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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 無心”

James Chae 2023. 1. 8. 07:00

 

2023. 1. 8. 가해. 공현대축일_연중1주일

이사 60:1-6 / 시편 72:(1-9) 10-15 / 에페 3:1-12 / 마태 2:1-12

 

무심 無心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마태오복음의 가장 특징 하나는구약 예언의 성취입니다. , 구약 성서에 기록된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다는 것을 중요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 운동이 유대교의 전통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 같은 연결 선상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율법의 완성과 근본정신을 환기시키는 중점을 뒀습니다. 이러한 의도에 따라 마태오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자료를 수집 편집하면서 그분이 바로 구약이 예언한 그리스도이시며하느님의 아들임을 분명히 하고자 했습니다.

 

마태오복음과 구약과의 연관성은 구약의 사건이나 예언적 말씀을 역사적 예수의 사건과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기록됩니다. 예를 들면 아기 예수가 태어난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한 것은 정확히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출애굽을 사건의 오마주입니다. 또한 예수의 산성설교 장면은 정확히 구약의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하느님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선포하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이러한구약 예언 성취 도식은 마태오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연속성을 자신들의 교회공동체에 분명히 알리는 목적이 있었던 같습니다. 이와 더불어 마태오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차이점 또한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는 이에 대한 좋은 예입니다.

 

오늘 이야기에는 당시 유대사회의 가지 권력이 모두 명시됩니다. 정치적 권력의 중심인 , 성전 권력인 대사제들, 그리고 종교와 율법 권력의 중심에 있던 율법사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유대교를 대표하는 사람들로서 성전을 중심으로 제사와 종교 그리고 정치를 통합하는 시대의 엘리트 그룹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오늘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하여 보인 태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판단하고 분별할 있는 영적, 정치적 분별과 판단의 중심에 자들이었습니다. 동방에서 이방인 사절단이유대인의 찾으니 예루살렘에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던 같습니다. 그러니 헤로데 왕은 종교권력의 대표인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불러 이에 대한 그들의 의견을 먼저 들었습니다. 그리고 동방박사들을몰래만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정치인답게 어떤 절충안이나 비밀스러운 독단적 처리를 원했던 같습니다. ‘유대인의 이라니? 우리는 구약에서 하느님의 선지자들을 통해 수시로 왕권이 이양됐던 사건들을 알고 있습니다. 사울왕도 사무엘이 다윗에게 야훼의 이름으로 기름을 부음으로 말미암아 하루아침에 왕권을 잃었습니다. 그러니 다윗의 혈통을 잇는유대인의 탄생소식을 들은 헤로데 왕이 두려워했던 것은 당연한 같습니다. ‘베들레헴 다윗의 고향으로 구약 예언이 성취될 장소로서 적합하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그러니 그가 선택할 있는 것은 그를 없애는 것뿐 달리 길이 없었을 겁니다. 이러한 헤로데의 태도는 민족의 해방자로서 강대국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정치적 그리스도를 기다리던 당시 유대인들의 염원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리스도가 다윗 같은 왕권을 가지고 위엄과 권위로써 자신들을 구원해주길 기다렸습니다. 물론 헤로데의 입장에서는 다윗의 혈통보다는 자신의 자식들이 자신의 대를 이어 왕이 되었으면 했을 겁니다. 이러한 헤로데의 바람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이해관계에 부합했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이방인이었던 동방박사들은 유대교의 관점과는 거리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과 같은 이해관계나 선입견이 없었습니다. 야훼의 구원이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와 율법에 대한 이해가 높지는 않았지만 유대교의 메시아 신탁에 대한 이해는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유대인의 어디에서 찾느냐는 질문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인들이 그랬듯이선민사상이란 선입견에 붙들리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들은 별을 보며 나라와 시대의 길흉을 점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평소에 자신들이 하듯이 그들은 어느 평소처럼 별을 관측하다가 전혀 새로운 빛을 하늘에서 발견합니다. 이를 우리는에피파니 epiphany (ἐπιφάνεια)’라고 부르지만, 그들이 목격한 별은 환상이 아닌 그들에게는 실재였습니다. , 자연의 현상을 통해 드러난하느님의 현현(에피파니)’ 그들은 아무런 편견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파르티아 제국, 지금의 이란 지역에서부터 팔레스타인까지 여행을 감행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들이 유대교에 대해 어떤 신앙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최소한 하느님의 현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정도로 겸손하고 열린 사람들이었음은 분명한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은 아니었지만 하늘의 이치에 따를 줄은 알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편견과 선입견에 붙들리지 않았던 . 그들은 필요 이상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무심함 알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신앙과 다른, 지식과 다른, 진리를 향한 다른 깨달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묵상할에피파니 수반되는무심無心입니다.

 

무심無心

사전적으로 말은 번째로아무런 생각이나 감정이 없음이란 뜻도 되고, 번째는세속적인 욕망이나 가치 판단에서 벗어난 마음의 상태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번째 뜻으로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느 한쪽이무심해지는 순간 관계는 급격히 냉랭해지고 파탄에 이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의 관계와 주변 현상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을무심한 사람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는무심 번째 뜻입니다. “세속적 욕망이나 가치 판단으로 부터 자유로운 상태”. 이기춘 시인은 이러한무심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얼마나 더 살면 여름을 떼어다 가을에 붙여도 아프지 않은 흰구름 같은 무심을 배우랴… 중략… 얼마를 더 가면 제 잎을 잘라 가슴에 꽂아도 소리하지 않는 풀들의 무심을 배우랴” 이기춘의 시 ‘지상의 길’ 중에서

 

 

무심 그러한 것입니다. 방금 읽은 시의 구절처럼흰구름들풀들은” ‘세속적인 욕망과 가치 판단 얽매이지 않는 초연함이 있습니다. 초연함이 흰구름과 들풀의 무심함입니다. “흰구름 여름에서 가을로 옮겨져도 흰구름일 뿐이고, 들풀이나 들꽃은 자신이 이유 없이 꺾여 아파해도 전혀 불평하지 않습니다. 시인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인간들과 달리 자신에게 닥치는 급작스런 변화에 초연하고 무심합니다. 그들은 필요 이상으로 세상에 대해 반응하지 않고, 필요 이상으로 자신의 처지와 운명을 비관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헤로데와 같은 초조함도,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영악함도 없습니다. 헤로데나 종교권력자들처럼 자신의 자리에 연연하는 집착도 전혀 없습니다. 자연은 결코 자신들에게 닥치는 운명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무심함 보입니다. 이러한 자연의 무심함은 파괴와 회복의 오랜 반복을 통해 자연에 담긴 무심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자연은 자연에 의해 파괴되지만, 자연 자체에 의해 회복되는 자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인의 위대함은 그러한 자연 현상을 통해 깊은 삶의 통찰을 깨닫는 탁월한 재능입니다. 이러한 영성을 우리 기독교는관조(觀照, θεωρία, contemplation)’라고 부릅니다. ‘관조 바라 봄이며, 바라 봄은 모든 편견과 지식, 감정 또한 배제한무심함 통한 바라봄입니다. 대상이나 현상을 관조한다는 것은무심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주관이나 이성이 작동되는 순간무심 이상 유지될 없습니다. 어떤 것에도 연연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상태. ‘무심 그러한 것입니다. 우리는 시인처럼 자연 속에서 그러한무심 배울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동방박사들은 이러한 자연 현상을 항상 관찰하고 관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별의 움직임과 별의 밝기의 변화를 매일 관조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세상의 운명을 읽어냈습니다. 이런 면에서 그들은 분명 시인들과 비슷한 관조의 영성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관조가 다다르는 지점이 바로 현상과 초월의 경계를  쪼개고들어오는에피파니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느 목격된 밝은 빛을 보고 자신들의 ‘''삶의 자리''’ 박차고 떠날 있었던 것입니다. 빛은 한순간에 그들의 주관과 이성을 쪼개는깨달음' 순간이었습니다. 깨달음의 순간, 보이지 않는 세계가 현상의 세계에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을 그들은 포착할 있는 예민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가능함은세속적인 욕망과 고정된 가치 판단 붙들리지 않는 그들의무심때문입니다. 그들은 집중할 것에 집중할 아는무심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버릴 것을 버릴 아는무심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밝게 빛나는 동방의 별빛을 헤로데와 유대교 지도자들과 같은 편견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빛을 제대로 바라볼 있게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확신을 직접 확인하는 여행을 감행한 것입니다.

 

마태오의 예수 탄생 이야기에서 우리는 가지의 극명한 대비를 발견합니다. ‘예수의 탄생구약 예언의 성취임과 동시에구약 예언의 성취 인한 은총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로 옮겨졌음을 선포하는 사건이 것입니다. 당연히 구원받을 것으로 믿었던, 율법의 약속, 예언의 약속을 지닌 민족인 이스라엘은 이제 하느님의 구원에서 제외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를 십자가에 처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인과 같은 선입견과 편견에서 자유로왔던 동방박사처럼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약속이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인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학자들은 마태오 사가의 공동체의 '삶의 자리' 소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다수의 이방인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리고 공동체는 처음에는 유대인 회당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다가 차츰 그들과 결별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마태오복음을 처음부터 이러한 관점에서 읽어보면 사실을 쉽게 확인할 있습니다. 처음에는 유대교에 대해 우호적이다가 차츰 유대교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로 발전되는 것을 마태오복음에서 발견할 있습니다. 이는 정확하게 마태오가 하느님의 구원의 복음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하는 복음에 집중했던 루가복음과 다른 마태오복음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4 복음서를 균형 있게 읽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무심의 영성을 묵상하며 드는 생각은 헤로데 왕의 선입견과 편견, 그리고 집착이 우리에게도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이 지켜온 신앙의 색깔, 신학적 지식, 전례적 습관, 신앙의 연륜 등등. 우리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경험과 생각 속에 종종 가둬놓으려 하고 있습니다. 남의 신앙에 간섭하거나 필요 이상의 충고를 한다든지, 예언의 은사를 가졌다고 함부로 남의 신앙에 대해 간섭하기도 하고그것뿐이겠습니까?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항상 말씀의 가르침을 남을 변화시키는 데만 적용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회개의 메시지는 항상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율법의 잣대로 자기 자신보다는 타자에게 전가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는 법입니다. 눈은 항상 밖을 향하고 있어서 남의 탓을 하기 쉽고 남의 잘못과 남의 부족함을 발견하는 일은 너무 쉬워 보입니다. 자기의 기준으로 보면 항상 타자는 자신의 성에 차지요. 특히 자신의 분야에서 실패를 경험하지 못해 사람이나, 자기가 하는 일에 성공을 경험해본 사람들 그리고 신앙적으로 성숙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우리는 헤로데왕을 함부로 비난하기에는 너무나 그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이란에서 팔레스타인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여행을 감행할 정도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비워 이러한 영적 여행을 감행하기에 아직 부족함을 느낍니다. 하느님의 일보다 항상 자신에게 닥친 세상의 일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혹입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마태 4:4

 

주님께서도 우리와 같이 이러한 유혹을 견디셔야 했습니다. 마귀의 유혹을 주님께서는 신명기 8 3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유혹에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맞설 수밖에 없습니다. (헤로데 왕이 대면했던 유혹은 그리스도로 태어난 아기를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현대인의 삶에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다양한 유혹과 도전들은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우리는무심으로 별을 보면서 자신을 비워 영적인 순례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일에 매이고, 가족에게 매였으며, 세상적 안락과 성공에 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헤로데처럼가서 아기를 찾아보시오. 나도 가서 경배할 터이니 찾거든 알려주시오.”라고 말하며,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자기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뛰어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각자의 몫이 됩니다. 여러분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 모든 것에 자유하며,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을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물론 자유는 그리스도인에게 선악과를 보는 듯한 부담으로 작용하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능력으로 이를 극복할 있음을 또한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간 어떤 선택을 성령을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심.

세상에 무심해지고 하느님께 예민해지기. 이웃의 단점과 실수에 무심해지고, 자신에게 예민해지기. 세속적 욕심에 무심해지고 타인과 나누는 삶에 예민해지기. 어쩌면 우리의 무심함의 상태는 우리에게 새로운 관조의 세계를 열어줄지 모르겠습니다. 무심에서 시작된 우리의 관조가 우리가 그동안 경험했던 세상을 넘어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새로운에피파니 순간들로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전례독서_ 1.6. 공현대축일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동방박사를 별빛으로 인도하시어 아기 예수를 경배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세상 모든 나라를 빛으로 인도하시어 인류가 하느님의 영광 안에서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이사 60:1-6

1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     야훼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
2     땅이 아직 어둠에 덮여,
.     민족들은 암흑에 싸여 있는데
.     야훼께서 너만은 비추신다.
.     위에서만은 영광을 나타내신다.
3    민족들이 너의 빛을 보고 모여들며
.     제왕들이 솟아오르는 너의 광채에 끌려오는구나.
4    머리를 들고 사방을 둘러보아라.
.     모두 너에게 모여오고 있지 않느냐?
.     너의 아들들이 데서 오고,
.     너의 딸들도 품에 안겨온다.
5    이것을 보는 얼굴에 웃음의 꽃이 피리라.
.     너의 가슴은 벅차 올라 부풀리라.
.     바다의 보물이 너에게로 흘러오고
.     민족의 재물이 너에게로 밀려오리라.
6     낙타떼가 너의 땅을 뒤덮고
.     미디안과 에바의 낙타들이 우글거리리라.
.     사람들이 세바에서 찾아오리라.
.     금과 향료를 싣고
.     야훼를 높이 찬양하며 찾아오리라.

 

 

 

 

성시_시편 72:1-7, 10-14

1    하느님, 임금에게
.     올바른 통치력을 주시고,
.     임금의 아들에게
.     정직한 마음을 주소서.
2    당신의 백성에게 공정한 판결을 내리고
.     약한 자의 권리를 세워 주게 하소서.
3    임금이 의를 이루면
.     높은 산들이 백성에게 평화를 안겨주고
.     언덕들이 정의를 가져다주리라.
4    백성을 억압하는 자들을 쳐부수고
.     약한 자들의 권리를 세워 주며
.     빈민들을 구하게 하소서.
5    해와 달이 닳도록
.     그의 왕조 오래오래
.     만세를 누리게 하소서.
6    풀밭에 내리는 단비처럼,
.     땅에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     은덕 만인에게 내리리니
7    정의가 꽃피는 그의 날에
.     달이 닳도록 평화 넘치리라.
10  다르싯과 섬나라 임금들이 조공을 바치고
.     세바와 스바의 왕들이 예물을 바치며,
11  만왕이 앞에 엎드리고
.     만백성이 그를 섬기게 되리라.
12  그는 하소연하는 빈민을 건져주고
.     도움 받을 없는 약자를 구해주며,
13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     가난에 시든 자들을 살려주며
14  억울한 자의 생명을 소중히 여겨
.     억압과 폭력에서 목숨 건져주리이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에페 3:1-12

1 그러므로 이방인 여러분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포로가 바울로는 하느님께 기도 드립니다. 2 하느님께서 나에게 은총을 베풀어 여러분의 일꾼으로 삼으신 것을 여러분도 알고 있습니다. 3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심오한 계획을 나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내가 앞서 간단히 적은 있으므로 4 그것을 읽으면 여러분은 내가 그리스도에 관한 심오한 계획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있을 것입니다. 5 지금은 하느님께서 성령의 힘을 빌려 심오한 계획을 당신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지만 전에는 지금처럼 인간에게 알려주시지 않았었습니다. 6 심오한 계획이란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면서 유다인들과 함께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몸의 지체가 되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함께 받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7 나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은총을 받고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에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8 나는 모든 성도들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아니 그보다도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은총을 주셔서 헤아릴 없이 풍요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게 하셨고 9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과거에 감추고 계시던 심오한 계획을 어떻게 실현하시는지를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알려주게 하셨습니다. 10 이렇게 되어 결국 하늘에 있는 권세의 천신들과 세력의 천신들까지도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무궁무진한 지혜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11 모든 것은 우리 그리스도 예수를 내세워 이루시려고 작정하신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입니다. 12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살게 되어 확신을 가지고 서슴지 않고 하느님께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복음서_마태 2:1-12

1 예수께서 헤로데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나셨는데 때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2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 말을 듣고 헤로데 왕이 당황한 것은 물론, 예루살렘이 온통 술렁거렸다. 4 왕은 백성의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모아놓고 그리스도께서 나실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5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예언서의 기록을 보면,

6   ‘유다의 베들레헴아,
.     너는 결코 유다의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     영도자가 너에게서 나리라.’
.     미가 5:1

하였습니다.”

7 때에 헤로데가 동방에서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정확히 알아보고 8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가서 아기를 찾아보시오. 나도 가서 경배할 터이니 찾거든 알려주시오.” 하고 부탁하였다. 9 왕의 부탁을 듣고 박사들은 길을 떠났다. 동방에서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마침내 아기가 있는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10 이를 보고 그들은 대단히 기뻐하면서 11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리고 보물 상자를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12 박사들은 꿈에 헤로데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나라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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