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이스라엘의 정치제도 변천
채창완
아마 이스라엘은 작은 씨족 공동체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드 괴에 의하면 이 씨족(clan)은 고대 이스라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회 단위였고 정치적 조직 단위였다.[1] 이러한 씨족 집단은 보통 외부의 압력에 항거하기 위해 구성된다[2]. 이 공동체는 유목민이었을 것이고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방과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었던 여느 씨족공동체와 같이 씨족의 족장이 씨족의 운명을 결정 짓는 임무를 맡았을 것이다. 이 씨족의 대표는 장자에 의해 계승된 가장 연장자일 것이다. 성서에서 이스라엘의 족장은 아브라함,이삭,야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씨족공동체는 인구가 확장됨에 따라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고 모세와 여호수아로 이어지는 신정정치가 성서에서 등장한다. 물론 성서의 족장 설화와 같이 모세와 여호수아에 대한 근거도 성서와 몇몇 고대 문서들에 겨우 의존하고 있을 따름이지만 성서에 언급된 정치제도의 한 형태로 충분히 언급할 만하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등장하는 시기는 성서에서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의 시기로서 이미 이스라엘은 씨족공동체에서 부족 공동체로 넘어가기 전단계의 시기였다. 이 시기는 하나님과의 계약 공동체의 성격을 띠면서 신정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는 정치적, 종교적인 강력한 카리스마를 요하는 지도자를 필요로 했다. 이 지도자들이 바로 모세와 여호수아였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권위를 계승해서 신정정치의 우두머리가 되었지만 모세의 경우는, 성서에 근거하면, 아주 우연히 하나님으로부터 민족을 이끌 권위를 부여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3]. 이러한 의미에서 이들은 부족장이나 왕이 아니었다. 이들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리더십으로 이들의 권위는, 물론 성서에 이들에게 반란한 사건들이 기록돼 있지만, 하나님에 비견될 정도로 절대적인 것이었다.[4] 그러나 부족 공동체의 우두머리는 ‘하나님’이고 모세와 여호수아는 그의 대리자였다. 이들은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제사장으로서 종교적 제의의 의무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종교를 공동체의 중심에 두는 이런 신정정치는 하나님의 계시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이 리더쉽은 세습될 수 없는 것이었고 오직 하나님에 의해 지명된 자이어야만 했다. 그러나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를 항상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권력 공백의 위험이 늘 존재했다. 따라서 이 신정정치는 강력한 국가 체계를 만들기에는 너무 약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던 그 초기에는 열 두 종족들의 연방 체제였다. 이러한 근친 종족은 당시 고대 근동에 흔한 체제였다. 이 열 두 종족은 민족적인 단일체인 지파공동체를 형성했다. 고트발트는 이것을 ‘지파 동맹 혹은 연합’이라고 불렀다.[5] 그들은 동일한 야훼 하나님을 인정하는 민족 공동체였다. 이 동맹은 ‘지파’, ‘씨족’, ‘가족’이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자치적이고 분절(分節)된 집단으로 더 나뉘어진다. 고트발트에 의하면 이 지파는 각 50개 정도의 가족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그들은 공동의 율례와 법도를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관습법이나 기록된 법률의 위반 사항을 판결하기 위하여 다같이 집합하였다. 때론 사건의 중요성에 따라 온 백성이 집합하기도 했다. 이 지파 체제에는 중앙 정부도 도성도 행정 기구도 관료 제도도 없었다.[6] 오직 언약의 상벌 규정을 통하여 지파간의 평화는 유지되었고 단합된 행동이 확보되었다. 각 지파는 지파를 대표하는 우두머리인 족장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공동의 지도자를 세운 것은 아니다. 씨족의 장로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전통적인 권위에 의해 씨족 내의 분쟁해결이나 재판권을 어느 정도 행사할 수 있었다. 지파 동맹은 언약궤가 있었던 실로를 구심점으로 했다.[7] 이 지파 동맹이 운용된 것은 야훼의 부르심을 받은 사사들에 의해서 였다. 사사기에 언급된 사사들은 어느 씨족이나 종족을 결정적으로 위험한 상황에서 구출한 자들이다. 이들은 상비군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지파 공동체의 위기 시에만 각 지파들로부터 징용된 군사를 가질 수 있었다. 사사의 부름이 있을 때 각 씨족마다 군사를 제공할 의무가 있었다. 이 의무는 야훼의 성전에 대한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8] 사사들은 지속적으로 백성을 다스린 것은 아니다. 예외적인 경우에서만 그들의 구출 행위가 많은 종족들의 집단에 까지 확대된다. 예를 들면 기드온과 드보라, 바락의 경우에 그렇다.[9] 그러나 그들이 군사적 행동이외에 어떠한 통치행위를 수행했는지에 대해선 우리에게 알려진 바가 없다.
이 지파 공동체는 어느 정도 각 지파간에 그리고 각 구성원들 간에 평등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파간의 힘의 균형은 어느 정도 유지될 수 있었다. 사사들은 기드온과 같이 백성들의 항구적인 통치 행위의 요구를 명백히 거절했다. 그러나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은 70인의 형제들을 죽이고 세겜에서 3년 동안 이스라엘 공동체를 다스렸다.[10] 여기서 원시왕정의 모습을 보게 된다. 사사들은 하나님의 계시 후에 사사가 되는데 입다의 경우는 그 반대다.[11] 그는 백성이 원해 사사가 된 후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군대장관으로서 군사지도력의 리더십을 보여줬다. 늘어나는 외세의 침략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사실 이러한 임시적인 리더십은 언제나 불안정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백성들은 강력한 리더십의 영속성이 보장된 왕정을 요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마지막 사사로 등장하는 사무엘은 사사의 강력한 리더십의 표본이었다. 모세와 여호수아와 같은 제사장으로서 또한 재사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강력한 권력은 그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에게 세습되기도 했지만 그들의 공정치 못함으로 이스라엘 장로들에 의해 탄핵 된다.[12]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외세의 침입, 백성들의 다양한 요구를 담아내고 문제를 해결할 강력한 체제가 이스라엘 공동체에 요구되었다. 자고로 사사기까지 유지되어 오던 ‘신정정치’는 왕정정치로 넘어갈 위기에 놓인 것이다. 백성들은 강력한 왕정정치를 원했고 결국 종족동맹은 결말을 맞이했다.
이스라엘의 종족들이 연방제도를 형성하기는 하였더라도 여전히 확고한 정치세력을 구성하지 못하고 있을 때도 이스라엘 주변에 부족으로 구성된 여러 왕국들이 형성해 있었다.[13] 이스라엘은 지파공동체에서 갑자기 왕정체제로 바뀌면서 ‘사울’이 초대 왕이 되었다. 왕정의 도입은 신정정치의 종말이며 대신 세금,부역,병역의 의무가 백성에게 주어지는 왕정정치의 시작이었다. 왕정 도입으로 인해 일어난 군사,경제,정치,종교적 세력의 중앙 집중화는 사회 전체의 여러 집단들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변화와 긴장을 초래한다.[14] 드보는 두 가지 전승을 근거로 왕정정치의 시작을 말한다. 하나는 왕조의 제도가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것이고 하나님은 사울을 이스라엘의 해방자로 선택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백성 자체가 ‘다른 민족들과 같이’되기 위하여 왕을 요청했다는 것이다.[15] 두 가지 주장 모두 성서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이 왕조의 발전은 외부로부터의 전쟁의 위협을 통해 가속화되었다.[16] 외세의 침입에 일사불란하게 대처하기 위한 목적이 이 왕정에서 실현됐다. 사울은 초기에 사사들의 일을 답습하는 정도의 단계에 머물다 결국 암몬 족속을 물리친 후 백성들은 그를 왕으로 선포한다.[17] 이스라엘 지파동맹이 민족 국가로 바뀐 것이다. 왕정 국가가 된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 국가들의 체제를 모방하기 시작한다. 이는 새로운 정치 형태에 필요한 행정 체제를 갖추기 위해서 였다. 초기 이스라엘 왕정에서는 왕조의 원칙이 통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18] 왕은 세습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기름부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왕은 소집군대와 용병군대를 소유했고 장교단을 지휘 하에 두었다. 사울의 권위는 군사적인 명령의 한계에 머문다. 아직 중앙 정부가 성립되지 않았다. 당시에도 각 씨족은 여전히 독립적인 자치운영을 하였다.[19]
왕정정치가 시작되었어도 이스라엘 각 지파 공동체는 여전히 하나로 통합되기 않았다. 유다 지파는 맨 처음부터 자기 자신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20] 유다 지파는 역사 속에서 다른 지파들의 공동 생활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은 오래 전부터 예루살렘과 게셀과 아얄론을 경계로 북부 지파와 남 유다 지파로 커다란 분열된 세력권을 형성해 온 것이다. 유다 지파와 북쪽의 지파들이 접근하게 된 일은 사울 시대의 일이었다.[21] 사울이 유다지파와 가까운 곳의 베냐민 출신이었다는 것이 그 접근을 용이하게 했다. 사울이 사망하자마자 이러한 분열은 첨예화됐다. 곧 유다 지파는 다윗을 다른 지파들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각각 왕으로 세운 사건이다.[22] 이러한 분열은 다윗의 통치권이 사울과는 전혀 다른 사항에서 전개됐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윗은 통치 초기에 소집 군대 보다도 용병들을 더 신뢰했다는 데서도 이 두 세력의 대립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지파와 유다 지파는 서로에게 절대로 흡수 될 수 없었다. 성서 기자는 그래서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와 유다를 통치했다’라는 표현으로 이 두 체제를 염두에 두고 성서를 기록한 것 같다.[23] 그러므로 다윗과 솔로몬의 왕국 시대는 군합국(君合國, 한 군주 밑에 둘 이상의 독립국이 통치되는)의 정부 형태였을 것이라는 주장들은 설득력을 얻는다.[24] 또한 다윗과 솔로몬의 국가체제는 결코 순수한 민족적인 구조를 더 이상 지니고 있지 않다. 많은 부족과 나라들을 정복하며 어느덧 이스라엘에도 민족 국가라는 개념보다는 강대국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이러한 강대국의 개념은 이집트로부터 배운 것일 것이고 솔로몬은 이 개념을 완성시킨다.[25]
왕정으로 인한 권력의 개인 독점은 이스라엘 종교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성서 기자들은 이러한 왕정제도를 선호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왕들을 통치능력으로 판단하여 기록하지 않고 왕들의 하나님 신앙의 여부에 따라 성서를 기록했다. 신정정치에서는 어느 정도 유지될 수 있었던 종교와 정치의 결합이 왕정정치에서는 그 결속력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왕정 정치의 폐단은 점점 늘어갔다. 과도한 세금과 부역, 병역의 의무는 백성들의 새로운 고통이 되고 솔로몬 통치기간 동안의 솔로몬의 사치(?)는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역과 세금으로 이어지고 왕정의 폐해는 극에 달하기도 했다.
결국 솔로몬이 죽자 이 군합국은 유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이 두 왕국의 국가 개념은 서로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사울 시대의 카리스마적인 사고가 다시 살아났다.[26] 예언자에 의한 기름부음에 의해 왕이 선출된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왕들을 선택하고 폐위시키는 분은 야훼이다. 오므리 왕조 이전까지 북이스라엘에서는,남유다와 같이, 세습에 의한 왕위 계승은 없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의 왕권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자주 왕권이 바뀌면서 온전한 왕조를 이루지 못했다. 결국 그 왕국은 앗수르에게 정복당하고 만다.
남유다의 경우는 북이스라엘과 사정이 다르다. 여기서는 처음부터 왕조의 원리가 받아들여졌다.[27] 예언자 나단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 즉 다윗의 왕조에 의한 왕국의 건설에 대한 약속,가 유다 백성들에게 설득력을 얻은 것이다. 남유다에서는 어느 정도 부족 공동체의 신정정치의 틀을 유지할 수 있어 제사장들의 활동도 두드러지나 이들도 왕권을 침범하지는 못했다. 이들은 왕에게 고용된 제사장들로 ,왕에게 조언을 할 수는 있었지만, 이들의 활동영역은 왕을 보좌하는 역할로 제한된다. 하나님의 약속은 개인에서 혈통에게 임한다. 왕조 계승은 이제 법에 의해 보호를 받게 된다. 솔로몬을 지명한 자는 이제 하나님이 아니라 다윗이 된다. 남유다의 역사에서 몇 번의 혁명이 있었지만 다윗의 왕조는 유다 민족의 충성에 의해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각각의 독립된 체계를 갖춘 국가였고 다른 나라들도 그렇게 인식을 했다. 그러나 단일 민족으로서의 그들의 정체성은 유지되었다. 공동의 민족 전승과 종교를 지닌 단일 민족이었다. 이들을 연결시킨 띠는 바로 종교였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가 숭배되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여러 가지의 정치적인 원인에 의하여 유다라는 이름과 자주 대조되고 북왕국을 가리키는 특수한 표현으로 부각되지만 그 이름은 언제나 그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를 보존하고 있다.[28] 결국 열 두 지파의 연합이라는 종교적인 이상은 이 분열왕국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남아 있고 이는 통일에 대한 기대로 나타난다.
B.C.722년 200년 동안 유지해온 북이스라엘 왕국이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하고 그 후 바벨론의 예루살렘 함락으로 B.C.586년 남유다 왕국도 무너진다. 유다는 이제 강대국, 즉 처음에는 바벨론의 일부로, 그 다음은 페르시아 제국과 헬라 제국의 일부로 전락한다. 더 이상 국가 개념의 정치 체제는 이스라엘에서 찾아볼 수가 없게 된다. 고대의 씨족 공동체의 전통대로 장로들의 각 공동체의 대표성을 갖게 된다. 페르시아 제국의 포용정책으로 종교적 자유가 보장되고 이스라엘 공동체는 제사장들의 지도권 아래 결속했다. 이른바 종교와 정치의 일치가 이루어진 제정일치(祭政一致) 정부 형태를 띤다. 여기서 다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29]
다양한 정치 체제를 경험하는 동안에도 이스라엘에는 ‘국가’에 대한 사고가 한 번도 없었다.[30] 부족 공동체, 왕정 정치, 남북 왕국, 포로기를 거치면서 이스라엘의 다양한 정치 형태들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주목할 것은, 드보가 말한바, 포로기 후기의 이스라엘 공동체가 어떻게 힘들이지 않고 쉽게 왕정시대 이전의 생활형태로 되돌아 갈 수 있었는가 이다.[31] 물론 정치적 체제는 강대국의 지배 하에 있었지만 이스라엘 공동체의 실제적인 지배권은 종교적 지도자들인 제사장들에게 있었다. 페르시아와 헬라 제국은 조세 징수에 집중했으므로 이스라엘 공동체는 어느 정도 자치권을 가질 수 있었다. 포로기 후기에 작성된 다양한 성서 기록들에서 우리는 왕정제도에 대한 이스라엘의 우려가 삽입되는 것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포로기 후기 다시 초기 이스라엘 공동체로 돌아가면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다. 이스라엘은 야훼의 백성이요, 그 분 이외에 다른 아무도 주인이 될 수 없다 라고. 이스라엘은 자기 역사의 맨 처음부터 맨 끝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종교적인 공동체로 존속한다.[32]
롤랑 드보,,구약시대의 생활 풍속, 이양구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2, 서울
R.E.클레멘츠 편저, 고대 이스라엘의 세계, 황승일 번역, 은성, 1996, 서울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 역사, 박문재 옮김,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04, 경기
[1] R.E.클레멘츠 편저, 고대 이스라엘의 세계, 황승일 번역, 은성, 1996, 서울 p.142
[2] Ibid. p.143
[3] 구약성서, 출애굽기 3장 참조
[4] 구약성서, 출애굽기 4장16절 참조
[5] R.E.클레멘츠 편저, 고대 이스라엘의 세계, 황승일 번역, 은성, 1996, 서울 p.144
[6]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 역사, 박문재 옮김,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04, 경기, p.221
[7]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 역사, 박문재 옮김,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04, 경기, p.221
[8] Ibid, p.222
[9] 롤랑 드보,,구약시대의 생활 풍속, 이양구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2, 서울, p.188
[10] 구약성서, 사사기 6~8장 참조
[11] 구약성서, 사사기 11장 참조
[12] 구약성서, 사무엘상 8장 참조
[13] 롤랑 드보,,구약시대의 생활 풍속, 이양구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2, 서울, p.188
[14] R.E.클레멘츠 편저, 고대 이스라엘의 세계, 황승일 번역, 은성, 1996, 서울 p.173
[15] 롤랑 드보,,구약시대의 생활 풍속, 이양구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2, 서울, p.189
[16] Ibid. p.189
[17] Ibid. p.189
[18] 롤랑 드보,,구약시대의 생활 풍속, 이양구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2, 서울, p.190
[19] Ibid. p.190
[20] Ibid. p.191
[21] Ibid. p.192
[22] 구약성서, 사무엘하 2장 6절~11절 참조
[23] 롤랑 드보,,구약시대의 생활 풍속, 이양구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2, 서울, p.192
[24] Ibid. p.193
[25] Ibid. p.194
[26] 롤랑 드보,,구약시대의 생활 풍속, 이양구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2, 서울, p.194
[27] Ibid. p.195
[28] Ibid. p.196
[29] Ibid. p.197
[30] Ibid. p.198
[31] Ibid. p.199
[32]롤랑 드보,,구약시대의 생활 풍속, 이양구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2, 서울,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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