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6. 연중32주일
하깨 1:15하-2:9 / 시편 145:1-5, 17-21 / 2데살 2:1-5, 13-17 / 루가 20:27-38
“이 세대 또는 저 세대”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죽음과 부활은 과학의 영역이 아닙니다. 과학은 실증적이고 실험적이라 언제나 명확한 증거를 그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현세’ 이외에는 무관심합니다. 증명할 수 없는 것은 과학에서는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이 나오기까지 이 세상은 마치 뉴튼이 말한 ‘만유인력의 법칙’대로 움직이는 줄 우리 인류는 생각했었습니다. 뉴튼의 시대에는 빛이 중력에 의해 굴절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빛이 중력에 의해 굴절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 뉴튼의 시대에도 사실이었지만, 당시에는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과학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과학의 한계입니다. 아마도 오늘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태도가 과학자들과 유사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확인 가능하지 않은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라사이파 사람들과 달리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여겼으며, 천사의 존재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전 권력의 중심이었으므로, 제사를 통한 현재의 죄사함과 구원을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성전에 현존하시고, 하느님의 용서도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로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내세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바라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의 준수에 인간 구원의 길이 있다고 가르쳤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의인으로 내세에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했지요. 기원전 2세기부터 시작된 부활에 대한 유대교의 신앙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내세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었고 부활도 믿었습니다. 오늘 루가복음 20장 40절에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라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동의를 한 사람들은 바로 바라사이파 율사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바라사이파 사람들은 신학적으로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루가복음 20장 38절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모든 산 자의 하느님이십니다. 그에게는 그들 모두가 살아있습니다.”
“하느님에게는 그들 모두가 살아있다”. 이 말씀은 루가가 첨가한 말씀으로 한번 들으면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의 시점이 아닌 “하느님의 전지적 시점”에서 생각해야만 이해 가능한 말입니다. 인간의 시점에서 의역을 하면 “모두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고 의역 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전지적 시점, 즉 하느님의 관점에서 이 말씀을 해석하면 “하느님께는 그들 모두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사악도, 야곱도 비록 과거의 사람들이고 모두 다른 때에 죽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영원한 현재’에 살아있는 자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물리적 시간과 같은 과거, 현재, 미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영원히 ‘산 자의 하느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독특한 어법은 항상 자신의 관점과 하느님의 관점을 동일하게 말씀하실 때가 많아서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혼란을 겪게 됩니다. 특히 시제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예배 장소에 대한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요한 4:23) “바로 지금이 그 때” 라는 말은 “하느님의 영원한 현재적 시점”인 것입니다. 물리적 시간은 인간이 세상과 관련하여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 시간은 그분 자신에게 속한 것으로 시간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듯 하느님께는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이 루가가 “하느님에게는 그들 모두가 살아있다”.라는 구절을 삽입한 의도일 겁니다. 루가 저자는 늘 하느님의 말씀에 자신의 의견을 첨가하여 마무리를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승 자료를 작성하면서 항상 그 자료의 앞에는 상황 묘사하는 말을 덧붙이고, 뒤에는 그 내용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첨가하여 해석하는 방식으로 편집을 자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주님의 말씀과 함께 루가 기자의 말씀에 대한 해석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전지적 관점”에서 우리는 오늘 주님께서 “이 세대와 저 세대”를 구분하여 말씀하신 진의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오늘 공동번역 성서가 ‘이 세상, 저 세상’으로 번역한 말은 헬라어 “αἰών 아이온”으로 우리말로 “세대”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이 세상, 저 세상’이라 하면 ‘이승과 저승’ 또는 ‘현세와 내세’를 말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온’은 영어로는 age 또는 generation으로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지만 연령 또는 현상에 따라 구분되는 ‘시간적 공간’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미래 세대와 현재 세대와 같은 경우 말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세대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 중 ‘수혼법 Levirate Law’(신명 25:5-10)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로서 기존 유대인들을 상징합니다. 자식이 없이 맏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대를 잇는 것이 ‘수혼법’입니다. 그러니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충분히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저 세대 사람들은’ ‘죽었다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산 사람들’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더 이상 ‘이 세대 사람들’처럼 죽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이 세대’에서는 죽었지만, 그들은 하느님을 향해서는, 하느님의 시점에서는, “영원한 현재”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대”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로, “저 세대”는 하느님의 자녀 된 사람들로 각각 바꿔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고, 죽고, 부활한다는 말.
우리 그리스도교는 불교나 힌두교같이 윤회를 말하지 않습니다. 윤회는 ‘영혼의 영원한 삶’을 말하며, 몸은 영혼의 감옥과도 같은 것으로 여깁니다. 몸은 해탈을 할 때까지 업보에 의해 계속 이승의 삶을 반복해서 사는 것이지요.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삶을 영원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산 자의 하느님’이시지 ‘죽은 자의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한 번도 ‘죽음’을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라자로가 죽었다는 사람들의 소식을 듣고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친구 라자로가 잠들어 있으니 이제 내가 가서 깨워야겠다.” (요한 11:11)
또 야이로 회당장의 딸이 죽어서 슬피 우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왜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자고 있다.” (마르 5:39, 마태 9:24)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음을 인정하시 않으시고 ‘잠’으로 여기셨습니다. 주님께서 죽음을 인정하는 순간 죽음을 하느님의 자리에 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 원래 죽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생명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이 절망이고, 죽음의 슬픔과 죽음의 권세에 눌려 늘 죽음을 하느님보다 더 두려워합니다. 그러면 죽음이 하느님보다 더 절대적인 권세를 가진 것일까요? 우리는 하느님께서 영원한 삶을 말씀하셔도, 그 말씀을 믿기보다 우리 자신이 여전히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라고 여기며 두려워합니다. 마치 하느님께서도 죽음 앞에서 무능력하신 분처럼 말입니다. 주님께서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신 이유는 죽음이 슬퍼서도 아니고, 죽음이 주는 절망 때문도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인간 실존의 한계에서 하느님보다 죽음을 더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에 대해 마음 아프셔서 우신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는 이미 십자가 위에서 무장 해제된 상태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죽음 앞에서는 무기력합니다. 마치 부활은 예수님께만 적용되고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로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하느님을 부정합니다. 사도 바울로가 말했듯이 죽음은 ‘죄의 삯’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죽음과 투쟁하셨고, 죽음을 인정하지도, 타협하지도 않았다”라고 정교회 전례신학자 알렉산더 슈메만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죽음은 영적 재앙으로 출현한 것입니다. 하느님에게 죽음은 원래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로마서 6장 2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입니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지만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로마 6:23)
죽음이 ‘이 세대’에 속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 세대’는 하느님 안에 있지 않고 율법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과 죄의 종입니다. 그러나 이제 ‘저 세대’에 속한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종이 된 사람들입니다. 죽음은 죄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유효한 것이지 이미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렸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 (1 고린 15:54-55)
“승리가 죽음을 삼켜벼렸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선포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는 그러한 것입니다. ‘이 세대’에 속한 우리의 육신은 분명 죽습니다. 그러나 ‘저 세대’에 속한 우리의 영혼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룰 것입니다. 그때까지 잠시 죽음은 자신의 마지막 권세를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여전히 우리를 두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잠시뿐입니다. 죽음이 잠시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지 결국 생명이 죽음을 이깁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로마 8:35,37)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는다”라고 사도 바울로가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세대’에 속한 사두가이파 사람들처럼 부활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살다 죽으면 끝나는 헛된 인생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 됨도, 이 세상과 소통함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귀한 존재라는 사실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 세대에서 살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사도 바울로처럼 부활을 살아내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현재 몸이 아프고, 경제 사정도 어렵고, 여러 관계로 복잡하고 어려울지라도 그러한 모든 것들은 ‘이 세대’에 속한 일입니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지만, 분명 ‘이 세대와 저 세대’ 간에는 하늘과 땅의 거리만큼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처럼 결코 하나 될 수 없는 간격입니다. 부활 신앙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신비 중 하나는 우리가 몸으로 부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태초에 선악과로 갈라진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다시 친교와 상호 소통의 관계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부활한 몸은 하느님과 세계를 사랑의 관계로 하나 되게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방식이고 이 세상에 드러난 그분의 의지이십니다. ‘하느님의 의’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영원히 멸망받을 ‘이 세대’에서 오직 은총으로 ‘저 세대’로 옮겨진 사람들은 얼마나 복된 사람들입니까? 삶이 우리를 기만하고, 우리의 실존이 우리 모두를 벼랑 끝으로 내 모는 것처럼 보이는 현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라자로의 죽음 앞에 서 계셨던 것처럼 오늘도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그러니 두려워 마십시오. 모두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 우뚝 선 사람들이 되십시오.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하여 ‘이 세대’에서 ‘저 세대’로 옮겨지길 간절히 바라는 우리 모두에게 그러한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전례독서_ 연중32주 (다해) 1
본기도
의로우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잃어버린 이를 찾아 구원하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으며,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 하깨 1:15하-2:9
1:15하 다리우스 왕 제이년이었다. 2:1 그 해 칠월 이십일일, 주께서 예언자 하깨를 시켜 말씀을 내리셨다. 2 “스알디엘의 아들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 대사제와 그 밖에 살아 남은 모든 백성에게 일러라. 3 ‘이 성전이 예전에는 얼마나 영광스러웠더냐? 너희 가운데 그것을 본 사람이 더러 남아 있으리라. 그런데 지금 이 성전은 어떠하냐? 너희의 눈에도 이 따위는 있으나마나 하지 않으냐? 4 그러나 즈루빠벨아, 힘을 내어라. 나 야훼의 말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사제 여호수아야, 힘을 내어라. 이 땅 모든 백성들아, 힘을 내어라. 그리고 일을 시작하여라. 내가 너희 곁에 있어주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5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 너희와 계약을 맺으며 약속한 대로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 머물러 있을 터 이니, 겁내지 마라.
6 나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 나는 이제 곧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를 뒤흔들고
7 뭇 민족도 뒤흔들리라.
⋅ 그리하면 뭇 민족이 보화를 가지고 오리니,
⋅ 내가 내리는 영광이 이 성전에 차고 넘치리라.
⋅ 야훼의 말이다.
8 은도 나의 것이요, 금도 나의 것이다.
⋅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9 지금 짓는 이 성전이 예전의 성전보다 더 영화로울 것이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나는 이 곳에 평화를 주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성시_ 시편 145:1-5, 17-21
1 나의 하느님,
. 나의 임금님,
. 내가 당신을 높이 받들며 ◯
. 언제까지나 당신 이름 찬양하오리이다.
2 날이면 날마다 당신을 기리며,
. 언제까지나 당신을 기리며 ◯
. 언제까지나 당신 이름 찬양하오리이다.
3 높으시어라, 주님.
. 끝없이 찬미받으실 분, ◯
. 그 높으심, 측량할 길 없어라.
4 당신의 업적 세세에 전해지고 ◯
. 찬란한 그 공적 대대손손 알려지리이다.
5 찬란한 당신의 명성과 이룩하신 놀라운 일, ◯
. 전하고 또 전하리이다.
17 주님 가시는 길은 언제나 바르시고 ◯
. 그 하시는 일 모두 사랑의 업적입니다.
18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자에게, ◯
. 진정으로 부르는 자에게 가까이 가시고
19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의 소원을 채워주시며 ◯
. 그 애원 들으시어 구해 주신다.
20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 지켜주시고, ◯
. 악인들은 모두 멸하신다.
21 나는 이 입으로 주님을 찬양하리라. ◯
. 모든 사람들아,
. 그 거룩한 이름 영원토록 찬양하여라.
. 이제부터 영원토록!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 2데살 2:1-5, 13-17
1 교우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일과 그분 앞에 우리가 모이게 될 일에 관해서 부탁할 말씀이 있습니다. 2 주님의 날이 벌써 왔다고 어떤 사람들이 말하더라도 여러분은 지성을 잃고 쉽사리 흔들리거나 당황해서는 안 됩니다. 아마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는 사람이나 혹은 말씀을 전한다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할지도 모릅니다. 또 우리가 이런 말을 편지에 써 보냈다고 떠들어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3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절대로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4 그자는 사람들 이 신으로 여기는 것이나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모든 것에 대항하고 자기 자신을 그보다도 더 높이 올려놓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성전에 자리 잡고 앉아서 자기 자신을 하느님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다니 11:36; 에제 28:2). 5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이런 일에 관해서 누차 일러둔 일이 있는데 여러분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합니까? …
13 주님의 사랑을 받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먼저 여러분을 택하셔서 구원을 얻게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거룩하게 해주셨으며 진리를 믿게 하셨습니다. 14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여러분을 구원하시려고 여러분을 불러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15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굳건히 서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전한 말이나 써 보낸 글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가르쳐준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16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총을 베푸시어 영원한 위로와 좋은 희망을 주십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17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여러분에게 힘을 주셔서 온갖 좋은 일을 하고 좋은 말을 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복음서_ 루가 20:27-38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 몇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28 “선생님, 모세가 우리에게 정해 준 법에는 형이 결혼했다가 자녀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29 그런데 칠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첫째가 아내를 얻어 살다가 자식 없이 죽어서 30 둘째가 형수와 살고 31 다음에 셋째가 또 형수와 살고 이렇게 하여 일곱 형제가 다 형수를 데리고 살았는데 모두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2 나중에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33 이렇게 칠 형제가 다 그 여자를 아내로 삼았으니 부활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34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가지만 35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저 세상에서 살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다. 36 그들은 천사들과 같아서 죽는 일도 없다. 또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37 모세도 가시덤불 이야기에서 주님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렀다. 이것으로 모세는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38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