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3. 연중33주일
이사 65:17-25 / 이사 12 / 2데살 3:6-13 / 루가 21:5-19
“희망의 계보”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로마 5:4-5a
우리의 전례력은 대림절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기다림으로 시작해서 사순절의 그리스도의 고난을, 그리고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부활을 거쳐, ‘모든 성인의 날’ 신자들의 부활을, 그리고 종말에 대한 희망을 지나, ‘파루시아’하실 ‘왕이신 그리스도’ 축일을 마지막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며 이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전례력을 통해 따라갈 수 있습니다. ‘왕이신 그리스도 축일’ 바로 전,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있을 종말의 메시지를 접하게 됩니다. 성서는 종말이 지나야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것을 말합니다. 오늘 이사야가 선포한 “새 하늘과 새 땅”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로운 창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곳에서는 “서로 해치고 죽이는 일이 없는”, 생명이 사망을 삼켜 버리는 새로운 세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종말에 대한 이야기가 결국에는 ‘희망 ἐλπίς’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실낱’ 같은 희망일지라도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 이유는 “희망이 우리의 현재의 삶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가 바라는 바가 무엇이든, 어떤 희망을 품고 있든,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현재의 삶을 살게 마련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납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지막 때에 대한 궁금증은 똑같습니다. 일의 시작이 있으면 일의 끝이 있듯이 모든 일에는 반드시 끝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해 궁금해하고 일희일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현재가 너무 고통스럽기에 마지막이 빨리 와서 현재의 고통이 끝이 나길 바랍니다. 그러면서 미래의 종말만 생각하며 현재를 외면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현재가 없는 종말이 과연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요?
마르코복음 기자는 70년에 있었던 로마군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전 파괴가 종말의 시작이라고 말했지만, 루가복음 기자는 아마도 예루살렘의 파괴가 있은 후에 복음서를 썼기 때문에 성전 파괴 사건에 대해 ‘사후 예언’ 차원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후 예언’은 어떤 일이 일어난 후에 그것을 예언의 형식을 빌어 명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루가에게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역사적 사건 중 하나일 뿐입니다. 이점이 루가복음이 마르코복음과 다른 점입니다.
오늘 복음서는 종말의 징조를 여러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 ‘전쟁과 반란’,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 등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징조들이 일어나기 전 또 다른 전조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입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종말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박해의 시대가 ‘복음’을 증거 할 때라는 역설을 오늘 복음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박해의 시대’가 곧 ‘교회의 시대’이고, 성령께서 복음을 위해 활동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끝이 오기 전에 복음의 선포가 먼저 있는 것입니다. 그 복음이 주는 ‘희망’은 ‘사망’이 마치 주인 노릇을 하듯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힐지라도 결국 최후에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긴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고 견디는 것”. ‘인내 δοκιμή’. 이 ‘인내’는 단순히 어떤 것을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의 믿음을 지켜며 승리하는 인내를 말합니다. 그 ‘인내’는 결국 우리에게 ‘희망’을 잉태합니다.
신약성서는 한결같이 우리에게 축복보다는 ‘고난’과 ‘환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안락과 평화보다는 마지막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에 대해 오히려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이 왕 노릇 하는 ‘이 세대’가 아니라 왕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로운 창조로 완성되는 ‘저 세대’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오늘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도 그러한 “새 창조”의 때가 오기 이전에 있을 고난과 환란을 말하면서 전조현상을 통한 희망에 대해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 희망은 바로 ‘생명’에 대한 희망입니다. 오늘 설교 처음에 읽어드린 사도 바울로의 로마서 선포대로, 그 희망은 단순히 미래를 열망하는 희망이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도 아닙니다. 현재에 당면한 모든 고난과 아픔들을 무시하는 희망도 아닙니다. 절망과 고통 속에서 붙드는 일말의 낙관주의도 더더욱 아닙니다. 그 희망은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며 현세에서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당당히 삶의 고난과 아픔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세상 권세와 투쟁하며 승리를 향해 두 발로 굳건히 서는 희망입니다. 그 희망은 결코 종말을 기다리면서 현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 희망은 성령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희망이지만, 단순히 믿음에서 비롯되는 희망도 아닙니다. 그 희망은 사도 바울로가 말했듯이 오직 “고난과 아픔” 속에서 얻어지는 “인내”로 잉태된 희망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고난을 통해 인내를 낳고, 그 인내를 통해 얻어지는 고귀한 희망인 것입니다. 이것이 “희망의 계보”입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아픔 없이 우리는 ‘희망’을 얻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걸어가신 “Via Dolorosa(고난의 길, 슬픔의 길, 십자가의 길)”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루가 9:23
주님께서는 잘 먹고, 잘 살고, 평안한 현세의 축복이 아니라 “매일” 그리스도인들이 짊어질 ‘고난의 십자가’, ‘고통의 십자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를 버리라”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자기를 버리는 것”은 단순히 ‘자기 수양’이나 ‘내면적 성찰’을 통한 인격의 고양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지배하는 세상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을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종노릇 하는 ‘아담의 후손’에서 그리스도와의 합일을 통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새로운 신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를 버리는 작업”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조용히 참선이나 영적 수양을 하거나, 말씀 만을 묵상하면 됩니까? 아닙니다. “자기를 버리는 일”은, 사도 바울로의 관점에서, 철저히 “환란이나 고난”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고통스럽지만, 한 개인은 고통과 아픔을 통해서만 자신 안에 있는 “인본주의적 확신”,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편협한 “자아”를 깨부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씨앗이 자신의 형상을 모르지만, 그 안에 보이지 않는 형상을 품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고통 속에서 단단한 껍질을 벗어야만 씨앗은 새로운 생명으로 새로운 형상을 입게 됩니다. 씨앗이 깨지지 않으면 결코 싹은 틀 수 없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산모와 아기가 극심한 고통을 통해 하나의 생명을 공유한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아픔과 고통 없이 생명은 탄생하지도 또 성장하지도 않습니다. 고통과 아픔이 있음으로 우리는 인내를 배우게 되고, 그 인내는 희망을 잉태하게 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로가 말하는 “희망의 신학”입니다.
그러나 고난과 아픔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조차도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성부께 고통 가운데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루가 22:42) 모두가 아픔과 고난을 벗어버리고 싶지만, 우리의 삶은 이미 죽음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완전한 해방은 아직 보류됐습니다. 십자가의 승리는 선포되었지만, 최후의 승리는 마지막 추수 때에나 가능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승리는 단순히 ‘육신 σάρξ’을 벗어 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육신의 고통과 아픔으로부터 해방하고자 하는 바람은 영지주의자들의 것입니다. 이 육신의 옷을 벗어버리면 우리의 영은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영지주의자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은 우리의 ‘몸 σŵμα’을 통해 성취되는 생명입니다. 몸은 하느님과 우리를 ‘상호관계’하게 하고, 현재를 통해 미래를 연관시킵니다. ‘몸’은 이 세상에서 고난과 환란을 당할 때 고통을 느끼는 주체이지만, 또한 미래의 생명을 품는 희망의 주체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몸’으로 부활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몸이 없이 영혼만 부활하셨다면 주님께서는 이 현세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희망도 도저히 이 현재와 현실의 삶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냥 모두가 이 지겹고 어려운 세상을 포기하고 육신의 옷을 벗어버리고 싶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지주의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느끼는 이 만질 수 있는 몸으로 이 세상 속에서 인내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픈 몸으로 인내 속에서 희망도 배웁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함은 우리의 보혜사 성령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때론 극심한 고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안락사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고통이 얼마나 견딜 수 없으면 그럴까라고 이해도 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이 ‘고통의 주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육신이 없으면” 고통도 느끼지 않을 거라는 믿음. 그래서 육신을 죽임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을 꿈꿉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육신이 죽으면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철저히 영지주의의 생각일 뿐입니다. 아무도 죽음 이후에 대해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죽은 영혼들은 어디에 있는지, 부활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연옥’ 교리도 죽음의 신비에 대해 모든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서는 ‘연옥’에 대해 침묵합니다. 정말 죽으면 모든 고통이 끝난다면 뭐하려 우리는 이 세상을 힘들게 살고 있습니까? 정말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고,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며, 우리의 영혼은 참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까? 육신만 없으면, 몸만 없으면 정말 우리는 자유로울까요? 그러나 우리는 본능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느니 산다’고 말하면서 우리의 일상을 이어갑니다. 이렇게 모두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심긴 생명에 대한 본성 때문일 겁니다. ‘삶’은 ‘살라’는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 안에 각인된 창조주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삶의 모든 고초를 이겨내고 승리하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완주하는 사람이 승리자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로가 말한 “인내 δοκιμή”의 참 뜻입니다. 전도서는 말합니다. “죽은 사자보다 산 개가 더 낫다”(전도 9:4)고. 그렇습니다. 죽은 자는 하느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시편의 많은 노래들이 같은 진리를 외치고 있습니다. 죽음은 하느님의 것이 아니기에, 죽음은 하느님의 원수이기에, 주님은 죽음의 권세를 절대 용납하시지 않으십니다. 십자가의 승리는 죽음에 대한 승리입니다. 죽음으로 죽음을 이긴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삶으로 죽음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굳건히 붙드는 한 죽음은 우리에게 권세를 부릴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우리 앞에 당면한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몸은 고통을 느끼지만, 동시에 희망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같은 몸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주체’가 ‘희망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몸이 있기에 우리는 현재에 굳건히 설 수 있고,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사도 바울로의 두 번째 편지는 “게으름”에 대해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일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때만을 바라보지 말고 현재에 부지런히 열심을 다해 살라는 뜻입니다. 현재에 집중하다 보면 미래의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다가올 미래도 언젠가는 현재에 침투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미래의 일로 오늘을 낭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일의 염려로 오늘을 시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마태 6:34)라고 주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해야 할 일과 감사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종말론자들이 현재를 포기하고 미래에만 매달린 결과 어떤 사달이 났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미래를 붙잡는 대신 현재의 가족도, 현재의 일도, 현재의 행복도 모두 포기합니다. 그 대가는 너무나 치명적입니다. 그래서 오늘 전례독서는 마지막 때에 대한 주님의 말씀과 함께 현재에 충실하라는 사도 바울로의 메시지 또한 함께 읽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분명 언젠가는 우리에게 닥칠 미래입니다. ‘현재가 잉태하여 미래를 낳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항상 ‘영원한 현재’에 살기 때문에 너무 먼 시간을 생각할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환란과 고통은 우리에게 인내를 가르치고 그 인내는 우리 안에 희망을 창조합니다. 이는 성령을 통해 주신 주님의 약속에 의해 보증됩니다. 이러한 ‘희망의 계보’ 속에서 오늘의 아픔을 이겨내며 성실히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의 무한한 축복이 항상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전례독서_ 연중33주 (다해) 1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주님께서는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장차 오실 분이시옵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의 나라를 간절히 사모하며,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모든 고난을 믿음으로 극복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 이사 65:17-25
17 “보아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 지난 일은 기억에서 사라져 생각나지도 아니하리라.
18 내가 창조하는 것을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 나는 ‘나의 즐거움’ 예루살렘을 새로 세우고
. ‘나의 기쁨’ 예루살렘 시민을 새로 나게 하리라.
19 예루살렘은 나의 기쁨이요
. 그 시민은 나의 즐거움이라,
. 예루살렘 안에서 다시는 울음 소리가 나지 않겠고
. 부르짖는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리라.
20 거기에는 며칠 살지 못하고 죽는 아기가 없을 것이며
.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는 노인도 없으리라.
. 백 세에 죽으면 한창 나이에 죽었다 하고,
. 백 세를 채우지 못하고 죽으면 벌을 받은 자라 할 것이다.
21 사람들이 제 손으로 지은 집에 들어가 살겠고
. 제 손으로 가꾼 포도를 따 먹으리라.
22 제가 지은 집에 남이 들어와 사는 것을 보지 않겠고
. 제가 가꾼 과일을 남이 따 먹는 것도 보지 아니하리라.
. 나의 백성은 나무처럼 오래 살겠고
. 내가 뽑은 자들은 제 손으로 만든 것을 닳도록 쓰리라.
23 아무도 헛수고하지 아니하겠고
. 자식을 낳아 참혹한 일을 당하지도 아니하리라.
. 그들은 야훼께 복받은 종족,
. 후손을 거느리고 살리라.
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대답하고
. 말을 마치기 전에 들어주리라.
25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뜯고
.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 뱀이 흙을 먹고 살리라.
.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나
. 서로 해치고 죽이는 일이 없으리라.”
성시_ 이사 12 (이사야 첫째 송가 Ecce, Deus)
2 진정 나를 구원하실 분은 하느님이시니,◯
. 내가 그를 의지하고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노래시며, ◯
. 나의 구원이십니다.
3 그러므로 너희는 기뻐하며, ◯
.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4 그 날, 너희는 이렇게 감사의 노래를 부르리라. ◯
.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의 이름을 외쳐 불러라.
¶ 그가 하신 큰 일을 만민에게 알려라. ◯
. 그 높으신 이름을 잊지 않게 하여라.
5 그가 큰 일을 하셨으니 주님을 찬양하며, ◯
. 그 모든 일을 온 세상에 알려라.
6 수도 시온아 기뻐 외쳐라. ◯
. 너희가 기릴 분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시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 2데살 3:6-13
6 교우 여러분,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명령합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게으른 생활을 하거나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을 따르지 않는 교우는 여러분이 멀리해야 합니다. 7 우리를 어떻게 본받아야 하는지는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게으른 생활을 하지 않았고 8 아무에게서도 빵을 거저 얻어 먹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러분 중 어느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수고하며 애써 노동을 했습니다. 9 그렇게 한 것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요구할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여러분에게 우리를 본받게 하려고 스스로 모범을 보인 것입니다. 10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마라.” 하는 말을 여러분에게 종종 했습니다. 11 하느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혼미한 마음을 주시어 거짓된 것을 믿도록 하셨습니다. 12 결국 진리를 믿지 않고 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단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13 주님의 사랑을 받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먼저 여러분을 택하셔서 구원을 얻게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거룩하게 해주셨으며 진리를 믿게 하셨습니다.
복음서_ 루가 21:5-19
5 사람들이 아름다운 돌과 예물로 화려하게 꾸며진 성전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6 “지금 너희가 성전을 바라보고 있지만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날이 올 것이다.”
7 그들이 “선생님,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날 즈음해서 어떤 징조가 나타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8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앞으로 많은 사람이 내 이름을 내세우며 나타나서 ‘내가 바로 그리스도다!’ 혹은 ‘때가 왔다!’ 하고 떠들더라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고 그들을 따라가지 마라. 9 또 전쟁과 반란의 소문을 듣더라도 두려워하지 마라. 그런 일이 반드시 먼저 일어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끝날이 곧 오는 것은 아니다.” 10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 민족이 일어나 딴 민족을 치고 한 나라가 일어나 딴 나라를 칠 것이며 11 곳곳에 무서운 지진이 일어나고 또 기근과 전염병도 휩쓸 것이며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굉장한 징조들이 나타날 것이다.” 12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는 잡혀서 박해를 당하고 회당에 끌려가 마침내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며 나 때문에 임금들과 총독들 앞에 서게 될 것이다. 13 그 때야말로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때이다. 14 이 말을 명심하여라. 그 때 어떻게 항변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마라. 15 너희의 적수들이 아무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주겠다. 16 너희의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잡아 넘겨서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17 그리고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겠지만 18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19 그리고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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