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설교문

“그리스도인의 존재감”

James Chae 2023. 6. 24. 21:40

2023. 6. 25. 가해_연중12주일

창세 21:8-21 / 시편 86:1-10, 16-17 / 로마 6:1-11 / 마태 10:24-39

 

그리스도인의 존재감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법이 생겨서 범죄는 늘어났지만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 (로마 5:20)

 

사도 바울로는 방금 읽어드린 말씀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하여 오늘 로마서 6장에서 이에 대한 보충설명을 합니다. 은총을 더욱 더하기 위해 범죄를 저질러도 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로마교회에 있을 것을 상정하고 이에 대한 반론을 전개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리스도와 하나의 실존을 공유하는, 그리스도와 운명공동체인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럴 없다고 단정합니다. 이유는세례 통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율법에 대해, 죄에 대해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된 입니다. 율법은 살아있는 동안만 구속력이 있는 것이므로죽은 율법으로부터 자유해진다고 사도 바울로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은 그리스도인은 율법과 죄의 속박에서 자유하고 새로운 생활양식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다시는 죄를 저지르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이 하느님의 영광에 참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한번 죽으시고 하느님을 위해 다시 사신 것처럼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도 하느님을 위해 새로운 삶을 다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로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실존입니다.

 

존재는있음입니다. 존재는 우리의 의식 밖에 독립하여 실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없음입니다. 존재감은 이러한 존재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우리의 죄책감도 그러합니다. 죄는 존재가 아닌데도 우리의 육신에 존재처럼 들러붙어 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우리이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존재감 대신 오히려 죄책감에 사로잡힐 때가 많은 같습니다. 그건 우리의 육체가 죄에 대해 죽어 죄가 소멸되었기에 오히려 죄의 부재로 인해 죄를 인식하게 됐기 때문일까요? 죄를 전혀 인식하지 않고 죄에 대해 무관심하게 살면서 죄를 저질러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살던 때가 우리에게 있었는데,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후에 우리는 더욱더 죄에 대한 존재감을 느끼는 것일까요? 역설입니다. paradox입니다.

 

모든 존재들은 존재하고 있을 때는 존재감을 우리가 느낄 때가 태반입니다. 공기가 그렇고 물도 그렇습니다. 지난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우리는 마스크 없이 공기를 들이쉬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절감했습니다. 어디 공기뿐이겠습니까? 항상 만나는 가족도, 친구도 있을 때보다는 없을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존재하던 사람이 사라지고 나면 빈자리 때문에 존재감이 그때부터 작동을 합니다. 있을 잘할 걸이란 후회는 이미 늦습니다. 보통 우리는 어떤 존재와 함께 있을 잘해주지 못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우리의 몸도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낼 때가 있습니다. 평소에 건강과 육체에 관심을 가지지 않다가도 한번 건강을 잃고 나면 자신의 몸보다 중요한 것이 없음을 절감합니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존재들에 대한 존재감이 항상 우리의 일상과 일치하면 아마도 우리는 더욱 소중한 만남을 일상 속에서 이어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죄에 대한 존재감도 이와 유사합니다. 속에 있을 때는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죄에서 해방되고 나면 오히려 죄의 존재감이 커집니다. 존재가 아닌 죄가 존재감을 갖다니요. 결국존재감 우리의 심리 상태를 드러내는 말입니다. 죄의 존재감. 그것을 우리는 죄책감이라 부릅니다. 몸은 죄에서 해방되었는데, 여전히 우리의 마음은 죄에 붙들여 있는 것입니다. 증거는 바로 염려와 걱정 그리고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한시도 염려와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적이 없습니다. 일어나지 않을 일을 미리 걱정하고 염려하며 현재의 시간을 낭비합니다. 출애굽을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기적을 체험하고도 이집트 노예 시절을 오히려 그리워했던 것을 보면 이를 이해할 있습니다. 죄는 사라졌는데 죄책감이 마치 고향에 대한 향수처럼 우리를 이전의 삶으로 회귀하게 만듭니다. 노예근성처럼 한번 죄의 노예였던 우리는 끊임없이 근성에서 벗어나기 힘들어합니다.  출애굽을 사람 중에 약속의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뿐입니다. 모두가 이집트를 그리워하다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자유함이나 해방감이 죄책감 속에 자리할 곳은 없습니다. 그래서 교부 오리게네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산다는 의미인 것처럼, 죄를 위해 산다는 것은 죄의 뜻에 따라 산다는 의미입니다.” [오리게네스의 로마서 주해]

 

죄의 뜻에 따라 산다는 결국 죄의 습성과 욕망에 굴복한다는 뜻입니다. 죄는 사라졌는데죄의 우리 안에 뱀처럼 여전히 웅크리고 있다가 때에 따라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세례의 효과가 죄책감에 짓눌린 형국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하느님의 권능이, 하느님의 사함의 은총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요?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그리스도께로 마음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책감과 죄에 대한 연민에 빠져 있는 사람은 아직도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반쯤 그리스도께 향하고 있으니 죄에 대해 우리는 아직 완전히 죽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일에 무심하고 자신의 일에 열심을 다합니다. 세례를 받았는데 아직 마음은 여전히 세상에 발을 반쯤 담그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에 소금기둥이 롯의 기억하십시오. 이미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왔으면 절대로 뒤를 돌아보면 되는 것입니다. 아직 우리가 종종 죄책감과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는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존재감을 분명히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개신교의 열광주의자들처럼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은은한향기가 나고, 그리스도의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존재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감이 뚜렷한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는 죄책감이나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의 염려, 근심, 걱정보다 하느님의 일에 사로잡힙니다. 그는 어디에 있어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몸에 지니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존재감이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세상과 그리스도 사이 어디쯤에서 여전히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고괴담]이란 영화를 기억하시는지요. 공포영화를 보지 않으시는 분은 모르시겠지만, 영화에서 유령으로 나오는 여학생은 년을 학교를 다니며 입학과 졸업을 반복했는데도 선생님들이나 학생들도 아무도 그녀의 존재감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영화의 소름 끼치는 공포의 설정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존재감이 없는 사람은 소위말하는왕따보다 존재감이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소외되어 전혀 존재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은 마치 유령처럼 우리 주위를 배회한다는 . 분명히 있는 없는 같은 사람. 교회에 있으나 세상에 있으나 어디에도 존재감이 없는 사람. 아마도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의 존재감을 상실한 순간 바로 영화 속의 유령처럼 세상을 배회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전혀 구분이 되지 않고 동화되어 버리는 그리스도인.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그리스도인임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감 없이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될까요?

 

이와 같이 사회에서 존재하지만 존재감이 전혀 없는 그리스도인을 우리는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세례를 받았지만 이전의 삶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면 우리는 이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니면 위기로 또는 부끄러움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교회에서, 사회에서 실제로 존재감 있는 삶을 살기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체질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서 일까요? 아니면 방법을 몰라서 일까요? 아니면 하느님의 권능이 이것밖에 되지 않아서일까요?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의 어느 부분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일까요? 하느님의 일과 세상의 일이 동시에 충돌할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는가요? 나는 비록 손해를 보지만 나의 손해와 희생으로 타자가 이득을 본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정말 율법과 죄로부터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으로서의로움이 따르는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입니까? 

 

오늘 창세기 말씀을 잠시 봅니다. 오늘 말씀에서 약속에서 배제된 사람까지 세밀하게 살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보게 됩니다. 

 

이 말을 듣고 아브라함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이스마엘도 자기 혈육이었기 때문이다. (창세 21:11)

 

아브라함은 자신의 하갈과 첫째 아들 이스마엘을 떠나보내며 몹시 괴로워했다고 오늘 말씀은 전합니다. 약속의 자녀인 이사악으로부터 배다른 아들을 떼어놓아야 하는 것이 아비로써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광야로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느님의 자비를 처음 경험합니다. ‘화살이 날아가는 거리 얼마 정도일까요? 우리나라 활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100~300m 날아간다고 하니 자기 자식이 죽어가는 모습을 차마 없어서 하갈은 화살이 날아가는 거리만큼 떨어져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며 괴로워했습니다. 이집트 노예 출신인 그녀가 기도를 했는지는 기록이 없지만, 그녀는 거의 넋이 나간 상태로 멀리서 이스마엘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던 같습니다. 모습이 얼마나 안타까왔는지 야훼께서 천사를 보내 그녀와 이스마엘을 살려주십니다. 약속의 자녀나 그렇지 않은 자녀나 하느님의 자비 앞에서는 공평하다는 사도 바울로의 논리가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자비의 하느님은 약속의 자녀가 아닌 이스마엘을 살려주셔서 결국 아랍인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현재 아랍인들과 모든 무슬림들은 하갈과 이스마엘이 이때 발견한잠잠 샘물 있던 곳을메카 하여 무슬림 최대 성지로 귀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사라의 질투로 시작된 이사악과 이스마엘의 갈라섬은 이렇게 이방인 구원의 표징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사건이 됩니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안 받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로마 9:16)

 

오늘 창세기 말씀과 사도 바울로의 말을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신이 세울 사람을 세우시고 자비를 베풀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출애 33:19) 우리의 믿음이나 행위가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기준이 됩니다. 물론 주님께서 우리를 보실 믿음을 보시겠지만, 믿음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총제적인 성질의 것이기에 단순히 감정이나 느낌, 이성적 동의를 넘어서는 실재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믿음을 세웁니다. 그러니 우리는 은총에 감사할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공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면 구원의 조건이 나의 믿음이 됩니다. 경우 믿음이 마치 자신의 공로로 오해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하느님의 은총에 기반합니다. 은총이 믿음보다 조금 앞섭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아무도 하느님 앞에 자랑할 없습니다. 

 

모든 은총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관계한다고 오늘 사도 바울로는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매일 조금씩 그리스도의 실존을 함께 살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것이 하느님 앞에 세우는 것이고 우리의 도리를 다하는 길입니다. 다시 우리를 구속하는 율법이나 죄에 속박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으로 얻은 자유를 지켜야 합니다. 자유에는 그만큼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왕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존재감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유령처럼 일반인들의 주변을 맴돌지 마시고 당당하게 그리스도인임을 생활 속에 드러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례 받은 사람답게 기쁨으로 살아가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답게 자비로우며, 성령이 주신 권능으로 자유를 얻은 사람답게 당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의 존재감을 갖고 살아가겠다고 결단하는 순간 성령께서 여러분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권능으로 은사로 여러분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총에 합당한 여러분의 믿음의 세계를 존재감 있게 열어가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축복이 존재감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모든 분들에게 시간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전례독서: 연중12 (가해) 1

 

 

 

 

본기도 

인자하신 하느님,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었이다. 비오니, 이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마음과 믿음으로 주님을 위해서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창세 21:8-21

8 아기가 자라나 젖을 때가 되었다. 이사악이 젖을 떼던 , 아브라함은 잔치를 베풀었다. 9 그런데 사라는 이집트 여자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준 아들이 자기 아들 이사악과 함께 노는 것을 보고 10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 계집종과 아들을 내쫓아 주십시오. 계집종의 아들이 아들 이사악과 함께 상속자가 수는 없습니다.” 11 말을 듣고 아브라함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이스마엘도 자기 혈육이었기 때문이다. 12 그러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 애와 계집종을 걱정하여 마음 아파하지 마라. 사라가 하는 말을 들어주어라. 이사악에게서 자식이라야 혈통을 이을 것이다. 13 그러나 계집종의 아들도 자식이니 내가 그도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14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양식 얼마와 부대를 하갈에게 메어주며 아이를 데리고 나가게 하였다. 하갈은 길을 떠나 얼마쯤 가다가 브엘세바 빈들을 헤매게 되었다. 15 부대의 물이 떨어지자 하갈은 덤불 구석에 아들을 내려놓고 16자식이 죽는 것을 어찌 뜨고 보랴.” 하고 탄식하며 화살이 날아가는 거리만큼 떨어져서 주저앉아 이스마엘을 바라보았다. 하갈은 이스마엘이 소리내어 우는데도 주저앉아 그저 바라만 보았다. 17 하느님께서 아이의 울음 소리를 들으시고 당신의 천사를 시켜 하늘에서 하갈을 불러 이르셨다. “하갈아, 어찌 일이냐?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저기서 아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다. 18 어서 가서 아이를 안아 일으켜주어라. 내가 그를 민족이 되게 하리라.” 19 하느님께서 하갈의 눈을 열어주시니, 그의 눈에 샘이 보였다. 하갈은 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아이에게 먹였다. 20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해주셨다. 그는 자라서 사막에서 살며 활을 쏘는 사냥꾼이 되었다. 21 그는 바란 사막에서 살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며느릿감을 이집트 땅에서 골라 맞아들였다

 

 

 

 

성시_시편 86:1-10, 16-17

1   주여, 귀를 기울이소서.
.     나에게 대답하소서.
.     불쌍하고 가련한 몸이옵니다.
2    당신께 바친 몸이오니 지켜주소서.
.     당신께 의지하오니 이종을 구원하소서.
3    당신은 나의 하느님이시오니
.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나는 매일같이 당신을 부르옵니다.
4    주여, 마음 주님을 향하여 올리오니
.     당신 종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우소서.
5    주여, 용서하심과 어지심이 당신의 것이니
.     주님께 부르짖는 자에게 한없는 사랑 베푸소서.
6    주여, 기도 들어 주시고
.     애원하는 소리를 귀담아 들으소서.
7    주께서 분명코 대답해 주시겠기에
.     몸이 곤경에 빠졌으나
.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8    주여, 신들 중에
.     누가 주님과 같으리이까?
.     주께서 하신 일을
.     누가 감히 하리이까?
9    주여, 당신께서 내신 민족들이
.     모두 와서 예배드리고
.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10  주님은 위대하시어 놀라운 이루시니,
.     당신 홀로 하느님이시옵니다.
16   몸을 굽어보시고 불쌍히 여기소서.
.     당신의 종에게 힘을 주소서.
.     당신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17  어지심의 징표를 보여 주소서.
.     주여, 당신께서 몸을 돕고 위로하셨음을,
.     원수들이 보고 부끄러워하게 하소서.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로마 6:1-11

1 그러면은총을 풍성히 받기 위하여 계속해서 죄를 짓자.” 말할 있겠습니까? 2 절대로 그럴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죽어서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이상 어떻게 그대로 죄를 지으며 있겠습니까?3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4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것입니다. 5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분과 하나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분과 하나가 것입니다. 6 예전의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버리고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 니다. 7 이미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8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 9 그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는 죽는 일이 없어 죽음이 다시는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0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으로써 죄의 권세를 꺾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는 하느님을 위해서 살고 계십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복음서_마태 10:24-39

24 “제자가 스승보다 높을 없고 종이 주인보다 높을 없다. 25 제자가 스승만해지고 종이 주인만해지면 그것으로 넉넉하다. 주인을 가리켜 베엘제불(악마의 괴수)이라고 부른 사람들이 식구들에게야 무슨 욕인들 못하겠느냐?”
26 “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27 내가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고,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 28 그리고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29 참새 마리가 단돈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런 참새 마리도 너희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30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세어두셨다. 3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훨씬 귀하다.”
32 “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다.”
34 “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미가 7:6 36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이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사랑하는 사람도 사람이 자격이 없다. 38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사람이 자격이 없다. 39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글모음 > 설교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배된 지혜”  (0) 2023.07.09
“변신 또는 변화”  (0) 2023.07.02
희망의 상실 시대  (0) 2023.06.18
“모험의 상실 시대”  (0) 2023.06.11
“삼위일체, 관계성, 그리고 세례”  (0) 2023.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