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6.19. 연중 12주일
열왕상 19:1-16 / 시편 42, 43 / 갈라 3:23-29 / 루가 8:26-39
“존재를 건립하는 공간”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오늘 읽은 복음서는 ‘구마사화’입니다. 마태오, 루가, 마르코가 모두 이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구마사화가 있었던 장소에 대한 기록이 복음서마다 상이합니다. 마태오는 ‘가다라 지방(Gadara)’이라 표기했고, 루가는 마르코복음을 따라 ‘게라사(거라사,Gerasa)’라고 기록했습니다. 물론 공동번역 성서는 루가복음의 장소를 ‘게라사’가 아니라 ‘게르게사(Gergesa)’로 번역을 했습니다. 가다라, 게라사(거라사), 게르게사는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지만 각각 다른 지명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복음사가들이 지역명을 사용하는 데 상이한 것은 아마도 구마사화 이야기에 ‘돼지 집단 익사 사건’이 추가되면서 발생한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르코가 언급한 ‘게라사’는 갈릴레아 호수 동남쪽으로 55km 정도 떨어진 도시였습니다. 돼지들이 우르르 달려가 익사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이지요. 그래서 마태오는 지명을 ‘가다라’로 고친 듯합니다. 거기는 갈릴레아 호수에서 10km 정도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돼지들이 달려가기에는 여전히 먼 거리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공동번역 성서는 루가복음의 ‘게라사’를 번역하면서 ‘게르게사’로 고쳤습니다. ‘게르게사’는 ‘게라사’보다 갈릴레아 호수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이니 돼지 집단 익사 사건 이야기에 가장 적합한 지명입니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를 염두에 두고 그렇게 번역한 것이 아니면 다른 헬라어 버전을 참고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스라엘의 지리에 밝았던 교부 오리게네스도 이를 ‘게르게사’라고 고쳐 사용했다고 하니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이 언급된 지역들이 유대인들이 혐오했던 이방 지역이었다는 점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만 활동을 하셨습니다. 물론 띠로 지방의 시로페니키아 이방 여인을 고쳐주신 적이 있으시지만, 이렇게 이스라엘 밖 이방인들의 지역에까지 일부러 가셔서 이방인을 고치신 일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마르 7:24-30 ; 마태 15:21-28). 그 지역에 가셔서 주님께서 유일하게 하신 일은 ‘악령 들린 자’를 치료하신 일뿐입니다.
오늘 ‘구마사화’에는 소위 ‘불결한 것’들이 넘쳐납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그렇습니다. 불결한 지역(이방 지역 게라사), 불결한 장소(무덤), 불결한 짐승(돼지), 불결한 병(악령 들림). 심지어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은 수치스럽게도 알몸이었습니다. 또한 몸을 피할 거처 없이 무덤에서 살았습니다. 그 사람의 처지가 어떠했을지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사람들로부터 소외를 받은 것인지, 아니면 자기 스스로 공동체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킨 것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가 ‘레기온’이라는 ‘많은 악령들’에 사로잡힌 것을 보면 병이 그 소외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관점에서 전혀 자기 존재를 건립할 수 없는 삭막한 상태 속에 놓였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차별적 편견이 아니더라도 실제로 일반인들이 기피하는 ‘무덤’이란 공간에서 살았습니다. 하이데거는 모든 예술작품이 작품 자체의 ‘세계를 건립’한다라고 하였지만, 저는 모든 장소와 공간은 그 안에 거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건립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결한 장소는 불결함을 건립합니다. 지저분한 공간은 무질서를 건립합니다. 요란하고 현란한 댄스 클럽에서 거룩함을 건립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모든 장소와 공간은 사람들의 삶과 생활, 문화를 건립합니다. 장소와 공간은 존재가 거하는 ‘존재의 세계’를 건립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은 언제나 우리의 존재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눈에 보이는 장소와 공간은 그 안에 형성될 인간의 조건과 인격을 건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옥과 같은 곳에서 인간의 교정이 가능하다는 것은 어불성설로 여겨집니다. 푸코가 말했듯이 근대 감옥이란 공간은 ‘감시와 격리’에 최적화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감시와 격리’ 하에서 인간의 존재는 ‘건립’이 아니라 ‘붕괴’되고 맙니다.
모든 존재에는 자신 만의 ‘존재의 자리(Sitz des Seins)’가 있습니다. 심지어 들꽃조차도 자신에게 맞는 최적의 공간이 있습니다. 아스팔트 틈에 핀 들꽃은 그 자체로 아름답기는 하지만 처연한 느낌을 줍니다. 존재의 자리를 획득하지 못한 존재는 존재를 건립하지 못하고 모종의 처연함을 드러냅니다. 인간은 생활공간, 즉 침실과 식당, 공부방, 응접실 등으로 주거 공간을 구분하고 그 공간 속에 개인의 삶을 건립합니다. 오늘 읽은 악령 들린 남자는 자신의 삶을 제대로 건립할 수 없을 지경에 놓였습니다. 그는 존재를 건립할 공간을 잃었습니다. 비와 바람, 추위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움막조차 없습니다. 아마도 바위 무덤 틈에 자신의 몸을 의탁하면 지냈을 겁니다. 물과 음식을 어떻게 먹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굶는 날이 다반사였을 겁니다. 자신의 공간이 붕괴되면서 그의 존재도 서서히 붕괴되었습니다. 공간이 붕괴된 그 사람은 자기를 온전히 건립하지 못했고 대신 수 천의 악령들에 의해 수 천 가지의 인격을 자기 안에 건립했습니다. 그의 몸은 ‘레기온 악령들’이라는 ‘불결한’ 인격들을 위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격이 아닌 ‘타자들의 인격’에 의해 철저히 타자화되었습니다. 원래 인간에게 주어진 보편적 존엄성도 잃었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존재와 인격을 온전히 ‘건립’ 하지 못한 사람은 쉽게 타인들이나 다른 것들에 휘둘리고 현혹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존재는 늘 안정을 취할 수 없어 번민과 번뇌에 쉽게 사로잡힙니다. 존재의 건립 대신 두려움과 염려가 건립됐기 때문입니다. 한 번 두 번 자신의 것을 타자에게 내어주다 보니 어느새 수 천의 타자들이 그를 점령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고 타인의 시선과 반응에 좌지우지되는 사람이 됐습니다. 한마디로 주체성 없는 사람이 됐습니다. ‘레기온’이 로마 군대의 편제 단위로 6천 명 정도 되니 그 사람의 형편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는 존재로서의 주체성을 잃었기에 가끔 악한 인격들이 이끄는 대로 발작을 일으키며 자기를 결박한 쇠사슬을 끊고 광야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그의 영혼은 서서히 타자들에게 길들여지면서 ‘자기 붕괴’을 경험했고, 결국에는 그의 전존재가 해체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살아가는 장소와 공간을 설계하고 건립한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모든 장소와 공간도 ‘무의식 속에서’ 우리 존재를 건립한다는 사실을 쉽게 간과합니다. 불결한 장소는 불결함을 건립하고, 우울한 장소는 우울함을 건립합니다. 폭력적인 공간은 폭력을 건립하고, 평화로운 공간은 평화와 안정을 건립합니다. 장례식장은 장례문화를 건립하고, 결혼식장은 결혼의 문화를 건립합니다. 결혼 식장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성스러운 공간은 존재의 성스러움을 건립합니다. 성당 공간은 그리스도인을 건립합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공간을 건립하지만, 공간도 인간 존재를 건립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공간’에 놓여 있는지 자주 묻고 살펴봐야 합니다. 한 개인이 주로 생활하는 공간은 그 사람의 존재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떤 공간에서 여러분의 존재를 건립하고 계십니까? 자신이 속한 공간은 나의 존재와 인격을 건립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는지요? 그래서 신앙심 깊은 동방정교회 신자들은 자신의 공간에 늘 성스러운 이콘을 세웁니다. 이콘은 공간의 성스러움을 건립합니다.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을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또 우리 교회는 진정한 예배를 건립하는 장소인가요? 여러분의 가정은 사랑과 평안함을 건립하는 장소인가요? 우리 성당이 속한 지역은 우리 교회로 인해 거룩함을 건립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거룩함을 자신 안에 건립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양한 공간과 장소에서 우리 자신이 붕괴될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하느님, 생명을 주시는 나의 하느님, 당신이 그리워 목이 탑니다. 언제나 임 계신 데 이르러 당신의 얼굴을 뵈오리이까?” (시편 42:2)
시인은 항상 ‘임 계신 데”에 이르러 주님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시냇물을 찾는 목마른 사슴처럼 갈급해합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건립할 ‘임 계신 데’를 항상 갈망합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왜 주님께서 갑자기 배를 타시고 이방인 지역까지 가셨는지 언급이 없지만, 개인적 상상력을 의지하면, 아마도 주님께서는 악령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사람의 영혼의 외침을 들으셨을 겁니다. 한 사람 안에 6 천의 악령이 들리는 경우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한 처지 속에서 아마도 그의 영혼은 끊임없이 악령으로부터의 ‘해방’을 남몰래 외쳤는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신 걸까요? 아무튼 주님께서는 갑자기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루가 8:22)라고 말씀하시고 갈릴래아 호수 동쪽으로 가셨습니다. 게라사로 가는 도중 풍랑을 만나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기적도 베푸셨습니다. 풍랑을 잠재우시는 분이시니 수 천의 악령이 들린 사람을 구해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게라사에 도착하자마자 만난 첫 번째 사람이 바로 ‘악령 들린 자’입니다. 그 외에 주님께서 그 지방의 다른 이방인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로지 그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풍랑을 잠재우며 ‘그곳’으로 가신 것입니다. 그 사람과 주님 사이에 모종의 연관성이 선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유대인 전도보다 이방인 전도를 주장하는 그룹에서는 아마도 이러한 게라사 방문 이야기가 그들을 선교적으로 고무시켰을 겁니다. 그들은 이방인 전도에 대한 정당성을 이 이야기에서 찾았을지 모릅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이방인들에 대한 총체적 편견들이 이 한 이야기 속에 모두 들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이방인들이 사는 ‘불결한 지역’, 무덤이 있는 ‘불결한 장소’, 유대인들이 기피하는 동물인 ‘불결한 돼지’, 저주와도 같은 불결한 병인 ‘귀신 들림’… 아마도 이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가진 혐오의 모든 이미지들을 다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편견과 선입견을 주님께서는 단 한순간에 ‘돌파’하십니다. 구원과는 거리가 먼 이방인들도 하느님의 은총 가운데 편입될 수 있음을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통해 초대 교회는 인지했을 겁니다. 한 사람에게 무려 ‘수 천의 악령’이 들렸다는 구성은 그만큼 이방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편견이 깊었음을 상징합니다. 주님께서는 악령 들린 이방인을 고쳐주시고, 그가 주님을 따르겠다는 것을 말리셨습니다. 대신 그에게 명령하십니다. 가서 “하느님께서 너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일을 이야기하라.”(루가 8:39) 그는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이 있던 ‘지역과 공간’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존재가 붕괴됐었던 게라사 지역에서 분명 예수의 제자로 충실히 살았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 예수의 은총으로 ‘불결함’이란 유대인들의 편견을 넘어 자신의 삶과 공간 속에서 새롭게 자기 존재를 건립해 나갔을 겁니다.
모든 공간은 존재를 건립합니다. 그리고 모든 공간이 ‘임 계신 데’가 될 때 그 공간은 생명의 공간이 됩니다. 생명이 없으면 성장도 없고, 존재는 건립될 수 없습니다. 오늘 시편의 시인이 간절히 찾았던 ‘임 계신 데’는 결국 ‘존재를 건립하는 공간’인 것입니다. 악령 들린 자의 붕괴된 공간에 주님께서 ‘직접’ 방문하심으로 그곳이 ‘임 계신 데, 즉 하느님 현존의 공간’이 됐습니다. 우리의 공간이 그러한 존재를 건립하는 ‘성스러운 공간’이 되길 바랍니다. 일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건립할 공간을, 자신만의 공간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 기도의 시간과 공간. 그곳에서 조용히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공간으로 ‘직접’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공간이 변화되면 우리의 존재도 변화됩니다. 우리의 존재가 변화되면 우리의 공간도 변화됩니다. 존재와 공간은 상호 건립됩니다.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직장이, 우리의 성당이 서로의 존재를 세워주고 서로의 인격을 건립해주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변화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전례독서_ 연중12주 (다해) 1
본기도
주 하느님,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성령의 지혜와 힘을 주시어 모든 분열의 상처를 씻고 하나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 열왕상 19:1-16
1 아합은 엘리야가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떻게 예언자들을 칼로 쳐죽였는지를 낱낱이 이세벨에게 말해 주었다. 2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전갈을 보내었다. “네가 예언자들을 죽였으니 이번에는 내가 너를 내일 이맘때까지 반드시 죽이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천벌 아니라 그 이상이라도 내가 받으리라.” 3 엘리야는 두려워 떨며 목숨을 구하여 급히 도망쳤다. 그는 유다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 곳에 시종을 남겨두고 4 자기는 하룻길을 더 여행하여 거친 들로 나갔다. 싸리나무 덤불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 아래 앉은 그는 죽여달라고 기도하였다. “오, 야훼여,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주십시오. 선조들보다 나을 것 없는 못난 놈입니다.” 5 그리고 나서 엘리야는 싸리나무 덤불 아래 그대로 누워 잠들었다. 그 때 하늘의 천사가 나타나 흔들어 깨우면서 “일어나서 먹어라.” 하고 말하였다. 6 엘리야가 깨어보니 머리맡에, 불에 달군 돌에 구워낸 과자와 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음식을 먹고 또 물도 마셨다. 그리고는 다시 누워 잠이 들었다. 7 야훼의 천사가 다시 와서 그를 흔들어 깨우면서 “갈 길이 고될 터이니 일어나서 먹어라.” 하고 말하였다. 8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는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 사십 일을 밤낮으로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
9 그가 거기 한 동굴에 이르러 그 속에서 그 날 밤을 지내는데 갑자기 야훼의 말씀이 들려왔다. “엘리야야,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10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과 맺은 계약을 저버리는 것을 보고 만군의 하느님 야훼를 생각하여 가슴에 불이 붙고 있습니다. 이 백성은 당신의 제단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죽였습니다. 이제 예언자라고는 저 하나 남았는데 그들이 저마저 죽이려고 찾고 있습니다.” 11 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앞으로 나가서 야훼 앞에 있는 산 위에 서 있거라.” 그리고 야훼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 한 줄기가 일어 산을 뒤흔들고 야훼 앞에 있는 바위를 산산조각 내었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다음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12 지진 다음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불길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불길이 지나간 다음, 조용하고 여린 소리가 들려왔다. 13 엘리야는 목소리를 듣고 겉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그러자 그에게 한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야,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14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과 맺은 계약을 저버리는 것을 보고 만군의 하느님 야훼를 생각하여 가슴에 불이 붙고 있습니다. 이 백성은 당신의 제단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죽였습니다. 이제 예언자라고는 저 하나 남았는데 그들이 저마저 죽이려고 찾고 있습니다.” 15 야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다마스쿠스 광야로 해서 돌아가거라. 다마스쿠스 성에 들어가거든 하자엘을 기름 부어 시리아의 왕으로 세우고 16 님시의 아들 예후를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라. 그리고 아벨므홀라 출신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기름 부어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 …”
성시_ 시편 42, 43
1 암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
. 이 몸은 애타게 당신을 찾습니다.
2 하느님, 생명을 주시는 나의 하느님,
. 당신이 그리워 목이 탑니다. ◯
. 언제나 임 계신 데 이르러
. 당신의 얼굴을 뵈오리이까?
3 “네 하느님이 어찌 되었느냐”
. 비웃는 소리를 날마다 들으며 ◯
. 밤낮으로 흘리는 눈물이 나의 양식입니다.
4 기쁜 축제의 모임에서 ◯
. 환희와 찬미소리 드높던 그 행렬에서
¶ 무리들 앞장서서 성전으로 들어가던 일, ◯
.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미어집니다.
5 어찌하여 내가 이토록 낙심하는가? ◯
. 어찌하여 이토록 불안해하는가?
¶ 나를 구해주신 분, 하느님을 기다리리라. ◯
. 나의 하느님, 그분을 찬양하리라.
6 내가 스스로 낙심이 되어서
. 요르단 물줄기가 솟는 땅, 헤르몬산에서, ◯
. 미살 봉우리에서 당신을 부릅니다.
7 당신의 벼락치는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노호하고 ◯
. 당신의 파도와 물결들이 한 덩이 되어
. 이 몸을 휩쓸고 지나갑니다.
8 낮에는 주님의 사랑을 베푸시고,
. 밤에는 이 입술에 찬양을 채워주시니, ◯
. 나는 내 생명의 하느님께 기도하리이다.
9 나의 반석이신 하느님이여,
.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습니까? ◯
. 이 몸이 원수에게 짓눌려 슬픈 나날을 보내니
. 이것은 어찌된 일이옵니까?
10“네 하느님이 어찌 되었느냐?”
. 날마다 원수들이 빈정대는 소리가 ◯
. 뼛 속을 저며 들어옵니다.
11 내 영혼아, 어찌하여 이토록 낙심하는가? ◯
. 어찌하여 이토록 불안해하는가?
¶ 나를 구해주신 분, 하느님을 기다리리라. ◯
. 나의 하느님, 그분을 찬양하리라.
1 하느님이여, 나의 옳음을 판단하시고
. 매정하게 나를 무고하는 자들을 거슬러 변호해주소서◯
. 거짓밖에 모르는 악인들에게서 이 몸을 구하소서.
2 나의 요새이신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옵니까? ◯
. 이 몸이 원수에게 짓눌려 슬픈 날을 보내다니,
.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3 당신의 빛, 당신의 진실을 길잡이로 보내시어 ◯
. 당신 계신 거룩한 산으로 이끌어주소서.
4 하느님, 당신의 제단으로 나아가리이다. ◯
. 나의 기쁨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리이다.
¶ 하느님, 나의 하느님, 수금가락에 맞추어 ◯
. 당신께 감사 찬양 올리리이다.
5 내 영혼아, 어찌하여 이토록 낙심하는가? ◯
. 어찌하여 이토록 불안해 하는가?
¶ 나를 구해주신 분, 하느님을 기다리리라. ◯
. 나의 하느님, 그분을 찬양하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 갈라 3:23-29
23 믿음의 시대가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의 감시를 받았으며 믿음이 나타날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24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후견인 구실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신 뒤에는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25 이렇게 믿음의 때가 이미 왔으니 우리에게는 이제 후견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26 여러분은 모두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삶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27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28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29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따라서 약속에 의한 상속자들입니다.
복음서_ 루가 8:26-39
26 그들은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에 있는 게르게사 지방에 다다랐다. 27 예수께서 뭍에 오르셨을 때에 그 동네에서 나온 마귀 들린 사람 하나와 마주치시게 되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옷을 걸치지 않고 집 없이 무덤들 사이에서 살고 있었다. 28 그는 예수를 보자 그 앞에 엎드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왜 저를 간섭하십니까? 제발 저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하고 크게 소리질렀다. 29 그것은 예수께서 이미 그 더러운 악령더러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여러 번 악령에게 붙잡혀 발작을 일으키곤 하였기 때문에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단단히 묶인 채 감시를 받았으나 번번이 그것을 부수어버리고 마귀에게 몰려 광야로 뛰쳐나가곤 하였던 것이다. 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시자 그는 “군대라고 합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에게 많은 마귀가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31 마귀들은 자기들을 지옥에 처넣지는 말아달라고 예수께 애원하였다.
32 마침 그 곳 산기슭에는 놓아 기르는 돼지떼가 우글거리고 있었는데 마귀들은 자기들을 그 돼지들 속으로나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33 마귀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떼는 비탈을 내리달려 모두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34 돼지 치던 사람들이 이 일을 보고 읍내와 촌락으로 도망쳐 가서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35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고 보러 나왔다가 예수께서 계신 곳에 이르러 마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멀쩡한 정신으로 예수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36 이 일을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사람이 낫게 된 경위를 알려주었다. 37 게르게사 근방에서 나온 사람들은 모두 몹시 겁을 집어먹고 예수께 떠나가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배를 타고 떠나가셨다. 38 그 때에 마귀 들렸던 사람이 예수를 따라다니게 해달라고 애원하였지만 예수께서는 그를 돌려보내시며 39 “집으로 돌아가서 하느님께서 너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일을 이야기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는 물러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해주신 일을 온 동네에 널리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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