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3.20. 사순 3 주일 감사성찬례
이사 55:1-9 / 시편 63:1-8 / 1고린 10:1-13 / 루가 13:1-9
“하느님의 은총에 압도된 회개” (회개-1)
채야고보 신부 / 성공회 제주한일우정교회 사제, Artist
회개란 무엇입니까?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어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사용된 ‘회개’라는 말도 메타노이아의 동사형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 하나로 오늘 본문의 회개에 대한 표상들이 전부 드러나지 않습니다. 회개는 반성이나 참회, 속죄와도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는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라는 표현을 두 번이나 기록했습니다. “망할 것이다.” ‘아포레이스테 ἀπολεῖσθε’. 미래형으로 이는 닥쳐올 재앙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사용하신 ‘회개’는 분명히 어떤 “때”를 전제하고 말씀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아직 시간이 남아 있을 때, 아직 시간이 남아 있는 동안,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성서신학자 예레미야스는 이를 ‘때 (또는 시간)에 대한 도전”이라고 정의합니다. 마치 노아가 방주를 만들고 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종말의 ‘때’가 주는 도전을 무시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그렇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때’는 현재가 아니라 바로 다가올 ‘종말의 때’ 입니다. 즉, 현재, 오늘의 심판이 아니라 종말의 때의 심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루가복음은 ‘메타노이아’라는 단어의 표상을 이야기로 엮어 표현한 복음서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다음 주 전례독서에서 읽게 될, 우리가 잘 아는, ‘돌아온 탕자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루가복음에만 나오는 ‘루가의 특수자료’입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 부분도 ‘루가의 특수자료’입니다. 이는 루가복음에만 기록된 전승으로 루가복음의 신학적 특징과 삶의 자리를 이해하는 근거가 됩니다. 이 이야기가 말하고 있는 ‘회개’가 정확하게 예수께서 의도하신 회개의 개념과 일치하는지 우리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우리는 루가가 기록한 회개에 대한 개념 덕분에 은총과 회개의 연관성을 알게 됩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는 갑작스러운 사고와 죽음 그리고 질병에 대해 그 원인을 개인의 ‘죄’에서 찾는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생각이 그 배경에 깔려있습니다. 요세푸스가 기록한 ‘유대고사’에 오늘 복음서의 내용과 유사한 참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원후 35년경 빌라도는 ‘가리짐 산’으로 제사를 지내러 올라가는 ‘사마리인’들을 학살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서 기록은 ‘사마리아인들’이 아니라 ‘갈릴래아 사람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건의 맥락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들이 갑자기 죽은 이유는 그들이 다른 이들보다 죄가 많아서 일까요? 이것이 사람들이 예수께 드린 질문의 요지였을 겁니다. 사람들은 현재의 심판을 말했지만, 주님의 대답은 지금 현재에서의 심판이 아니라 종말의 심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심판은 종말의 때까지 ‘유보된 상태”라는 것이 암시됩니다. 이것이 루가복음에 담긴 “유보된 종말”에 대한 개념입니다. 루가복음은 심판이 마지막 종말의 때까지 유보되었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우리는 심판이 유보된 사람들이므로 기회가 있을 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마치 죄인에게 ‘집행 유예’가 선고된 것과 유사합니다. 마르크복음의 ‘임박한 종말론’의 시간보다는 유보되었다고 하여 신학적으로 “유보된 종말론”이라 부릅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의 두 번째 이야기는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 이야기’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포도원에 왜 무화과나무가 심긴 것인지… 그것도 한 그루뿐입니다. 포도원에 어울리지도 않는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린다고 하등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포도원지기는 주인에게 한 해만 더 참아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그때 가서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버리자고 제안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포도원 주인’이 누구이고, ‘포도원지기’가 누구인지를 우리는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종말의 심판을 유예해달라고 요청한 ‘포도원지기’가 바로 예수님이겠죠. 이러한 유보된 심판의 개념은 루가복음과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 나옵니다. 꼭 기억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루가복음은 우리 모두가 형 집행이 유보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지금’이 우리가 회개할 때임을 강조하며, 이사야서 49장 8절 말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것입니다. ‘지금 여기’는 심판의 날이 아니고 ‘회개의 때’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자비를 베풀 만한 때에 네 말을 들어주었고 너를 구원해야 할 날에 너를 도와주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자비의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1 고린 6:2)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는 루가가 말하는 회개에 대한 생각을 잘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위시하여, ‘잃은 양의 비유’(루가 15:1-7, 마태 18:12-14), ‘잃은 은전을 찾은 과부 이야기’(루가 15:8-10) 등 루가가 기록한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회개에 대한 정확한 표상을 전달해줍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회개의 3단계를 정리해봅니다. 이는 예레미야스의 진술에 기반합니다.
1) 회개의 첫 번째는 “죄를 깨달음”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회개는 시작하는 것입니다. 탕자는 오랜 방탕의 생활 끝에 절망의 나락에 떨어진 후에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습니다. 이를 성서는 그가 “그제야 제정신이 들었다.”(루가 15:1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후에 하느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회개의 1단계입니다. 자신의 처지와 실존의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인정한 자만이 회개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체면이나 부끄러움이 앞선다면 아직 회개를 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지요. 이미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말하기 전에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니 회개의 첫 단계는 결국 하느님의 현존 앞에 인간 존재의 상황과 처지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2) 두 번째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입니다. 탕자는 “마침내 거기를 떠나 자기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루가 15:20 비교)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자캐오는 “제가 남을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곱절은 갚아주겠습니다.”(루가 19:8)라고 말하면서 회개에 합당한 삶의 전환을 시도합니다. 회개는 우리에게 지금까지 살아왔던 죄의 상황과 실존에서 돌아서라고 말합니다. 분명한 것은 죄는 인간이 극복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피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게 아니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더 이상 죄와 씨름하지 마시고 그냥 가던 길을 멈추고 과감히 그 길에서 돌아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두 번째 단계입니다.
3) 세 번째 단계는 회개 후에 우리 마음의 주인을 누구로 모시느냐의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바로 ‘죄의 재발’의 문제입니다. 루가복음과 마태오복음에 모두 기록된 “되돌아온 악령”에 대한 이야기는 이를 잘 보여줍니다. (루가 11장 24-26, 마태 12:43-45)
“더러운 악령이 어떤 사람 안에 들어 있다가 거기서 나오면 물 없는 광야에서 쉼터를 찾아 헤맨다. 그러다가 찾지 못하면 ‘전에 있던 집으로 되돌아가야지.’ 하면서 돌아간다. 그리고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흉악한 악령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자리 잡고 살게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의 형편은 처음보다 더 비참하게 된다.”(루가 11장 24-26)
빈 집. 회개한 사람은 비어 있는 집과 유사한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주인이 없는 집은 쉽게 도적이 들 수 있는 법이지요. 어디 도적뿐이겠습니까? 집을 오래 비워두면 집이 서서히 망가지고 결국에는 흉가가 되는 법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옛 죄악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아직 자신의 마음의 주인을 결정하지 못한 것이 이 경우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이켜 회개한 후에는 자신의 마음의 주인을 새롭게 모셔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한 것이지요. 이는 바로 “내키지 않은 회개”의 경우를 보여줍니다. 아직 자신의 전존재와 삶을 온전히 새로운 주인이신 하느님께 내어드릴 준비가 안 된 것이지요. 예수님을 만나서 문제를 해결 받지 못했던 부자 청년처럼(루가 18:18-27, 마태 19:16-26, 마르 10:17-27), 이 세상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 그리고 가진 것이 많을 경우 포기하기가 더 어려운 법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후에도 아직 자신의 주인을 결정하지 못해 예전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빈 집을 오래 두는 것은 결국 악령의 좋은 유혹거리가 됩니다. 앞에서 읽었던 말씀에서 “일곱 악령”은 완전함의 뜻입니다. 이제 빈 집은 완전히 악령으로 점거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 사람의 형편은 분명 처음보다 더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내키지 않는 회개’, ‘가식적인 회개’가 위험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은 속일 수 있어도,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물론 사탄 마귀도 그것을 잘 알지요.
‘빈 집’은 인간의 전인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우리 자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성소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빈 집의 주인이 되시면, 우리 자신이 그분의 현존의 장소가 됩니다.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현존과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잘 들어라.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맞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루가 18:17)
여기에서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모에 대해 철저한 신뢰를 보이는 어린아이의 마음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못 믿으면 그 집안은 끝장난 것이 아닐까요? 밤에 홀로 잠이 깨어 두려움에 놀랄 때 어린아이들은 당연히 부모님을 찾게 마련입니다. 가정폭력으로 부모가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이는 자신의 부모에 대한 신뢰를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신뢰에 합당하게 자식을 돌보고 사랑하는 것 또한 부모의 의무이며 본능이지요. 그러므로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은 곧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의 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께서 하느님 아버지를 아람어로 ‘압빠’(Abba)라고 부르신 것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압빠’에 대해 ‘아빠’라는 해석과 ‘아버지’라는 해석이 신약 학계에서는 충돌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문맥에서 읽히는 것은 ‘친근함의 표현’을 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은 하느님 아버지와 친밀한 유대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회개한 사람이 자신의 빈 집의 주인으로 하느님을 모실 때 그러한 친근한 인격적 관계가 형성됨을 말해줍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완성이 됩니다. 이를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 5장 8절에서 “순결과 진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선 개인’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우리 안에서 죄의 누룩을 제거하고, “순결과 진실”의 상태로 하느님 앞에 서게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회개를 합니까? 종말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하는 것일까요? 회개에 대해 ‘종말론적’인 설명을 하고 보니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제가 제목에서 언급했던 말. “하느님의 은총에 압도된 회개”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회개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우리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우리의 잘못을 용서받기 위해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전적인 사랑과 은총에 압도되어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회개를 통해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될 때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축복입니다. 그러할 때 한 죄인의 회개는 하늘의 기쁨이고, 하느님의 기쁨이 되는 겁니다.
“잘 들어두어라,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루가 15:10)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이 하늘의 기쁨이고, 또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그 기쁨을 잘 표현한 성서 구절은 아마도 스바니야 3장 17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스펠 곡으로도 만들어져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구절입니다. 시온의 회복을 노래했던 스바니야의 예언은 한 영혼의 회개가 어떻게 ‘하느님의 기쁨’이 되는 지를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시온아, 두려워 마라, 기운을 내어라. 너를 구해 내신 용사 네 하느님 야훼께서 네 안에 계신다. 너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리니 사랑도 새삼스러워라. 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 (스바 3: 16-17)
하느님께서 너무 기쁘셔서 춤까지 추신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압도된 회개”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 클뿐더러, 하느님께 가장 큰 기쁨이 됩니다. 이는 우리가 회개하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께로 “진솔하게 돌아설 때” 하느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사순절이 회개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모든 얽힌 것들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그러한 사순절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회개는 단순히 윤리적인 죄에 대한 회개를 말하지 않습니다. 회개는 돌이켜 하느님 품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탕자를 품으신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이 이제 우리를 품어주시어 우리 가운데 한량없는 그분의 사랑과 기쁨을 가득 내려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에 압도된 우리.” 그러한 은총이 우리 가운데 넘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전례독서 _ 사순3주 (다해)
본기도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 목마른 이들에게 영원한 생수를 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이제 헛된 갈망에서 벗어나 주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 이사 55:1-9
1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 여기에 물이 있다.
.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 돈 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
. 값 없이 술과 젖을 사서 마셔라.
2 그런데 어찌하여 돈을 써가며
. 양식도 못되는 것을 얻으려 하느냐?
. 애써 번 돈을 배부르게도 못하는 데 써 버리느냐?
. 들어라, 나의 말을 들어보아라.
. 맛좋은 음식을 먹으며
. 기름진 것을 푸짐하게 먹으리라.
3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로 오너라.
. 나의 말을 들어라.
. 너희에게 생기가 솟으리라.
. 내가 너희와 영원한 계약을 맺으리라.
. 다윗에게 약속한 호의를 지키리라.
4 나는 그를 뭇 백성들 앞에 증인으로 세웠고
. 부족들의 수령과 군주로 삼았다.
5 이제 너는 네가 알지 못하던 민족을 부르리라.
. 너를 모르던 민족들이 너에게로 달려오리라.
. 너희 하느님 야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께서
. 너를 영화롭게 하신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6 야훼를 찾아라.
. 만나주실 때가 되었다.
. 그를 불러라, 옆에 와 계신다.
7 불의한 자는 그 가던 길을 돌이켜라.
. 허영에 들뜬 자는 생각을 고쳐라.
. 야훼께 돌아오너라,
. 자비롭게 맞아주시리라.
. 우리의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리라.
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 야훼의 말씀이시다.
9 “하늘이 땅에서 아득하듯
. 나의 길은 너희 길보다 높다.
.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1절 “돈 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 / 값 없이 술과 젖을 사서 마셔라.”는 “네가 먹을 양식은 돈 내고 살 것이 아니다. / 네가 받아 마실 술과 양젖은 값을 내고 얻을 것이 아니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성시_ 시편 63:1-8
1 하느님, 당신은 나의 하느님,
⋅ 물기없이 메마른 땅덩어리처럼
⋅ 내 마음 당신 찾아 목이 마르고, ◯
⋅ 이 육신 당신 그려 지쳤습니다.
2 당신을 그리면서 성소에 왔사오며 ◯
⋅ 당신의 힘, 당신의 영광을 뵈옵니다.
3 당신의 사랑, 이 목숨보다 소중하기에 ◯
⋅ 이 입술로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4 이 목숨 다하도록 당신을 찬양하며 ◯
⋅ 두 팔 들어 당신 이름 찬양하리이다.
5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
⋅ 배불리 먹은 듯 내 입술 기쁘고, ◯
⋅ 내 입이 흥겨워 당신을 찬양합니다.
6 잠자리에 들어서도 당신 생각, ◯
⋅ 밤을 새워 가며 당신 생각뿐입니다.
7 나를 도와주신 일 생각하면서 ◯
⋅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즐겁습니다.
8 이 몸 당신에게 포근히 안기면 ◯
⋅ 당신 오른팔로 붙들어 주시옵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 1고린 10:1-13
1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꼭 기억해 두셔야 하겠습니다. 모세 때에 우리 조상들은 구름의 인도를 받았고 모두가 홍해를 무사히 건넜습니다. 2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의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3 그들은 모두 똑같은 영적 양식을 먹었고 4 또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의 동반자인 영적 바위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다는 말입니다. 그 바위는 곧 그리스도였습니다. 5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대부분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죽어서 그 시체가 여기저기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민수 14:16, 23, 29-30; 시편 78:31). 6 이것은 우리가 우리 조상들처럼 악을 일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고하는 본보기입니다. 7 그들의 일부는 우상을 숭배하였는데 여러분은 그들처럼 우상 숭배자가 되지 마십시오. 그들에 대해서 성서에는 “백성들이 앉아서는 먹고 마셨고 일어서서는 춤을 추었다. 출애 32:6”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8 어떤 사람들은 음행을 일삼다가 하루에 다 죽어 넘어졌는데 그 수가 이만 삼 천 명이나 됩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음행에 빠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9 또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떠보다가 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주님을 떠보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10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불평을 하다가 살육의 천사의 손에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불평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11 그들이 이런 일들을 당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는 경고가 되었으며 그것이 기록에 남아서 이제 세상의 종말을 눈앞에 둔 우리에게는 교훈이 되었습니다. 12 자기 발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13 여러분이 겪은 시련은 모두 인간이 능히 감당해 낼 수 있는 시련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신의가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시련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복음서_ 루가 13:1-9
1 바로 그 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빌라도가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흘린 피가 제물에 물들었다는 이야기를 일러드렸다. 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변을 당한 줄 아느냐? 3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4 또 실로암 탑이 무너질 때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죄가 많은 사람들인 줄 아느냐? 5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놓았다. 그 나무에 열매가 열렸나 하고 가보았지만 열매가 하나도 없었다. 7 그래서 포도원지기에게 ‘내가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따볼까 하고 벌써 삼 년째나 여기 왔으나 열매가 달린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아예 잘라버려라. 쓸데없이 땅만 썩일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하였다. 그러자 8 포도원지기는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9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 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버리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글모음 > 설교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난이 기쁜 소식이 되는 삶’ (0) | 2022.04.10 |
---|---|
“하느님의 기쁨” (회개-2) (0) | 2022.03.26 |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 (0) | 2022.03.12 |
가증스러운 위로-자의적 성서 해석의 위험성 (0) | 2022.03.05 |
위선에 대한 경계-재의 수요일 (0) | 2022.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