸망시키시고 한평생 죽음의 공포에 싸여 살던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히브 2: 14-15)
그래서 그분은 친히 유혹과 고난을 받으셨기에 모든 고난 받는 사람들을 도와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인간의 한계와 인간 실존의 고통을 모두 경험하셨습니다. 그러니 친히 사람들을 부르시고, 소명을 주시며, 또 도우시는 성령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소명은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수행되는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인간의 공이 끼어들 틈이 부재합니다. 요구되는 것은 순종과 믿음입니다. 이것이 소명을 받은 자에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또한 주님의 소명은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50년마다 모든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차압된 토지를 원래 소유자들에게 돌려주는 ‘희년’이란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은총의 해’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희년 제도’가 잘 지켜졌는지는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인류의 현재는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상적인 율법의 ‘희년 제도’는 이제 예수에 의해 완성될 것입니다. 그것은 종말론적으로 마지막 때가 임하는 순간 주님의 재림과 함께 모든 억눌린 자들의 참다운 해방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복음입니다. 그러니 ‘유앙겔리온, 즉 기쁜 소식’입니다. 물론 이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절망의 날이 되겠지만, 모든 믿는 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이러한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셨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전 생애를 걸쳐 자신의 소명을 이뤘던 것처럼. 그리고 부활의 증인으로 ‘사도’들을 세우셔서 그러한 소명이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소명이 이사악과 야곱에게 이어진 것과 같습니다. 오늘 이 자리 저의 설교는 그러한 주님의 소명에 대한 외침의 흐름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소명의 외침을 들은 자들은 모두 그의 소명에 초대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 앞에서 더 이상 변명을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사야서 52장의 말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그러나 믿지 않는 분의 이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또 들어보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말씀을 전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전도자로서 파견받지 않고서 어떻게 전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말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 로마 10:14-15)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같은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12제자들과 사도 바울로, 많은 성인들의 소명도 모두 같습니다. 복음을 빼고 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마도 종교적 모양만 남고 말 것입니다. 종교의 외형과 형식은 종교적 행위를 뒷받침하지만, 그 자체만으로 참다운 생명을 줄 수는 없습니다. 성령과 복음이 없이는 우리의 모든 예배는 종교의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의 물가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후견인_갈라 3:24-25)은 될 수 있어도 그 이상은 아닙니다. 온전히 복음과 성령의 인도 속에서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은 우리를 살게 하는 힘입니다. 마치 소명을 받지 않은 듯이 모른척하고 싶어도 우리는 절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알몸을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는 것처럼 하느님 앞에서는 무모한 책임회피입니다. 하느님의 시선으로부터 숨을 곳은 없습니다. 이미 우리가 세례를 받은 날부터 우리는 주님의 길 위에 서도록 운명 지워졌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앞으로만 뻗어 있기 때문에 다시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가 있는 골고다를 지나 마지막 재림의 때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명도 아브라함처럼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해 드러나고 증명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소명 위에 굳건히 서시기 바랍니다. 기독교가 ‘개독교’가 된 것은 모두 우리 각자의 책임이지 나 자신만 빼고 교회나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각자가 바로 교회입니다. 세상이 욕하고 비난하는 기독교는 바로 우리 자신이지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늘 비난의 손가락은 우리를 향합니다. 사제들이나 교회 시스템이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러니 ‘눈이 손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 하고 말할 수도 없고, 머리가 발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 하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같은 몸을 공유한 운명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비난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합니다. 그러니 우리끼리 서로 비난하거나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각자 자신의 소명 가운데 자기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교회의 미래는 없습니다. 주님께 참 죄송한 일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없어도 본인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오래 참으심은 늘 우리를 당신의 소명으로 초대하십니다. 결단은 우리의 몫입니다. 매일 밤하늘의 별처럼 소명은 우리 안에서 영롱하게 빛납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바라봤던 밤하늘의 별들처럼. 주님께서 자신의 소명을 깨달으신 것처럼, 우리도 각자의 마음에 빛나는 소명의 별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에서 목인지, 가슴인지, 손인지, 발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은 거창함보다는 일상의 소소함 속에서 오히려 그 빛을 발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소명대로 행동하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멘.
비록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삶의 소명에 관해 진지했던 한 시인의 시를 읽어드리며 오늘 설교를 마칩니다. 한용운의 시 ‘나의 길’ 중 일부분입니다.
…
악한 사람은 죄의 길을 쫓아갑니다.
의 있는 사람은 옳은 일을 위하여는 칼날을 밟습니다.
서산에 지는 해는 붉은 놀을 밟습니다.
봄 아침의 맑은 이슬은 꽃머리에서 미끄럼 탑니다.
그러나 나의 길은 이 세상에 둘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님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죽음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그것은 만일 님의 품에 안기지 못하면 다른 길은 죽음의 길보다 험하고 괴로운 까닭입니다.
아아 나의 길은 누가 내었습니까
아아 이 세상에는 님이 아니고는 나의 길을 낼 수가 없습니다.
…
만해 한용운의 ‘나의 길’ 중에서 [님의 침묵]
전례독서: (다해) 연중 2 주 목요일
본기도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크신 권능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성령의 인도를 따라 어둠 속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이 은총의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느헤 8:1-3, 5-6, 8-10
1 이스라엘 백성은 각기 저희의 성읍에서 살고 있다가 칠월이 되자,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와서 선비 에즈라에게 청하였다.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려주신 모세의 법전을 가지고 오십시오.” 2 사제 에즈라는 그 법전을 가지고 회중 앞에 나타났다. 그 자리에는 남자와 여자,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말귀를 알아들을 만한 사람은 모두 모여 있었다. 때는 칠월 초하루였다. 3 그는 수문 앞 광장에 나타나 해 뜰녘부터 해가 중천에 이르기까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셈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들려주었고 온 백성은 그 법전을 귀담아들었다.… 5 에즈라가 모두 쳐다볼 수 있도록 높은 자리에서 책을 펴들자 온 백성은 일어섰다. 6 에즈라가 높으신 하느님 야훼를 칭송하자 온 백성도 손을 쳐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며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야훼를 예배하였다. … 8 에즈라는 백성들이 알아듣고 깨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법전을 읽으며 풀이하여 주었다.
9 온 백성은 법전에 기록되어 있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들으면서 울었다. 그래서 총독 느헤미야와 선비요 사제인 에즈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이 온 백성에게 일렀다. “이 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께 바친 거룩한 날이니 울며 애통하지 마라.” 10 그리고 그는 이렇게 일러주었다. “가서 잔치를 차려 배불리 먹고 마셔라. 미처 마련하지 못한 사람이 있거든 그런 사람도 빼놓지 말고 몫몫이 보내주도록 하여라. 이 날은 우리 주님의 날로 거룩하게 지킬 날이니 슬퍼하지 마라. 야훼 앞에서 기뻐하면, 너희를 지켜주시리라.[A]”
[A] “야훼께서 지켜주시니 너희는 기뻐하여라.”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시편 19
1 하늘은
⋅ 하느님의 영광을 속삭이고 ◯
. 창공은
⋅ 그 훌륭한 솜씨를 일러줍니다.
2 낮은 낮에게 그 말을 전하고 ◯
. 밤은 밤에게 그 일을 알려줍니다.
3 그 이야기도 그 말소리도 ◯
. 비록 들리지 않아도
4 그 소리 구석구석 울려 퍼지고 ◯
. 온 세상 땅 끝까지 번져 갑니다.
5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쳐주시니,
. 마치 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이 ◯
. 신나게 치닫는 용사와 같이,
6 하늘 이 끝에서 나와
⋅ 하늘 저 끝으로 돌아가고 ◯
. 그 뜨거움을 벗어날 자 없습니다.
7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 사람에게 생기를 돌려주고 ◯
. 주님의 법도는 변함 없어
⋅ 어리석은 자도 깨우쳐준다.
8 주님의 분부는 그릇됨이 없어
⋅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
. 주님의 법은 맑아서
⋅ 사람의 눈을 밝혀준다.
9 주님의 말씀은 순수하여
⋅ 영원토록 흔들리지 아니하고 ◯
. 주님의 법령은 참되어
⋅ 옳지 않은 것이 없다.
10 금보다, 순금덩이보다 더 좋고 ◯
. 꿀보다, 송이 꿀보다 더욱 달다.
11 당신 종이 그 말씀으로 깨우침 받고 ◯
. 그대로 살면 후한 상을 받겠거늘,
12 뉘 있어 제 허물을 다 알리이까? ◯
. 모르고 짓는 죄일랑 말끔히 씻어주소서.
13 일부러 죄 지을세라 이 몸 막아주시고 ◯
. 죄의 손아귀에 잡힐까 날 지켜주소서.
. 그제야 이 몸은 대역죄 씻고 ◯
. 온전히 깨끗하게 되리이다.
14 내 바위요, 내 구원자이신 주여, ◯
. 내 생각과 내 말이 언제나
⋅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1고린 12:12-31상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 13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같은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14 몸은 한 지체로 된 것이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15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딸리지 않았다.” 하고 말한다 해서 발이 몸의 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16 또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까 몸에 딸리지 않았다.” 하고 말한다 해서 귀가 몸의 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17 만일 온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또 온몸이 다 귀라면 어떻게 냄새를 맡을 수 있겠습니까? 18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진 여러 지체를 우리의 몸에 두셨습니다. 19 모든 지체가 다 같은 것이라면 어떻게 몸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20 그래서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는 것입니다. 21 눈이 손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 하고 말할 수도 없고 머리가 발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 하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22 그뿐만 아니라 몸 가운데서 다른 것들보다 약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23 우리는 몸 가운데서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부분을 더욱 조심스럽게 감싸고 또 보기 흉한 부분을 더 보기 좋게 꾸밉니다. 24 그러나 보기 좋은 지체들에게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도 변변치 못한 부분을 더 귀중하게 여겨주셔서 몸의 조화를 이루게 해주셨습니다. 25 이것은 몸 안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모든 지체가 서로 도와 나가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26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또 한 지체가 영광스럽게 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27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 28 하느님께서는 교회 안에 다음과 같은 직책을 두셨습 니다.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이요 셋째는 가르치는 사람이요 다음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요 또 그 다음은 병 고치는 능력을 받은 사람, 남을 도와주는 사람, 지도하는 사람,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 등입니다. 29 모두가 다 사도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가르치는 사람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기적을 행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30 모두가 다 병 고치는 능력을 받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이상한 언어를 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해석하는 사람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31 여러분은 더 큰 은총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루가 4:14-21
14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받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셨다. 예수의 소문은 그 곳 모든 지방에 두루 퍼졌다. 15 예수께서는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셨다.
16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난 나자렛에 가셔서 안식일이 되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서를 읽으시려고 일어서서 17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 이러한 말씀이 적혀 있는 대목을 펴서 읽으셨다.
18“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19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 칠십인역 이사 61:1-2(58:6 참조)
20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들던 사람에게 되돌려주고 자리에 앉으시자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의 눈이 모두 예수에게 쏠렸다. 21 예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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