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30. 모든 성인의 날 / 연중31주일
다니 7:1-3, 15-18 / 시편 149 / 에페 1:11-23 / 루가 6:20-31
“성인 신앙”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삶과 죽음.
삶의 고통만큼이나 인류는 끊임없이 죽음에 대한 공포와 씨름해왔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지내던 가족이 싸늘한 육신만 남기고 의식이 사라질 때, 사람들은 공포와 슬픔에 전율했습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모르기에, 죽음의 정체를 모르기에 더욱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여 극복하고 정복하려 했습니다. 인간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 죽음 이후에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소통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한계의 깨달음 속에서 종교가 싹트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종교의 기원이 어떤 경위를 가지든, 많은 종교들은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죽음과 화해하기 위해, 죽음을 이기기 위해 노력해 온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종교적 설명과 위로도 죽음의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기에 충분하지 않음을 우리는 느낍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크면 클수록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불확실성 속에서 신앙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한계를 느낍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도, 미신을 믿는 사람도 감당할 수 없는 공포 앞에서는 모두가 겸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독교가 죽음에 대해,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죽음을 넘어서기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죽음에 대해 고민했던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그러한 고민 속에서 자연스럽게 싹튼 ‘성인 신앙’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커다란 위안과 영향을 줍니다.
교회사에서는 ‘성인 신앙’이 주후 4세기경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물론 전조는 그전부터 있었을 것이고, 4세기경부터 성행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면 맞을 겁니다. 지중해 중심의 고대 사회에서 인간의 육신이 사후에 평화를 누린다거나, 육신과 영혼이 함께 하늘로 올라간다는 믿음은 불가능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원래 가진 성품에 맞게 육신은 자연으로 영혼은 하늘의 별로 돌아간다고 고대 지중해 사람들은 생각했지요. 로마 세계의 도시 바깥에 일반적인 삶과 분리되었던 ‘공동묘지’에서 그리스도교의 ‘성인 신앙’이 싹트면서 후기 고대 사회는 새롭게 죽음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 영혼만 하늘로 올라가고 죽은 성인들의 육신은 무덤에 머물며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지켜주며, 하느님께 중재의 역할을 감당한다는 믿음. 이것이 4세기 그리스도교 안에 싹튼 성인 신앙이었습니다. 순교와 배교의 시기를 거쳐 기독교가 로마의 정식 종교로 공인되면서 바야흐로 다양한 민족들의 신앙적 요구가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많은 교부들은 이러한 이방 종교적인 풍습이 미칠 부정적 영향을 경계했지만, 민초들의 죽음에 대한 신앙과 장례 문화에서 우러나오는 요구들과 영향력을 가볍게 간과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등과 같은 다양한 종교들도 각 민족들이 지닌 고유한 장례 문화에까지 자신들의 종교적 영향력을 끼치는 데에는 모두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례 문화는 각 지역과 민족의 독특한 방식을 그대로 유지한 채 각 종교 안으로 편입된 것입니다. 고대의 죽음과 장례문화는 매우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과 관련됐었습니다. 그것이 공적인 세계와 밀접한 관련을 갖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가 그러한 장례문화를 자신들 안에 품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역사 신학자 피터 브라운은 ‘성인 신앙’ 기원을 기독교의 독특한 장례문화에서 찾았고, 이를 “천상과 지상, 영혼과 육신의 결합”의 표현이라 말했습니다. 성인 신앙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긴장감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반 서민들 안에서 싹튼 신앙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인 신앙은 후기 고대사회에서 중세 기독교 사회로 진입하는 분기점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인 신앙’은 교부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기독교 신앙의 신학화와 교리화 작업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 신앙이 아니라, 갖은 어려움과 고초를 겪던 민초들로부터 비롯된 ‘아래로부터 위로’,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향하는 신앙이 반영됐다는 점에서 교회사적 의미가 큽니다. 즉, 성인 신앙에는 당대 인간 실존의 다양한 삶의 결들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이 어렵고 고통스러울수록 사람들은 더욱더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의존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성육신 신앙에서 전조를 보였던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으로의 나아감’이란 관점에서 그들의 신앙은 미신과 성육신 신앙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시작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그 균형이 무너지며 ‘성인 신앙’은 ‘성인 숭배’로 빠지며 교회의 세속화를 촉진하여 중세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성인 신앙이 지닌 흑과 백을 오늘날 분명히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성인 신앙의 시작은 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을 처리하는 문제에서 비롯되기 시작했습니다. 거룩한 순교를 당한 그들의 육신은 다른 시신과는 분명 다른 권위를 부여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의 숭고한 죽음은 고난과 박해를 견뎌야 하는 남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 커다란 용기와 하느님 나라의 승리에 대한 희망을 견인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순교자들의 무덤을 중심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묘자리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순교자들의 묘는 ‘공동묘지’의 중심이 됐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순교자들의 무덤을 찾아 기도하고 그들을 기리는 일이 빈번했고, 결국 시간이 흐르며 그러한 대중의 염원이 성인들의 무덤에서 드리는 성찬례의 제단과 결합했습니다. ‘성인 신앙’은 이렇게 기독교 내부로 진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인 신앙’은 자연스럽게 주교의 권위와 결합하며 ‘순교자 보호자’로서의 주교의 권위를 강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성인들의 무덤이나 유품 위에 새로운 성당들이 하나씩 건축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군 전쟁 시기에는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성인들의 유골이나 유품을 찾는 것이 유행처럼 유럽 대륙을 덮었습니다. 예를 들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가 발견했다고 전해지는 예수께서 못 박히신 ‘예루살렘의 십자가’는 유럽 전역에 ‘성 십자가 성당’이란 이름으로 무수한 성당들을 탄생하게 했습니다. 각자 진품이라 주장하는 ‘성 십자가’의 흩어진 조각들을 모으면 아마도 수 백 개의 십자가를 만들고도 남을 분량일 겁니다. 그렇게 성인 신앙은 언제나 ‘미신’이라는 위험성을 늘 내포하고 있었고, 그러한 것에 맹목적인 신앙과 종교권력이 결탁하면서 아주 나쁜 방향으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중세로 진입하며 교회나 수도회들은 다양한 이유 때문에, 또 재정 충당을 위해 앞다퉈서 성인들이 그려진 이콘을 병 고침의 능력이 있다고 하여 판매하는 데 혈안이 됐었습니다. 심한 경우는 이콘을 갈아서 먹으면 병이 낫는다고까지 사람들을 속이기도 했습니다. 십자군 전쟁이 더욱 기독교에 불리하게 전개되고, 교회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더욱 교회와 수도회들은 성인을 이용한 돈벌이에 혈안이 됐습니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이콘 논쟁이 종교개혁 시대에도 불이 붙은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또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또 성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에페 1:18
오늘 읽은 에페소서에서 공동번역이 번역한 “성도들과 함께”라는 말은 “ἐν τοῖς ἁγίοις, 성인들 안에서”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가 너무 의역을 해서 이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인들 안에서 그의 상속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게 하려 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모든 성인의 날’과 관련하여 두 가지 중요한 키워드를 찾게 됩니다. 하나는 ‘부르심의 소망’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상속의 풍성함’입니다. 그 ‘하느님의 상속의 풍성함’은 우리가 성인들과 함께 장차 물려받을 유산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페소서가 사도 바울로의 친서가 아니라는 학자들의 주장도 있지만, 에페소서는 그 신학적 개념들이 사도 바울로의 맥을 잊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절들은 정확하게 사도 바울로의 깨달음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에페소서는 우리가 받은 소망과 하느님 나라의 유업의 풍성함은 비록 현재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마음의 눈”이 열리면 그것을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τοὺς ὀφθαλμοὺς τῆς καρδίας 우리 마음의 눈”
이 은유적 표현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볼 수 없는 소망을 볼 수 있게 됨을 뜻합니다. 일종의 ‘깨달음’과 같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깨달음’이라 합니다. 사도 바울로는 다른 사도들처럼 직접 주님을 본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는 늘 성령으로 말미암는 깨달음으로 다른 어떤 사도들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잘 이해했던 사도였습니다. 그는 심지어 ‘삼층천’까지도 경험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의 말을 통해 희망의 약속을 다시 확증받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바울로는 자신의 삶을 통해 자신의 증언이 사실임을 실제로 보여줬던 분이십니다. ‘모든 성인의 날’ 우리가 사도 바울로를 위시하여, 우리가 잘 아는 성인들부터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성인들까지 모든 성인들의 삶과 신앙을 묵상하는 것은 그들의 신학이나, 교리 때문이 아니고, 정신적인 신앙의 위로나 현세의 축복이 아니라, 오직 마지막 날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았던 그분들의 삶 때문입니다. 그들 모두는 진정 주님만으로 만족할 줄 알았던 사람들이었고, 주님에 대한 믿음 만으로 이 세상의 모든 고난과 아픔을 감내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성인 신앙은 오늘 본기도에서 기도했듯이 “성인들의 거룩한 삶을 본받아 주님의 진리를 증거 하고, 그들과 기도로 소통하며, 마지막 날 그들과 더불어 부활한다는 희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례와 견진 시에 자신이 닮고 싶고 존경하는 성인의 이름을 ‘신명’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명의 성인을 생각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그분을 오늘 자신의 삶의 자리로 소환하여 ‘산 자와 죽은 자’의 소통이 신앙 안에서 ‘실재화’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조금씩 그분들을 닮아가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중세처럼 그분들이 우리의 기도를 중재한다는 믿음을 가지신 분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또 성인을 우상숭배가 아닐까 의심의 눈으로 이를 대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18세기 계몽주의 역사가이자 철학자였던 데이비드 흄이 말한대로 ‘성인 신앙’은 “저속한 서민들”의 신앙으로 취급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인 신앙 속에 담겨있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소통과 상통’이란 관점에서 우리는 성인 신학이 지닌 위대한 신비와 상상력을 유산으로 받은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유산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눈에 보이는 육신을 입으신 성육신 사건과 맥을 같이하며, 우리에게 죽음을 이기는 희망을 열어줍니다. 성인들의 고귀한 삶과 죽음은 사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과 믿음이 아니면 결코 설명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인 신앙이 지닌 믿음과 상상력을 우리의 희망으로 승화시키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할 때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부활을 몸으로 살아낸 성인들을 우리의 ‘신앙적 푯대’로 삼고, 우리도 같은 소망으로 그 길을 성인들과 함께 걸어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러한 축복이 우리 가운데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 모든 성인의 날 (다해)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인들의 믿음과 헌신으로 교회를 새롭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앞서간 모든 성인들의 거룩한 삶을 본받아 주님의 진리를 이 세상에 증거하고, 마지막 날에 성인들과 더불어 영원한 잔치에 참여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 다니 7:1-3, 15-18
1 바빌론 왕 벨사살 제일년, 다니엘은 잠자리에 들었다가 꿈에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그는 그 꿈을 적어두었는데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2 “다니엘이 말한다. 나는 밤에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하늘 끝 사방에서 갑자기 바람이 일면서 큰 바다가 출렁거리는데, 3 바다에서 모양이 다른 큰 짐승 네 마리가 올라왔다. …
15 나 다니엘은 마음이 어수선했다. 그 이상한 광경이 머리를 어지럽게 하였다. 16 그래서 거기 서 있는 한 분에게 가서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가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17 ‘이 큰 짐승 네 마리는 세상 나라의 네 임금을 가리키는데 18 마침내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이 그 나라를 물려받아 길이 그 나라를 차지하고 영원토록 이어 나가리라는 뜻이다.’
성시_ 시편 149
1 알렐루야!
. 주님께 새 노래를 불러라. ◯
. 신도들아, 모여서 그를 찬양하여라.
2 이스라엘아,
. 너를 내신 분을 모시고 기뻐하여라. ◯
. 시온 시민들아,
. 너희 임금님을 모시고 즐거워하여라.
3 춤을 추며 그의 이름 찬양하여라. ◯
. 북치고 수금 타며 노래하여라.
4 주께서 당신 백성 반기시고 ◯
. 짓눌린 자들에게 승리의 영광 주셨다.
5 신도들아, 승리의 찬치 벌여라. ◯
. 밤에도 손뼉 치며 노래하여라.
6 목청 높여 하느님을 찬양하여라. ◯
. 주님은 손에 쌍날칼을 드시고
7 뭇 민족에게 원수를 갚으시며 ◯
. 뭇 나라에게 벌을 주시고
8 왕들에게 고랑 채우시며 ◯
. 권세 있는 자들을 사슬로 묶고
9 이미 내린 선고대로 그들을 처형하시니, ◯
. 하느님을 믿는 온 신도들의 영광이로다.
. 알렐루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 에페 1:11-23
11 모든 것을 뜻하신 대로 이루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따라 우리를 미리 정하시고 택하셔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습니다. 12 그러므로 맨 먼저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13 여러분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복음 곧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어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확인하는 표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약속하셨던 성령을 주셨습니다. 14 성령께서는 우리가 받을 상속을 보증해 주시고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15 나는 여러분이 주 예수를 충실히 믿으며 모든 성도들을 사랑한다는 소식을 듣고 16 기도할 때마다 언제나 여러분을 기억하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17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스러운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을 내려주셔서 하느님을 참으로 알게 하시고 18 또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또 성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게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19 그리고 우리 믿는 사람들 속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여러분에게 알게 하여주시기를 빕니다. 20 하느님께서는 그 능력을 떨치시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시고 하늘 나라에 불러 올리셔서 당신의 오른편에 앉히시고(시편 110:1) 21 권세와 세력과 능력과 주권의 여러 천신들을 지배하게 하시고 또 현세와 내세의 모든 권력자들 위에 올려놓으셨습니다. 22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셨으며 그분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셔서 모든 것을 지배하게 하셨습니다(시편 8:6). 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복음서_ 루가 6:20-31
20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21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의 아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내어쫓기고
⋅ 욕을 먹고 누명을 쓰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럴 때에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
25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 너희가 굶주릴 날이 올 것이다.
⋅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 너희가 슬퍼하며 울 날이 올 것이다.
26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7 “그러나 이제 내 말을 듣는 사람들아, 잘 들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 29 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 주고 누가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내어주어라. 30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빼앗는 사람에게는 되받으려고 하지 마라. 31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