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설교문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

James Chae 2022. 3. 12. 19:27

 

2022.3.13. 사순 2 주일 감사성찬례

창세 15:1-12, 17-18 / 시편 27 / 필립 3:17-4:1 / 루가 13:31-35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

 

 

채야고보 신부 / 성공회 제주한일우정교회 사제, Artist

 

한마음으로 당신을 위하면 당신께서도 한마음으로 위해 주십니다. 흠없이 당신을 위하면 당신께서도 흠없이 위해 주십니다. 
마음을 품지 않고 당신을 받들면, 당신께서도 마음 품지 않고 붙들어주십니다. (시편 18:25-26)

 

오늘 읽은 복음서 말씀에서 선지자와 예루살렘의 이미지가 교차 비교되어 묘사됩니다. 선지자들의 죽음과 그들을 죽인 유대인들의 이미지 말입니다. 루가는 구약의 선지자들의 죽음을 통해 예수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선지자들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 간에 상호 연관성이 있음을 드러냅니다. 과거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선지자들을 보내시어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그들을 회개하도록 부르셨지만, 결국 그들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이를 오늘 복음서는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들이 원하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부르심, 하느님의 선한 창조의 목적에 맞는하느님의 형상(Imago Dai)’ 지닌 인간으로 돌아오라는 요청입니다. 그러나 과거 선지자들의 외침을 무시했던 이스라엘 조상들처럼 예수의 시대에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선지자의 죽음은 예수 죽음에 대한 ἀναλογία(아날로기아), , 유비(類比, 또는 유추類推)이고, 그분의 사역은 선지자들의 사역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루가가 오늘 복음서를 통해 보여준 예수님에 대한선지자적 이미지입니다. 이는 다른 3 복음서와 다른 루가복음만의 독특한예수의 이미지입니다. (see 루가 7:16; 13:33; 24:19; 사도 3:22-23; 7:37)

 

루가 기자의 관점에서 과거이스라엘의 시대 율법과 선지자들의 시대였습니다. 하느님의 역사적 현존은 율법을 통해 그리고 선지자들의 활동을 통해서 역사 속에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지자들의 시대는 결국 세례자 요한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 것이라고 루가 기자는 생각했습니다. 과거이스라엘의 시대부터 이어온 하느님의 구속사적 부르심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어집니다. 이것이 루가가 생각하는 구속사적 시간인예수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시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으로 끝이 납니다. 이후에 하느님의 구속사는 3 시기인성령의 시대’, 교회의 시대 이어집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이는 콘첼만이 정리한 구속사적 시대 구분이라고 이전 설교에서 말씀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 구분으로 우리는 루가복음을 관통하는 하느님의 구속사적 시간관을 통해 루가복음을 새롭게 이해하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3가지 시대를 관통하는 중심은 자연스럽게 예루살렘과 그곳에 있는 성전이 됩니다. 그래서 루가복음은 예수의 탄생 이야기부터 성전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른 복음서에 비해 많이 기록한 것입니다. 모든 예수님의 사역의 하이라이트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 메시아로서 민중에 의해 추대받으셨고, 성전을 정화하셨으며, 배반당하시어 붙잡히시고,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예루살렘 근처베다니에라는 지역에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성령강림절에 강림하신 곳도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구원사의 중심이며 그분의 현존의 장소가 됩니다.

 

오늘 말씀은 구약의 시대 때부터 꾸준히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부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그들의 욕심이나 마음의 완악함 때문만은 아닌 같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조상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흘리게 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마태 23:30)라고. 정말 그랬을까요? 오늘날에도 가끔 교인들 가운데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있을 있습니다. 만약 내가 예수님의 시대에 그를 따라다니며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을 직접 듣고 봤다면, 나는 그렇게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만약 타임머신이 있어서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하시는 자리에 가면 그분의 모습을 직접 보고, 가르침에 감동을 받아 예수를 죽기까지 따를 있을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오병이어가 벌어지는 현장에 계셨다면 정말 예수님을 철저히 믿게 되고 그분 말씀대로 살게 되리라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어쩌면 그것은 12 제자들을 모욕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핵심 제자였던 12명의 제자들은 그분의 설교, 그분의 특수 가르침, 그분의 기적을 모두 경험했고, 심지어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며 공동생활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님께서 잡히실 결국 모두 도망을 쳤습니다. 그중 하나는 예수를 팔아넘겼고, 그중 하나는 예수를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까지 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예수님과 함께했다면 제자들처럼 예수를 버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하십니까? 

 

궁지에 몰린 인간은 본성이 바닥에서부터 전부 드러나게 되는 법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특히 악랄한 것입니다.”(영화소년심판대사 중에서) 궁지에 몰리면 우리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우린 아무도 장담할 없습니다. 이렇게 편하게 예배를 드리고, 이러한 평화로움 속에서 종교 생활을 하는 것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는 우리의 일상처럼 생활의 부분일 뿐입니다. 물론 어렵게 시간과 노력을 드려 힘들게 교회에 출석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최소한 핍박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는다고 욕은 들을지언정,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핍박을 받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그럼 누가 과연 믿음을 가질 있는가? 그럼 누가 과연 구원을 받을 것인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느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 (루가 18:27)

 

결국 믿음은 사도 바울로나 루터가 외친 것처럼오직 은총으로만 가능한 것임을 우리는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다음이오직 믿음이겠지요. 하느님께서 주신 성령이 없이는 우리는 죄를 깨달을 수도 없고(요한 16:9) 그분을 믿을 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또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1 고린 12:3)

 

우리가 너무 자주 들어 귀에 인이 박힌 말씀이지만, 우리는 믿음을 이야기할 이러한 말씀의 언저리를 맴돌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성령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믿음에 대해 다른 길이 좀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냥 가만히 기도만 하고 있으면 되는 겁니까? 믿음이 성령의 은총이라면 우리 편에서는 애써 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그럼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의 외침과 예수님의 외침 그리고 많은 성인들의 외침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믿음은 은총이니 그냥 가만히 앉아 기도만 하고 기다리라고 하던가요?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 5:20)

 

그러면서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에 대해서는화를 입을 것이다.”(마태오 23:1-36, 마르코 12:38-40, 루가 20:45-47)라고 그들을 저주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들이 율법의 모양만 따르고 율법의 정신은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의로움에 미치는 것에 대해 우리에게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바라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의 정신인 사랑과 자비를 잊고 오직 문자적으로, 가식적으로 행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종교적 열정과 종교적 의로움은 우리가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바라사이파 사람들의 신앙과 실천에서 위선만 빼면 된다는 것이지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얼마나 철저히 신앙생활을 했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실 겁니다. 그들의 호칭인바리사이분리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헬레니즘이라는 세속주의에 대항하여 그들은 철저히 율법 조문의 해석과 실천에 매달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준수로 타인과 자신들을 구분하는 익숙했던 사람들입니다. 물론 대중적 지지도 받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살려고 철저히 행동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만 그러한 율법의 문자적 실천은 정말 힘든 것입니다. 그러니 가식적인 행동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행함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그러나 행함의 정신은 예수님처럼. , 사랑과 자비가 없는 율법 준수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입각한 예수님의 새로운 율법의 해석은 마태오복음의산상설교 루가복음의평지설교 오롯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율법의 해석에 따라 행하는 자가 하느님 앞에 의로운 자로 판명이 것입니다.

 

내용과 형식.

둘은 결코 분리될 없는 것입니다. 동전에 앞면과 뒷면이 함께 있듯이 둘은 결국 하나입니다. 미술사에서 예술의 이러한 성질 때문에 많은 논란이 되곤 했습니다. 큐레이터 생활 10년의 경험에 비춰봐도 작품의 형식이 좋은데 내용이 허접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형식은 엉망인데 내용만 화려한 작품들은 넘쳐납니다. 형식이 내용을 담아내지 못하고 내용은 형식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마치 격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사람처럼 말입니다. 예술 작품이 이러한데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언행이 일치하는 사람. 생각과 마음과 자세 그리고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는 뭔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기품과 품격이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행동과 행위는 사람의 내면을 자연스럽게 담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뒷모습은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다고 하는 말에 공감이 갑니다. 앞모습은 꾸밀 있어도 뒷모습은 우리가 가꾸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사람은 언젠가는 가식과 위선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느 정도 가식과 가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인간의 본능에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정도는 ‘내숭떤다 있지요. 그러나 문제는 정도가 지나쳐 남과 자기 자신조차도 속이는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언행의 불일치뿐만 아니라 개인의 인격에도 분열이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 원하지 않은 것에 더해 그들은 도저히 믿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들려주신 이 소식을 누가 곧이들으랴? 야훼께서 팔을 휘둘러 이루신 일을 누가 깨달으랴?” (이사 53:1)

 

이사야서 53장은 우리 주님을 “a man of suffering 고난 받는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장 볼품없는 자의 외침에 모두 코웃음을 치고, 그가멸시만 당하였으므로 그들은 덩달아 그를 멸시했다라고 성서는 기록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를 원하지도 믿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멸시하고 핍박했다고 합니다. 백성들의 존경을 몸에 받았던 세례자 요한조차도 바라사이파 사람들은 무시했으니, 초라한 모습의 우리 주님은 어떠했겠습니까?

 

오늘 복음서 말씀은 예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원하지 않았다.” 말은 유대인들과 주님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깨졌음을 말해주는 말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거부했습니다. 믿기를 거부했고, 관심조차 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율법 너머로 생각을 없었습니다. 그러니 지혜가 그들에게 부재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끊임없이 하느님의 지혜를 주시고 계십니다. 또한 성서를 통해, 예배를 통해, 사회적 문제를 통해, 개인의 문제를 통해, 삼라만상의 변화를 통해우리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계십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완전한 인격이시기 때문에 우리와 인격적인 만남을 갈망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원하지 않으면그분도 우리에게 침묵하십니다. 그분은 예의 바르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인격에 맞는 격으로 우리를 대우하십니다. 우리는 입력된 값과 연산에 의해 작동되는 로봇이 아닌하느님의 형상 지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뜻에 합당한 예의를 가지고 그분과 관계해야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자유의지 그분께 어떻게 내어 드려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 설교 부분에서 읽어드린 시편의 구절을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한마음으로 당신을 위하면 당신께서도 한마음으로 위해 주십니다. 흠없이 당신을 위하면 당신께서도 흠없이 위해 주십니다. (시편 18:25)

 

주님께서 우리에게 예의를 지켜주시니, 우리도 그분께 합당한 예를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그분을 마음으로 섬기면 그분도 우리를 마음으로 사랑해주십니다. 그것이 인격 인격의 만남이며, 상호 섬김, 상호 존중, 상호 신뢰의 관계인 것입니다. 이것이인격적 관계이며, 사랑이고, 우정입니다. 하느님께 하느님의 격에 맞는 예의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분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경거망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숙한 어른처럼 여러분의 신앙의 격을 높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도 여러분에게 어울리는 격으로 여러분을 세워주실 것입니다. 사순절이 우리 자신이, 우리 교회가, 우리 가족이 조금은 격조 있는 단계로 성장하는 은총의 시간이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께 헌신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도 여러분에게 헌신하실 것입니다. 아멘.

 

 


 

전례독서: 사순 2 주일(다해)

 

본기도

신실하신 하느님, 믿음으로 순종하는 이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주시나이다. 구하오니,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순종하여 선한 열매를 맺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 창세 15:1-12, 17-18

1 이런 일들이 있은 뒤에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환상으로 나타나시어 말씀하셨다.
.   “무서워하지 말아라, 아브람아,
.    
나는 방패가 되어 너를 지켜주며,
.    
매우 상을 너에게 내리리라.”

2 그러자 아브람이 말씀 드렸다. “야훼 나의 주여, 나는 자식이 없는 몸입니다. 가문의 대를 이을 사람이라고는 다마스쿠스 사람 엘리에젤밖에 없는데, 나에게 무엇을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3 나를 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식 하나도 점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대를 이을 사람이라고는 집의 종밖에는 없지 않습니까?” 아브람이 이렇게 여쭙자, 4 야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대를 이을 사람은 그가 아니다. 장차 몸에서 친아들이 대를 이을 것이다.” 5 그리고는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어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있거든 별들을 세어보아라. 자손이 저렇게 많이 불어날 것이다.” 6 그가 야훼를 믿으니, 야훼께서 이를 갸륵하게 여기시어, 7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야훼다.” 8 아브람이내가 땅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9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 암소와 암염소와 숫양과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마리씩 나에게 바쳐라.” 10 그는 모든 것을 잡아다가 반으로 쪼개고 쪼갠 것을 짝을 맞추어 마주놓았다. 그러나 날짐승만은 쪼개지 않았다. 11 솔개들이 잡아놓은 짐승들 위에 날아오면, 아브람은 이를 쫓고 있었다. 12 무렵, 아브람이 신비경에 빠져들어 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데,

17 해가 져서 캄캄해지자, 연기 뿜는 가마가 나타나고 활활 타는 횃불이 쪼개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가는 것이었다. 18 야훼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말씀하셨다.나는 이집트 개울에서 유프라테스에 이르는 땅을 후손에게 준다…”

 

 

성시_ 시편 27

1    주께서는 나의 ,
.      구원이시니,
.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오.
.     주께서 생명의 피난처시니
.     누구를 무서워하리오.
2    나를 잡아먹으려고 달려드는 악한 무리들
.     나의 원수, 나의 적들, 휘청거리고 쓰러지리라.
3     군대 진을 치고 에워쌀지라도
.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아니하리라.
.     군대를 몰아 달려들지라도
.     오히려 나는 가운데 마음 든든하리니
4    주님께 청하는 하나 나의 소원은
.     한평생 주님의 성전에 사는 그것뿐.
.     아침마다 성전에서 눈을 뜨고
.     주님을 뵙는 그것만이 나의 낙이라.
5     어려운 당할 때마다
.     당신 초막에 숨겨 주시고
.     당신의 장막 그윽히 감춰 주시며
.     바위 위에 올려 높이시리라.
6    에워싼 원수들을 내려다보며,
.      장막에서 제물 바치고 환성 올리고
.     노래하며 주님께 찬양하리라.
7    주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 주소서.
.     불쌍히 여기시어 대답하소서.
8  “나를 찾으라말씀하셨으니
.      마음 그대로 아뢰옵니다.
.     주여, 이제는 당신을 뵙게 하소서.
9    그동안 종을 도와 주셨으니,
.     
당신의 얼굴을 숨기지 마소서.
.     
구원자이신 하느님,
.     
진노하지 마시고 물리치지 마소서.
.      몸을 저버리지 말아 주소서.
10   부모가 나를 버릴지라도
.     주께서는 나를 거두어 주실 것입니다.
11  주여, 당신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
.     원수들이 지키고 있으니,
.     안전한 길로 인도하소서.
12  원수들이 독기를 뿜으며
.     거짓 증언하러 일어났으니
.      몸을 그들의 밥이 되지 않게 하소서.
13  그러나 나는 살아 생전 위에서
.     주님의 은덕을 입으리라 믿습니다.
14  주님을 기다려라.
.     
마음 굳게 먹고 용기를 내어라.
.     
주님만을 기다려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 필립 3:17-4:1

17 형제 여러분, 나를 본받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과 같이 우리를 모범으로 삼고 따르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

18 내가 벌써 여러 여러분에게 일러준 것을 지금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바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19 그들의 최후는 멸망뿐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뱃속을 하느님으로 삼고 자기네 수치를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하며 세상 일에만 마음을 쓰는 자들입니다. 20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오실 구세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21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있는 능력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4:1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을 믿으며 굳세게 살아가십시오.

 

 

복음서_ 루가 13:31-35

31 바로 때에 몇몇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어서 곳을 떠나시오. 헤로데가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자 32 예수께서는 여우에게 가서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를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이면 일을 마친다.하고 전하여라. 33 오늘도 내일도 다음날도 계속해서 길을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야 죽을 있겠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번이나 자녀들을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는 응하지 않았다. 35 너희 성전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을 것이다(예레 22:5).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시편 118:26)하고 너희가 말할 날이 때까지 너희는 정녕 나를 다시 보지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