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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vs. 피해자”

James Chae 2023. 7. 15. 04:10

2023. 7.16. 가해_연중15주일
창세 25:19-34 / 시편 119:105-112 / 로마 8:1-11 / 마태 13:1-9, 18-23
 

가해자 vs. 피해자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인간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 율법이 이룩할 수 없었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룩하셨습니다.” 로마 8:3 

 
 
사람들은 말합니다. 왜 하느님은 인간을 시험하시는가? 왜 선악과를 심어서 그것을 따먹지 말라고 하셨는가? 하느님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을 줄 정말 모르셨는가? 전지하신 하느님이 그것을 몰랐을까? 이러한 질문은 나름 의미가 있는 것 같지만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하는 질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전지전능하시다는 점과 인간은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먼저 전제하면서 그런 나약한 인간에 대해 마치 하느님은 무자비한 신처럼 여기게 만드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하지 않습니다. 왜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었을까? 그들은 에덴동산의 풍족함에 왜 만족할 수 없었을까? 그들은 왜 자신의 자유의지를 하느님을 시험하는 데 사용했을까? 왜 아담은 아내인 하와의 허물을 덮어주지 못하고 책임을 아내에게 전가했을까? 왜 그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무시하고 사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갔는가? 우리는 이 부분에서 하느님께서 가해자이신가 아니면 피해자이신가를 분명히 살펴야 합니다.
 
위와 같은 질문들은 성폭력의 가해자들이 하는 질문과 매우 유사함을 느낍니다. 왜 여자가 옷을 조신하게 입지 않는가? 왜 여자가 먼저 내게 눈웃음을 지었는가? 왜 여자가 밤늦게 싸돌아다니는가? 이런 질문은 피해자의 입장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가해자 일변의 질문입니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피해자에 동정은 하면서도 이해관계에 따라 피해자보다는 가해자에게 너무 관대한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집단학원폭력의 예를 보면 가해자들이 다수이고 피해자가 소수일 경우 이러한 경향이 더욱 자주 발생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보다 그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우리는 무심한 경향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피해자는 평생에 씻기 어려운 상처를 안고 겨우 살아가야 하는데 가해자들은 처벌을 받고 나면 더욱 당당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히려 언론의 보도 행태를 보면 가해자의 인권을 피해자의 인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듯한 의심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가해자가 그리스도교를 믿고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집니다.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고도 보이지 않는 신에게 용서를 받았다는 주장은 일종의 아이러니로 여겨질 정도입니다. 종교적 용서는 가해자를 더욱 뻔뻔스러운 모습으로 바꿔놓는 듯합니다.
 
우리는 실낙원 이야기에서 하느님께서 오히려 피해자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전지전능하시니 피해자라는 생각을 우리는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가해자인 아담과 하와 편에 서서 늘 하느님을 판단하려 합니다. 자식에 대해 부모가 갖는 권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권력(?)을 가진 부모도 자식 때문에 속을 썩고 상처를 받습니다. 분명 속을 썩히는 자식이 가해자이지만, 어느 부모도 자기 자식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식들은 어렸을 때는 모르지만, 나중에 커서 자기 자식을 낳아보면 그때에야 깨닫습니다. 자신의 부모의 입장을 어른이 되고 아이를 낳아보면 이해를 합니다. 그리고 부모도 부모이기에 앞서 한 사람이고, 한 남자이며, 한 여자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자식들은 이러한 것을 간과하고 한 남자를 아빠로만, 한 여자를 엄마로만 인식합니다. 자식을 둔 부모도 자식 때문에 아플 수 있고, 그들도 사랑할 수 있고 또 사랑받고 싶은 평범한 남자이고 또 여자입니다. 그들도 욕망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다만 자식들을 위해 많은 것을 참고, 많은 것을 절제하며 많은 것을 인내할 뿐입니다. 부모는 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위치에 설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자식 앞에서 늘 미안한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 보통의 부모님들입니다. 자식들이 엄마 아빠 때문에 상처받았다고 말하면 보통 부모들은 자신들을 변호하기보다 자신을 자책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부모는 자식 앞에서 영원한 피해자일 뿐입니다.
 

“아비가 자식을 어여삐 여기듯이 주께서는 당신 경외하는 자를 어여삐 여기시니” 시편 103:13

 
이와 같이 하느님도 우리와 같은 부모님의 위치에 서 계십니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위치에 말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하느님을 가해자의 위치에 두고 함부로 기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인간에게 서로 사랑하자고 자유 의지를 주신 것이 잘못입니까? 생명나무도 심어주고, 선악과도 심어주신 것이 도대체 왜 잘못입니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 그렇게도 잘못된 요구사항이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자녀들에게 몸조심하라고 당부하는 부모의 잔소리도 그렇다면 중죄가 됩니까? 그것이 상처가 됩니까? 자식을 염려하는 부모의 사랑이 자녀들의 자유의지를 억압하는 중차대한 문제입니까? 사랑하면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왜 우리는 유독 하느님께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댑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의 부모님 되심을 우리는 망각한 것입니까?
 
오늘 창세기 말씀은 인간이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는데 에사오와 야곱의 운명이 달라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에사오나 야곱, 어느 누구도 하느님 앞에 사랑받을 행동도 하기 전에 그들의 운명이 정해졌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잘못일까요? 장자권은 오직 한 명에게 주어지는 권리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뭐라고 합니까? “이렇게 에사오는 자기의 상속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라고. 에사오에게 장자권은 자동으로 태어나면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에사오와 아곱의 차이는 이를 귀하게 여긴 것과 그렇지 않은 차이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성인이라면 본인의 의지와 결정으로 그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에사오는 ‘장자권’을 경히 여겼습니다. 이는 그가 하느님의 은총을 경히 여겼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아담과 하와도 결국 하느님의 말씀을 경히 여긴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자신들에게 관대하고 하느님께 엄격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보다 자기애가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에사오는 자기가 굶어 죽을까 겁이 나서 하느님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넘긴 것입니다. 자기가 소유한 육신의 고통, 육신의 배고픔이 하느님의 장자권보다 더 귀중했던 것이지요.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 로마 8:6

 
이는 육적인 것에 마음을 쓴 결과입니다. 그 결과는 죽음이라고 사도 바울로는 말합니다. 죽음을 생명과 평화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도 바울로는 사용합니다. 죽음은 모든 빛을 삼켜버리는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육을 먼저 생각하는 것. 육신의 염려와 세속적인 축복과 영광에 매달리는 것. 자기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길 가에 뿌려진 씨앗”이나 “돌밭에 뿌려진 씨앗” 그리고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앗” 등이 모두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들에 대한 메타포입니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쓴다는 것은 곧 이 세상의 물질과 영광, 자신의 안위 만을 쫓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만 잘 먹고 잘살려고 바둥대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자기 연민에만 빠져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을 소유로만 평가하고 존재 자체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무한하셔서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처럼 인간의 자유의지를 향해 끊임없이 하느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비록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더라도, 만약 그들이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하지 않고 즉시 회개했다면 창세기의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 인류의 실존도 오늘과 같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도, 에사오도 어느 누구도 하느님께 회개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모두 자기의 죄를 타자에게 전가하거나 회피했지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하와의 탓이라고 변명을 했고, 하와는 뱀의 탓이라고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에사오의 경우는 장자권을 앗아간 야곱을 오히려 죽이려 했습니다. 자신이 경솔했다는 생각보다는 야곱이 자신을 속였다는 것에 분개했습니다. 야곱이 비록 정직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장자권을 소중히 여긴 것만은 분명합니다. 리브가의 예언대로 결국 야곱인 동생이 장자권을 획득합니다. 자신의 권리를 경히 여긴 에사오는 선민사상에 빠진 유대인에 대한 메타포입니다. 그들은 먼저 선택받았지만 구원에 이르지 못했고 대신 선택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선택을 받아 구원에 이릅니다. 은총을 소중이 여기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은총에 진심으로 감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선한 방향으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가해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도전했던 사람들입니다. 2천 년 전 그를 못 박은 사람들은 유대인들이나 로마인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하느님께 늘 불평하고 그분께 늘 불순종하는 우리들이 가해자입니다. 하느님은 늘 피해자의 위치에 서 계셨습니다. 마치 우리의 부모님들처럼. 그분은 자신의 권능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의 죄 때문에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아무런 저항도 없이 치욕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인간에 대해 피해자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아담과 하와와 함께 가해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하느님을 기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을 사랑하신 하느님은 아무런 죄도 없으신 분입니다. 만약 그분이 죄가 있다면 “우리를 사랑하신 죄” 뿐입니다. 그것이 죄라면 말이지요.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죄를 덧씌웠을 뿐입니다. 그러니 회개하십시오. 우리의 불평들에 대해, 우리의 미움과 참소들에 대해, 그리고 이웃을 서로 사랑하지 못한 우리의 불찰에 대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참 자녀로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이러한 회개의 은총이 우리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로 이끄시길 이 시간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연중15 (가해) 1
 
 
본기도
은혜로우신 하느님, 우리 마음에 은혜의 말씀을 심어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그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열매를 우리 삶 속에 가득히 맺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창세 25:19-34
19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의 역사는 아래와 같다.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 이사악이 태어났는데, 20 이사악이 리브가를 아내로 맞을 때 그의 나이는 사십 세였다. 리브가는 바딴아람에 사는 아람 사람 브두엘의 딸로서 아람 사람 라반의 누이였다. 21 리브가가 아기를 낳지 못하였으므로 이사악은 야훼께 아기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야훼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는데, 22 뱃속에 든 두 아이가 서로 싸우므로 리브가는 “이렇게 괴로워서야 어디 살겠는가!” 하면서 야훼께 까닭을 물으러 나갔다. 23 야훼께서 리브가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태에는 두 민족이 들어 있다. 태에서 나오기도 전에 두 부족으로 갈라졌는데, 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억누를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
24 달이 차서 몸을 풀고 보니 쌍둥이였다. 25 선둥이는 살결이 붉은데다가 온 몸이 털투성이였다. 그래서 이름을 에사오라 하였다. 26 후둥이는 에사오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했다. 리브가가 그들을 낳은 것은 이사악이 육십 세 되던 해였다. 27 두 아들이 자라나, 에사오는 날쌘 사냥꾼이 되어 들에서 살고, 야곱은 성질이 차분하여 천막에 머물러 살았다. 28 이사악은 에사오가 사냥해 오는 고기에 맛을 들여 에사오를 더 사랑하였고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하였다.
29 하루는 에사오가 허기져 들에서 돌아와 보니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었다. 30 에사오가 야곱에게 “배고파 죽겠다. 그 붉은 죽 좀 먹자.” 하였다. 그의 이름을 에돔이라고도 부르는 데는 이런 사연이 있다. 31 야곱이 형에게 당장 상속권을 팔라고 제안하자 32 에사오는 배고파 죽을 지경인데 상속권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였다. 33 그러나 야곱은, 먼저 맹세부터 하라고 다그쳐 요구하였다. 에사오는 맹세하고 장자의 상속권을 야곱에게 팔아 넘겼다. 34 그리고 에사오는 야곱에게서 떡과 불콩죽을 받아먹은 후에 일어나 나갔다. 이렇게 에사오는 자기의 상속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30: “에돔붉다 뜻의아돔 비슷합니다.
 
 
 
 
성시_시편 119:105-112
105  당신의 말씀은
⋅       내 발에 등불이요 ◯
⋅       나의 길에 빛이옵니다.
106  나 한번 맹세하였으니 ◯
⋅       당신의 바른 결정을 지키리이다.
107  주여, 내가 받는 고난이 심하오니 ◯
⋅       말씀하신 대로 이 몸 살려주소서.
108  주여, 내 입이 드리는 이 정성을 받으시고, ◯
⋅       당신의 결정을 가르쳐주소서.
109  나의 생명, 항상 위기에 처해 있으니 
       당신의 법을 잊지 않으리이다.
110  악한 자들이 내 앞에 올가미를 쳐 놓았으니 ◯
⋅       나는 당신의 법령들을 어기지 않으리이다.
111  당신의 언약은 영원히 내가 받을 유산이며 ◯
⋅       내 마음의 기쁨입니다.
112  당신 뜻을 따르기로 내 마음 정하였으니 ◯
⋅       그것이 영원한 보상입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로마 8:1-11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결코 단죄받는 일이 없습니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3 인간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 율법이 이룩할 없었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룩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어 그 육체를 죽이심으로써 이 세상의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4 이렇게 해서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 속에서 율법의 요구가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5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 6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 7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은 하느님의 율법에 복종하지도 않고 또 복종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원수가 되고 맙니다. 8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9 사실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면 여러분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10 비록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여러분은 이미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영은 살아 있습니다. 11 그리고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주실 것입니다.
 
 
 
 
복음서_마태 13:1-9, 18-23
1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더니 2 사람들이 또 많이 모여들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그대로 모두 호숫가에 서 있었다.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를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먹었다. 5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싹은 곧 나왔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6 해가 뜨자 타버려 뿌리도 붙이지 못한 채 말랐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 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혔다. 8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배가 것도 있고 육십 배가 것도 있고 삼십 배가 것도 있었다. 9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18 “이제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내포한 뜻을 들어보아라.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할 때에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간다. 길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20 또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곧 기꺼이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21 그 마음속에 뿌리가 내리지 않아 오래 가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그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닥쳐오면 곧 넘어지고 만다. 22 또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억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23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잘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사람은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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