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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또는 변화”

James Chae 2023. 7. 2. 06:09

2023. 7.2. 가해_맥추감사주일(연중13주일/신자영접/관할사제취임)

창세 22:1-14 / 시편 13 / 로마 6:12-23 / 마태 10:40-42

 

변신 또는 변화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는 생각했다. 꿈은 아니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중에서

 

아침에 일어나니 갑자기 자신이 벌레로 변해있다면 여러분을 어떻겠습니까?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 하루아침에 사람에서 벌레로 변한 주인공그레고르 잠자 이야기를 전합니다. 한순간 사람에서 벌레로 전락한 존재. 이것은 실존의 변화이면서 존재의 변신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한 것이지요. 물론 소설에서 그는 외형과 말만 변했을 마음과 생각은 여전히 본인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그의 변화는 [변신]입니다. 현대 사회의 각박한 물질적 인과관계에 경종을 울린 소설은 자본주의 사회, 물질만능주의가 만들어 놓은 세상의 부조리를 가정을 통해 드러냅니다. 잠자에게 닥친 불행은 아무런 이유도 인과관계도 없이 갑자기 개인에게 발생합니다. 또한 현대인의 비극과 불행이 아무런 이유 없이 닥치는 것에 대한 메타포입니다. 원인도 이유도 찾을 없는이태원 참사세월호 참사같은 현상입니다. 그리고 그는 현대사회의 인간의 고독과 소외를 상징합니다.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등에 박혀 상처가 덧나서 결국 가족들의 냉대와 무관심 속에 쓸쓸히 주인공이 죽어가는 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가족의 생계를 홀로 책임져야만 했던 가장의 쓸쓸한 퇴장입니다. 가정부가 마치 쓰레기를 치우듯이 서둘러 벌레가 그의 사체를 간단히 처리함으로써 가정의 모든 갈등이 한순간에 해결되는 듯한 결말. 그동안 쌓아왔던 가족의 인과 관계가 가장의 [변신]으로 한순간 무너지는 역설. 소설은 어쩔 없이 우리가 생계를 위해 해야 하는 일들과 우리의 피상적인 사회적 관계들을 또한 돌아보게 합니다. 누군가의 노력이나 헌신이 아닌 누군가를 소진시키고 소비시킴으로써 우리의 생존이 가능하게 우리의 소비 사회. 그러나 속에서 우리는 변함없는 진지한 관계를 만드는데 시간을 소비하기보다 생계를 위해 피상적인 만남에 오히려 많은 시간과 열정을 다하고 살아갑니다. 지속될 없는 관계가 생계를 위해 중요해진 사회. 그러니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가족 안에서 조차 소외감과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부조리가 어느덧 정상이 것이지요. 너무나 부조리해서 인과의 관계로 설명도 불가능하고 모든 것이 이익과 효율에 의해 정의되는 사회. 그러니 인간이 벌레처럼 여겨지는 것도 하등 이상할 같지 않은 부조리. 이러한 [변신] 정말 누구도 원치 않는 악몽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인공처럼 벌레로 [변신] 하지는 않았지만, 벌레로 전락할까 두려움에 떨며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현재의 실존입니다.

 

변신(變身 transformation 또는 變態 metamorphosis) 변화(變化 change). 같은 다른 . 그래서 카프카의 소설은 [변신]보다는 Metamorphosis [변태(變態)]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했을 듯합니다. 본질은 그대로인데 동물이나 곤충이 모양을 바꾸며 성장하는 것을 [변태] 합니다. 그러나 말들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변신은 일순간에 가능할 있고, 지속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변화는 지속적이며 항구적이고 연속적입니다. 변신은 순간이지만, 변화는 오랜 시간과 인내를 요구합니다. 변신은 존재의 본질까지 변하지 않고 외형이나 외적인 요소들만 변합니다. 그러나 변화는 그대로 화학적 본질적 변화에까지 이르러 존재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카프카의 소설에서 잠자는 한순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레로 [변신] 했습니다. 반면 이에 충격을 받은 가족들은 점증적으로 잠자와의 관계에서변화 경험합니다. 물론 소설에서는 벌레로 변한 잠자가 [변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족들이 [변신]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 누구도 벌레가 잠자에게 피상적인 관계성 이상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잠자의 변신으로 완전히 이전의 잠자를 잊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전혀 다른 가족인 벌레 앞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자신들을 변신합니다. 그들의 외형은 그대로인데 이미 그들은 가족이 아닙니다. 벌레에 대항하여 모두 하나가 듯하지만, 벌레의 죽음을 뒤로하고 자신들이 받은 스트레스를 풀려고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피크닉을 떠나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가면을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벌레로 변신한 아들의 죽음은 그들에게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변화를 꿈꿉니다. 그러나 대부분 변신이나 변태의 단계에서 머물러 완전한 화학적 변화에 이르지 못합니다. 옷이나 화장품 다양한 외형적인 변신은 일시적이며 한시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아닌 다른 나로 살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특히 빚에 쫓겨 신용불량자가 사람들은 철저히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단절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영화 [화차] 빚에 쪼들리다 다른 사람의 신분을 도용해서 사는 여인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자기이면서 자신이 아닌 자기로 살아가는 . 존재가 물질의 노예가 되어 신분뿐만 아니라 인간이 아닌 벌레처럼 취급당하는 이러한 사태는 정녕 부조리 자체입니다. 소유보다 존재의 중요성을 강조한 에리히 프럼의 외침은 오늘날 공허하게 들립니다. 소유가 모든 것이 되어버린 우리의 사회. 이러한 부조리는 모든 존재를 비존재처럼 만드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있는데 없는 것처럼 사람을 소외시키니 말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인은변신이나 변태가 아니라 확실한변화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일순간의 감정이나 형식, 분위기, 외형적 변화에 의해 그리스도인처럼 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점증적으로 거룩함을 덧입으며 성장해 가는변화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주일에만 그리스도인으로 [변신] 했다가 다시 세상 사람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일주일의 번의 [변신]. 이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자화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본질의 변화, 영적인 변화,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변화는 정말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묘연한 일일까요? 죄의 종에서 하느님의 순종하는 종으로의 변화. 죽음에서 부활로의 변화. 변화의 시작은 세례를 통해 죄에 대해 죽는 데서 시작하여 이후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서 점증적으로 변화해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없이 살아왔던 삶을 청산하고 이제 새로운 하느님의 실존에 참여하는 삶을 사는 . 죄와 율법, 세속의 모든 굴레와 억압에 대해 죽고,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관계성을 갖게 되는 변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사도 바울로는 오늘 말씀에서죄의 순종하는 이란 말을 대비시킵니다. 이는죄에 순종하는 하느님께 순종하는 각각 뜻합니다. 율법의 지배은총의 지배 대비시킵니다. 그가 죄와 은총을 나란히 대비시킨 것은 죄가 은총과 동등하거나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세례 이전과 세례 이후에 달라진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죄는 은총과 동등한 선상에서 비교 대상도 되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읽었던 로마서 6 1절에서 11절까지 사도 바울로는 세례에 대한 자신의 세례신학을 펼친 다음 세례의 효과에 대해 오늘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 받기 전에 죄의 종살이를 하던 사람이 이제 세례를 받고의로움의 됐다는 것입니다. 존재가 바뀐 것이 아니라 존재의 실존이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존재의 실존이 달라지니 점증적으로 존재에 변화도 옵니다. 점증적인 성화의 단계 말입니다. 카프카의 [변신]과는 다른 그리스도인의 [변화]입니다.

 

인간의 변화는 자신을 어떤 것에 복종시키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사도 바울로는 말합니다. 돈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돈의 노예로 변합니다. 생기지도 않은 일로 미리 염려하는 사람은 번뇌의 노예로 변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은 두려움의 노예로 변합니다. 신념을 따르는 사람은 신념의 노예가 됩니다. 하느님에 대한 감사가 넘치는 사람은 하느님의 노예가 됩니다. “하느님의 보다하느님의 노예라고 하니 조금은 실감 있게 들립니다. 노예는 자신을 지배하는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 운명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누구에게 또는 어떤 것에 지배당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유한 같지만 모든 사람이 무엇인가에 지배를 당하고 영향을 받고 있다고 사도 바울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의 지배를, 어떤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까? ? 물질? 염려? 걱정? 두려움? 외로움? 자부심? 신념? 기쁨? 감사? 은총? 여러분이 무엇에 지배를 받고 있는지를 알려면 여러분이 하루 가장 관심을 가지고 공을 들이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쉽게 있습니다.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의 노예로 변합니다. 하루 종일 게임을 하는 사람은 게임의 종으로 변합니다. 진지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결국죄의 이든순종하는 이든 누구와 또는 무엇과 어떻게 관계를 가지느냐가 차이와 변화를 만듭니다. 악과 친한 사람은 악의 종이 됩니다. 선한 것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 됩니다. 너무나 단순한 원리이지만 우리는 자기 자신이생각하는 존재이기에 독립된 존재이고, 자유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생각하는 존재 생각은 다른 것에 의해 영향을 받고 다른 것에 의해 지배를 받습니다. 광고에서 반복적으로 코카콜라를 보면 무의식적으로 코카콜라를 마시게 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의식은 항상 무의식에 영향을 받는다고 정신분석학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의 대부분이 무엇에 의해 지배되고 영향을 받는지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남에게 내맡겨서 복종하면 곧 자기가 복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로마 6:16)

 

사도 바울로가사람이라 표현했지만 그것은 유무형의 모든 외부적 영향력들을 말한다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생각하는 바에 따라 무엇인가의 노예가 됩니다. 우리의 존재는 우리의 실존이 달라지면 우리의 인격도 변화됩니다. 세례 이후에 우리는 이제 은총의 지배 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총에 합당한 실존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았지만, 형식적이고 단순한 종교인이 된다면 그것은 변신이지 변화가 아닙니다. 그래가지고는 그리스도의 은총의 지배 아래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단순한 변신은 우리를 과거의 습성으로 다시 돌아가게 합니다. 인격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커다란 충격과 사건을 경험한 사람은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똑같이 돌아갈 없습니다. 깊은 트라우마가 현재의 실존을 뒤흔들어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인격이 사건과 사고로 인해 형성되기도 합니다.  세례는 존재의 인격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는 일입니다. 그것은 세례 후에 일순간의 변신이 아니라증적인 변화를 요구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원리입니다. 존재가 죄로부터 자유해져서 하느님의 부활의 실존 안으로 들어가는 . 이것이 변화이고 성화의 의미입니다. 그러할 우리는 은총으로 구원받은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하느님께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도리입니다. 은혜를 잊은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니라 은혜와 은총에 인간적 도리를 다하는 그리스도인말입니다. 이것이 일시적인 [변신] 아닌 [ 변화] 갈망하는 우리의 비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매일 조금씩이라도 자신을 하느님께 가까이 변화시켜 가시기 바랍니다. 변신에 대한 유혹에 빠지지 마시고 진정한 변화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이러한 삶과 존재의 변화를 진정으로 바라는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전례독서_연중13 (가해) 1

 

본기도

하느님, 성자께서는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베푼 자선도 주님께 행한 것이라 말씀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로 하여금 이웃의 어려움을 살피게 하시고, 주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늘의 상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창세 22:1-14

1 이런 일들이 있은 뒤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셨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하고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2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분부하셨다.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거기에서 내가 일러주는 산에 올라가, 그를 번제물로 나에게 바쳐라.”
3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종과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제물을 사를 장작을 쪼개가지고 하느님께서 일러주신 곳으로 서둘러 떠났다. 4 길을 떠난 사흘 만에 아브라함은 산이 멀리 바라보이는 곳에 다다랐다. 5 아브라함은 종들에게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물러 있거라. 나는 아이를 데리고 저리로 가서 예배 드리고 오겠다.” 하고 나서 6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씨와 칼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둘이서 길을 떠나려고 하는데, 7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을 불렀다.
.   “
아버지!”
.   “
얘야! 내가 듣고 있다.”
.   “
아버지! 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8  “
얘야!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말을 마치고 사람은 함께 길을 떠나, 9 하느님께서 일러주신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놓은 다음,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10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잡고 아들을 찌르려고 , 11 야훼의 천사가 하늘에서 큰소리로 불렀다.
.   “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   “
어서 말씀하십시오.”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야훼의 천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12 “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게 하지 말아라.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서슴지 않고 나에게 바쳤다.” 13 아브라함이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보니 뿔이 덤불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숫양 마리가 눈에 띄었다. 아브라함은 가서 숫양을 잡아 아들 대신 번제물로 드렸다. 14 아브라함은 곳을 야훼 이레라고 이름 붙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야훼께서 산에서 마련해 주신다.” 하고 말한다.
14절은 칠십인역을 따랐습니다. “야훼께서 산에서 마련해 주신다.” 히브리어 본문은야훼의 산에 장만되어 있다.” 혹은야훼의 산에서 그가 나타나신다.”라고 번역할 있습니다.

 

 

 

 

성시_시편 13

1    주여! 언제까지 나를, 영영 잊으시렵니까?
.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2    밤낮없이 쓰라린 마음,
.     아픔을 언제까지 견뎌야 합니까?
.     언제까지 원수들이 우쭐대는 꼴을 봐야 합니까?
3    , 나의 하느님, 굽어 살피시고 대답해주소서. .
.     죽음의 , 자지 않도록 눈에 빛을 주소서.
4    원수들이 이겼다고 뽐을 내며 
.     적들은 기뻐하며 날뛸 것입니다.
5    나는 주님의 사랑만을 믿습니다.
.     건져 주실 믿고 기뻐합니다.
6    온갖 은혜 베푸셨으니
.     주님께 찬미드리리이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로마 6:12-23

12 그러므로 결국 죽어버릴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죄의 지배 받지 않을 것입니다. 13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기어 악의 도구가 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가 하느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 쓰이게 하십시오. 14 여러분은 율법의 지배 받는 것이 아니라 은총의 지배 받고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지배할 없을 것입니다.
15 그렇다면 우리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은총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해서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이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없습니다. 16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남에게 내맡겨서 복종하면 자기가 복종하는 사람의 종이 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죄의 되어 죽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되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17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이었지만 이제는 진실한 가르침을 전해 받고 그것에 성심껏 복종하게 되었으니 하느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18 그리고 여러분은 죄의 권세를 벗어나서 이제는 정의의 되었습니다.
19 여러분의 이해력이 미치지 못할까 하여 이렇게 인간사에 비추어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온몸을 더러운 일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기어 불법을 일삼았지만 이제는 온몸을 정의의 종으로 바쳐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것입니다. 20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는 여러분은 정의에 예속되지 않고 제멋대로 놀아났었습니다. 21 때에 여러분이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들밖에는 없지 않았습니까? 그런 생활은 결국 죽음을 안겨줍니다. 22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결과로 여러분은 거룩한 사람이 되었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23 죄의 대가는 죽음이지만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은 우리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복음서_마태 10:40-42

40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옳은 사람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나는 분명히 말한다.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그가 제자라고 하여 냉수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상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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