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15. 가해. 주님의 세례 축일(연중2주일)
이사 42:1-9 / 시편 29 / 사도 10:34-43 / 마태 3:13-17
“세례의 계보”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아시는 분은 이미 아는 사실이지만,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는 성직자나 선교사를 통한 기독교 전례가 아니라 평신도들에 의해 자발적, 자생적으로 시작된 기독교라는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 계보를 잠깐 살펴보는 것은 우리 세례 신앙의 뿌리를 돌아보는 차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자발적 세례에 의해 교회가 시작된 곳이 우리의 조선이었습니다. 그 시작은 바로 조선 유학자 이승훈부터입니다. 이승훈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약용 형제들의 매형입니다. 그는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 중국 북경에 갔다가 그곳에서 예수회 그라몽(J.J. de Gramont) 신부에게 필담으로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자청해서 받았습니다. 그의 세례명은 ‘베드로’였습니다. 조선 교회의 기둥이 되라는 뜻일 겁니다. 세계 기독교 선교 역사에서 선교사가 파견되기 전에 자발적으로 세례를 자청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이렇게 자발적이면서도 자생적이었고, 태생적으로는 유학적인 기초 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유학의 ‘충효사상’과 기독교의 가르침이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고 여겨서 기독교를 ‘서학’의 일환으로 적극 수용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기독교는 당시 정계를 장악한 ‘노론 벽파’에게 밀려난 ‘남인’ 출신의 소장파 학자들을 중심으로 연구되었고, 유학과 기독교 사상의 조화를 추구했습니다. 처음에는 신앙적인 면보다는 학문적으로 접근했던 것 같습니다. 정약용도 초기에는 매형 이승훈과 사돈 이벽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접했다가 전라도에서 있었던 ‘진산사건’ 이후 기독교와 거리를 뒀다고 합니다. ‘진산사건’은 부모의 신주를 불태운 사건으로 당시 유교 사회에서는 배은망덕한 일로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결국 남인 출신 ‘윤지충’과 ‘권상연’이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두 번째 순교자가 됐습니다. 이들의 순교터 위에 세워진 성당이 전주 한옥마을에 있는 ‘전동성당’입니다. 최초 순교자는 기독교 서적 소각령까지 내려졌던 ‘을사추조(乙巳秋曹) 적발사건(摘發事件)’ 때 유배됐다 사망한 중인 출신 ‘김범우’로 기억됩니다.
이승훈이 이렇게 자발적으로 세례를 자청한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열망이나 호기심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승훈이 기독교를 접한 것은 그 이전에 이미 조선땅에 기독교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반증입니다. 그의 세례는 이제 막 시작된 자생적 조선 교회의 바람이 반영된 것입니다. 이점이 우리 기독교 역사의 수수께끼입니다. 아무도 선교사로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조선의 선비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일까요? 이승훈을 중국에 보내 세례를 받도록 권했던 인물은 이벽이었습니다. 이벽은 정약용의 큰 형인 정약현의 처남입니다. 이 이벽이란 인물은 정말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그는 기독교 불모지인 이 조선에 자발적, 자생적 교회의 최초의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이승훈 보다 연배가 많았던 그는 이승훈을 중국에 보내 세례를 받게 하고 자신도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의 첫 세례의 계보이며 한국 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러한 이벽 또한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신앙의 계보가 있었음은 당연합니다. 그의 신앙의 계보는 ‘소현세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아들로 병자호란 이후 중국에 볼모로 잡혀갔던 불운의 왕세자입니다. 포로 생활 중 그는 우연히 ‘아담 샬’이라는 예수회 신부를 만나 기독교를 처음 접했습니다. 그 후 그는 조선으로 귀환하면서 새로운 조선의 미래를 꿈꾸며 서양의 문물과 기독교 관련 서적들을 대거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이때 소현세자를 모셨던 신하가 바로 이벽의 고조부 ‘이경상’입니다. 원래 이벽의 가문은 문관 출신이었지만 증조부 때부터 무과에 진출한 집안이었습니다. 이벽이 기골이 장대했던 것도 집안의 내력이었습니다. 이벽이 기독교를 처음 접한 것은 그의 고조부인 이경상이 소현세자 때 가지고 들어왔던 서적들을 통해서가 아닐까 추측됩니다. 소현세자는 서양 문물과 기독교에 열린 사람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꿈인 조선 개혁의 염원을 이뤄보지도 못하고 안타깝게 이른 나이에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의 사후 100년이 지난 후에 그의 기독교 정신은 이벽에게로 맥이 닿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조선 기독교의 계보는 소현세자에서 이경상으로, 이경상에서 이벽으로, 이벽에서 이승훈까지 이어내려 온 것으로 보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을사추조(乙巳秋曹) 적발사건(摘發事件)’의 시작은 이벽을 중심으로 지금의 명동에 있던 중인 ‘김범우’의 집에서 이승훈, 권일신, 권상학, 정약전, 정약종 형제 등이 비밀리에 모임을 가진 것에서 기인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이 땅에 자생적인 첫 교회의 모습이었을 겁니다. 또한 이벽과 이승훈 그리고 권철신 등이 경기도 광주에 있는 ‘천진암’에서 기독교 ‘강학회’를 열어 몇 날 며칠을 함께 숙식을 하며 말씀을 연구한 일도 매우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자발적인 연구와 활동은 이 땅에 기독교가 자생적으로 뿌리를 내리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의 기독교 계보가 특이한 것은 이 모든 과정이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자생적이며, 자발적인 세례 운동이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신문물과 서양 학문에 대한 양반들의 호기심도 작용을 했겠지만, 이는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복음 전례의 역사입니다. 이는 한국 천주교의 자부심인 동시에 우리나라 기독교의 자부심입니다.
기독교와 유교의 불편한 동거에서 시작된 기독교이지만, 그들이 추구했던 자발적, 자생적 정신은 아직도 우리나라 기독교에 깊은 맥을 유지하며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외세에 의해 전례 된 것이 아닌 민족 자생적, 자발적 기독교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행전 8장에 빌립보 부제가 길에서 만난 에티오피아의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를 통해 에티오피아 기독교가 시작이 된 것처럼, 우리도 이벽과 이승훈이란 한 개인들의 헌신에 의해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진 귀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기독교가 사람들로부터 외면받고 심지어 젊은이들에게 관심을 끌지 못하는 사태를 생각해 보면 이러한 우리의 복음의 역사는 오늘날 많은 안타까움을 느끼게 합니다.
자발적이고 자생적인 정신이 없는 기독교는 우리 민족과 이 땅의 풍토와 전혀 맞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대한성공회도, 비록 영국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긴 했지만, 많은 평신도들의 헌신, 특히 ‘전도부인’들과 ‘어머니 연합회'와 같은 평신도들의 헌신 없이는 이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 겁니다. 성공회의 자료들을 살펴보면 표면에 드러나지 않지만 많은 평신도들의 헌신과 노력의 결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아직 훈련된 사제가 많지 않았던 시절, 대한성공회는 외국 선교사들을 도와 복음전도와 교회 사역을 책임졌던 ‘전도부인’들의 헌신과 노력에 많은 빚을 졌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름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점 잊혀 가는 그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대한성공회와 우리 기독교는 사제들의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의 교회는 시작부터 평신도들의 것이었고, 또 앞으로도 계속 그러해야만 할 것입니다. 사제는 예배의 중심과 일치의 상징으로 봉사하는 직분일 뿐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시며, 그 몸은 평신도들로 구성됩니다. 평신도들의 자발적 참여 없이는 교회는 바로 설 수 없고, 복음 전도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의 요르단강에서 시작된 예수의 세례 운동이 이 땅의 ‘이승훈’이란 한 개인에게까지 이어진 것은 과히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세례 운동의 계보 속에 숨겨진 성령의 역사와 많은 평신도들의 헌신들이 이러한 역사를 가능하게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마치 성직자들의 전유물처럼 되어가고, 점점 텅 비어가는 현상은 우리가 우리의 세례의 계보를 잊은 결과일 것입니다. 성직자 없이 자생적으로 시작된 이 땅의 기독교의 모습과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은 확연히 다릅니다. 이승훈과 이벽이 현대의 교회를 보면 정말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을 보는 듯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이제 현대인에게 교회는 주일에 한번 가는 곳이 됐습니다. 아니면 중요한 축일에나 얼굴을 비추면 되는 곳이 되어갑니다. 그러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성당이나 예배당이란 건물이 된 지 오래입니다. 교회에서 ‘선교’의 열정을 볼 수 없고, 새롭게 회심한 세례자들을 보는 것은 너무나 드문 현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선교나 봉사는 나의 일이 아니고 누군가의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교회 일에 깊이 관여하면 골치 아프고 피곤하니 아예 관심을 끄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사제는 교인들이 주일 예배에만 출석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를 해야 하는 실정입니다. 사제나 교인들에게 불만이 생기면 금세 교회를 떠나 버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먼저 남을 대접하기보다는 교회에서 먼저 대접을 받고 싶어 합니다. 세상에서 너무 피곤하고 힘든 나머지 교회에 와서는 무조건 대접받고 쉬고 싶어 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26)라는 주님의 말씀은 교회에서 그 힘을 완전히 잃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도 세상에서도 어떠한 ‘쉼’도 누리지 못하는 불안증과 신경증에 모두가 불안해하며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이승훈이나 이벽 같은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의 사람을 찾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교회 일은 사제만의 일이 되었고, 사제는 점점 봉급자가 되어가면서 봉사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봉사는 신자들을 대표하는 신자회장과 사제회장 그리고 교회위원들의 일이 된 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교회에 사람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가 없는 것이라고. 교회에 교인이 없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헌신된 그리스도인이 없는 것이라고. 그러니 교회는 사람은 있어도 그리스도인이 없는 짠맛을 잃은 소금처럼 그 기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다운 맛을 잃을 것이지요. ‘교회 소멸’이란 말이 등장해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사실 ‘공현대축일’은 모든 교회들의 대축일 중 하나로 1월 6일에 고정입니다. 러시아 정교회는 1월 7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일에 교회에 나올 수 없으니 대축일마저도 주일로 옮겨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슬픈 일이지만, 사제로서 이것 또한 타협 아닌 타협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지키는 ‘주님의 세례 축일’은 사실 지난 주일이었어야 했는데 ‘공현대축일’을 지난 주일에 옮겨 지킴으로 ‘주님의 세례 축일’을 오늘 지키게 된 것입니다. 모든 축일들을 주일로 옮겨 지켜야 하는 이러한 이상한 현상들이 교인들의 편의를 위해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일에만 교회에 출석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슬픈 현실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세례를 받았던 이승훈과 이벽. 그들은 비밀 예배와 모임을 위해 몇 날 며칠을 기도하고 기다렸으며, 한번 모이면 며칠을 말씀을 함께 읽고 연구하며 토론을 했습니다. 그러한 진지함과 열정이 사라진 우리는 기독교를 단지 마음의 위안을 주는 사교 모임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승훈이 처음 세례를 받을 때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혹시 여러분은 여러분의 세례의 기억을 아직도 가지고 계십니까? 세례를 주신 성직자는 기억하고 계십니까? 세례를 기다리며 마음 졸인 기다림의 기억이 있습니까? 세례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잊어버리니 주님과의 첫 만남의 기쁨도 아련해졌습니다. 공현절과 함께 ‘주님의 세례’ 또한 우리는 ‘에피파니(Epiphany)’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늘을 ‘쪼개고’(이사야 63:19) 내려온 하느님의 현현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쪼개지고’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왔으며 하느님의 음성이 들렸다고 성서는 기록합니다. 이를 통해 역사적 예수는 자신의 신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얻게 됩니다. 세례가 주는 의미는 예수님의 세례 사건에게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세례는 ‘옛 정체가 새로운 정체성을 얻는 것’이라고 전례학자 안셀름 그린은 말합니다. 예수도 세례를 통해 ‘완전한 인간’에서 ‘완전한 신성’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케노시스’, 즉 ‘자기 비움의 확증’이며 이를 인식하는 순간부터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된 것입니다. 단성론자들은 예수께서 세례시에 하느님께 ‘입양’되었다는 ‘양자론’을 주장했습니다. 즉 원래는 인간인데 세례를 통해 신성을 얻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정통 신앙은, 이미 우리가 예수의 탄생에서 확인했듯이, 그는 완전한 하느님이시며 또한 완전한 인간이심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세례는 그의 성육신의 ‘자기 비움’과 하느님의 신성을 확증하는 의미가 큽니다. 그래서 마르코복음은 루가복음이나 마태오복음과 다르게 예수의 세례 이야기부터 복음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주님의 세례는 하느님의 구원 사역의 서막을 여는 사건이었고, 이는 그분의 성육신을 우리에게 확증해 준 사건입니다. 그래서 공현절 다음에 오는 첫 주일을 ‘주님의 세례 축일’로 교회는 지켜온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한 주를 옮겨서 오늘을 ‘주님의 세례 축일’로 지키고 있지만, 공현절 즉 에피파니는 이렇게 ‘주님의 세례 축일’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피파니는 결코 예수님에게만 국한되는 사건이 아닙니다. 에피파니는 세례의 은총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의 세례를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은 그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이제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도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바로 완전한 하느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종교들이 궁극적으로 다다르고 싶어 했던 궁극의 경지가 우리에게는 주님의 세례를 통해, 그분의 성육신을 통해, 은혜로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것은 완덕 수행이나 고행, 그리고 우리의 공로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얻은 것도 아니기에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례 시에 받은 은총으로 확증된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과 느낌이 인지하든 안 하든 그러한 은총은 세례 때에 우리 모두에게 은혜로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것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상관없이 세례의 은총을 경히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례의 의미와 중요성을 잃어버린 우리는 세례를 입교식 정도로만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말씀드린 대로 세례는 하느님의 에피파니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하느님의 현현으로 은총을 입어 새로운 정체성을 얻는 것이지요. 이러한 어마어마한 신비를 우리는 정말 감당할 수 있습니까? 감당할 수 없기에 그 의미를 쉽게 망각하게 되는 건가요? 현대 교회들이 세례를 가볍게 여기기 시작하면서, 세례 교육 또한 요식행위처럼 취급을 받습니다. 에티오피아 내시는 빌립보의 전도에 가슴이 뜨거워져 세례를 받고 싶은 강한 충동에 사로잡혔습니다. 이승훈도 세례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기에 먼 중국 땅에까지 가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의 세례는 이벽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세례의 계보는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릅니다. 그들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의미는 죽음도 불사하는 선택의 길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족의 방해와 사회적 편견 그리고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신 것처럼 기독교가 그 시작부터 고난과 늘 함께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이러한 비장한 이야기들은 교회에 평안과 위로를 받으러 오신 분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소리일 수 있습니다. 누가 희생과 고난을 좋아하겠습니까? 뭐 하러 사서 고생하는 종교를 믿어?라는 말이 나올 법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가르침은 한결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마태 16:24
십자가는 사실 세상적 안락과 평안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참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시고는 또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라고 상반된 말씀도 하십니다. 이건 무슨 뜻입니까? 십자가를 지라는 명령은 절대적이지만, 그것을 우리 인간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할 때 전적인 은총인 성령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자신의 십자가를 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견에 감당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세상의 모진 짐들보다 가볍고 자유로운 것임이 판명됩니다. 이건 직접 순종해 보고 경험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축복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를 보면 많은 증인들이 이를 직접 경험하고, 이를 증거 했던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 첫 번째 증인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것을 알았기에 이승훈과 이벽은 죽음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가족이나 친척, 사회적 명성이나 부귀영화보다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가 자신들의 영광임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 위에 서 있습니다. 오늘 살펴본 우리의 세례의 계보를 통해 우리의 믿음을 진지하게 다시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말고 과연 무엇이 이 세상에서 여러분에게 더 귀합니까?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우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분의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길 원하는 모든 분들에게 오늘 에피파니의 은총이 항상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님의 세례 (가해)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예수께서 요르단 강가에서 세례 받으실 때에 성령을 보내시고 사랑하는 아들이라 말씀하셨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우리도 세례의 언약을 굳게 지키며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또는
사랑의 하느님, 의로우신 성자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어 우리 죄인들과 같이 세례를 받으셨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다시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 이사 42:1-9
.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 그는 내가 믿어주는 자,
⋅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이다.
⋅ 그는 나의 영을 받아
⋅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주리라.
2 그는 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아
⋅ 밖에서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3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버리지 아니하고,
⋅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하며,
⋅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리라.
4 그는 기가 꺾여 용기를 잃는 일 없이
⋅ 끝까지 바른 인생길을 세상에 펴리라.
⋅ 바닷가에 사는 주민들도 그의 가르침을 기다린다.”
5 하늘을 창조하여 펼치시고
⋅ 땅을 밟아 늘이시고 온갖 싹이 돋게 하신 하느님,
⋅ 그 위에 사는 백성에게 입김을 넣어주시고
⋅ 거기 움직이는 것들에게 숨결을 주시는
⋅ 하느님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6 “나 야훼가 너를 부른다.
⋅ 정의를 세우라고 너를 부른다.
⋅ 내가 너의 손을 잡아 지켜주고
⋅ 너를 세워 인류와 계약을 맺으니
⋅ 너는 만국의 빛이 되어라.
7 소경들의 눈을 열어주고
⋅ 감옥에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주고
⋅ 캄캄한 영창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을 놓아주어라.
8 나는 야훼다. 이것이 내 이름이다.
⋅ 내가 받을 영광을 뉘게 돌리랴?
⋅ 내가 받을 찬양을 어떤 우상에게 돌리랴?
9 전에 말한 일들은 이미 이루어졌다.
⋅ 이제 새로 될 일을 내가 미리 알려준다.
⋅ 싹도 트기 전에 너희의 귀에 들려준다.”
성시_시편 29
1 하느님을 모시는 자들아,
. 주님께 돌려 드려라. ◯
. 영광과 권능을
. 주님께 돌려 드려라.
2 그 이름이 지니는 영광
. 주님께 돌려 드려라. ◯
. 거룩한 빛 두르신
. 주님께 머리를 조아려라.
3 주님의 목소리가
. 바다 위에 울려 퍼진다. ◯
. 영광의 하느님께서
. 천둥소리로 말씀하신다.
4 주께서 바닷물 위에 나타나신다.
. 그 목소리는 힘차시고 ◯
. 그 목소리는 장엄하시다.
5 주님의 목소리에 송백이 쩌개지고 ◯
. 레바논의 송백이 갈라진다.
6 레바논산이 송아지처럼 뛰고 ◯
. 시룐산이 들송아지처럼 뛰게 하신다.
7,8 주님의 목소리에 불꽃이 튕기고,
. 광야가 흔들거린다. ◯
. 주 앞에서 카데스 광야가 흔들린다.
9 주님의 목소리에,
. 상수리나무들이 뒤틀리고 ◯
. 숲들은 벌거숭이가 된다.
. 모두 주님의 성전에 모여 ◯
. 한결같이 그 영광을 기린다.
10 주께서 거센 물결 위에
. 옥좌를 잡으시고 ◯
. 영원히
. 왕위를 차지하셨다.
11 주님의 백성들아,
. 그에게서 새 힘을 얻고 ◯
. 복을 받아 평화를 누리어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사도 10:34-43
34 베드로는 이렇게 말을 시작하였다. “나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35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36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해 주셨는데 그것은 만민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시켜 선포하신 평화의 복음입니다. 37 이것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비롯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서 일어났던 38 나자렛 예수에 관한 일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에게 성령과 능력을 부어주시고 그분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주시고 악마에게 짓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39 우리는 예수께서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목격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달아 죽였지만 40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다시 살리시고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41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증인으로 미리 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42 그분은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자기를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자로 정하셨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43 모든 예언자들도 이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복음서_마태 3:13-17
13 그 즈음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오셨다. 14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게 오십니까?” 하며 굳이 사양하였다. 15 예수께서 요한에게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은 예수께서 하자 하시는 대로 하였다.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내려오시는 것이 보였다. 17 그 때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 시편 2:7, 창세 22:2, 이사 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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