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과 상황
채창완
[들어가는 말]
얼마 전 모TV프로그램에서 어느 노숙자 가정에 대한 보도를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IMF 경제위기로 그 가정의 가장이 운영하던 공장은 도산하고 빚 때문에 전전긍긍하다 결국 고향인 부산을 떠나 서울의 한 거리에 나 앉을 수 밖에 없었던 어느 가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절망에 빠져있는 그 부부 옆에는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 초등학교 3년 생의 아들과 다섯 살 박이 딸이 있었다. 이제까지 서울의 지하철에서 흔히 보는 노숙자들은 나 홀로 노숙자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한 가족이 이렇게 노숙자가 된 것은 나로선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것도 단지 경제적인 이유 하나만으로 어린 아이들까지 길거리에 나앉아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도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아이들은 이 사회에서 생존권과 교육 받을 최소한의 권리마저 박탈당한 것이다. 과연 이들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들의 부모의 잘못에? 단지 그들의 부모들의 책임에 원인을 돌리기에는 너무 석연치 않은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사회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그냥 평범한 부모들이었다. 결코 게으름이나 무능력함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시간이 갈수록 이 나라에서는 열심히 일했는데도 불구하고 가차없이 버림 받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이모든 원인을 잘못된 국가 운영 시스템과 분배의 불균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구의 5% 밖에 안 되는 엘리트 계층에게 만 유리하게 움직여지는 사회시스템, 그리고 이들에게만 집중되는 부의 편중 현상을 한국 사회는 막아내지 못했다. 결국 이 사회의 제도와 법이 온전하게 민중들을 위해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민중’[1], 즉 ‘약자’ 들의 ‘인권’이 철저히 무시된 것은 이 사회에 온전한 인권에 대한 철학이 부재하며 인권에 대한 온전한 감시체계와 종교단체, 특히 기독교 기관의 무관심에서 그 원인이 있다.
인권이란 무엇인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생명,자유,평등 등에 관한 기본적인 권리라고 한다.[2] 즉, 모든 인간이 인간이기만 하면 단지 그 사실 때문에 당연히 갖는다고 생각되는 기본적인 권리를 말한다.[3] 현재 우리나라의 인권 사항은 어떠한가? 5백 명이 넘는 양심수의 문제와 매년 서울에서만 약 5백 명이 죽어간다는 부랑인들, 불법체류자로 내몰리는 외국인 노동자들, 소년소녀 가장과 최소한의 삶도 영위하지 못하고 있는 절대 빈곤층의 사람들, 그 수도 파악되지 않는 동성애자들 등등 사회적 약자들은 오늘도 사회적 무관심 속에서 근근히 목숨만을 연명하며 인간답지 못한 삶의 벼랑 끝에 허덕이고 있다.[4] 이 글은 이러한 인권에 대해 언급하며 오늘날 인권 문제 해결의 출발점을 성서에서 찾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는 구약이 현재의 상황 속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를 살펴보는 것이 될 것이다. 특히,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권 사상을 통해 인권에 대한 사상적 근거를 마련하고 이 사회에 대해서 교회와 기독교인에게 주어진 인권에 대한 감시자와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재확인하기 위함이다. 이 글에서 다룰 인권에 대한 범위는 ‘경제적인 약자, 즉 가난한 민중’[5]들의 인권에 한정하며, 구약 성서에서도 모세 오경,특히 출애굽기에 언급된 ‘약자보호법’에 그 한정을 둘 것이다. 이는 인권에 대한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고 인권에 대한 성서의 언급들도 너무 많음으로 이 글의 한계상 모두를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1. 구약과 민중 (구약 해석 관점-민중신학적 해석)
구약을 어떠한 관점으로 접근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성서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아메리칸 대륙을 정복한 미국인들이 인디언들을 핍박하는데 성서를 그 근거로 두었다는 것은 성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역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성서를 자의로 해석하여 얼마나 많은 악영향을 끼쳤는가? 나는 성서를 아래에서부터 봐야 한다(Bible Reading from Below)는 민중신학자 임태수의 관점에 동의한다.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무리들도 바로 다름아닌 민중들이었다. 민중의 관점에서 성서를 볼 때 민초들의 고통을 해방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목적이 더욱 잘 들어 난다. 민중 신학자들의 성서해석 특히 구약에 대한 입장들을 정리해 보았다.
임태수 선생은 “주후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교로 승격시킨 이후 성서해석은 대체로 기존 지배체제를 재가하고 옹호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루터의 종교개혁도 교회를 가톨릭 교회로부터 해방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교회로 하여금 농민이나 피지배자의 편에 서게 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18세기 계몽주의 이후 생겨난 ''역사비평적 방법''은 그 때가지 교회의 전통과 교리에 얽매여 있던 성서해석으로부터 벗어나서 이성에 의하여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음으로써 성서해석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이 역사비평방법도 그 수행자 대부분이 서구사회의 기득권을 가진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었으므로 그들의 시각은 기존의 지배질서를 유지하는 차원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였다.”라고 비판하며 성서에 대한 정의를 “성서는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피지배계층 사람들, 즉 민중을 해방하는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기록한 책이다.”라고 정의하였다. 그는 민중의 눈으로 성서 읽기를 강조했다.[6]
서남동 선생은 민중신학의 전거로서 구약에서는 출애굽사건을 들었다.[7] 그는 출애굽 사건은 이집트의 학정에 시달리던 히브리 사람들의 반란이며 압제로부터의 탈출이었다고 역사적 해석을 강조했다.[8] 고대근동지역에서 사용되던 ‘하비루’는 ‘히브리’와 같은 의미이며 최하위층 사람들에 대한 칭호로서 천민이나 유랑민들을 가리킨다.[9] 야훼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히브리 사람들의 하나님, 즉 노예의 하나님인 것이다. 후에 야훼 하나님이 다윗 왕을 비롯한 왕권에 의한 지배 이데올로기를 합리화시킨 보호신으로 변질되었다고 그는 주장한다.[10]
김정준 선생은 그의 논문에서 구약성서는 민중의 책임으로 민중신학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했으며 서남동 선생과 같이 “무당이 죽은 사람의 ‘한’을 풀어 주듯이 기독교인은 이 시대의 고통당하는 민중의 ‘한’을 풀어주는 ‘한의 사제’가 되어야 한다”고 민중의 한에 대해서 언급했다.[11]
문익환 선생은 그의 저서인 ‘히브리 민중사’에서 “야훼는 하비루의 많은 신들 중에 하나인데 야훼 만을 해방의 신으로 이스라엘이 섬긴 것은 영구적인 행방의 길을 가르쳐 주신 신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가나안 정착에 대해서는 “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가나안 농민들의 해방전쟁에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담하여 해방전쟁을 완성한 사건”이라고 혁명설을 주장했다. “다윗은 해방자가 지배자가 된 비극적인 사건”이었으며 구약의 예언자 운동은 “하비루 농민 해방군 전통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온 예언운동”이었다고 평가했다.[12]
출애굽기의 ‘계약법전’의 시작은 히브리 민족에게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시기를 잊지 말라는 경고로부터 시작됨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13] 이스라엘의 역사의 시작이 바로 노예 해방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는 민중의 토대 위에 히브리 신앙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내며 히브리 민족의 노예 생활에 대한 경험은 약자들의 편에 서시는 야훼하나님의 신앙으로 이어진다. 야훼 하나님은 약자들을 보호하시고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인 것이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실제로 민중의 삶을 사셨고 민중을 위해 죽으시므로 민중의 하나님임을 다시 한번 나타내셨다. 구약에는 이러한 민중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넘쳐 나고 있다.
2. 가난한 자에 대한 정의
제2장에서는 가난에 대한 성서의 정의를 살펴보려고 한다. 가난에 대한 성서적인 입장을 확인해야만 이에 대한 성서적 해결 방법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전적으로 임태수 선생이 정리한 가난에 대한 성서적 해석[14]에 의존해서 쓰여졌음을 밝힌다.
민중 신학에서는 가난의 원인을 사회구조적인 착취에서 찾는 반면 구약성서의 잠언은 이를 세분화해서 가난의 내적요인과 외적요인으로 나눈다. 내적요인은 전적으로 인간 개인에게 그 원인이 있으며 외적요인은 사회적인 요인에 근거한다.
그 자세한 내용을 살펴본다. 가난의 개인적 요인 또는 내적 요인의 첫번째는 게으름이다. 잠자기를 좋아하고[15] 일하기 싫어하며[16] 핑계가 많고[17] 일은 하지 않으면서 말만하며 실천을 절대하지 않는[18] 말 그대로 구제 불능의 게으른 자이다. 다음은 술[19], 사치[20], 방탕[21] 등 절제 없는 생활 습관에 의해 생기는 가난이다. 이 두 가지는 가난의 당연한 원인이 될 것이다. 이에 비해 빚보증[22] 때문에 가난해지는 것은 개인적으로 어리석어서 그렇기 하지만 앞에 언급한 원인들과는 달리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을 쉽게 믿는 착한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속인 사람들이 더 큰 잘못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인정에 이끌려 행동한 대가는 지불해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오래 참지 못하고 조급해서 일을 망치는 일과[23] 남을 돕거나 돈을 쓰는데 너무 인색한 것도[24] 가난의 원인이 된다. 마지막은 훈계나 교훈을 멸시함으로[25] 다가오는 가난이다. 이와 같이 가난의 원인이 철저하게 개인의 잘못으로 인한 경우가 있다. 이러한 가난의 원인들은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어느 정도 개선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개인의 노력여하에 따라 전혀 개선될 수 없는 것이 가난의 외적 요인이다. 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정치 권력자들의 억압과 착취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자들의 경제적 수탈에 원인이 있다. 이러한 사회적 제도 속에서는 개인이 아무리 노력을 한다 사회적인 시스템의 변화와 올바른 분배 정책이 없이는 가난을 물리치기 어려울 것이다. 권력자들의 억압과 착취에 대한 언급은 잠언서 29장2절[26] 등에 잘 나타나 있으며 이러한 권력자들은 뇌물을 받고 그릇된 판결[27]을 하기도 한다. 부자들의 수탈은 경제적인 상업활동에서 이루어지는데 그들은 치사하게 저울을 속이고[28] 고리대금[29]으로 과한 이자로 부당한 부를 축적한다.
우리는 가난이 우리 개인들의 게으름이나 잘못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권력자나 부자들의 수탈이나 사회제도의 문제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가난은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는 사회개혁으로 반드시 극복해야 할 이 시대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가난의 외적요인들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부의 불균등의 원인이 되어왔다. 최근 정치판의 개혁으로 사회적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지만 근본적인 처방 없이는 즉, 사회 복지 제도를 통한 부의 재분배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 현대 사회의 가난의 문제를 해결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내가 서두에서 언급했던 노숙자 가족의 가장은 이 한국 사회가 나은 피해자인 것이다. 이들에게도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 헌법에 명시된 기본권인 방어권,협동권,청구권에[30] 따라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의 생존권에 책임을 져야 한다.
3. 구약과 인권
현대 국가들은 인권을 국가 법률의 중요한 요소로 채택하고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인권에 대해서 현대 사회가 법률적인 관심을 갖게 된 것을 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의 바이마르 헌법에서부터다. 국가 권력이 국민의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해 주기 위하여 경제 과정에 개입해야 하며, 국민은 누구나 기본적인 생활권을 보장 받아야 한다는 것이 이 헌법의 인권에 대한 주요 골자이다. 이 헌법은 특히 경제활동에 있어서의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제한적으로 규정하고, 노동자의 단결권이나 노동권,생존권 등을 새로운 기본권으로 선언 했다. 오늘 날 대부분의 나라의 헌법은 모두 이러한 기본권을 규정하고 있다.[31] 법이 얼마만큼 인권을 존중하고 있으며 또 그것을 신장시킬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느냐 하는 점에 따라 그 법의 준수 여부도 결정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법을 준수하는 것이 윤리적일 수도 있으며 반대로 오히려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윤리적일 수도 있다. 그 기준을 우리는 ‘인권’으로 보는 것이다.[32]
이 장에서는 이러한 ‘인권’의 관점에서 구약을 바라보고자 한다. 구약에 기록된 인권과 관련된 내용들은 어떤 사건들의 기록보다도 구약 법전인 ‘모세 오경’에 두드러져 나타나 있다. 이 모세 오경에 명시된 ‘법률의 사상’은 구약 전반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오경’에 명시된 약자 보호법이나 안식년, 희년 제도를 얼마 만큼 잘 지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구약 법전은 ‘인권’에 대한 중요한 보고(寶庫)임에 틀림없다.
법은 인권을 보장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법은 일종의 권위적 명령이요, 규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 자체가 곧바로 권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성서의 법정신은 법과 권위의 관계를 분명히 한 데서 그 특징이 드러난다. 즉 법이 권위를 지닐 수 있는 것은 법 자체의 속성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 한에서이다. 그 하느님은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를 돌보시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의 뜻에 부합한다는 것은 바로 이들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법은 정의를 이루는 수단이 된다.[33]
이러한 구약법률 이외에도 구약성서에는 인권에 대한 많은 언급들이 존재한다. 이는 예언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왕정기에 훌륭한 예언자들이 등장하여 왕정의 횡포와 폭력으로 인한 인권유린 사태를 고발하고 항의하면서 하나님의 정의의 법을 회복시키며 유린당한 인권의 현장에서 백성의 대변자가 되었던 것이다. 왕정 치하의 예언자들은 계약법에 나타난 왕도[34]의 계명을 어기는 일이 발생하면 약자의 편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대언하였다. 기원전 8세기 예언자들인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등의 예언자들의 기록에서 정경유착에 의한 농민들의 땅 강탈과 약자들을 고문으로 죽이거나 억압하는 등 폭력적 인권유린 사태가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한다.[35]구약의 예언자들은 이러한 불의에 맞서 민중의 편에서 민중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힘썼으며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다.
구약의 인권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사상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이 피조물이라는데 있다. 하느님은 자기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심으로서[36] 자신의 인간적인 존엄성을 사람에게 주셨다.[37]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뜻과 만인에게 같은 존엄성이 존재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존엄이란 모든 인간의 인격의 본질을 말한다.[38]이러한 성서의 인간 존엄성 사상은 출애굽기의 민중보호법의 사상적 배경이 된다. 이 민중보호법 즉 약자 보호법의 특성은 힘없고, 가난하며,소외된 민중들을 보호하려는 인도주의적 정신이 그 기초를 이루며 비민중들에게 민중을 억압,학대,착취하지 말고, 잘 돌보아 주라는 목적에서 선포됐다. 이러한 민중보호법의 정신은 1) 하느님은 반민중이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할 때 하느님은 민중의 편에 서서 민중을 억압자들로부터 해방하고 구원하신다. 하느님은 민중의 하느님이시다. 2)민중과 비민중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없도 가난한 사람이라 할 지라도 그의 신성한 생명과 인격이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3) 민중과 비민중은 배타적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돕고 사랑해야 하는 관계라는 것이다. 즉, 민중과 비민중이 서로를 존중하며 평화롭게 더불어 사는 사회의 실현이 구약법전의 민중보호법에서 추구하는 목적이다.[39]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나그네에 대한 보호[40] :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종 되었던 점을 상기시키면서 나그네, 특히 이방나그네들을 보호할 것을 당연한 의무로 강조하고 있다.
2) 과부와 고아에 대한 보호[41] : 고대 이스라엘에는 전쟁과 기근,전염병 등으로 많은 가장들이 죽었으므로 과부와 고아 많았다. 이들에게는 경제력이 없었으므로 이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했다. 이들을 억압하는 자는 하느님이 직접 심판을 하신다.
3) 가난한 빚진 자에 대한 보호[42] : 가난한 자에게는 이자를 받지 말고 꾸어줘야 하며 전당 잡힌 것이 옷일 경우는 해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줘야 한다고 명하고 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 가진 자들이 어떻게 행할 것인지를 구약성서는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4) 도망한 노예에 대한 보호[43] : 도망한 노예에 대해서 고대 근동의 법이 매우 엄격했던 것에 비해[44] 구약 법률에 언급된 노예 보호는 아주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스라엘의 노예가 다른 고대 근동 국가의 노예와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은 고대 이스라엘이 평등 공동체를 추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레위기 25장에 기록된 ‘희년’ 제도에서 50년 마다 노예 해방과 토지 소유권 회복을 언급한 것은 이러한 고대 이스라엘의 평등 공동체의 이상을 잘 보여준다.
5) 비고의적인 살인자에 대한 보호[45]: 피의 보복은 고엘(go’el)[46]에 의한 보복으로 고대 근동의 오랜 풍습이었다. 그러나 구약의 법률은 고의적인 살인과 우발적인 살인을 구별했으며 비고의적인 살인자는 도피성이나 성소 도피처로 피할 수 있었다. 도피자는 그 성의 회중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까지 또는 그 성의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곳에 머물 수 있었다.[47]
6) 희년 제도[48] : 이스라엘 법률 중 가장 특색 있는 부분이 희년에 대한 언급일 것이다. 이 희년은 50년 마다 돌아온다. 이 50년을 주기로 토지를 상환하고, 가옥을 회수하며, 빈민에게 대부하고 노예는 해방된다는 내용이다. 토지는 하느님의 것임으로 인간이 사유재산을 차지하듯이 토지를 제 것으로 차지할 수 없다. 이스라엘은 토지의 소유권이 아니라 이용권을 가지고 토지를 사용한 것이다. 성벽 밖에 있는 가옥의 경우는 희년이 되면 반드시 원래 소유주에게 돌려줘야 했다. 그리고 가난한 동족에게는 돈을 빌려줄 때 이자를 받지 말아야 했다. 마지막으로 노예 해방은 안식년이나 희년에 해방되었다. 여기서 언급된 노예는 이스라엘 동족 노예로 채무적인 의무로 노예가 된 경우임으로 전쟁 포로나 외국인 노예와는 구별된다.[49]
이러한 구약의 민중 보호법은 약자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법령으로서 약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이 잘 나타나있으며 고대 이스라엘이 추구했던 평등사회에 대한 이상이 담겨져 있다. 이러한 이상은 구약과 신약의 근간에 흐르는 중요한 사상으로서 민중의 해방과 평등이라는 현대 인권 사상과도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맺는 말]
이와 같이 나는 부족하지만 인권에 대한 성서의 몇몇 근거들을 법률적인 관점에서 살펴 보았다. 인권에 대하여 민중의 시각으로 구약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구약 전반에 걸친 구속사적인 영적인 해석도 중요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으로서 역사적인 시대의 흐름에 동참하여 한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비젼을 우리는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특히 현대 사회에는 다양한 인권의 목소리가 높아 가고 있다. 이러한 인권의 요구에 구약이 얼마나 많은 답을 줄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인간의 생존권 만은 이 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분명한 답을 구약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구속사적인 입장에서만 성서를 해석함으로 말미암아 개인의 영적 구원에만 너무 치중하고 있음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교회가 개인적인 영적 구원을 넘어서 이웃과 사회를 보듬고 이 시대와 함께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만 한다. 길희성 선생은 종교의 사회 통합적인 기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이러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종교는 없다. 오죽하면 뒤르캥이 ‘신은 곧 사회 그 자체’라고 했겠는가? 소수의 종교적 천재와 강한 종교 체험과 카리스마로 출발한 종교도 신도 수가 증가하여 사회의 다수가 될 정도로 성공하면, 사회를 변화시키는 대신 사회의 체재와 가치체계와 한통속이 되어버린다. 심지어는 국가 종교 혹은 국교가 되어서 소수 집단들이나 자유사상들을 억압하며 체제 수호의 도구로 전락한다. 종교가 본연의 정신과 역할을 망각하고 사회체제와 문화체제 속으로 완전히 통합되어 버리는 것이다.”[50] 로마 가톨릭과 일제식민지 시대와 독재정권 시대의 한국교회가 바로 그러했다. 일제 통치와 독재 정치에 아부했던 한국 교회가 아니었던가. 개인의 구원만 부르짖으며 모든 신앙적인 시선을 개인에게만 집중한 나머지 사회와 민중에게 무관심해왔던 한국 교회는 이제 자성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는 구약에 나타나 있는 민중의 인권을 대변함으로써 이 사회를 향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해 가는 예언자적인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사회 통합의 기능이 과거 한국 교회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교회부터 사회적 기득권을 포기하고 민중의 삶 속에 파고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인권의 수호자로서 민중을 더욱 잘 이해하는 자리에 교회는 설 수 있다.
앞으로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에서는 이전 보다 더욱 복잡한 인권의 문제들이 나타날 것이다. 이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성서 속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구약’이 현대라는 ‘상황’에 적용되는 한 예가 될 것이다. 이는 내 개인에게 주어진 숙제이며 또한 한국교회에 주어진 하느님의 뜻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끝으로 나는 서두에 언급했던 한 노숙자 가족의 비애에 대한 책임이 한국 사회보다도 한국교회와 내 자신에게 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나 한 사람이 한 사람이 변화되지 않고서 어떻게 한국 교회가, 더 나아가 한국 사회가 변화될 수 있겠는가? 신학을 공부하는 신학도로서 나의 어깨가 무거워 지는 것은 분명 ‘책임감’ 때문 만은 아닐 것이다.
-박래군, ‘인권이란 무엇인가?’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한길사, 서울, 1983
-만수 김정준 논집 간행위원회, ‘신학과 경건’, 대한기독교성회, 서울, 1991
-임태수, ‘구약성서와 민중’, 한국신학연구소, 1993
-후버,볼프강, ‘인권의 사상적 배경’ , 주재용,김현구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2
-김은규, ‘구약성서의 희년’ , 대한성공회출판부, 서울, 1991
-임헌준, ‘오경법전의 민중보호법 연구’
-최형묵, ‘법질서와 인권’, 한국신학연구소 간 [살림]62호, 1994년1월
-길희성, ‘왜 불교인가?’
-양수용, ‘인권사상에 대한 기독교 윤리학적 연구’, 감리교신학대학 석사 논문, 1996
-문익환, ‘히브리 민중사’, 삼민사, 1990
-드보, ‘구약시대의 생활풍속’ , 이양구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9
-‘파스칼 세계 대백과 사전’
[1] 민중은 정치적 피억압자, 경제적 피수탈자, 사회적 소외자 등 사회의 하류층이다.또, 민중은 역동적이며 상대적인 개념이다. 상대에 따라서는 비민중이면서 동시에 민중적 성격을 가질 수도 있다.(임태수, ‘구약성서와 민중’,한국신학연구소, 1993, p.p 236~37
[2] 동아 새 국어사전
[3] J.Roland Pennock, ‘Rights Neutral Rights and Human Rights-A General View’, New York University Press, 1981, p.5
[4] 박래군, ‘인권이란 무엇인가?’, p.6
[5] 모세오경의 ‘약자보호법’(출22:21~27,23:9, 신23:15,16)등에 언급된 떠돌이, 과부, 고아, 빚진 자 등과 같이 경제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는 민중들이다.
[6] 임태수, ‘구약성서와 민중’, 한국신학연구소, 1993
[7]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한길사, ; 1983,서울, p.51
[8] Ibid. p.51,235
[9] Ibid. p.p.236~7
[10] Ibid. p.238
[11] 만수 김정준 논집 간행위원회, ‘신학과 경건’, 대한기독교서회 ; 1991, 서울
[12] 문익환, ‘히브리 민중사’, 삼민사, 1990
[13]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개역성경- 출20:2]
[14] 임태수, ‘구약 성서와 민중’, 한국신학연구소;1993, 서울, p.p.307~328
[15]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 6:9~11)
[16]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니라 (잠10:4~5)
[17]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 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잠22:13)
[18]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잠14:23)
[19] 술을 즐겨 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도 더불어 사귀지 말라 술 취하고 음식을 탐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 자기를 즐겨 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잠23:20,21)
[20] 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요 음식을 탐하는 자와 사귀는 자는 아비를 욕되게 하는 자니라(잠28:7)
[21]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의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로우며 그의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의 걸음은 스올로 나아가나니 그는 생명의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며 자기 길이 든든하지 못하여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잠5:3~6)
[22]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잠11:15 참고-잠22:26~27)
[23]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잠21:5)
[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잠11:24)
[25]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받는 자는 존영을 받느니라(잠13:18)
[26]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잠29:2, 참고-잠28:15,16)
[27]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잠17:23)
[28]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11:1, 참고,잠20:10,23)
[29] 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늘이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해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니라(잠28:8)
[30] 방어권-국가권력에 의한 부당한 침해에 대해 각 개인을 보호하는 역할, 협동권-참정권 뿐만 아니라 신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 등을 통해 공공의 정신 생활, 정치 생활을 함께 형성하는데 참여하는 권리, 청구권-국가권력기관에 정당한 요구를 주장할 권리 / 최형묵, ‘법질서와 인권’ , 한국신학연구소 간 <살림62호> (1994.1) 수록
[31] 파스칼 세계 대백과 사전
[32] 최형묵, ‘법질서와 인권’ , 한국신학연구소 간 <살림62호> (1994.1) 수록
[33] Ibid.
[34] 신명기 17장 14절~20절 참조
[35] 문희석, ‘구약성서와 인권’, 교회와 신학 8 (1977) p65~66
[36]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
[37] 문희석, ‘창조신학’, 민음사, ; 서울, 1976
[38] 후버,하인츠, ‘인권의 사상적 배경’, 주재용,김현구 역, 대한기독교서회
[39] 임헌준, ‘오경 법전의 민중보호법 연구’
[40] 출22:21,23:9 참조
[41] 출22:22~24 참조
[42] 출22:25~27 참조
[43] 신23:15,16 참조
[44] 함무라비 법전 제17조에 의하면 도망한 노예는 중대 범죄로 다뤄지고 있다. 도망친 노예를 도와주거나 숨겨주면 처벌을 받았으나 도망친 노예를 붙잡아 주면 포상을 받았다.
[45] 도피성(신19:1~13, 수 20장), 도피처(출21:13) 참조
[46] 자식이 없이 죽은 근친자의 과부와 결혼해서 죽은 사람의 이름을 계승할 자식을 낳는 사람을 뜻하는데(파스칼 백과사전) 이스라엘의 고엘제도는 가족의 재산과 가족을 보호하며 형제의 집안을 일으키는 일까지도 포함한다.( 드보, ‘구약시대의 생활풍속’, 이양구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9)
[47] 드보, ‘구약시대의 생활풍속’, 이양구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9
[48] 레위기 25장 참조
[49] 김은규, ‘구약성서의 희년’, 대한성공회 출판부, 서울, 1991, p.p.20~25
[50] 길희성, ‘왜 불교인가?’,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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