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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전도

James Chae 2022. 10. 30. 06:58

2022.10.18. 연중 29 화요일 / 루가 축일 (성직자 연피정 여는 예배 설교)

이사 35:3-6 / 시편 147:1-7 / 2디모 4:5-17 / 루가 10:1-9

 

복음 전도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오늘 본문은 루가복음에만 나오는루가의 특수 자료입니다. 공동 복음서가 공통적으로 기록한열두 제자의 파견이야기를 루가는 루가복음 9장에 배치하고, 오늘 10장에서는일흔두 제자의 파견이야기를 덧붙입니다. 베다는 각각의 파견 이야기를열두 제자의 파견 주교직의 사명을 명시한 것이고, ‘일흔두 제자의 파견 우리와 같은평사제 사명에 대해 말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교직의 사명이든평사제의 사명이든 이야기에는 가지 공통된 점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명령평화를 거부하는 마을에서는 신발의 먼지를 털라는 명령그리고 마지막으로하느님 나라 선포와 병자 치료 명령 등입니다. 사화의 차이는 오늘 읽은일흔두 제자 파견 사화에서 두드러집니다. 루가는 사화의 차이를 다음 말씀에서 구분합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 루가 10:2

 

말씀은 루가가 아마도예수 어록에서 취한 것으로 마태오복음 9:37-38목자 없는 양의 비유에도 나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루가가 일흔두 제자 파견 사화를 기록한 이유를 있습니다. ‘추수 종말을 상징하고, 추수할 일꾼이 바로 제자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은 12명의 사도들만으로 불가능하고, 더욱 많은 일꾼들이 요청됨을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일흔두 제자에는 열두 사도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열두 제자일흔두 제자사이에는 루가복음만의 독특한 긴장감이 있습니다. 그것은 루가의 종말 사관을 반영합니다. 루가도 다른 복음 사가들과 유사하게임박한 종말 선포하지만, 임박한 종말 지연됐다는 관점을 반영함으로 차이점을 드러냅니다. 예수의 재림이 지연되고, 핍박은 거세지는 상황 속에서 루가는종말과 재림 대한 수정된 관점을루가 공동체 말할 필요가 있었을 겁니다. 그것은복음이 세상 끝까지전파될 때까지 종말이 잠시 지연되었다는 것입니다(콘첼만). 그래서 루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또 전쟁과 반란의 소문을 듣더라도 두려워하지 마라. 그런 일이 반드시 먼저 일어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끝날이 곧 오는 것은 아니다.” 루가 21:9

 

끝날은 루가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에서 비롯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고 하였다.” 루가 24:47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 이것이 루가가 말하는 종말의 때입니다. 그래서 루가는 루가복음에 이어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담은교회의 시대사도행전 기록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사도 바울로의 로마 도착으로 갑자기 끝이 것은 그러한 사명이 사도 바울로 이후에도 계속 지속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예수의 시대 지나 복음이 전파되는 지금이 바로 루가가 말한교회의 시대 것입니다. 루가는지금 집중하며아직이라는 미래의 침투를 예비합니다. 

 

복음을 전도하는 자들에게 당부하는 주님의 말씀은 매우 긴박성을 띱니다. ‘전도 집중하기 위해 소유를 최대한 줄이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사람들에게 인사나 안부도 묻지 말라고 말하십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도하는 자는 오직주인만을 의지하라고 말합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보편적 평화를 빌지만, 평화는 받을 사람만 받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영접하는 동네에서 그들과 함께 먹고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권위와 사명을 봅니다. 그것은하느님 나라가 그들에게 다가왔다라는 선포 속에서 드러납니다. 여기에서가까이 오다라는 헬라어 동사 ‘ἐγγίζω 엥기조 3인칭 완료형 “ Ἤγγικεν 엥기켄으로 사용됐습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의 미래성보다는 제자들의 복음 전도 활동으로 구체화되는 하느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복음 전도 활동으로 하느님의 나라는 구체적으로 복음이 전파되는현재가운데 임하는 것입니다. 루가복음 11 20절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을 통한 하느님의 나라의 현재성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루가 11:20

 

 

마귀가 쫓겨나고, 복음이 전파되는 활동으로 하느님 나라가 현재에 구체화된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활동’. 이것이복음 전도입니다. 

루가복음은복음 전도사명이 12명의 제자들에게만 국한된 사명이 아님을일흔두 제자 파견 사화 통해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흔이든 일흔둘이든 사본마다 각각 다르지만, 일흔은 완전수를 의미하며 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반드시추수할 일꾼 보내 달라고 기도하며, 본인 스스로도 그러한추수할 일꾼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복음 전도자 사명이며 그들의 권위는복음에서 나옵니다. ‘복음 전도 말씀으로 우리의 행위로 동시에 전파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

복음그리고복음 전도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란 구호 때문일까요? ‘복음 전도 대한 오해로 오늘날 우리는복음전도 대해 심한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사실입니다. ‘복음 전도 부작용이지요. 특히 성공회에서는전도라는 말에 대해 매우 알레르기 반응들을 보입니다. 신자들에게복음이란 말과전도라는 말을 하면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미 성공회에 오기 전에 귀에 인이 박히도록 타교파 교회에서 들었기 때문일 겁니다. 주님의 소명의 말씀이 가장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말이 됐습니다. 

복음은 말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을 통해 전하는 것이다.”, “전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성화를 통해 하는 것이지, 말로 강요해서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과 실천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은 사회 정의를 통해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섬김으로 드러내야 한다.” 

정말 무수한복음 전도 해석들과 나름 타당성 있는 실천의 말들이 넘쳐납니다. 그래서 우리 성공회는 사회정의를 실천하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며, 복지의 사각지대를 찾아다니고, 사회적 소수자들을 위해 많은 헌신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을 어떻습니까? 국가 복지정책들이, 사회 복지사들이 그러한 일들을 대신 맡아가면서 우리가 말하는 사회정의와 복지는 이제 대부분 국가 복지정책으로 편입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성소수자 또는 경계인들을 찾아 움직입니다. 우리는 사회의 중심으로 복음을 들고 가지 않고 주변에서 움직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점점 비어 가고, 젊은 이들은 교회를 떠나가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복음의 생명력도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점점 우리 교회 스스로가 소외되고 있지는 않은지 염려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능력도, 복음의 능력도, 하느님의 은총도 모두 빛을 발해 가고 있습니다. 아무도 교회에 관심을 두지 않는 시대가 왔습니다. 그래서복음 잘못됐다 하여순복음 외치더니, 이제는참복음’, ‘원복음이란 말을 사용하게 됐습니다. 어디 복음 자체가 잘못됐겠습니까? 우리가 복음을 잘못 이해해서 그런 겁니까? 복음이 복음으로서의 힘을 잃으니 복음 앞에 다양한 수식어들이 붙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 그대로복음일뿐입니다. 어떤 수식어도 붙을 없습니다. 그래서기쁜 소식’. ‘유앙겔리온 εὐαγγέλιον’입니다.

 

능력이 없는 말뿐인 복음도 문제이지만, 행함은 있는데 말씀이 없는 복음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로마서 10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 로마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고, 들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전할 사람들이 없으니 정말 큰일이 났습니다. 아니 사람은 있는데 복음을 전하지 않으니 큰일입니다. 예수 믿으라는 소리를 하기가 쑥스럽고, 교회 나오라는 말을 하는 것은 너무 편협해 보인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복음 전도 외치면 뭔가 막힌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고상하고 점잖은 그리스도인이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 보수적인 개신교와는 차별을 있었고, 막힌 목사님들 보다는 관대한 사제로 비취진 같습니다. 우리 성공회는 비아 메디아라는 신조에 어울리는 멋진 이미지는 가졌지만, 대신 현재 교회를 물려받았습니다. 은퇴를 앞둔 어느 신부님께서 제게 고백적으로 하신 말씀이 아직도 뇌리에 선합니다. “우리 성공회는 그동안 사회정의와 실천을 외치면서 정작 복음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 은퇴할 때가 되니 그것이 후회스럽다.”라고. 그분의 고백은 정확하게 우리 성공회가 지나온 시간들을 한마디로 정리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제대로 가르치지도, 전도를 격려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는 숫자보다 질이다.라고 주장하기에 우리의 교회를 보면 그런 여유를 부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남아 있는 우리 성공회 교인들은 정말 질적으로 교파의 신자들보다 월등히 신앙적으로 성숙하고, 사랑이 넘치며 그리스도의 희생을 실천하고 있나요? 정말 의심스럽습니다. 교회와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은 항상 소수이고,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은 점점 찾아볼 없고, 몇몇 사람들의 희생만으로 교회가 운영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요? 격년으로 선출되는 교회위원들은 항상 사람이 사람이고, 그나마도 사람들마저 점점 고령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부님들은 항상 교회에서 열일로 분주하지만, 교인들은 주일에나 얼굴을 비추는 것이 전부입니다. 주일에 참석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를 해야 하는 실정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에 비해 교회에 봉사하는 손길은 언제나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러니복음 전도 사실 꿈도 꿉니다. 모두 자신들의 일상에만 매여 허덕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인들 가슴에 정말 복음이 자리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복음 전도 우리 안에서 꿈틀대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기쁨이 우리 밖으로 표출되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기쁘기 때문에 이웃과 나눠야 하는 소식인 것이지요. 좋은 일이 있으면 남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요? 우리 안에 다른 사람과 나눌기쁨 없으니 침묵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정직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 루가 10:2

 

 

일꾼이 적은 성공회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꾼을 달라고 기도하기. 그러한 기도를 하는 본인부터추수할 일꾼으로 실천하고, 행동하기. 우리 혼자서는 절대로 없지만, 우리 교인들과 함께라면 우리는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많은 중요한 일들 중에 근본에는복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 전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성공회가 복음 전도를 하면 정말 개신교와 다른 세련됨과 진지함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성서, 이성, 전통을 자랑하는 성공회답게 말로도 세련되게 복음을 이웃에게 전했으면 좋겠습니다. 소외받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그들의 이웃이 되면서, 그들이 복음을 들을 있도록, 복음을 느낄 있도록 우리 성공회다운 전도방법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형식은 내용을 내용은 형식을 각각 담보합니다. 형식이 엉터리면 거기에 담기는 내용도 엉터리가 됩니다.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형식이 세련되지 않으면 내용의 가치도 소멸됩니다. 그래서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는 그림이 훌륭한 작품이 되듯이, ‘복음 전도 우리 성공회에 맞는 세련된 모습으로 거듭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공회도 교인들이 늘어 교회 다닐 난다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복음화 쇄신 10 우리의 노력은 21세기에 맞는 우리의복음 전도 방식을 찾는 여정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체화되고, 우리 교회에 적용되며, 우리 사회에 흘러들어 있는복음’. 주님의 시대에는유랑 전도라는 형식이 있었지만, 우리의 시대는 주님의 시대와 다른 방식의 무엇인가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함께 찾고 고민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고민과 노력 가운데 주님께서 은총을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전례독서_10.18. 루가(복음사가)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의 의사 루가를 부르시어 성자 예수의 사랑과 치유의 능력을 복음서에 기록하게 하셨나이다. 비옵나니, 주님의 교회가 사랑과 치유의 능력으로 주님의 이름에 찬미와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이사 35:3-6

3    늘어진 팔에 힘을 주어라.
     휘청거리는 무릎을 꼿꼿이 세워라.
   겁에 질린 자들을 격려하여라.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 마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원수 갚으러 오신다.
     하느님께서 오시어 보복하시고 너희를 구원하신다.”
5     때에 소경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리라.
6     때에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
     사막에 샘이 터지고 황무지에 냇물이 흐르리라.

 

 

 

성시_시편 147:1-7

1    알렐루야!
     주님을 찬양하여라.
      노래 얼마나 좋으냐.
     우리 하느님, 찬미 얼마나 부드러우냐.
2    주님은 예루살렘을 세우신 ,
     흩어졌던 이스라엘을 모아들이시는 ,
3    상처 입은 마음을 고치시고
     터진 상처를 싸매 주시는 ,
4    별들의 수효를 헤아리시고
     낱낱이 이름을 붙여 주시는 ,
5    전능하신 우리의 주님 얼마나 크시냐.
     그의 슬기 형용할 없어라.
6    , 낮은 자는 들어 올리시고
     악인들은 땅에까지 낮추신다.
7    주님께 감사노래 불러라.
     수금 타며 우리 하느님 찬미하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2디모 4:5-17

5 그러나 그대는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내며 복음 전하는 일에 힘을 다하여 그대의 사명을 완수하시오.

6 나는 이미 피를 부어서 희생제물이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가 왔습니다. 7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8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날에 정의의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월계관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9 그대는 속히 나에게로 오도록 힘쓰시오. 10 데마는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카로 가버렸습니다. 그레스겐스는 갈라디아로 갔고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으며 11 루가만이 나와 함께 있습니다. 마르코는 내가 하는 일에 필요한 사람이니 그를 데리고 오시오. 12 나는 디키고를 에페소로 보냈습니다. 13 그대가 이리로 때에 내가 트로아스에 있는 가르포의 집에 두고 외투와 책들을 가지고 오시오. 특히 양피지로 만든 책들을 가지고 오시오.

14 구리 세공을 하는 알렉산드로가 나를 몹시 괴롭혔습니다. 그의 행실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마땅한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15 그대도 그를 경계하시오. 그는 우리가 전도하는 것을 악착같이 반대한 사람입니다.

16 내가 처음으로 재판정에 나갔을 때에 사람도 나를 도와주지 않고 모두가 버리고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나를 버리고 그들이 엄한 벌을 받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17 주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며 나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완전히 선포할 있었고 말씀이 모든 이방인들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복음서_루가 10:1-9

1 주께서 달리 일흔두 제자를 뽑아 앞으로 찾아가실 여러 마을과 고장으로 미리 둘씩 짝지어 보내시며 2 이렇게 분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은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 3 떠나라.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어린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구나. 4 다닐 돈주머니도 식량 자루도 신도 지니지 것이며 누구와 인사하느라고 가던 길을 멈추지도 마라.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댁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6 집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살고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사람에게 머무를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주인이 주는 음식을 먹고 마시면서 집에 머물러 있어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집으로 옮겨다니지 마라. 8 어떤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환영하거든 주는 음식을 먹고 9 동네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 나라가 그들에게 다가왔다고 전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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