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3.6. 사순 1 주일 감사성찬례
신명 26:1-11 / 시편 91:1-2, 9-16 / 로마 10:8-13 / 루가 4:1-13
“가증스러운 위로-자의적 성서 해석의 위험성”
채야고보 신부 / 성공회 제주한일우정교회, Artist
“하느님이 당신의 천사들을 시켜 너를 지켜주시리라. (시편 91:12)”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손으로 너를 받들게 하시리라. (시편 91:12)”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들리십니까? 이는 위로가 되는 말씀이 아닙니까?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이나 위험 가운데 처한 사람이 이 말을 들으면 많은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요? 또 다음 구절은 너무나 많이 들어서 잘 아시는 구절일 겁니다. 개역성경 버전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이 구절은 교인들이 운영하는 사업장이나 신장개업을 하는 가게에서 액자로 된 이 성구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 뜻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개업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문장만 보면 정말 큰 힘을 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읽어드린 성서 구절들 중 처음에 읽은 것은, 이미 알고 계셨겠지만, ‘악마’가 예수를 시험에 빠트리기 위해 인용한 성서 구절입니다. 그리고 뒤에 읽어드린 욥기의 구절은 수아 사람 ‘빌닷’이 욥을 참소하기 위해 한 말입니다. 이 말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얼마나 잔인한 소리로 들렸을지 모릅니다.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아들 일곱과 딸 셋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실의에 빠져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상태에 있는 욥에게 충고와 위로를 한답시고 욥의 친구 ‘빌닷’이 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인즉, 네가 아무리 죄로부터 깨끗함을 주장해도 자네의 자식들이 죽은 것과 자네가 당하는 고난을 보면 이 모든 것이 자네의 죄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회개하고 새 출발하면 주님께서 도와주신다는 격려의 말입니다. 자식 잃은 슬픔과 고난의 책임을 온전히 아비인 욥에게 돌리고 있는 형국입니다. 천 길 벼랑 끝에서 지푸라기를 잡고 겨우 매달려 있는 사람에게는 하루살이의 가벼운 무게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차라리 이럴 때는 침묵해주는 것이 더 이롭지 않았을까요?
처음에 읽어 드린 구절은 시편 91편을 ‘악마διάβολος’가 인용하여 예수님을 유혹한 말입니다. 예수께서 40일 동안 아무것도 못 드셔서 지칠 대로 지쳐있는 상태를 오늘 복음서는 “몹시 허기지셨다.”는 짧은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인격을 지니신 예수님이시니 우리 인간이 느끼는 허기졌을 때의 혼미한 상태나 고통을 예수께서도 경험하셨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신 곳은 이스라엘의 ‘네게브 사막’이나 ‘유대 광야’ 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곳은 사막처럼 모래로 덮인 지역은 아니지만 기후가 건조해서 돌과 흙으로 이루어져 있고 수풀이 겨우 자라는 척박한 지역입니다.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하고 매우 건조하여 물이 없이는 단 하루도 지내기 어려운 지역입니다. 그런 곳에서 물이나 음식도 없이 40일을 지낸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의 상태가 어떠했는지 성서는 우리에게 자세한 것을 말하지 않지만, 예수께서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음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 ‘악마’는 “가증스러운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마치 예수를 걱정이나 해주는 양 하느님의 돌보심과 보호를 약속합니다. 분명 ‘악마’가 구약에서 인용한 말은 위로의 약속이지만, 그것을 듣는 예수께는 살갗을 찢는듯한 고통이었을 겁니다. 영혼의 깊은 곳을 후벼 파내는 듯한 아픔. 그래서 “가증스럽고 음흉한 위로”는 코브라의 독보다 더 치명적입니다. 차라리 그럴 때는 직접적인 저주나 욕설이 “가증스러운 위로”보다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 시험 사화’는 마르코복음 1장 12-13절에도 나오는데, 매우 간략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마르코와 달리 루가는 시험 사화를 ‘예수 어록’ 전승을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시험 사화’는 마태오와 루가의 기록이 유사합니다. 그러나 마태오와 루가의 차이점 중 특징적인 것 하나는 마태오는 ‘영’이란 뜻의 ‘프뉴마πνεῦμα’를 사용하여 ‘영에 이끌려’라고 표현한 반면 루가는 ‘프뉴마토스 하기우 Πνεύματος Ἁγίου’라 하여 ‘거룩한 영의 인도로’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미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루가복음은 ‘성령’을 무척 강조한 복음서입니다. 그리고 루가가 사용한 성령이 기운이나 에너지처럼 ‘πλήρης플레레스’ ‘충만한’ 상태였다는 표현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는 성령을 인격적으로 보다는 ‘하느님의 권능’ 또는 ‘하느님의 기운’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기운처럼 임하시기도 또 떠나시기도 한다는 의미로 읽히는 부분입니다. 아무튼, 척박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악마’의 유혹, 즉 “식욕”과 “권력욕”, “신심을 시험하는 유혹” 등을 물리치십니다.
구조주의 언어학자 소쉬르는 언어가 갖는 의미에 대해 연구하며 ‘랑그(Langue)’와 ‘파롤(Parole)’이란 개념으로 우리의 언어를 분석했습니다. ‘랑그’는 우리가 모두 함께 인지하는 추상적이면서도 사회적이고 공통된 변함없는 의미의 말을 뜻합니다. 즉 쉽게 말해 언어가 지닌 문법이나 시스템을 말합니다. ‘파롤’은 개인별로 상황에 따라 그 ‘랑그’가 서로 다르게 적용되어 의미가 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말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예를 들어보면, “잘했다”라는 말은 본래 칭찬의 의미이지만,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어떤 상황, 어떤 억양, 어떤 태도로 발화자가 말하고, 또 듣는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듣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상대방이 분위기 파악 못하고 자꾸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하면 듣다 못해 “그래, 잘했네, 잘했어”라고 말함으로써 상대의 말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으이그 잘했네”라는 말은 어떤 때 사용합니까? 상대가 뭔가 실수를 했을 때 어이가 없어 나오는 반응 아닙니까? “참 잘했어요~~오”라고 웃으며 억양의 변화를 줘서 말하면 상대를 장난스러운 뉘앙스로 칭찬하는 것이겠지요. 이와 같이 사회적이고 보편적인 언어의 의미는 개인과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르고 개별적인 의미로 해석되는데 이것이 바로 ‘파롤’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을 누가 언제 어떻게 하느냐도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악마’와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둘 다 똑같이 성서 본문을 인용했지만, 그 의미와 의도는 천양지차입니다. 원래 성서 구절이 지닌 의미가 누가 언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의미가 달라지니 말입니다. 제국주의 시대 때 ‘여호수아서’는 식민지 개척에 중심 바이블 역할을 했던 성서였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한다는 ‘복음 전도’의 미명 하에, 즉 “백인의 의무”라는 이데올로기로 서구 제국주의는 북미와 남미를 비롯하여 비서방 지역을 모두 식민지화시겼습니다. 또 개종을 명목으로 많은 종교와 문화를 말살시키고 경제적 수탈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잔혹한 침략 전쟁을 정당화한 것은 ‘여호수아서’의 가나안 침략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이해하고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전쟁’ 말입니다. 그런데 전쟁과 거룩함이 어떻게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모순입니다. 어린이와 힘없는 사람을 잔혹하게 죽이고 노예로 사람을 팔아넘기는 것을 우리는 ‘성전’이라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성서를 잘못 해석한 기독교가 저지른 근대의 죄악입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명분을 찾겠지만, 전쟁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현재 푸틴이 처한 상황이겠지요. 결국 그는 자가당착에 빠진 것입니다.
누가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성서 해석은 무궁무진하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 성서 연구의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할 때, 자의적 해석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그것이 지닌 위험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성서 말씀은 ‘신중함’과 ‘객관성’ 그리고 ‘진실성’이 담보가 되지 않으면 오히려 독이 될 위험도 있습니다. 물론 성령의 도우심은 필수겠지요. 단순히 위로를 위해 성서를 읽을 수도 있습니다. 또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또 성서를 통해 우리 삶의 지혜와 지침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양하게 성서를 읽고 해석하고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만 진리이고 타인에게는 적용되기 어려운 진리의 해석은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해석보다는 그 말씀이 적용되는 상황 또한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늘 성서 해석에는 사랑과 자비가 그 바탕이 됩니다. 그것이 주님의 십자가와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지고한 윤리적, 복음적 지향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서를 읽고 해석할 방향성을 주님께서는 이미 십자가를 통해 몸으로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모든 성서 해석의 근간이 됩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는 기도와 회개, 그리고 성찰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특히 다른 때보다 더 성서 말씀을 가까이하실 필요를 느끼실 것입니다. 말씀이 없는 기도는 하면 할수록 공허함만 더 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기도를 통해 위로도 받고 말씀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말씀의 진리를 깨달았을 때 늘 자기 자신에게 그 깨달음을 먼저 적용하고 타인에게 함부로 말씀을 적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남을 판단하는 오류와 함께 본인도 자가당착에 빠지고 맙니다. 말씀의 깨달음은 말이 아니라 깨달은 자의 행동과 행위를 통해 자연스럽게 전해지게 마련입니다. 말씀의 깨달음이 상호 간에 서로를 세워주고,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오늘 ‘악마’처럼, 또 욥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위로했던 친구들처럼, 위로도 아닌 위로가 고통받는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너희는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만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태 5:37)
자기 자신에게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 취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기. 이것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씀은 늘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자기도 감당하기 힘든 성서 구절을 타인에게 함부로 적용할 필요는 없겠지요. 가능하면 성서 구절이 의미하는 바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그 깨달음을 삶을 통해 실현하기 위해 성서를 읽고, 연구하고 그리고 묵상하는 자세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사순절이 그러한 말씀에 대한 묵상과 연구로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깨달은 후에는 그 말씀대로 실천하기. 이번 사순절이 모두에게 말씀과 더 가까워지고 말씀으로 변화되는 그러한 여러분의 사순절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전례독서: 사순 1 주일
본기도
구원의 하느님, 하느님 백성이 광야의 시련을 거쳐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이 세상 광야를 지나는 동안 주님의 이끄심을 따라 마침내 약속하신 영광의 나라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 신명 26:1-11
너희 하느님 야훼께 유산으로 받은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고 자리잡게 되거든 2 너희 하느님 야훼께 받은 그 땅에서 너희가 거둔 각종 햇곡식을 떠내어 광주리에 담아가지고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고르신 곳으로 가거라. 3 너희는 당직 사제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여라. ‘나는 야훼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의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이 땅에 들어오게 된 것을 오늘 나의 하느님 야훼께 아룁니다.’ 4 사제가 그 광주리를 네 손에서 받아 너희 하느님 야훼의 제단 앞에 놓으면 5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 아래와 같이 아뢰어야 한다.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었습니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 몸붙여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불어나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6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우리를 억누르고 괴롭혔습니다. 우리를 사정없이 부렸습니다. 7 우리가 우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는 우리의 아우성을 들으시고 우리가 억눌려 고생하며 착취당하는 것을 굽어살피셨습니다. 8 그리고 야훼께서는 억센 손으로 치시며 팔을 뻗으시어 온갖 표적과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모두 두려워 떨게 하시고는 우리를 이집트에서 구출해 내셨습니다. 9 그리하여 우리를 이 곳으로 데려오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10 그런즉 야훼여, 주께서 저에게 주신 이 땅의 햇곡식을 이제 제가 이렇게 가져왔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 놓고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 엎드려 예배 드리고 11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와 너희 집에 주신 온갖 좋은 것을 먹으며 즐겨라. 너희뿐 아니라 너희 가운데 있는 레위인과 떠돌이도 함께 즐기도록 하여라.
성시_ 시편 91:1-2, 9-16
1 지존하신 분의 거처에
. 몸을 숨기고 ◯
. 전능하신 분의 그늘 아래
. 머무는 사람아,
2 주께서 네 피난처시요, 네 요새이시며 ◯
. 네가 의지하는 하느님이라고 말하여라.
9 주님을 너의 피난처라 하고 ◯
⋅ 지극히 높으신 분을 너의 요새로 삼았으니,
10 어떤 불행도 너를 덮치지 못하리라. ◯
⋅ 어떤 재앙도 네 집을 가까이 못하리라.
11 주께서 너를 두고 천사들을 명하여 ◯
⋅ 너 가는 길마다 지키게 하셨으니,
12 행여 너 돌 뿌리에 발을 다칠세라 ◯
⋅ 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고 가리라.
13 네가 사자와 독사 위를 짓밟고 다니며, ◯
⋅ 사자새끼와 살모사를 짓이기리라.
14 나에게 부르짖는 자를 내가 건져 주며 ◯
. 나의 이름을 아는 자를 내가 높여 주리라.
15 나를 부르는 자에게 대답해 주고,
⋅ 환난 중에 그와 함께 있으리니 ◯
. 나는 그를 건져주고 높여 주리라.
16 그로 하여금 마음껏 오래 살게 하고 ◯
.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여 주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 로마 10:8-13
… 8 하느님께서 “말씀은 네 바로 곁에 있고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 신명 30:14” 하셨는데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9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11 성서에도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칠십인역 이사 28:16”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12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무런 구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만민의 주님이 되시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찾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복을 내리십니다. 13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 요엘 2:32”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복음서_ 루가 4:1-13
1 예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성령을 가득히 받고 돌아오신 뒤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셔서 2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서 사십 일이 지났을 때에는 몹시 허기지셨다. 3 그 때에 악마가 예수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하여 보시오.” 하고 꾀었다. 4 예수께서는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칠십인역 신명 8:3’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를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잠깐 사이에 세상의 모든 왕국을 보여주며 6 다시 말하였다. “저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저것은 내가 받은 것이니 누구에게나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수 있소. 7 만일 당신이 내 앞에 엎드려 절만 하면 모두가 당신의 것이 될 것이오.” 8 예수께서는 악마에게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신명 6:13-14’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9 다시 악마는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시오. 10 성서에 ‘하느님이 당신의 천사들을 시켜 너를 지켜주시리라. 시편 91:12’ 하였고 11 또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손으로 너를 받들게 하시리라. 시편 91:12’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12 예수께서는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떠보지 마라 칠십인역 신명 6:16’라는 말씀이 성서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13 악마는 이렇게 여러 가지로 유혹해 본 끝에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를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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