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설교문

“반대를 받는 표징으로서의 그리스도”

James Chae 2023. 1. 28. 06:17

2023. 1. 29. 가해. 주님의 봉헌 주일 (연중4주일)

말라 3:1-5 / 시편 24:(1-6)7-10 / 히브 2:11-18 / 루가 2:22-40

 

반대를 받는 표징으로서의 그리스도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거부받고, 비난받으며, 핍박을 받는 사람들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어떻게 세상의 급류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그들은 바로 있을까요? 저의 청소년기에 나왔던 하이틴 드라마와 영화 등은 학창 시절의 청순함, 설렘 그리고 청소년들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제가 접하는 대부분의 청소년 드라마나 영화들은 정말 청소년들이 있을지 의문이 들정도로 주제가 폭력적인집단 따돌림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최근에도 세간의 화제를 모았던 넷플릭스 시리즈 글로리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고데기 체크폭력의 실상을 폭로했습니다. 집단 따돌림 피해자들은 학교나 사회로부터 전혀 보호를 받지 못한 더욱 소외되고 죽음과도 같은 현실을 직면하는데 반해, 가해자들은 점점 당당해지는 것이 마치 승리자 행세를 하는 아닐까 생각됩니다. ‘성선설(性善說)’ 주장했던 맹자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에는 선을 싹트게 하는 가지 단서, , 사단(四端) 마음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맹자의 주장이 사실일까? 의문이 정도로 그러한 인간성을 사람들에게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맹자는 절벽으로 기어가는 어린아이를 보고 외면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전제로 인간의 선한 본성을 주장했지만, 오늘날에는 어린아이가 절벽에 떨어지려 해도 자신의 아이가 아니면 전혀 무관심할 같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혐오와 욕설, 배제, 폭력, 무관심이 인간의 본성을 대신하고 있는 듯합니다. 집단 따돌림은 학교나 직장을 불문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확산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맹자가 말한 가지 마음 과연 어떤 것이 남아 있습니까? 한번 자신을 잠시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측은지심(惻隱之心) ; 의롭지 못함과 선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마음, 수오지심(羞惡之心) ; 겸손하여 사양할 아는 마음, 사양지심(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판단할 아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

 

우리가 학창 시절에 배웠던 내용입니다. 기억하시는지요? 여러분은 가지의 마음을 아직 가지고 계신지요?

 

왕따 또는 집단 따돌림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인류가 존경하는 4 성인 역사적으로 고대에서부터 현재에까지 한결같이 먹고갈등 대상이 분은 누구일까요?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또는 무함마드? 생각에는 예수님 뿐인 같습니다. 예수님은 믿지 않는 자들에 의해 차마 입에 담을 없는 험담을 아직도 듣고 계십니다. 물론 그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이미개독교라는 비난을 받으며 예수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종교를 떠나 인류의 사대 성인으로서도 존경을 받지 못하는 역사적 예수를 생각하면 매우 마음이 아픕니다.

 

예수님은 탄생부터 논란의 중심에 서셨습니다. 어떻게 처녀가 성관계없이 임신을 있지? 예수는 오늘날로 말하면 미혼모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니 태생부터 유대인들의 율법에 어긋났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에서는 마리아가그리스도의 어머니 아니면하느님의 어머니 라는 호칭 논란으로 예수의 어머니조차 갈등의 중심에 섰습니다. 또한 예수에게는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합쳐졌느냐? 아니면 각각 독립해서 신성과 인성을 지니셨느냐? 아니며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이 동시에 존재하시냐?라는 논란도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귀신 들린 ’, ‘죄인들의 친구’, ‘신성모독자등으로 비난을 했습니다. 결국 예수는 신성모독과 반란죄로 갖은 수모를 당하시면서 십자가 처형까지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부활에 대한 논란까지세상은 그를 죽음 이후에도 전혀 존중해주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동성애자였다는 이야기, 예수가 인도 구루의 제자였다는 이야기, 그가 결혼하셨다는 이야기 등등너무나 많은 속설들이 그의 이름에 따라붙었습니다. 독배를 마시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던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비교해도 예수의 죽음은 너무 가볍게 취급되고 있습니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마태 2:34-35

 

 

오늘 시므온은 마치 이러한 상황을 예견한 , 성육신 하신 아기 예수를 반대를 받는 표적 또는 표징’(σημεῖον ἀντιλεγόμενον)”이라 불렀습니다. 어린 아기를 축복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들으면 기뻐할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반대를 받는 표징으로서의 예수의 운명은 나면서부터 이미 예정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마리아의 고통이 어떠할지, 고통받는 아들을 보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할 지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우리는 따돌림당하는 자녀를 부모의 심정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아픔은 오늘 말씀처럼예리한 칼에 찔리는 듯한 아픔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미 마리아는 이를 수태고지 때부터 인지하고 있었을 겁니다. 가진 없어 비둘기로 봉헌을 해야 하는 가난한 부부에게 시므온의 예언은청천벽력같은 신탁이 아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모는 아기가 논란의 중심에 서게 것이라는 신탁을 순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처음에 시므온은 아기 예수가 이스라엘의 구원이 된다고 예언했습니다. 이때 예수의 부모는 너무 감격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번째 신탁은 너무나 잔혹합니다. ‘반대를 받는 표징 아기라니 왕따와 따돌림당할 운명의 아기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말을 들은 부모의 마음은예리한 칼에 찔리는 듯한 아픔 자체였습니다. 야속한 운명입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예언을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박히는 순간 느꼈을 겁니다. 결국 십자가 위의 예수와 십자가 밑의 마리아는 이로써 고통의 운명 공동체가 됐습니다. 

 

루가복음 저자는 복음서를 기록하며 예수께서 유대 율법에 따라할례 받으셨고, ‘정결법 따라 제물도 봉헌했으며, 속량법 따라 태의 열매로 하느님께 아기 예수가 봉헌되었음을 꼼꼼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완전한 하느님이시요 또한 완전한 인간이심을 예수가 일반적인 아이들처럼 성장했다는 점을 기록하며 설명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육신의 신비입니다. 이를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분은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다. 히브 2:18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의 한계와 연약함을 직접 경험하셨던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루가는 그러한 그가 이스라엘의 예언을 성취하실 분이심을성전과 율법의 준수 통해 보여줌으로써 구약 율법과 예언의 성취를 또한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마태오복음서에서는 동방박사가 예수께 가지 봉헌물을 바친 것에 반해서 루가복음은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물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루가복음 탄생이야기에서 목동들은 예수께 아무런 봉헌물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봉헌물은 비둘기 마리뿐입니다. 이는 가난한 사람들의 봉헌물입니다. 교부 암브로시우스는 이를몸의 순결과 영의 은총이라 해석했습니다. 산비둘기는순결, 집비둘기는은총 각각 상징한다고 합니다. 가지 상징은 바로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그대로 설명해 줍니다. 마태오복음에서 보여주는 왕으로서, 제사장으로서의 이미지와 다른 그리스도의 이미지입니다. 루가복음의 그리스도는 모든 면에서순결하며 하느님의은총으로 가득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니 그에게는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사단의 마음이 충만했음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그를 통해 완전한 인간의 본성을 보게 됩니다. 

 

반대를 받는 표징(표적, σημεῖον ἀντιλεγόμενον)으로서의 그리스도”.

그는 세상에서 인간이 받을 있는 가장 극심한 고통과 따돌림을 경험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하느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다고 외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따돌림당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게 것입니다. 이것이 아기 예수에게 주어진 신탁의 비밀이었고, 그의 부모는 이러한 신탁에 따라 순종하는 마음으로 아기 예수를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고, 그리스도인의 고난 받는 운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묵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반대를 받는 표징이시라면 그를 믿는 우리 교회의 본질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의 본질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반대를 받는 표징(표적, σημεῖον ἀντιλεγόμενον)으로서의 교회”, “반대를 받는 표징으로서의 그리스도인”.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반대를 받는 표징으로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를 그의 고난 받는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교회 본질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 마태 10:34-36

 

 

이건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숙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수용과 배척의 갈등이 항상 따라다니는 것은 필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복음의 빛은 항상 어둠과 대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것이 우리의 잘못된 모습과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이라면 우리 교회가 지닌반대를 받는 표징 어쩌면 우리의 영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용과 배척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복음은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내는강력한 양날의 검이 수도 있습니다. 맹자가 말한 사단의 마음이 충만한 사람은 결코 어둠과 친구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기독교는 이미 태생부터 세상의 따돌림을 각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지닌 모든 가식과 거짓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철저히 쪼개지고 돌파됩니다. 그러니 세상은 우리를 감당할 수도 없고, 그리스도를 수용하기도 어렵습니다. 이것이반대를 받는 표징으로 시작된 복음과 교회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융통성 없음과 편협함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비판과 배척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수용과 배척의 갈등 속에서 최종적으로으로 나아가는 정반합의 길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대를 받는 표징으로서의 복음 우리 개인의 속에서도 순간 양가적 감정 속으로 우리를 몰아넣습니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배척해야 하는데, 우리는반대를 받는 표징으로서의 그리스도 우리 자유의지 안에서 몰아내려 합니다. 우리 안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를 배척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보다 사랑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다면 그것도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것이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마태 10:37

 

 

말은 부모님께 효도하지 말고, 자식을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말씀은반대를 받는 표징으로서의 그리스도 우리 안에 주인으로 모시라는 말씀입니다. 배격이 아닌 수용입니다. 그것은 분명 세상적 풍요의 축복과는 거리가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고통과 아픔에 있어서 주님보다 더한 경험을 사람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분은반대를 받는 표징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이사야서 53장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이사 53:2-3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이사야는 우리도 그를 업신여긴 공범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므온의 예언은 정확이 이사야의 예언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반대를 받는 표징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친히 고통을 받으셨으므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표징으로 삼아 고통을 이겨낼 있다는 역설이 여기에서 가능합니다. 이것이세메이온’, 표징 역할입니다. 예수는 고통의 표징으로 저주의 나무 위에 달리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쳐다보는 자는 사막에서 구리뱀을 쳐다본 사람들이 모두 살아난 것처럼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통해 우리가 고통도 능히 이겨낼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감당할 없는반대고통 직면했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생애는 일관되게반대 직면하는 자체였습니다. 우리가 평생 살면서 받게 모든 고통과 따돌림을 그분께서 홀로 모두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위로를 받고 또한 소외받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같은 말로 위로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친히 따돌림과 비난의 대상이 되셨기 때문에 남을 함부로 따돌리거나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험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반대를 받는 표징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따돌림당하는 자들과 항상 함께하십니다. 고데기로 살갗을 태우는 고문을 받는 어린 영혼의 고통의 자리에도 그분은 그곳에서 함께 비명을 지르십니다. 그분이 성육신으로 오신 이상 그분의 육신은 땅에서 철저히 버림받고 따돌림당할 운명 자체였습니다. 사탄은 하느님의 아들을 결코 그냥 내버려 없기 때문입니다. 따돌림당하신 그분 때문에 우리는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어떠한 언행이나 폭력에도 반대할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폭력을 행하는 자들에게안돼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방관하는 자나 폭력을 행하는 자나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하신 분이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행하지 않는 것도 율법을 범하는 것과 똑같은 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시면 방관하지 마시고 위로하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자신도 만약 고통 가운데 있다면 우리의 존엄을 잃지 않도록 그리스도를 표징으로 삼아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반대를 받는 표징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이미 고통을 당했으니 너희는 이제 평화를 누리라고. 부활 제자들에게 나타나 처음 하신 말씀이평안하냐?”였습니다. “반대를 받는 표징으로서의 그리스도 이렇게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주님의 봉헌 십자가와 부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평화를 비십니다. 이제 우리가 그분의 평화의 인사에 화답할 차례입니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아멘. 

 


전례독서_주의 봉헌 축일

 

 

본기도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느님, 오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성전에 봉헌되셨나이다. 겸손히 비오니, 우리도 정결한 마음으로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봉헌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말라 3:1-5

1보아라.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 그는 너희가 애타게 기다리는 너희의 상전이다. 그가 자기 궁궐에 나타나리라. 너희는 그가 와서 계약을 맺어주기를 기다리지 않느냐? 보아라. 이제 그가 온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2 그가 오는 , 누가 당해 내랴? 그가 나타나는 , 누가 버텨내랴? 그는 대장간의 불길 같고, 빨래터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자리를 잡고 앉아, 풀무질하여 은에서 쇠똥을 걸러내듯, 레위 후손을 깨끗하게 만들리라. 그리하면 레위 후손은 순금이나 순은처럼 순수하게 되어 올바른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게 되리라. 4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이 바치는 제물이 옛날 처음처럼 나에게 기쁨이 되리라. 5 나는 너희의 재판관으로 나타나 점쟁이와 간음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 하늘 두려운 생각없어 날품팔이, 과부, 고아, 뜨내기의 인권을 짓밟는 자들의 죄를 당장에 밝히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성시_ 시편 24:(1-6)7-10

1     세상과, 안에 가득한 것이 모두 주님의 ,
.     땅과 위에 사는 것이 모두 주님의
2    주께서 바다 밑에 기둥을 박으시고
.     땅을 위에 든든히 세우셨다.
3    어떤 사람이 주님의 산에 오르랴?
.     어떤 사람이 성소에 들어서랴?
4    행실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
.     허망한 뜻을 두지 않고
.     거짓 맹세 아니하는 사람이다.
5    이런 사람은 주님께 복을 받고
.     하느님께 구원받을 사람이다.
6    이런 사람이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며
.     야곱의 하느님 앞에 나아갈 사람이다.
7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     영광의 왕께서 드신다.
8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     힘세고 용맹하신 주님이시다.
.     싸움에 용맹 떨치신 주님이시다.
9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     영광의 왕께서 드신다.
10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     만군의 주께서 영광의 , 그분이시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히브 2:11-18

11 사람을 거룩하게 해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사람들은 모두 같은 근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거리낌없이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시고 12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
내가 당신의 이름을 형제들에게 선포하며
.    
회중 가운데서 당신을 찬미하겠습니다.” 시편 22:22
13
나는 그분을 신뢰하겠습니다.이사 8:17(2사무 22:30 참조)하고 말씀하셨고 다시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 나와 함께 여기 있습니다칠십인역 이사 8:18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4 자녀들은 다같이 피와 살을 가지고 있으므로 예수께서도 그들과 같은 피와 살을 가지고 오셨다가 죽으심으로써 죽음의 세력을 잡은 악마를 멸망시키시고 15 한평생 죽음의 공포에 싸여 살던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16 예수께서는 천사들을 보살펴 주신 것이 아니라 분명히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셨습니다이사 41:8-9 17 그러므로 그분은 모든 점에서 당신의 형제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자비롭고 진실한 대사제로서 하느님을 섬길 수가 있었고 따라서 백성들의 죄를 없이 있었습니다. 18 그분은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실 있으십니다.

 

 

 

 

복음서_루가 2:22-40

22 그리고 모세가 정한 법대로 정결 예식을 치르는 날이 되자 부모는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23 그것은누구든지 첫아들을 주님께 바쳐야 한다출애 13:2(13:12, 15 참조) 주님의 율법에 따라 아기를 주님께 봉헌하려는 것이었고 24 주님의 율법대로 산비둘기 쌍이나 집비둘기 새끼 마리를 정결례의 제물로 바치려는 것이었다레위 5:7, 12:8.
25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성령이 머물러 계셨는데 26 성령은 그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죽기 전에 보게 되리라고 알려주셨던 것이다. 27 마침내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전에 들어갔더니 마침 예수의 부모가 첫아들에 대한 율법의 규정을 지키려고 어린 아기 예수를 성전에 데리고 왔다. 28 그래서 시므온은 아기를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29“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30  
주님의 구원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31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32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33
아기의 부모는 아기를 두고 하는 말을 듣고 감격하였다. 34 시므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 아기는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분이십니다.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 되어 35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것입니다.”
36
또한 파누엘의 딸로서 아셀 지파의 혈통을 이어받은 안나라는 나이 많은 여자 예언자가 있었다. 그는 결혼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같이 살다가 37 과부가 되어 여든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없이 단식과 기도로써 하느님을 섬겨왔다. 38 여자는 예식이 진행되고 있을 때에 바로 자리에 왔다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이 구원될 날을 기다리던 모든 사람에게 아기의 이야기를 하였다.
39
아기의 부모는 주님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자기 고향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날로 튼튼하게 자라면서 지혜가 풍부해지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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