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의 문제들, 그 성서적 해법을 찾아서
채창완
[목 차]
들어가는 말
제 1 장 :
‘돈과 결혼’ ; 그 나눌 수 없는 인연
제 2 장 :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나 서로 해치고 죽이는 일이 없으리라’
맺는 말
참고문헌목록
[들어가는 말]
수 천년 전에 쓰여진 구약이 오늘 날과도 많은 관련이 있음은 새삼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이는 급변하는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성경 속에서 찾으려고 하는 학자들의 노력의 결과이며 또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사회 속에서 실천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의 결과이다. 그렇기에 아직까지도 성경은 인류가 발행한 책 중에서, 시대와 장소를 넘어, 또는 비판 혹은 찬사 속에서, 최대의 베스트셀러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성경, 특히 구약 속에는 종교적인 내용 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내용들이 다양하게 들어 있다. 과히 인류의 많은 문제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성경을 현대 사회의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일은 시대와 장소를 넘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며 우리 사회와 밀접한 문제의 해법을 찾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관심 있고, 또한 나와 가장 밀접한 문제들을 구약성서 속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많은 부분 아직 내가 학문적으로 아직 미흡하고 또한 나의 생각들도 더 검증을 받아야 하겠지만 성경과 현대 사회를 연결 시키는 연구의 작은 시발점이라는 대에 다소 위안을 느낀다. 물론 향후 나의 연구가 진척되어 학술적 의미를 지니는 단계로까지 발전 할 수 있을 수도 있겠지만 현재로서 이 글은 개인적인 소견을 밝히는 차원의 글이라는 한계를 분명히 한다. 아울러 이 글은 나의 신학과 수업인 ‘구약개론’의 학기말 고사에 해당하는 과제적 성격의 글임을 밝혀둔다.
이 글은 각각 다른 주제의 내용들로 구성된 총 3개의 장으로 구분되며, 제1장 ‘돈과 결혼’ ; 그 나눌 수 없는 인연, 제2장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나 서로 해치고 죽이는 일이 없으리라’ 그리고 제3장 ‘미술과 성경-시각적 예술은 과연 성경적인가?’ 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돈과 결혼의 문제를 ‘결혼지참금’차원에서 접근해 본 것이고, 제2장은 환경문제에 대한 성경적 해석 입장에 대해서, 그리고 제3장은 미학적인 문제인, 내 개인적인 문제와도 가장 밀접한, 미술의 성경적인 근거를 찾는 내용들로 각각 서술했다. 각 장은 각각 별개로 내용상 서로 연관이 없는 독립적인 장임을 밝힌다.
제 1 장
‘돈과 결혼’ ; 그 나눌 수 없는 인연
몇 년 전만해도 우리 사회에서 의사,변호사들에게 결혼을 하려면 신부는 상당한 결혼 지참금을 신랑측에 지불해야만 했다. 그러한 관습(?)은 현재에도 아직 그러하지만 IMF 이후에는 가장 안전한 직업이 결혼 대상 순위 1위라고 한다. 예를 들어 공무원이나 학교 선생님 등이다. 결혼 이상형이 ‘경제적’인 것에 따라 이렇게 달라지고 있다. 결혼의 조건은 사랑이다라는 것은 소설 속에나 있을 법한 얘기가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물론 예외도 있을 테지만, 사랑은 결혼의 첫째 조건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과거는 결혼 당사자들의 선택이 결혼 결정에 크게 반영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 치더라도 자기 의사표현이 자유로운 현대 사회에서 조차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무리 ‘자본’이 중요하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결혼의 첫째 기준이 된다는 것은 이해는 되지만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볼 문제이다.
또, 이번엔 외국의 사례를 보자. 다음은 한 잡지에서 인도의 여성 인권에 대해 다룬 기사인데 인도에서 결혼 지참금에 의한 여성 폭력 실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잘 보여주고 있다. 그 기사 중 일부를 실어본다.
‘가정폭력 문제가 특히 심각한 지역을 꼽으라면 인도가 빠지지 않을 것이다. 인도 정부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일어난 가정폭력 사건은 5만 건이 넘는다. 이는 단순히 보고된 건수만 집계한 것이므로 실제 상황은 더욱 심각할 것으로 추측된다. 한 여성인권단체가 북인도 알라하바드 지방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6%의 여성이 폭력을 가정생활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인다는 반응을 보였다. 또 폭력을 당한 여성의 65%는 학대의 원인이 결혼지참금 문제에 있다고 답했으며, 딸을 낳았다는 이유로 학대 당했다고 답한 여성도 43%나 되었다.’ (주간동아 제329호,2002,4,11)
위 기사에서 ‘딸을 낳은 이유로 학대 당한 사례’도 대부분 결혼지참금과 관련한 것으로 간주하면 이로 인한 폐해는 생각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딸이 성장하면 시집을 보내야 하는데 결국 딸을 가진 부모는 ‘결혼지참금’에 대한 부담을 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딸을 출산하는 것을 꺼리게 된다고 한다. 물질적으로 부유한 가정에서는 큰 문제가 없겠지만 가난한 가정에서는 딸을 갖는다는 것은 결국 심각한 재정난을 의미하는 것이다. 원래 결혼지참금 제도는 인도의 전통적 결혼풍습의 하나이다. 그러나 현재도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고, 정부는 형법 외에 지참금 금지법을 제정해 법률로 금지하고 있지만,[1]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한다.
이렇게 시대와 나라를 막론하고 시행되는 결혼지참금이나 납폐금[2] 문제는 결코 어제 오늘, 또한 몇몇 나라에서 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비슷한 경우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을까? 성경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이번 장에서는 고대 이스라엘에서의 결혼지참금 또는 납폐금 문제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먼저 결혼에 있어서 고대 이스라엘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살펴보면, 법적 지위에 관하여, 여성은 분명히 차별 받고 있었다. 여자는 결혼 전에는 아버지의 권위 아래, 결혼 후에는 남편의 권위 아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3] 그러나 이를 ‘모하르’(môhār,납폐금 또는 신부 값) 제도에 비춰서 보면 상반된 이견이 나올 수 있다.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신부가 신랑 집에 가지고가는 ‘결혼지참금’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4] 을 먼저 밝힌다.
필립스[5]는 ‘모하르’를 남자의 재정 손실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2가지를 근거로 주장하고 있다. 출애굽기22:16절은 남자가 딸을 데려가는 조건으로 ‘모하르’를 장인에게 지불해야 함을 보여주는데 이로서 신부 아버지는 어떤 식으로는 재정적인 손실을 입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출애굽기 21:22절을 예로 임신한 여자에게 해를 입혔을 때 그 남편에게 배상해야 한다는 것을 들었다.[6]
그러나 드보는 이와 반대로 출애굽기 22:16절을 단순히 처녀를 강간한 범죄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했다. ‘모하르’는 아내에 대하여 지불하는 구입 가격보다 처녀의 가족에 대한 ‘보상금’의 의미를 더 많이 지닌다고 했다.[7] 결혼 후 남편에게 아내에 대한 권리가 주어지나 그의 아내는 결코 그 남편의 물건이 아니다.[8] 이에 대한 지불방법으로 드보는 돈, 노동[9], 일정한 과제수행[10], 전승의 과제[11] 등을 들었다.
이러한 드보의 관점으로 본다면 모하르(môhār) 를 ‘신부 값’ 이라는 번역보다 ‘결혼 선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한다. 이 결혼 선물은 신랑이 신부의 아버지에게 준다. 결혼 선물의 금액은 신부 집의 지위에 따라 정해져 있었을 것이다.(삼상 18:23 이하 참조)[12] 드보는 창세기 31장15절에서 레아와 라헬이 그것을 ‘우리 돈’으로 묘사한 것을 근거로 모하르를 신부의 아버지에게 드렸지만 사실 딸의 소유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서두에서도 이미 밝혔지만, 고대 이스라엘에서 신부의 결혼 지참금 제도가 없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신부의 부모가 시집가는 딸에게 결혼 선물이나 여종을 줄 수는 있었던 것 같으나 이는 엄밀히 ‘결혼 지참금’은 아닌 것이다.[13] 이와 같이 남성 중심적인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결혼 시에 신부의 ‘결혼 지참금’이 없고 신랑의 ‘납폐금’이 있었다는 것은 신부나 신부 측 입장에서 보면 다행이 아닐 수 없는 것 같다. 남자는 경제적인 능력이 없으면 결혼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만약 여자를 강간을 하려 해도 이스라엘에서는 돈이 없으면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왜냐하면 율법 상 남자가 처녀를 범하면 반드시 ‘모하르’를 처가에 지불하고 그 여자와 결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하르’ 제도는, 내 소견에, 어느 정도 여성을 남성의 성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도 했을 것 같다. 물론 결혼 후에 여자가 남자의 소유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제한적인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법적 의존은 개인적 억압과 혼돈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14] 예를 들어 가정에서 어머니는 아버지와 똑 같이 자녀를 바로잡기 위한 법적 조치를 취할 수 있었고[15] 때론 남편의 허락 없이 아내가 독자적으로 재산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16]
그렇다면 고대 이스라엘에서 여자가 스스로 선택한, 자유연애에 의한 결혼과 같이, 남자와 자유롭게 결혼을 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 필립스는 가정의 법이 가장의 손에 달려 있으므로 딸의 결혼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주장한다.[17] 그러나 드보는 이와는 반대로, 비록 여자의 선택에 의한 연애 결혼은 드물지만, 어느 정도 연애 결혼이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젊은 남자는 자기의 짝사랑을 부모에게 알릴 수가 있었다(삿14:2). 또 남자는 자기 부모의 충고를 구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부모의 뜻에 반대하고 서도 자기 스스로 결혼을 결정할 수도 있었다.(창26:34 이하) 그리고 사울의 딸 미갈은 다윗에 대한 사랑에 빠져서 결국 결혼을 하게 됐다.(삼상18:20)[18]
아무튼 고대 이스라엘에서의 여자의 지위에 대해서는 다양한 각도로 얘기해야겠지만 ‘결혼지참금’이나 ‘납폐금’의 문제에 있어서는 신랑 측 보다는 신부 측의 권익을 더 보호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적어도 오늘날과 같이 여자들이 결혼지참금 때문에 고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자들에게 결혼 지참금까지 부과한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로 여겨 졌을 수도 있다. 오늘 날 같은 남성 중심 사회 속에서,물론 상당부분 여성의 권리가 많이 향상되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이것이 커다란 사회 문제로 남아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서의 예는 문화적으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끝으로 나는 최근에 한 잡지에서 다음과 같은 안타까운 기사를 읽은 것이 기억 난다.
‘최근 외국 남성의 현지처가 되는 이들은 “여성신용불량자”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도박 빚이나 신용카드 빚을 해결하지 못해 위장 결혼을 하고 있는 것으로 경찰 수사 결과 드러났다.’(일요시사, 2004,4,8)
결국 돈 때문에 외국인에게 ‘납폐금’을 받고 현지처가 되는 슬픈 사례이다. 돈 때문에 노예같이 자신을 맡길 수도 있는 여자들도 생겨났다. 돈만 주면 누구와 살든 상관없다는 식이다. 그렇게 해서 한 결혼이 과연 행복할까? 단지, 너무 심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그들에게 육체적인 노리개 감으로 취급되고 마는 것은 아닐까? 본처도 아닌 그냥 첩으로서 그들의 동거가 얼마동안이나 지속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모두 그들에게 달려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상적 결혼의 조건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글이 아니므로 나는 여기서 단지 성경적인 ‘결혼의 의미’를 생각나게 하는 성경 구절을 이 장의 끝에 인용하며 이번 장을 마치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과연 돈은 결혼의 가장 중요한 조건인가’라는 질문은 결코 답하기 쉽지가 않음을 느낀다. 그것은 ‘돈과 결혼; 그 나눌 수 없는 인연’은 인류의 역사를 통해 동,서양을 막론하고, 너무나 오랫동안 함께해 왔고, 또 , 시대와 지역을 넘어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 그 필요를 인정 받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더욱 둘은 안타깝게도 떨어지기 힘든 관계가 된 것 같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찌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창2:24,25)
제 2 장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나 서로 해치고 죽이는 일이 없으리라’[19]
-어느 날 지구의 오존층이 파괴되어 지구의 기온이 상승하면서 북반구의 빙하가 서서히 녹기 시작한다. 급기야 빙하가 녹으면서 이상 기온이 발생하여 한 여름에 우박이나 폭설이 내리게 되고 바닷물은 급격히 불어나 결국 세계의 각 도시들이 물에 잠기고 최후에는 급격한 기온 강하로 이 지구에 빙하시대가 시작된다. 이로 인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과 동식물들이 죽고 지구는 마침내 최후의 날을 맞이하게 된다.-
이는 최근에 개봉한 재난 영화 <투모로우>의 줄거리이다. 비록 영화이긴 하지만 환경 파괴로 생길 수 있는 상황을 이 영화는 너무 실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 마치 그러한 일이 가까운 미래에 생길 수 있을 것만 같은 두려움을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느끼게 한다. 이 영화가 미국 대선에 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사를 보니 사람들의 환경에 대한 관심은 예전보다 매우 높아진 것 같다.
그러나 얼마 전에 나는 한겨레의 기사 하나를 접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새만금 문제로 청와대까지 삼보일배를 했던 3명의 종교인 중 하나였던 ‘이희운 목사’에 대한 기사였다.[20] 원인은 타종교인들과 함께 불교적인 삼보일배를 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한국 교계로부터 비판을 받고 결국 견디다 못해 인도로 떠난다는 기사 내용이다. 이는 환경문제에 평소 관심이 많은 것 같이 말하던 한국교회의 본심을 들어내는 사건이었다. 환경을 보호하는데 종교적인 이유가 필요한 것일까?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을 사랑하자고 한쪽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한국교회가 실질적인 사회적 환경운동에는 뒷짐 만 지고 있으니 실로 마음이 아프다. 하나님을 잘 믿는(?) 한국 교회가 왜 이토록 환경에 대해서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일까? 그들은 자연에 대한 올바른 가치를 정말 알고 있는 것일까? 성경에서 말하는 환경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번 장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물론 많은 부분 부족할 것이지만, 찾아보는 것이 될 것이다. 이 내용의 대부분은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의 모임인 (사)창조과학협회의 글들과 이안 브래들리[21]의 저서 [녹색 신, God is green]을 주로 참고했다. 전자의 글들을 참조한 것은 복음주의 교회의 환경관을 살펴보기 위해서 였다. 난 그들의 환경에 대한 분석과 문제의식에는 개인적으로 충분히 동의하나 환경문제 해결 방법에 대한 그들의 보수주의적인 입장에는 반대한다. 그러나 이안 브래들리의 성서적인 환경관은 굉장히 설득력 있게 내게 다가왔으며 앞으로 신학적으로 충분히 연구가치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생태계(eco-system)라는 말은 근대부터 쓰인 용어로 독일의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이 1866년 처음 제창하였다.[22] Eco는 희랍어의 Oikos에서 유래한 것으로 집 또는 생활의 장을 의미한다. 즉 생태계라는 것은 '생활의 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생태계에서는 모든 생물이 환경과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과 자연은 더불어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과학은 마치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 같이 우리 인간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었다. 인류는 과학의 발전이라는 마차를 타고 끊임없는 산업 개발을 통한 자원의 착취를 일삼았다. 그 결과 자연과 단절된 도시가 더욱 발달하게 되었고 자연은 인간의 삶에서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되고, 자연은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것으로 인식이 되어 인간은 결국 자연을 마구 파괴하게 되었다. 그러나 산업과 과학이 발달해도 여전히 빈곤의 문제, 건강의 문제, 인간 소외의 문제, 환경의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급기야 인간은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서서히 과학과 인간의 이성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결국 인류는 앞으로 달려가던 길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본 순간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생태계의 파괴인 것이다.
인간은 이 지구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엔트로피(entropy)증가의 법칙’[23]을 무시하며 자연에 대하여 무분별한 착취를 일삼았으므로 오늘날과 같은 생태계의 파괴는 너무나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한쪽을 사용하면 다른 한쪽은 자연스럽게 고갈되거나 파괴된다는 것이 이 자연계의 법칙이다.[24]
그러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환경문제의 실태들을 몇 가지 살펴보고 넘어가자.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서해안 간척 사업의 경우, 이는 개발 논리와 경제 논리에 밀려 환경이 파괴되는 대표적 예가 될 것이다. 새만금 간척사업은 그 중 좋은 예가 될 텐데, 서해안의 간석지가 어떤 곳인지 우리는 먼저 알아야 한다. 밀물 때 잠기고 썰물 때 드러나는 간석지는 해일을 막아주고, 물을 정화시켜주고, 영양이 풍부한 퇴적물로 인하여 수많은 조간대(潮間帶) 생물들을 부양하기 때문에 해양생태계를 지탱하는 기본이 된다. 서해 바다 물고기의 90 퍼센트 정도가 간석지와 직, 간접으로 이 갯벌과 연관되어 있다. 근래에 서해안의 간석지가 거의 사라지면서 해일의 빈도가 커져서 간척하느라고 쌓았던 많은 수산물을 값비싼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다. 간척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간척 이전에 생산되던 수산물에 비하면 그 수익은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엄청난 돈과 수고를 들인 끝에 얻는 이익보다는 잃는 손해가 훨씬 큰 것이다. [25]
그렇다면 공기 오염은 어떠한가! 최근 공기 오염으로 인한 오존층의 파괴는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지난 10여년간 남극 상공의 오존층은 절반이, 칠레 남부의 상공은 1/4이, 북반구 지역은 3% 정도가 얇아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앞으로 오존을 파괴하는 원인 물질인 CFC(chloro-fluoro-carbon: 염화불화탄소)를 전혀 규제 않고 나간다면 2020년이면 북반구의 오존층이 평균 15%정도 파괴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26] 그 결과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아도 분명하다. 영화 ‘투모로우’에서 보여준 재앙이 정말 현실로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울러 수질오염과 토질오염의 심각성은 여기에 거론치 않아도 모두가 너무 잘 알 것이기에 그냥 넘어가자. 염두 해야 할 것은 현재 우리는 우리가 먹고 마시고 숨쉬는 모든 것을 통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그것을 우리가 못 느낄 뿐이다. 이는 생태계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직도 과학의 힘으로, 특히 유전 공학도 들은 이러한 환경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있다. 소위 오염물질을 분해하는 박테리아를 개발하면 가능하다고 한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 사실이라면 반드시 그때에는 새로운 문제가 또 등장하지 말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지구가 하나의 생명체로서 모든 생물들은 생존에 최적 조건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 변화한다는 현대 물리학의 ‘가이아 이론’[27]을 생각한다면 ‘유전적 박테리아’가 환경오염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은 큰 오산이 될 확률이 크다. 비록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우린 더 늦기 전에, 우리가 괴롭혀왔지만 오히려 많은 혜택을 얻고있고 또한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할, 정복할 대상이 아닌, 자연에 대하여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할 것이다.
이 장의 서두에서 언급한 것 같이 이러한 일에 앞장서야 할 한국 교회의 지금의 작태들은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한다. 세상 사람들이 환경을 파괴해도 제일 먼저 그것을 막아야 하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아닐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이 생태계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대도 그들은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면 다 해결될 것’ 같이 생각하며 넋을 놓고 있는듯하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의 모임인 ‘창조과학협회’의 어떤 사람의 글을 보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환경위기의 뿌리는 인간의 타락이며 타락한 인간의 본성 때문에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 궁극적인 해결책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그때는 모든 것이 태초의 샬롬의 상태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28]
그들은 생태파괴에 대해서는 모두 공감하고 있으면서 그 해결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실천을 내놓지도 않으면서 현재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환경운동을 하는 자들에게 말해야 하는 것은 궁극적인 해결책은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29]라며 환경운동가들의 활동을 비판하고 있다.
그들의 논리대로 하면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회복해 주신다’는 것이다. 즉 환경운동보다 열심히 ‘전도’하면 된다는 것이다. 역시 복음주의자들다운 결론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국민의 4분의1이 기독교인인데도 환경문제가 더 나아지고 있지 않은데 과연 국민 모두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가능해 지겠는가? 그들의 논리대로 말하건대, 그렇다면 우리나라를 넘어서 전 지구인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기독교의 역사가 이천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직도 많은 비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 아마 전지구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전에 우리는 오히려 환경의 종말을 먼저 맞이 할 지도 모른다.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논리대로 말하건대,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세상의 종말’일 수도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지구를 황폐하게 한 책임을 하나님 앞에서 피할 수 있다고 그들은 생각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결단코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믿어야 할 것이다.
1967년 미국의 잡지 사이언스(Science)지에 실린 “현대 생태계 위기의 역사적 근원”[30]이라는 논문에서 저자인 화이트(Lynn White) 교수가 기독교인들에게 한 비판을 우리는 가슴에 새겨야 한다. ‘오늘날 많은 환경문제의 근원이 기독교의 자연에 대한 오만에 있다’[31] 고한 그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을 가진다.[32] 그리스도인들이 자연파괴의 정당성(?)의 근거로 삼고있는 것이 바로 창세기 1장 26,28절[33]의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구절이다. 종교개혁 이후 근대 기독교는 이 구절을 말 그대로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뜻으로 이해해 온 것이 사실이다. 존 칼빈(John Calvin)은 그의 탁월한 창세기 주석에서 “만물이 창조된 목적은 인간이 살아나가는 데 필요한 것과 편리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이다”[34] 라고 썼다. 또한, 가톨릭 백과사전에 실린 존 헨리 뉴만(John Henry Newman)의 동물에 대한 한 글은 “우리는 동물을 우리의 필요와 이익 또는 만족을 위해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사용하고 파괴해도 된다”고 말하고 있다.[35] 그리고 이 글을 쓰기 위해 내가 살펴본 몇몇 주석들도 모두 공통적으로 이러한 ‘인간중심주의적’ 해석을 내리고 있었다.[36]
이러한 전통주의 교회의 해석에 대해 이안 브래들리는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한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 나타나는 하나님에 의해 인간에 위임된 임무의 의미가 인간의 자연착취를 정말로 허용하고 있는가, 아니며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우주적 관심이라는 중심적 테마를 자의적으로 왜곡한 결과인가? 나는 성경에서 이끌어낸 인간과 인간 외의 다른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전자의 견해가 성경의 원래 취지와는 모순된다고 믿는다. 이렇게 된 것은 “인간이기에 갖는 끊임없이 괴롭히는 죄”(besetting sin as human beings) 에 대한 지나친 강조의 결과인데, 이는 전적으로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려는 인간중심주의적 발상의 결과였다.’[37] 인간중심적인 생각이 이러한 자연파괴적인 성경 해석을 가능하게 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창세기 1장이 P문서(Priestly document)에서 유래된 것으로 J문서(Yahwehist source)에서 유래된 창세기 2장 보다 더 후대의 것으로 서로가 창조에 대한 입장이 다르게 표현됐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J문서에는 오히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이미지가 동반자 내지는 청지기 관계로 설명됐다는 것이다. 즉 ‘동물의 왕국이 창조 된 것은 사람이 외롭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아담이 에덴동산으로 이끌려 간 것은 동산을 경작하고 가꾸기 위해서 였다’[38]고 한다. 그런데 후에 나온 P문서인 창세기 1장에서 관점이 바꼈다는 것을 지적한다.[39] 그러나 그는 이 창세기 1장 26절,28절의 해석을 ‘인간의 다른 피조물 지배에 대한 위임’으로 해석하는 대신 ‘지배’(dominion)의 의미를 전체 문맥 속에서 해석할 것을 강조한다. ‘창세기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 핵심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아니라 온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이 명백하다. 즉 창조 이야기의 전반에 걸쳐 강조하려는 바는 창조주만이 통치하시며, 혼돈의 세력을 정복하고 우주가 존재할 수 있도록 붙들어주는 것은 하나님의 자존하는 창조력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그에게 속한다는 것을 확인시키려는 것이다. 즉 “이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모두 야훼의 것”(시편24:1) 임을 선언하는 것이다.’[40]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image)으로 지음 받은 우리는 자연의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대표자”(representaive)[41]로서의 권위를 갖는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매우 설득력을 갖는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그리고 세상을 지으시고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계속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는 하나님은 그의 지으신 이 생태계 전부의 ‘조화’로움에 만족해 하셨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모든 생물들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만든 법칙이다. 십계명의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은 결국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 까지 확대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관계를 설정하시고 그 관계 속에서 역사하신다.[42] 또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 하라’는 명령을 인간과 모든 생물들에게 내리셨다.[43] 인간은 하나님께 에덴동산을 돌볼 의무를 부여 받았다. 창세기 2장을 보면 이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각종 동물들과 함께 조화롭게 살았음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아마 이사야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된 세상이 바로 이러한 ‘에덴동산’일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65:25)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의 메시지는 분명해진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에 대한 권리는 ‘세상 피조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들을 잘 보호하고 관리하라’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이 서로 파괴하고 상하게 하는 일이 없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우리는 만들어가야 한다. 이사야가 꿈꿨던 세상을 우리가 꿈꾸지 말란 법은 없다.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나 서로 해치고 죽이는 일이 없으리라…’
[맺는 말]
이와 같이 성경은 우리의 사회적 공동의 문제에서부터 한 개인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확대해석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러한 해석에는 역사적이고 학문적인 검증이 반드시 따라야겠지만 우리가 성경에서 현대의 당면 과제들을 해결할 실마리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그러한 선물이 오직 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만 머물고 다른 비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확대되지 않는 다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현대 사회 속에서 우리 인류가 당면하는 문제들은 과거와 달리 이제 지역과 문화를 넘어서 전세계적인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이는, 특히 환경문제의 경우, 한 지역의 문제가 곧 전 세계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한 나라의 문제가 그 나라 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든 인류의 문제이며, 또한 한 개인의 문제는 그 한 개인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인식해야 할 때이다. 자고로 세계는 이런 ‘전지구화’의 과정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결코 고립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나라와 나라가, 민족과 민족이, 종교와 종교가 서로 이러한 공동의 관심사에 대해 마음을 열고 대화하며 서로 문제 해결의 협력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기독교도 이러한 문제 해결에 그 동안의 소극적인 자세를 버리고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다양한 분야들과 접촉하며, 기아, 환경, 여성, 인권 등과 같은 현대의 당면 문제들에 대처해 나가고 또한 갈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예언자적인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1] 주간동아 제329호,2002,4,11
[2] 고대 근동 지방에서 결혼하는 신랑이 신부측에 일정량의 돈을 지불하는 관습. 이스라엘에서는 이를 모하르(môhār,신부 값) 라고도 부른다. (창 34:12, 출22:16, 삼상18:25 참조)
[3] 그레이스 I. 엠머슨, 고대 이스라엘의 여성, [R.E.클레멘츠 편저,고대이스라엘의 세계,황승일 역,은성출판사, 서울, 1996, p.514]
[4] 롤랑 드보, 구약시대의 생활풍속, 이양구 옮김, 서울, 2002, p.p. 65~66
[5] Phillips, A.C., 1973, ‘Some Aspects of Family Law in Pre-exilic
[6] 그레이스 I. 엠머슨, 고대 이스라엘의 여성, [R.E.클레멘츠 편저,고대이스라엘의 세계,황승일 역,은성출판사, 서울, 1996, p.514]
[7] 롤랑 드보, 구약시대의 생활풍속, 이양구 옮김, 서울, 2002, p.63
[8] Ibid. p.63
[9] 야곱이 라헬과 레아를 얻기 위해 라반의 집에서 노동으로 봉사한 일(창29:15~30)
[10] 구약성서, 사무엘상18장23절 참조
[11] 여호수아 15장16절, 사사기 1장12절 참조
[12] 그레이스 I. 엠머슨, 고대 이스라엘의 여성, [R.E.클레멘츠 편저,고대이스라엘의 세계,황승일 역,은성출판사, 서울, 1996, p.p.517~518]
[13] 창세기 24:59, 29:24,29 참조
[14] 그레이스 I. 엠머슨, 고대 이스라엘의 여성, [R.E.클레멘츠 편저,고대이스라엘의 세계,황승일 역,은성출판사, 서울, 1996, p.515]
[15] 신명기 21:18~21 참조
[16] 사무엘상 25장,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남편의 허락없이 다윗에게 음식을 베푼 일을 참조
[17] 그레이스 I. 엠머슨, 고대 이스라엘의 여성, [R.E.클레멘츠 편저,고대이스라엘의 세계,황승일 역,은성출판사, 서울, 1996, p.519]
[18] 롤랑 드보, 구약시대의 생활풍속, 이양구 옮김, 서울, 2002, p.70
[19] 공동번역성서, 이사야 65장 25절 참조
[20] 한겨례 2004,6,9 < ‘왕따’ 이희운 목사 한국 떠난다> 기사 참조
[21] Ian Bradley: 스코틀랜드의 목사이자 자유기고 저널리스트인 그는 기독교 신앙이 근원적으로 녹색적(환경보호적)이고 성경의 복음이 모든 피조물의 구속과 완성을 약속하고 있으며 기독교인은 위험에 처한 지구를 살려내고 자연환경을 보존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22] JPIC 제 2차 초안 문서, 정의, 평화, 창조 질서의 보전 세계대회 자료집, 기독교 사회문제 연구원, 1990, p.58
[23] 우리는 살아가기 위하여 한정된 에너지 자원 중 한 형태의 에너지를 다른 형태로 변환시켜야 하는데(예 : 열이 운동에너지로 바뀌는 과정에서 손실된 에너지), 이 과정에서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하고 사용 가능한 에너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감소한다. 또, 이 법칙은 한 곳에 질서를 창출하고자 하면, 다른 한곳에 더 큰 무질서를 낳는다는 충격적인 법칙이다. 따라서, 과학기술의 무한한 발전은 비례적으로 엔트로피의 무한한 증가를 초래한다. 우리는 산업의 발달과 기계화로 인한 대량 생산과정에서 더 많은 엔트로피를 증대시킨다 (강준원, 환경문제의 성경적 이해, 창조지)
[24] 열역학제1법칙과 제2법칙에 의해 (강준원, 환경문제의 성경적 이해, 창조지)
[25] 김정욱, 성경과 환경, 창조지
[26] Ibid.
[27] Gaia : James Lovelock이 1979년 동명의 책에서 주장한 이론. 지구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이며 그 위에 살고 있는 생물들의 생존에 최적 조건을 유지해주기 위해 언제나 자기 조절을하며 스스로 변화한다는 이론
[28] 김성현, 성경적 환경관, 창조지
[29] Ibid.
[30] ‘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 crisis’
[31] “기독교, 특히 서구라파의 기독교는 세계종교 중 가장 인간중심주의적이다. 고대 이방 종교나 동양 종교와는 극단적으로 대비되게 서유럽 기독교는 인간과 자연의 이원론을 정립하였을 뿐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적절한 목적을 위해 자연을 착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한다.”[ Science, vol.155, no.3767 (10March 1967), pp. 1204~7
[32] 이안 브래들리, 녹색의 신(God is green), 이상훈,배규식 역, 도서출판 따님, 서울, 1989, pp. 14,15
[33]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사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중략…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개역성경, 창세기 1장 26~28절)
[34] J. Calvin, Commentaries on the First Book of Moses, called Genesis, tr.J.King (
[35] C. Birch and J.B.Cobb, The Liberation of Life : from cell to community (
[36] 대표적으로 박윤선의 성경주석-창세기,출애굽기 (영음사, 서울, 1961 )를 보라
[37] 이안 브래들리, 녹색의 신(God is green), 이상훈,배규식 역, 도서출판 따님, 서울, 1989, p.33
[38] 창세기 2장 15절 참조
[39] 이안 브래들리, 녹색의 신(God is green), 이상훈,배규식 역, 도서출판 따님, 서울, 1989, pp. 34,35
[40] 이안 브래들리, 녹색의 신(God is green), 이상훈,배규식 역, 도서출판 따님, 서울, 1989, p. 36
[41] Ibid. p. 37
[42] 출애굽기 3장 ; 19장,20장 참조
[43] 창세기 1장 22,28 참조
[44] 일정한 시점에서 본 물체와 공간을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이 멀고 가까움을 느낄 수 있도록 평면 위에 표현하는 방법[한컴표준국어사전]
[45]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헤겔 미학 I, 두행숙 역,나남출판, 서울, 1996, p.67
[46] Ibid. p.67,68
[47] Ibid, p.89~90
[48] 예술에 있어서 ‘주체’와 ‘객체’가 문제는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역사를 통해 너무도 많은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때론 작가가 ‘주체’이고 작품이 ‘객체’일 수도 있고, 때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 또 ‘주체’가 관자(觀子)일 수도 있고 ‘객체’가 없어지고 작가가 ‘타자’로서 남을 수도 있다. 이러한 것은 행위 미술과 설치 미술에서 두드러진다.
[49] 17, 18세기의 유럽의 바로크, 로코코 미술
[50] 이상호, 창세기, 성광문화사, 서울, 1975
[51] Gerhard von Rad, Old Testament Library ‘Genesis’, tr.John H. Marks form German (Vandenhoeck & Ruprecht, Göttingen, 1972) p.51
[52] Ibid.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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