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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와 백합을 보라”

James Chae 2023. 1. 22. 05:03

사진출처: pixabay.com

 

 

2023. 1. 22. 가해. 설명절 주일 감사성찬례 (연중3주일)

설날_ 민수 6:22-27 / 시편 89:1-2, 11-16 / 야고 4:13-17 / 마태 6:19-21, 25-34

 

“새와 백합을 보라”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모든 세속적인 염려는 사람이 사람인 것에 만족하지 않으려는 반항(unwillingness)에 그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교의 영향으로 차이를 갈망하는 염려하는 마음에 그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키르케고르 <새와 백합에게 배우라> 중에서

 

 

“사람이 사람인 것에 만족하지 않으려는 반항”

“비교를 통한 차이를 갈망하는 염려하는 마음”

 

사람인 것에 만족하기. 이 말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사람이 아닙니까?

오늘 복음서에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광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일상에 짓눌려 염려와 걱정으로 하루하루 허덕이는 우리를 데리고 광야로 나가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자리’에 함께하실 때도 있으셨지만, 때론 우리의 ‘삶의 자리’를 박차고 텅 빈 공간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일상의 공간은 온갖 것들로 가득 차 있어 도무지 집중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당장해야 할 일이 있고, 오늘 생계를 위해 다른 것은 엄두도 못 냅니다. 우리는 우리의 손을 놓으면 당장이라도 하던 일이 망할 것처럼 안절부절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도무지 마음에 여유도, 말씀에 대한 묵상도, 기도조차도 온전하게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릅니다. 숨은 막히고, 앞이 깜깜한 날들이 계속됩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는 하루의 일상조차도 불안하게 만듭니다. 내일 할 일이 산더미 같으니 오늘 할 일에 더해서 부담이 두 배 또는 세 배가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끌어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텅 빈 광야를 보는 순간 우리는 그 삭막함과 적막함, 그리고 단순함에 갑자기 또 다른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내가 이렇게 한가해도 되는 것일까? 이곳에서 무슨 선할 일이 있을까? 여기에는 먹을 것조차 없는 황량한 벌판이다. 그냥 나의 일상에 머물 것을 괜히 예수님을 따라 나왔나 보다. 오늘 처리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염려, 걱정. 우리는 주님과 함께 광야에 나왔어도 잠시라도 염려를 내려놓지 못합니다. 염려는 번뇌와 번민을 먹고 자랍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푸드덕 날아오르는 새들을 보라고 손짓하십니다. 염려하거나 두려워말고 단지 새들을 관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관조는 마음으로 대상을 응시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므로 바라봄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신 것입니다. 좀처럼 집중할 수 없는 우리도 최소한 눈에 보이는 것은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들을 말에 귀는 막혔어도 우리는 여전히 볼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잠시 침묵하시다가 우리를 돌아보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마태 6:26

 

 

주님께서는 우리더러 새를 잘 살펴서 새들에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새들은 우리 인간처럼 농사를 짓지도 않고 수확도 안 하며 저장할 곳간도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저들은 살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새의 실존과 인간의 실존이 분명 다른데 주님께서는 새를 닮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즉 새처럼 살면서 인간이 되라고 하십니다. 새의 실존 양태를 배우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새가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사람으로서의 존재의 격을 갖추라고 하십니다. 새처럼 살면서도 인간의 본질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새에게는 하느님의 형상이 없습니다. 새는 새의 형상을 가질 뿐입니다. 그런데도 새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을 지녔으면서도 염려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인간임을 스스로 부인하는 처사입니다. 최소한 그리스도인만큼은 새의 실존을 본받되 염려하지 않는 인간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실존이 새의 실존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처지에 놓였음을 상기시킵니다.

 

새는 염려에 대해 무지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닥치지 않을 일을 만들어 걱정하는 존재들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스스로 사서 고생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인간은 염려에 무지해져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우리는 염려에 무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지해져 가야’ 합니다. ‘가야 한다는 것’은 염려를 전혀 안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안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이는 ‘방향성’, ‘지향성’과 관련됩니다. 우리는 염려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점점 새를 닮으려 노력하며 염려에 무지해져 가는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이 하느님 앞에 새처럼 투명하고 명확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가식도 없으며, 제사장들의 이중적인 경건도 없습니다. 새들은 염려 자체도 모르지만 우리 인간은 최소한 염려가 무엇인지는 압니다. 새들은 염려가 무엇인지 모르니 염려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새처럼 염려 없는 상태에 이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주님께서 새의 실존을 칭찬하셨다고 해도 예수님 당시에 참새 두 마리의 값은 한 앗사리온 밖에 안 됩니다(마태 10:29). 우리 인간이 새보다 귀하다는 의미는 우리 인간이 ‘한 앗사리온(ἀσσάριον, assarion)’보다 귀하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앗사리온’은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5천 원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를 보시며 설교하실 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한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가 새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존재인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새보다 귀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새가 아니라 인간으로 성육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새의 실존에서 교훈을 얻어 염려하는 인간에서 염려에 무지해져 가는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새를 모범으로 삼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잠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임을,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를 깨달을 때 우리는 완전함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백합의 아름다움을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솔로몬의 부귀영화로도 들의 백합의 아름다움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백합은 시들면 아궁이에서 재가 되고 맙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아궁이에서 재가 될 운명인 백합도 저렇게 아름다운데 인간의 아름다움은 어떠하겠냐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되묻고 계십니다. 인간은 하느님보시기에 아름다운 존재들입니다. 인간이 인간일 때,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을 회복할 때, 인간은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대, 내 사랑, 아름다워라. 아름다워라.
비둘기 같은 눈동자. 
그대 내 사랑, 멋진 모습 
얼굴만 보아도 가슴 울렁이네,” 
아가 1:15~16

 

 

우리 인간은 하느님께 아가서의 연인처럼 아리따운 존재들입니다. 그 아름다움은 솔로몬의 영화로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염려에 의해 파괴됩니다. 염려하고 근심하는 사람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들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빛을 하며, 눈가에는 항상 ‘다크 서클’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눈빛은 잿빛으로 총기를 잃고 숨소리는 긴 한숨뿐입니다. 뱉는 말은 가시가 있고 말투는 마치 채찍질하는 것처럼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염려하는 사람은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궁이에 들어갈 시든 꽃들처럼 모든 색이 무채색입니다. 염려는 아름다움을 갉아먹고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염려의 끝은 절망과 죽음뿐입니다. 그것은 뜨거운 아궁이처럼 모든 것을 살라버립니다. 키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세속적인 염려는 언제나 사람들을 사로잡아 비교의 옹졸한 불안에 빠지게 하며, 소박한 생각 속에 들어 있는 숭고한 고요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키르케고르의 <새와 백합에게 배우라> 중에서

 

 

인간의 염려와 걱정의 근원에는 항상 ‘비교’가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허영심 때문일까요? 아니며 과욕 때문일까요? 아마 둘 다 일 겁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없는 것은 불행의 시작입니다. 남의 것이 부럽고, 남이 가진 것이 탐나며, 남보다 더 잘 나고, 더 잘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인간에게 좀처럼 자족하는 마음을 쉽게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우리 보다 돈이 많은 부자들도 항상 더 큰 부자들 때문에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상대적입니다. 비교 때문입니다. 비교하는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우리는 열등감 또는 우월감을 가집니다. 비교하지 않고, 모든 비교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과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 새와 백합을 비교의 대상으로 설정하신 것입니다. 비유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면 ‘비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비교할 수 없는 존재와 비교시키니 우리의 존엄성이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물론 염려하는 순간 이미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맙니다. 염려 때문에 우리가 지닌 하느님의 형상이 빛을 잃습니다. 새는 새로서의 존엄과 백합은 백합으로서의 존엄을 스스로 버린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들은 인간처럼 스스로 자신의 존엄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새는 새이고, 백합은 언제나 백합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교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태생부터 비교 자체를 모릅니다. 그들에게는 인간과 같은 ‘자유의지’가 제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처럼 눈이 밝아져 선악을 구분하고 싶어 했습니다. 감히 피조물이 창조주와 자신을 비교한 것입니다. 비교는 다다를 수 없는 것에 다다르고자 하는 유혹이며 욕망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허영심이라 부릅니다.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은 허영을 부리지 않습니다. 들의 백합은 솔로몬의 영화보다 아름답지만 결코 그것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비교하는 것은 오직 인간뿐입니다. 새와 백합은 비교를 모릅니다. 인간 만이 비교함으로써 절망에 빠지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비교의 대상이 인간이 아닌 새와 백합이 된 것입니다. 새와 백합의 실존에서 배우되 철저히 인간이 되라는 주님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전에 우리는 먼저 주님께서 관상을 통해 깨달으신 것처럼 우리도 자연에서 먼저 배워야 합니다. 새와 백합을 통해 먼저 새가 되고 백합이 되십시오. 그런 후에야 참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처지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보다 수준이 낮아졌습니다. 그러니 자존심이 상하시더라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비교의 대상으로 새와 백합을 제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와 백합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스승입니다. 그들에게서 염려 없는 삶과 투명한 아름다움을 배우십시오. 그래서 인간으로 나아가십시오. 염려하지 않는 인간 말입니다. 비교하지 않는 인간 말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알면 자유로워진다는 주님의 말씀의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알 수록 더욱 자유로워지고, 더욱 아름다워지는 존재들입니다. 새와 백합을 열심히 본받으십시오. 그리하여 참다운 인간으로,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축복이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에게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 음력 1.1. 설날

 

본기도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 주님의 은혜로 우리가 대대로 번영을 누리게 해주심을 감사하나이다. 비오니, 설날을 맞이하여 우리 선조들의 영혼을 기억하오니,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영원한 안식을 주시고, 주님의 자녀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한 가정을 이루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민수 6:22-27

22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3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말로 복을 빌어주라고 하여라. 24야훼께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며 너희를 지켜주시고, 25 야훼께서 웃으시며 너희를 귀엽게 보아주시고, 26 야훼께서 너희를 고이 보시어 평화를 주시기를 빈다.’ 27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면 내가 백성에게 복을 내리리라.”

 

 

 

 

성시_시편 89:1-2, 11-16

1    주여,
.     내가 당신의 사랑을 영원히 노래하리이다.
.     당신의 미쁘심을 대대로 전하리이다.
2    당신께서 다짐하신 사랑,
.      미쁘심은 하늘처럼 영원히 흔들리지 않습니다.
11  하늘이 당신 것이오니, 땅도 당신의
.     땅과 안에 담긴 모두 당신께서 만드신 것이며,
12  북녘과, 남녘을 만드신 이도 당신이오니
.     다볼산도 헤르몬산도
.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옵니다.
13   모든 전공이 당신의 것이니
.     억세신 당신 손이여, 탁월하신 오른손이여.
14  정의와 공정이 당신의 옥좌를 받들고,
.     사랑과 진실이 당신의 거동을 인도하옵니다.
15  복되어라, 주님께 만세 부르는 백성
.     그들이 걷는 길을
.     당신의 환한 얼굴이 비춰 주시니
16  날마다 이름 높이 기리고
.     당신의 정의로 사기도 드높습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야고 4:13-17

13 오늘이나 내일쯤 아무 아무 도시로 가서 동안 거기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어보겠다.” 하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합니다. 14 당신들은 내일 당신들의 생명이 어떻게 될는지 알지 못합니다. 당신들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15 그러므로 당신들은만일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우리는 살아가며 이런 저런 일을 해보겠다.” 하고 말해야 것 입니다. 16 그런데도 당신들은 지금 허영에 들떠서 장담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장담은 모두 악한 것입니다. 17 사람이 제가 마땅히 해야 착한 일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그것이 죄가 됩니다.

 

 

 

 

복음서_마태 6:19-21, 25-34

19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 20 그러므로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어라. 거기서는 좀먹거나 녹슬어 못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가지도 못한다. 21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25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26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시간인들 늘일 있겠느냐? 28 너희는 어찌하여 걱정을 하느냐?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다. 30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입히시겠느냐? 31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것을 알고 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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