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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기독교의 성립; 그 조각난 퍼즐을 맞추다

James Chae 2011. 9. 4. 17:35

 


 

초대기독교의 성립; 그 조각난 퍼즐(puzzle)을 맞추다

 

루돌프 트만의 '서양고대종교사상사'를 읽고

 

 

 채창완

 

 

 

불트만의 책을 접한 것은 내게 행운이었다. 기독교를 서구 사상적 체계 속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단순한 믿음으로 성경을 보아왔지만 다양한 조각들을 연결시켜서 생각해 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불트만은 초대 기독교의 형성을 신약성서 뿐만 아니라 구약, 헬라 철학과 고전들, 고대 근동의 고전들을 통해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하고 있다. 마치 조각난 퍼즐을 하나씩 맞추어 보는 것과 같은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이러한 흥미는- 그의 글의 난해성 때문에 글을 읽는 동안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 수고를 필요로 했지만- 책을 읽는 동안 지루함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줬다. 책을 읽어 가면서 다양한 개념들이 한 조각씩 모여져 결국 초대 기독교의 윤곽이 서서히 내 개념 속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도 이 책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여기에 이 책의 내용들을 간단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불트만은 저 헤겔의 전제-부분의 의미는 전체 속에서 결정된다-를 충실히 그의 저서에서 실천했다. 그는 초대 기독교의 형성을 역사적 연관성들의 범위 안에서 설명했다. 고대 유대교와 헬레니즘 문화 그리고 고대 근동의 종교와 문화 속에서 기독교의 형성을 논하고 결국 지나간 역사 현상들을 인간의 실존이해의 가능성에서 해석한다. 그는 기독교에서의 인간 실존의 이해를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먼저 구약성서에서 하나님과 인간 실존의 문제를 구약성서와 유대교 문헌을 예를 들어 설명하며 어떻게 유대교에서 기독교가 나올 수 있었는지를 설명한다. 또한 헬라 철학과 영지주의가 어떻게 초대 기독교에 영향을 주었는지도 설명한다.

 

 

[1]

 

이스라엘 초기에 야훼는 종족신이었다. 이때는 야훼를 유일신론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단일신론적으로 생각했다. 이스라엘의 국가가 형성됨으로써 세계를 보는 세계관의 변화와 함께 민족의 유일성을 보존해줄 유일신론이 등장했다. 하나님의 지존성과 인간에 대한 돌보심이 결국 하나님과 민족의 계약에 의해 야훼신앙은 민족 종교로 변했다. 계약은 계약 당사자 간의 의무로 결정되는 관계이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호할 의무가 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길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 계약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지켜지기 어려운 것이었고 제사의 계약에 의해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시기를 겪으며 이스라엘 신앙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예언자들의 주장은 이스라엘 국가 이전의 순수한 족장시대의 야훼신앙으로 돌아갈 것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포로기를 지나면서 이스라엘 신앙은 고대 이란 종교의 영향으로 영과 육, 부활과 죽음의 개념을 가지게 되며 유대교의 기틀을 마련해 간다. 고대 이스라엘 종교에서의 인간의 존재는 민족 속에서 이해되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한 민족의 하나님이었다. 이스라엘에서 인간의 영과 육은 헬라 철학의 이원론적인 대립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영혼 불멸 사상과 부활 사상은 모두 고대 이란 종교의 영향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죽은 자들은 그냥 땅 속에서 잠을 자는 것으로 이해됐다. 인간의 의는 바로 하나님 앞과 인간 앞에서의 단정한 행실이다. 악은 이러한 선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 의지로 파악됐다. 결국 죄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고 이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의지 임으로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 이러한 죄의 제거는 인간 독자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이고 민족공동체와 하나님께 달린 일이다. 죄는 속죄를 필요로 했으므로 제의에 의한 죄사함이 주어졌다.

 

이러한 죄사함의 성전 제의는 회당을 중심으로 한 제의 없는 하나님 예배 중심으로 바뀐다. 유대교는 성서와 역사를 결합시키면서 강한 역사의식 및 선민의식을 갖게 됐다. 그러나 유대교의 역사에 대한 성실은 오직 과거에 집중되었다. 서기관 세력이 제사장 세력을 대신하게 되며 랍비들은 옛 율법을 가능한 현재에 적용하고 현재에 사용할 수 있는 규정으로 만드는 작업을 했다. 여기서 유대교의 율법성이 등장한다. 이 율법을 해석하는 방법으로 서기관 세력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로 나뉘게 된다. 전자는 해석과 추론에 의해 옛 형법의 엄격성을 완화하며 구전전승을 율법과 같은 권위에 올려 놓았고, 후자는 오직 오경에 기록된 율법 만을 인정하고 부활론을 거부했다. 이들은 보수주의자, 정통주의자들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리새파가 자유주의자들이었으나 생활에 대한 속박은 바리새파가 더 심했다. 엣세네파는 이들과 다른 금욕적이고 엄격한 규율을 추구한 수도사적 집단이었다. 이들은 종말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과의 법적 관계 속에서 피안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보응을 구하는 고난의 신학이 등장했고, 또 구원에 대한 불확실성에 의해 죄의식과 회개의 개념이 등장한다. 이스라엘 신앙은 원래 순종의 성실이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복종이며 하나님의 보상에 대한 기대였다. 이 신앙이 차츰 응보 및 공로 신앙으로 변한 것이다. 신앙은 일과 평행한 것이 되고 바로 여기서 공로개념이 형성된 것이다.

 

예수도 이러한 유대교의 사상 영역과 개념 세계 안에서 활동했다. 예수에 의해 하나님의 초월성이 다시 인간과 가까운 관계로 회복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개념이 생겨난다. 예수에 와서 심판은 민족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개인이 책임지는 개인의 심판이 된다.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세계를 지배하고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율법책을 통해 중재 됨으로 하나님은 비역사화되어 인식된다. 이스라엘민족은 선민으로서 세계에서부터 이탈(고립?)된 비역사화를 가진다. 예수의 경우는 미래의 심판에서 해후 되는 하나님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그의 요구와 은사에서 이미 인간을 만나는, 항상 오는 이라는 의미의 피안적 존재로서의 비세계화이다. 또 인간은 모든 세계적 안전성에서, 모든 지배할 수 있는 것에서 벗어나서 자신을 만나는 이웃과 하나님의 요구 앞에 세워진 자로서 비세계화된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바빌론과 이란 신화의 영향으로 우주론적 종말론이 발전됐다. 하나님이 지금 고통 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영화롭게 해 주리라는 희망을 담은 묵시문학이 등장한 것이다. 종말, 부활, 지옥에 대한 개념들이 등장했다. 이스라엘 민족적 희망과 이란 종교의 우주론적 희망이 결합해서 메시야 왕국론이 등장하고 새 인류를 대표하는 자, 우주론적 종말론의 인물이며 심판자이고 구원을 가져올 인자의 개념이 유대교에 등장했다. 후기 유대 묵시문학에서는 이 인자가 메시야와 서로 혼합되어 사용됐다. 예수는 임박한 하나님 나라 사상을 선포함으로 이스라엘의 민족적 희망상의 메시야가 아니라 오히려 묵시문학의 우주론적 기대에 참여한다. 예수는 인자와 자신을 동일시 하지 않았다. 그는 인자의 옴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심판을 기다렸다. 예수의 설교는 현재의 결단에의 부름이었다. 예수의 종말론적 설교는 동경 혹은 사변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세상의 무력(無力)과 하나님의 뜻 및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책임을 아는 데서 나온 것이다. 초대 기독교는 이 인자를 예수 자신으로 동일시했다.

 

헬레니즘적 유대교는 그리스 로마 세계에 산재한 유대인의 집단, 디아스포라(diaspora)에서 형성되었다. 이는 회당 중심적이었고 헬라어를 사용했으며 그리스어 성서인 70인 역을 사용했다. 이들은 스토아 철학적인 알레고리 해석법으로 구약에서 그리스적인 지혜를 읽어 냈다. 그리스의 통일적 유기체로서의 세계사상, 즉 코스모스 사상이 유대교에 도입되었다. 하나님의 피안성은 그리스적 의미에서 그의 정신성으로 이해되었다. 하나님은 질료를 통해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스토아 철학의 섭리 개념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그 목표대로 인도한다는 개념-이 도입되었다. 스토아 철학의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로 이해되며 이는 세계와 하나님의 중개자이다. 예배는 육체적 감상적인 요소를 정신적인 것으로 지배하는 일의 인식과 훈련으로 여겨졌다. 이와 같은 알레고리적 신앙의 적용이 헬라적 유대교에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피안성은 여기서 신비적인 것으로 인식됐다.

 

이러한 헬레니즘의 영향은 그리스적 유산에 근거한다. 그리스의 폴리스 개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등에서 이를 찾을 수 있다. 정의와 법 위에 세워진 폴리스는 철저히 그들의 신들의 보호에 대한 확신에 근거한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적 신관이 힘을 잃으며 숙명신앙이 그리스 신화를 대체하기 시작한다. 신들은 더 이상 인간의 보호자가 아니며 자연 현상들의 원인들도 신들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의 힘들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소크라테스의 철학과 자연 관학이 등장한다. 종교적 권위의 자리에 학문의 권위를 대신 세웠다. 소크라테스는 이 세상을 자료와 형식의 이원론으로 설명했다. 그는 예술가의 작업을 비유로 이를 설명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즉 세계는 기술작업의 유비에 의해 파악된다. 작업에 의해 존재하게 되는 것은 재료(자료)가 아니라 형태이다. 그것은 작업자에게 떠오른 이 자료와 함께 형상화 될 때 실재한다. 그러므로 조형을 이끌어 가는 은 본래적-자료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근원이다. 그리고 개개의 예술작품이 의미 있고 합목적적으로 조형되었을 때 그 존재를 얻게 된다면 작품에 그 존재를 부여하는 형태를 동시에 ()’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그때에는 코스모스의 근원은 결국 자체이어야 한다. 본래적 존재에 대한 물음은 결국 의미에 대한 물음이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과 같이 자연에서 그 을 찾지 못하고 인간에게로 그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인간 안에 의미와 존재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로고스이다. 인간은 대화를 통해 서로의 근거에 설복당하기도 하고 설복하기도 한다. 대화의 과정에서 반드시 진리가 나타나고 그렇게 해서 ’, ‘정의이 무엇인지 가 인식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참존재에 대한 인식을 로고스로 생각한 반면 플라톤은 생과 멸의 세계 넘어서 이념들의 영원한 세계에로 시선을 돌리는 것을 생각했다. 이 이념들의 세계에 인간은 이념을 파악하는 로고스로서 참여한다. 플라톤에게 최고의 이념은 이고 존재는 동시에 의미이다. ‘선에의 인식적 참여는 동시에 지향적 의지적 참여이다. 인식의 추구는 을 지향하는 에로스이다. 선과 참존재는 하나이고 선으로의 길은 동시에 참에 대한 인식으로의 길이다. 결국 철학은 폴리스의 근거를 물으면서 또한 코스모스의 근원을 탐구해야 한다. ‘의 인식은 그 자체가 목적이고 인식하는 자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바로 이것으로 이 인식은 그를 참 정치가, 즉 시민으로도 만든다. ‘의 인식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국가적 존재로 파악한다. 인간은 전 코스모스에서 그에게 합당한 사명에서 자신을 파악하다. 즉 바로 국민으로서

 

헬레니즘 시대에 다양한 개념들이 등장했다. 로고스를 ’, ‘움직이는 공기로 이해한 스토아 학파는 자연과 로고스를 동일시 했다. 이 로고스는 만물을 관통하는 숨으로 만물의 유기적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이 로고스 존재로 파악해야 하고 그와 세계 로고스의 동일성을 인식해야 한다. 인간은 자유하기 위해선 선과 악에 대한 인습적 판단들에서도 자유 해져야 한다. 모든 속박에서 자유로운 이 현인사상은 금욕적이며, 수도사적이다. 이 스토아적 현인의 자유는 바울의 기독교적 자유와 유사성을 갖는다. 스토아 현인의 돌아섬은 평온과 확실성에의 길이며, 기독교인의 돌아섬은 세계에서 돌아서 하나님을 마주함으로 죄의식을 갖게 되는 불안으로 인도하는 돌아섬이다. 스토아 철학은 시간성을 제거함으로 철두철미하게 로고스 존재에만 자신을 집중시키고 모든 속박에서 모든 미래 자체를 부인하면서 그의 현재와 과거에서도 그것들의 시간성을 탈취한다. 기독교에 있어서 시간성은 인간의 본질에 속한다. 그의 현재는 항상 미래 앞에서의 결단으로서의 현재이다. 인간은 자신의 과거에서 현재로 옮겨 간다.

 

후기 스토아 사상은 숙명신앙과 성신(星辰)종교를 고대 그리스적 코스모스 사상과 결합시켰다. 그럼으로써 옛 통일성사상이 유지된다. 하늘에 대한 관조는 이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점성술의 등장은 헬라적 세계관의 변화에 영향을 끼쳤다. 그 영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별 세계에 대해 지상 세계가 평가 절하됨에 따라 신의 초월사상이 그리스 사상에 낯선 의미에서 형성된다. 둘째는 별의 지배권에 대한 신앙과 관련해서 시간에 대한 관계가 달라진다. 즉 별의 주기와 같이 시대의 주기화곧 종말론적인 사상과 구원의 시대에 대한 희망의 가능성이 제공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별 신앙은 개인의 운명을 문제로 하는 종말론을 등장시킨다. 별세계에서 유래한 인간의 영은 죽음 후에 다시 별 세계로 올라 간다.

 

헬레니즘 시대의 밀의 종교의 등장은 인간 실존 이해의 변화의 징후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대세계관계가 의심 받기 시작했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에 내 맡겨져 있다. 인간은 자신이 행()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불행에 대해서도 속수무책인 채 행(), 불행의 교체에 내 맡겨져 있음을 인식한다. 그를 도울 수 있는 신은 폴리스와 그 법칙을 지배하는 세력도, 로고스 또는 코스모스에 통합성을 주고 개체에 그의 바른 자리를 지시하는 자연의 이성적 법칙도 아니다. 결국 인간은 초월적 신에 자신의 운명을 맡긴다. 이것이 밀의 종교에 의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이다. 대표적인 밀의 종교는 영지주의인데 이들은 육,,자아의 삼분법적인 인간 개념을 갖고 있다. 여기서 자아는 정신으로서 그리스적 정신 개념과 다르다. 영지주의에서는 그리스적 자연의 조화는 곧 감옥으로 인식된다. 신은 초월적이고 세계는 모든 신성에서 배제된다. 해방은 오직 속죄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이는 육체의 감옥에서의 해방을 뜻한다. 부름의 신앙을 이들을 갖고 있는데 자아의 의식은 바로 이 부름에 의해 깨어나는 것이다. 즉 이세상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부름의 신앙인 것이다. 이들은 금욕적 생활 태도를 지키기도 했지만 세계 내에서의 모든 행위와 체험이 무의미하다는 인식을 근거로 윤리적 방종에 이르기도 했다. 인류가 통일성을 형성한다는 그리스적인 전제는 영지주의에서 단지 인간 모두 안에 존재하는 불꽃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 불꽃의 존재 여부에 따라 인류는 두 계급으로 분리된다.즉 영지주의자들과 물질주의자들이다.

 

 

[2]

 

이러한 다양한 철학과 종교의 영향 속에서 초대 기독교는 탄생했다. 이 책의 결론 부분에 해당하는 제5장에서 불트만은 이러한 영향들을 구체적 증거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불트만은 초대 기독교가, 특히 헬레니즘 기독교가 통일적인 것이 아니고 전체적으로 볼 때 특유한 절충주의적 형성체를 가지고 자신 안에 긴장들과 모순들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이는 후에 이단으로 규정될 수 밖에 없는 요소들을 지니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헬레니즘 기독교의 특징은 첫째 제의적 신앙에 있다. 종말론적인 신앙은 이방 기독교인들에게는 당시 낯선 것이었다. 묵시 문학적 칭호인 인자보다 하나님의 아들구원자가 대신했다. 특히 ()’가 주요 칭호가 되었는데 이 칭호는 예배에서 경배 되는 신으로 예수를 성격 짓는다. 성례적인 제의 신앙과 함께 영지주의적 지혜도 초기부터 침투해 있었다.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구속신앙을 개념화 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두 번째 특징은 복음서적인 전통이 헬레니즘계 기독교인들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회당에서 기독교 사상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기독교의 유일신론을 구약적 사유와 스토아의 자연신학을 통해서도 선포됐다.

 

초대교회의 절충주의는 예수와 교회의 모습에서 다양하게 나타났다. 예수의 모습은 때로는 유대교적 메시야적인 그리고 묵시문학적인 표상 세계의 옷을 입고, 때로는 제의에서 예배 되는 主로 즉 밀교의 신성으로, 때로는 영지주의의 구원자, 선재적인, 하늘에서 온 사자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교회는 때로는 구약적 개념성에 의해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 아브라함의 참 후손으로 생각되기도 하고, 때로는 영지주의적 개념성에 의해, 개인들이 세례와 주의 몸의 만찬이라는 성례를 통해 각기 지체가 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생각되기도 했다. 아무튼 초대 기독교는 이들의 영향 하에서 자라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기독교에서 인간의 본래의 본질은 그리스적 로고스, 이성, 정신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이다. 인간적 삶으로서의 삶은 언제나 지향적 존재로, 지향적 노력으로, 즉 의지로 이해됐다. 그리스적 이해는 이성이 연단되면 의지는 이성을 따른 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이해는 이 의지 자체가 善 혹은 惡에 해당된다. 즉 마음 혹은 의지에서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이 나온다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적인 인간 존재의 답은 인간은 곧 그의 의지이다가 될 것이다.

 

구약 성서에서 인간은 그의 존재에서 <과거에 의해 성격>지어져 있는 것이고 그 과거를 항상 그의 현재에서 동반하며 그러므로 결코 새로 시작할 수 없으며 실제적인 미래를 갖지 못한다. 악은 죄이고 악에 의해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파괴된다고 인식했다. 그러나 신약성서도 이러한 개념을 답습하고 있지만 의지의 무능(無能)에 있어서 구약과 대립한다. 의지의 무능: 인간이 철두철미 악에 빠져 있어서 선을 뜻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시간과 인간의 개념은 인간을 미래를 위한 개방된 자로 보는 구약의 이해가 더욱 철저히 신약에 나타난다. 옛사람에 대한 자아집착을 버리고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것이 신앙이다. 이 모든 것들은 미래에 대한 철저한 개방성, 즉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목표에 도달치 못하는, 항상 도중에 있음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고난의 의미도 이러한 미래에 대한 철저한 개방성에서 이해된다. 고난은 미래에 주어질 보상 때문이 아니라 현재 고난 속에서 나타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은사로 이해된다. 또 미래를 위한 이 철저한 개방성은 곧 기독인의 자유이다. 이점에서 바울과 스토아의 현인 사상은 유사해진다. 인간은 모든 가치 평가에서 자유해지는 것이 이 둘의 공통점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스토아에서는 지혜를 통해 자유를 얻고, 바울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다.

 

초대기독교는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상황과 구속사를 설명하는데 영지주의의 개념들을 사용했다. 이 세계에서의 인간의 정황을 1) 절대적인 우주적 세력들에 의한 노예로서 2)원인간의 타락에 의해 인류 위에 드리워진 숙명으로써 영지주의와 기독교는 공동으로 이해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영지주의는 이러한 인간의 정황을 숙명 또는 운명으로 이해하는데 반해 기독교는 여기에다 의 개념을 더했다. 이러한 죄책과 숙명의 관계는 신약 성서 안에서 복잡하게 나열되어 있다. 이러한 모순은 다음에서 해결된다. 즉 인간에게는 그의 범죄가 숙명이 된다. 우주적 세력들은 의 율법의, 죄의 죽음의 세력들로서 실제로 느껴지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개념은 유대교에서는 세계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인간에게는 이방적인 것이다. 기독교에서 이 세계는 인간은 이방인이고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이러한 영지주의적 세계관에서 기독교는 더 나아가 세계는 그리스도에 의해 해방된 자들에게서-설사 그 세계가 고향은 되지 않을지라도- 그의 피조물로서의 성격을 다시 얻는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세계의 주인이 된다.

 

하나님의 초월성 사상은 영지주의와 기독교가 공통이다. 하나님은 세계와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초월사상은, 영지주의에서처럼 한편으로는 인간 존재를,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본질을 자연적으로 파악함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초월성은 피조성을 망각한, 인간의 어떤 오만도 참지 못하는 그의 지배적인 권위의 초월성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의 은혜의 계시이다. 이 은혜에 근거해 하나님의 초월성은 지속적인 그의 미래성을 갖는다. 하나님은 이러한 미래를 향해 자신을 연 인간에게 은혜로운 자로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심판자로 언제나 여기 현재에 존재하시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자력으로 마련할 수 없다. 구원은 영지주의나 기독교에서 모두 오직 신적인 영역에 해당된다. 이 구원은 인간에게 사건으로 인식된다. 이 사건은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초기 팔레스틴 교회에서는 이 예수는 구약적인 인자로 이해되었다. 그의 죽음은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인 것이다. 이로서 하나님과 인간 관계에서 새로운 계약이 체결된다고 생각했다. 또 헬레니즘적 교회에서는 밀의(密儀) 종교적 표상들이 예수의 구원의 의미를 서술하는데 사용되었다. 예수는 제의에서 예배되는 主이다. 제의 참여자들은 세례와 주의 만찬의 성례를 통해 그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예수 인물과 업적을 영지주의의 구속신화의 개념을 가지고 해석했다는 것이다.  즉 예수는 하늘의 빛이고 세계의 신적인 인물이고 인간의 모습으로 감추어져 아버지에 의해 지상으로 보내졌고 그의 일을 통해 구원을 가져온 지고자의 아들이다. 이러한 선재(先在)적인 신의 개념은 영지주의에서 빌려온 것이다.

 

바울은 예수의 죽음을 속죄제물로 보는 유대 전통의 제의적 해석과 영지주의의 선재적인 신 개념을 합쳐 놓았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옛 것’(세상의 것들)에 종지부를 찍고 새 것을 일으킨 우주적 사건인 것이다.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의 구원자 역할이 가장 철저하게 영지주의적 개념성에 의해 표현되었다. 예수는 선재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이다. 그는 세상의 빛으로 왔고 이 빛은 생명진리이다. 그는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부르고 그의 임무를 완수한 후 다시 하늘 처소로 돌아간다. 그는 이 길을 자기에게 속한 자들에게 터 놓았다. 요한 복음이 이러한 영지주의적 구속신화의 개념을 따르는 것은 종말론적 사건을 현재에서 시작되는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관념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종말론적인 교회라는 의식은 하나님의 은혜와 만남으로 이미 이 세계에서 벗어났고 그것의 세력들에서 자유해졌다는 의식은 헬레니즘 세계에서만 표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도래, 죽은 자들의 부활과 대심판에 관한 옛 묵시문학적인 소망상을 고수하는 반면, 요한 복음서 기자는 구속을 철두철미 현재적 사건으로 기술했다는 것이 서로의 차이점이다.

 

말의 선포는 영지주의에서는 회개의 외침, 결단의 촉구로 나타나고 기독교에서는 십자가의 설교로 나타나는데 이는 순수한 결단의 호소이다. 이 십자가의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곧 새로운 실재적 자기이해를 포함하는 신앙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종교의 특징적 표지는 인식이 아니고 신앙이다. 기독교는 인간적 존재를 역사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반면 영지주의는 그것을 단지 숙명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기독교에서 영()은 하나님의 은사이고 육에 따라 살지 않고 영에 따라 살면서 윤리적인 성취, 곧 사랑의 계명의 성취를 기독교는 추구한다. 영과 상호사랑으로 결합된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 즉 하나님의 교회를 형성한다. 미래를 향해 열려진 지향성-미래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끊임없는 앞섬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는 기독교적 실존의 개방성은 그 끝을 모른다. 인간은 비세계적인 것이 단순한 소유가 되는 완성을 생각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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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서 왜 성서 속에서 그토록 많은 상이한 개념들이 존재하는 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다. 그것을 불트만은 혼합절충주의로 설명했다. 다양한 문화와 철학적 개념 속에서 기독교는 나름대로의 생존의 바탕을 거기서 만든 것이다. 기독교는 갑자기 홀로 등장한 종교가 아니다. 다양한 영향들을 받고 또한 끼치며 역사 속에 나타났다. 유대교 사상과 헬라 철학, 그리고 영지주의의 영향이 성서 곳곳에 베어있는 것을 불트만은 하나씩 세밀하게 끄집어냈다. 특히 초대 교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영지주의가 기독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초대 기독교에 영향을 준 개념이라는 것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부분이다.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가 영지주의의 구속신화에 의해 설명되고 이 세상에 대한 개념이 영지주의의 이원론적인 세계관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는 것 같다. 기독교의 성례전과 제의 의식 또한 영지주의에서 빚진 것이라는 불트만의 주장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결국 영지주의는 기독교에서 파생된 한 이단종파에서 기독교 형성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이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중요한 분기점인 시간과 인간의 개념이 유대교에서는 과거에 귀속되고 또한 미래에 완성될 것으로, 기독교에서는 현재에서 미래를 향해 열려진 지향성으로 인식 된다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해석이다. 결국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의 임재가 과거와 미래에 만 있는 것이지만 기독교에서는 현재에서 시작되어 계속해서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것이 된다. 즉 하나님 나라는 현재에 우리 안에 있으면서 또한 오고있는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나는 아직도 많은 혼란 속에서 성서를 본다. 마치 퍼즐을 맞추듯이성경을 보는 시각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믿어넘기는 단계에서 이제는 분석하고 검증해야 할 단계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이 책에서 보여준 불트만의 해박하고 통찰력 있는 성서 이해는 내게 많은 도전을 준다. 나는 한번도 그와 같은 시각에서 성서를 읽은 적이 없다. 그냥 위로와 은혜를 주는 말씀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신학을 공부하는 나로선 더 이상 이러한 차원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내 생각 속을 스치는 또 한가지가 있었다. 이렇게 서구적인 시각으로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면 왜 동양적인 시각으로는 불가능한 것일까? 그러한 시도들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는 안다. 아무튼 성서를 바라보는 시각은 개인에게 주어진 숙제로 남는 것 같다. 가장 자기에게 어울리는 시각으로 성서를 보는 것이 성서에서 말하는 자유가 아닐까? 하나님이 우리 인간 안에 내재해 있다면 우리 인간은 각자가 성서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고려 되야 할 것은 얼마나 그 해석이 우리에게 보편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느냐 가 아닐까?

 

 

[참고문헌] 루돌프 불트만의 서양고대종교사상사를 읽고 (허혁譯, 이대출판사, 1986,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