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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불러도 눈물겨운”

James Chae 2023. 1. 1. 07:00

2023. 1. 1. 가해. 거룩한 이름 예수 축일 감사성찬례

민수 6:22-27 / 시편 8 / 갈라 4:4-7(또한 필립 2:5-11) / 루가 2:15-21

 

이름만 불러도 눈물겨운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라도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된다
아플 만큼 아파 본 사람만이
망각과 폐허도 가꿀 줄 안다

내 한때 너무 멀어서 못 만난 허무
너무 낯설어 가까이 못 간 이념도
이제는 푸성귀 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불빛에 씻어 손바닥 위에 얹는다

세상은 적이 아니라고
고통도 쓰다듬으면 보석이 된다고
나는 얼마나 오래 악보 없는 노래로 불러왔던가

이 세상 가장 여린 것, 가장 작은 것
이름만 불러도 눈물겨운 것
그들이 내 친구라고
나는 얼마나 오래 여린 말로 노래했던가

내 걸어갈 동안은 세상은 나의 벗
내 수첩에 기록되어 있는 모음이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들
그들 위해 나는 오늘도 한 술 밥, 한 쌍 수저
식탁 위에 올린다

잊혀지면 안식이 되고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되는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를 위해
내 쌀 씻어 놀 같은 저녁밥 지으며

작은 이름 하나라도”_시집: 별까지는 가야한다 중에서  _ 이기철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루가 1:31

 

수태고지 신탁 천사는 마리아에게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름은 당시에 아주 흔했던 이름 하나였습니다. ‘여호수아’. ‘여호수아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에 입성하여 정복 전쟁을 치렀던 영웅의 이름이었습니다. 이름의 뜻은야훼는 구원이시다.’입니다. 히브리 발음으로는예슈아(יֵשׁוּעַ) 또는 예호슈아(יְהוֹשֻׁעַ)’, 헬라어로는이에수스(Ἰησοῦς)’, 라틴어로는예수스Iesus’. 이것이 다른 유럽어로 전파되면서 ‘I’ ‘J’ 표기되고 영어로는 ‘Jesus’ 됐습니다. 루가복음 3장에 나오는 예수의 족보에도 동명이인의 다른 여호수아가 있습니다 (루가3:29). 이름은 당시에는 우리 예전 교과서에 나왔던철수와 영희처럼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름에 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조상의 이름이나 출신 지역을 붙여서 이름을 구분했지요. 예를 들어다윗의 아들 솔로몬 같은 형식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조상의 이름이 아닌 예수의 출신지인나자렛 붙여나자렛 예수 불린 것입니다. ‘감나무골의 철수 같은 식이지요.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것은 아기 예수에게 주어진 이러한 평범한 이름예수 대한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혈통을 잇는 그에게 조상의 이름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이름을 주셨을까요? 그것은 평범성이 지니는 보편성의 특징입니다. 세상은 비범함보다는 평범함이 보편적입니다. 하느님께서 하느님이심을 비워서 가장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왔을 평범한나자렛 예수라는 이름은 그에게 가장 적합한 이름이 됐습니다. 물론 그의 이름에 이미하느님의 구원이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구원은 지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아래로부터의 구원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이 기대했던 다윗왕과 같은 위엄도, 권위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모습. 그래서 이사야 53 2절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만한 볼품도 없었다"(이사 53:2)라고.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있겠소?" (요한 1:46)라는 나타나엘의 말은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편견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그리스도는 위로부터 권위와 왕권을 가지고 오시는늠름한 풍채와 멋진 모습 가진 분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성육신하신 예수는 철저히 볼품없는, 가장 낮은 모습의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여드레째 되는 날은 아기에게 할례를 베푸는 날이었다. 그날이 되자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준 대로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루가 2:21

 

하느님께는 원래 이름이 없었습니다. 이름이 있는 것은 모두 유한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감히하느님이름을 부를 없어, ‘야훼라는 이름을 수는 있으나, 소리 내어 발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이를 감히야훼라고 발음하지만, 사실 아무도 정확한 발음은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십계명에 따른 것입니다. 감히 유한자의 입으로 차마 무한자이신 하느님의 이름을 입에 담을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야훼의 이름을 알려 달라고 했을 하느님은 자신을나는 나다.’라고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이름이 아니라 하느님의 존재 양태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분은자기 스스로 있는 입니다. 다른 어떤 수식어도 필요 없는 존재입니다. 그분은 이름이 필요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파격적인케노시스, 자기 비하 가지 발견합니다. 육신을 입으신 하느님의 몸에 칼을 사건입니다. 바로 할례 말입니다.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여호수아 요르단강을 건넌 후에 번째로 자신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몸에 일이 바로할례였습니다(여호 5). 할례는 육신을 지닌 인간의 한계를 하느님 앞에 인정하는 예식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하느님 앞에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할례를 통해 썩어 없어질 육신이 거룩함을 얻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자의 운명이 거룩함의 흔적과 약속을 몸에 지닌 사건입니다. 그러한 흔적을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 또한 율법의 예를 따라 몸에 지니게 됐습니다. 이는 완전한 하느님이 또한 완전한 인간이 되심을 뜻합니다. 반만 하느님이고, 반만 인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완전한 인간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하느님이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직접 육신에 할례를 받으심으로 그를 믿는 우리는 이상 육적인 할례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은총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태어난 남자 아기들을 반드시 할례를 시켜야 하는 전통을 아직도 지키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제는 돌칼을 벼르고, 이를 사용하는 법을 배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번의 할례로 우리 모두가 할례를 받은 것이 됐습니다. 우리는 모두 마음에, 우리 영혼에 예수라는 돌칼로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한자가 할례를 받아 유한자가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이제 사람의이름 받음으로 완전한 인간이 되셨음을 우리에게 확증하셨습니다. 여느 아기가 태어나면 치러야 하는 모든 과정을 그분도 밟으신 것입니다. 태어난 8 만에 할례의 흔적을 몸에 지니신 아기 예수님은 이제 자신의이름 받음으로써 부모의 완전한 아기가 되셨습니다. 그분도 우리와 같은 가정을 가지셨습니다. 그렇게 가장 흔하고 평범한 이름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대표가 되셨습니다. 이것이 그분의 케노시스, 자기 비하’, ‘자기 비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 세상 가장 여린 것, 가장 작은 것
이름만 불러도 눈물겨운 것
그들이 내 친구라고
나는 얼마나 오래 여린 말로 노래했던가

 

세상의 가장 여린 , 가장 작은 들의 이름을 부르는 시인의 마음에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봅니다. 물론 시인은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시를 썼겠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측은지심을 읽습니다. 이제 자신의 아들을 유한자로 보내심으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는 성부께이름만 불러도 눈물겨운자가 됐습니다. 이로써 하느님의 위격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아들을 극진히 사랑하시는성부로서, 예수란 이름을 지닌 독생자는 아버지에게 순종하는성자로서의 위격말입니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는 상호이름만 불러도 눈물겨운관계임이 증명됩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안에 있는 사랑의 관계성이고, 예수의 이름이 지닌 아름다움입니다. 이렇게 부를 있는 이름으로 말미암아 무한자가 유한자를 품을 있게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의 이름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났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으로 말미암아 감히 우리가 부를 없는 하느님의 이름을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이름으로 부를 있게 됐습니다. 유대인들은 발음할 없는 신을 믿지만, 우리는예수라는 이름의성자 하느님 믿습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은총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이것이 삼위일체의 은총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이름을 어떤주문이나주술같은 것으로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지표로 그분의 이름예수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이 가르치신 대로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찬양하며, 그분의 이름으로 힘을 얻고, 그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교부 오리게네스는 그분의 이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님 이름이 지닌 힘은 실로 대단해서, 사악한 자들이 그 이름을 불러도 위력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마음으로 고통받는 자들을 치유하고, 어둠의 영들을 쫓아내며, 병든 이들에게는 언제나 유효한 치료약입니다.” (오리게네스의 켈수스 반박 중에서)

 

 

물론 교부 오리게네스는 주술적으로예수이름의 권세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서 평범했던 이름인예수 이제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다른 의미로 거듭났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척박한 지명인나자렛 그분의 이름 앞에 붙었습니다. 이는 그분이 어떤 출신인지를 말해주지만, 동시에 그가 가장 낮은 자들의 친구임을 또한 말해줍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들, 절망과 고통 가운데 시달리는 사람들, 육신의 연약함에 좌절하는 사람들, 압제자들에게 짓눌린 사람들이 이제나자렛 예수 이름으로 희망을 갖게 됐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자렛 예수' 궁중에 사는 사람들, 호화로운 집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에 가장 낮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받으셨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상 육신의 연약함과 그들이 처한 처지는 그들을 넘어뜨리는 걸림돌이 아닙니다. 할례 시에 잘라낸 피부 표피처럼 이제 더러운 죄와 삶의 험난한 조각들이 예수라는 돌칼로 잘려 나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 영혼에 할례를 받은 것이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이름으로 가능해진 은총입니다. 그의 이름을 믿고 영접하는 자는 유한성에서 무한성으로 삶의 지평이 옮겨집니다. 그래서 우리는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예수 이름으로 능히 우리를 지키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그의 이름으로 약속받았습니다. 그의 이름의 권세는 우리가 생각하는 , 우리가 기대하는 이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여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예수 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문이나 주술이 아니라 그의 이름의 권세 위에 우리를 확고히 세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평범했던예수라는 이름은 우리의 아름다운 희망이 됐습니다.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라도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된다
아플 만큼 아파 본 사람만이
망각과 폐허도 가꿀 줄 안다

 

                                                                                                       

그러나 세상은 이름을 포기한 오래인 같습니다. ‘빛이 어둠 가운데 비췄지만세상은 빛보다 어둠을 사랑한 결과입니다. 우리의 희망의 이름인 예수가 오늘 시인이 노래한 세상 작은 이름가운데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입니다. 교회는 하러 가요? 하느님이 어디에 있어요? 그냥 살고 싶은 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면 되나요? 시인은 수첩 속에 적힌모음이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름 위해 아침밥을 차려 올리는 정성을 보이지만, 세상은 가장 귀한 이름이 예수 한갓 종교창시자라는 이름 속에 한계 지웁니다. 무한자가 이름을 가지심으로 유한자의 위치까지 내려오신 사건은 이상 세상에서 의미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나자렛보다 사회의 변방이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이 이러한 편견에 기름을 붓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이름의 소중함을 망각해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정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 세상 작은 이름 하나라도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된다”라고 노래한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에게 정말 예수라는 이름이 우리 마음 끝에 닿는 등불은 되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의 이름을 부여받은 예수. 우리에게 예수의 이름은 오늘날 무엇입니까? 예수가 단순히 우리가 추앙하는 신의 이름이라면 우리는 세상의 비난을  받는게 당연할 것입니다. 그가 우리 안에 단순히 이름뿐이라면 우리는 그를 아직 제대로 영접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불빛이 되고 우리 안에 뜨거움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직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 그 이름은 분명 우리 안에 성육신 하시어 임마누엘 하신 분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에 생명이 있기에 우리는 그의 이름으로 희망을 갖습니다.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를 위해
내 쌀 씻어 놀 같은 저녁밥 지으며

 

오늘 이기춘 시인이 아름다운 것은 그의 애틋한 마음 때문입니다. 세상의 작은 이름 하나라도 버릴 수 없는 그의 마음. 아마도 그것은 그가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며 만났던 모든 사람들을 그가 어떻게 기억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인간미가 넘쳐나는 서정시입니다. 이러한 감성이 말라버린 제 자신을 이 시를 통해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가장 작은 자의 이름인 ‘예수’. 결국 오늘 우리 주변에도 넘쳐나는 또 다른 이름의 ‘예수’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 가장 귀한 그 이름’은 우리 안에도 또 우리 밖에도 넘쳐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라는 보편적 이름을 가지시는 순간 하느님은 더 이상 우리만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리 모든 인류의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그의 작은 이름에 걸맞게 우리 자신이 겸손해지고, 그분의 이름에 걸맞게, 그분의 낮아지심에 걸맞게 우리가 ‘작은 이름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느님을 우리 그리스도인들만 독점하는 것은 우리 하느님의 케노시스와 전혀 맞지 않습니다.

 

2023년 새해를 시작하며 우리는 누구와 함께 시작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신 성자께서는 도무지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에서 말하는 축복과 전혀 관계가 없으신 분임이 분명합니다. 그분은 자신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오히려 십자가와 부활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빛과 어둠이 나란히 놓인 길입니다. 빛과 어둠 중에 우리는 분명히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빛을 선택한다고 어둠이 물러가는 것은 아니지만 빛은 언제나 어둠을 앞지릅니다. 그러니 2023년을 누구의 이름으로 살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또 2023년을 누구와 함께 나누며 살 것인지도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우르르 몰려가는 곳이 길은 아닐 수 있습니다. ‘길’이신 예수님은 자신이 길이라 하셨습니다. 그 길은 분명 좁은 길이고, 작은 이름을 받는 길이며, 케노시스, 자기 비움의 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이 빛을 선택한 길입니다. 역설적이지만, 그러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은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 길이 세상과 반대방향일지라도, 그 길이 예수의 이름으로 갈 수 있는 길이라면 우리는 2023년을 그렇게 가리라고 다짐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각오로 ‘예수의 이름’을 마음에 품으시는 모든 분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이 시간 기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1.1. 거룩한 이름 예수

 

본기도

영원하신 성부여,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성자께서는 우리 구원의 표지로 예수라는 이름을 받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를 위하여 율법에 순종하신 성자께서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고백하게 하시고 주님이 세상의 구원자임을 선포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민수 6:22-27

22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3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말로 복을 빌어주라고 하여라. 24야훼께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며 너희를 지켜주시고, 25 야훼께서 웃으시며 너희를 귀엽게 보아주시고, 26 야훼께서 너희를 고이 보시어 평화를 주시기를 빈다.’ 27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면 내가 백성에게 복을 내리리라.”

 

 

 

 

성시_시편 8

1    하느님, 우리의 주여!
.     주님의 이름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주님의 영광 기리는 노래, 하늘 높이 퍼집니다.
.     어린이, 젖먹이들도 노래합니다.
2    이로써 원수들과 반역자들을 꺾으시고
.     당신께 맞서는 자들을 무색케 하셨습니다.
3    당신의 작품, 손수 만드신 하늘과
.     달아 놓으신 달과 별들을 우러러 보면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
5    그를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6    손수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     모든 것을 발밑에 거느리게 하셨습니다.
7    크고 작은 온갖 가축과
.     들에서 뛰노는 짐승들 하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     물길 따라 두루 다니는 물고기들을
.     통틀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9    하느님, 우리의 주여!
.     주님의 이름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

 

갈라 4:4-7

4 그러나 때가 찼을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시어 5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을 구원해 내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6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당신의 아들의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느님을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있게 되었습니다. 7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상속자인 것입니다.

 

또는

 

필립 2:5-11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6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의 것을 내어놓고
.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10  그래서 하늘과 위와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11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10이사 45:23 참조

 

 

 

 

복음서_루가 2:15-21

15 천사들이 목자들을 떠나 하늘로 돌아간 뒤에 목자들은 서로어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사실을 보자.” 하면서 16 달려가 보았더니 마리아와 요셉이 있었고 과연 아기는 구유에 누워 있었다. 17 아기를 목자들이 사람들에게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이야기하였더니 18 목자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일을 신기하게 생각하였다. 19 마리아는 모든 일을 마음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 20 목자들은 자기들이 듣고 보고 것이 천사들에게 들은 바와 같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돌아갔다.

21 여드레째 되는 날은 아기에게 할례를 베푸는 날이었다. 날이 되자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준 대로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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