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18. 가해_연중11주일
창세 18:1-15 / 시편 116:1-2, 12-19 / 로마 5:1-8 / 마태 9:35-10:23
“희망의 상실 시대”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그러나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따지고 보면 서른 살에 죽느냐 예순 살에 죽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나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둘 중 어떤 경우가 됐든 당연히 다른 남자들과 다른 여자들은 살아갈 것이고, 수천 년 동안 그럴 것이다. 요컨대 이보다 더 명백한 것은 없다. 지금이건 이십 년 후건 언제나 죽는 것은 바로 나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중에서]
교통사고로 삶을 마감한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인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은 주인공 ‘뫼르소(Meursault)’가 해변에서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 자신도 모르게 어떤 아랍인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받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제리의 법정과 사회는 그의 살인 범죄 때문이 아니라, 그가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에 대해, 즉 어머니 장례식에서 전혀 눈물을 흘리지 않은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부조리’를 적나라게 드러낸 다양한 독백들이 매우 인상적인 이 소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실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이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결정할 옵션이 생각보다 많지 않음을 이 소설은 보여줍니다. ‘부조리’한 세상을 포기하고 자살을 선택하던지, 아니면 종교가 주는 피안의 세계에서 위안을 얻던지, 아니면 세속적 향락에 자신의 몸을 맡기고 세상의 물살에 휩쓸려가던지, 아니면 ‘부조리’한 세상에 반항하면서 인간과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하며 ‘저항’하던지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실존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많지가 않습니다. 물론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 책임은 고스란히 한 개인의 것입니다. 그 선택에 의한 비난과 불명예 또는 칭찬도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니라 바로 각 개인의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은 늘 외롭습니다. 카뮈 식대로 말하면 남의 삶에 “상관하지 말라”가 됩니다.
“보아라,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너희 앞에 내놓는다.” 신명 30:15
이 말씀은 이미 선택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누가 죽음을 선택하겠습니까? 누가 불행을 선택하겠습니까? 대부분 생명이나 행복을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당위론적인 이 말씀이 역설적인 것은 누구나 당연하게 선택할 것 같은 생명과 행복이 결코 쉽게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신명기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주제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로가 말한 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될 사람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단언컨대 “의인은 없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카뮈라면 펄쩍 뛸 일이지만, 즉 내가 의인이 되든, 죄인이 되든 누구도 상관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두려움조차도 오롯이 개인의 몫입니다. 우리는 카인의 죄에 집중하지만, 그의 분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야훼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왜 그렇게 화가 났느냐? 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느냐?’” (창세 4:6)
카인은 자신의 소출을 제물로 하느님께 바쳤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하느님께 거절을 당했습니다. 이에 대해 많은 신학자들이 여러 해석을 내렸지만, 모두가 카인을 기소하는 내용들일뿐 어느 것 하나 그의 분노를 변호하는 해석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하느님의 뜻에 맞는 제물을 바친 아벨과 그렇지 않은 카인. 어쩌면 카인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우리 현대인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투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카뮈와 같이 자신의 실존을 견뎌내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그에게서도 발견합니다. 그래서 카인에게 주어진 저주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작동되고 있습니다.
“네가 아무리 애써 땅을 갈아도 이 땅은 더 이상 소출을 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다.” (창세 4:12)
아무리 애써도 평생 자신의 집을 사기가 어려운 우리. 아무리 애쓰고 스펙을 쌓아도 안정된 일자리를 얻기가 어려운 우리. 아무리 노력하고 노력해도 빚만 늘어가고 재산의 증식은 몇몇 소수의 독점이 되어 버린 우리 사회. 법은 한없이 있는 자들에게 관대하고 없는 자들에게 엄격한 우리의 사법체계. 취업, 결혼, 자녀, 집, 희망 등을 포기하며 아르바이트나 비정규직 자리를 찾아 헤매는 젊은이들. 홀로 고독사를 하는 노인들. 생활고 때문에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가정들. 서민들의 등골을 빨아먹는 이자로 호위호식하는 금융기관이나 고리대금업자들. 우리 현대인은 아무리 애써도 늘 제자리를 맴돌거나 절벽에서 더 떨어지지 않으려 애쓰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카인의 저주는 정확하게 우리 현대인의 저주가 됩니다. 그러니 젊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게 됐습니다. 80,90년대 경제성장의 특혜를 누렸던 우리의 기성세대가 우리 자손들에게 만들어 놓은 세상입니다. 이제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말해야 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올해 우리나라 경제 성장률이 1.5%라는 지표는 우리 서민들이 얼마나 힘든 삶을 견뎌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인간의 행복이 아닌 자본의 행복을 추구한 자본주의의 한계점에 우리 인류는 도달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희망에 대해 말하는 것이 너무나 힘든 세상이 됐습니다. 특히 종교에서 말하는 희망이 얼마나 요즘 세상과 괴리가 있는지 더욱 절감합니다. 당장 빚에 쪼들려 허덕이며 매월 찾아오는 이자조차도 감당하기 힘든 사람들에게 오늘날 우리는 어떤 희망을 말해야 할까요? 상수리나무에 앉아 있다가 하느님의 천사를 영접하여 희망의 메시지를 받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병으로, 빚으로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희망을 전하는 것일까요? 사라나 아브라함이 처한 상황이 오늘날 우리 현대인이 처한 상황보다 더 절망적이었을까요? 최소한 아브라함은 첩도 있었고, 이스마엘이라는 서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랑인이었지만 당시에 부유하고 성공한 부족장이었습니다. 그가 처한 상황과 우리의 상황은 너무나 괴리가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 (마태 10:10)
오늘 복음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유랑전도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주기도문은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할 것을 가르칩니다. 주님께서 주의 기도를 가르치실 때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말씀하신 것은 정확하게 “빚, 즉 부채”와 관련된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에 살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수확량의 70%를 세금과 빚의 이자를 갚는 데 내어놓아야 했습니다. 30%의 수확량으로 일 년 치 식량은 커녕 다음 해에 뿌릴 종자조차 확보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당시의 서민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 운동’은 그래서 완전한 무소유를 전제로 시작된 것입니다. 진정한 가치는 먹고 마시고 소유하는 데 있지 않고 나누고 사랑하며 비우는 삶에 가치가 있다고 ‘예수 운동’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 자루나 여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마라.”(마태 10:9-10)
이는 정확하게 당시의 가진 자들, 자본가들, 권력가들이 주도하던 ‘부조리’한 사회의 통념을 깨는 말씀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복이 있다”는 메시지는 완전히 전도된 가치를 선포한 말씀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는 모두에게 열린 과제이고,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자본주의나 축복지상주의에 반하는 방향을 우리에게 제시하셨습니다. 만약 이러한 방향대로 기독교가 실천하며 성장했다면 세상은 현재와 같지는 않았을 겁니다. 현재와 같이 부동산이나 융자 이자로 부자가 되는 그리스도인도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항상 주류세력과 결탁하고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존재해 왔습니다. 그러니 부동산 투기나 융자 이자로 돈을 벌면 하느님의 축복이라 생각하는 이상한 현상이 교회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부동산 투기, 고리대금 이자가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님을 성서는 분명히 말하지만, 교회는 이를 하느님의 축복으로 포장을 했습니다. 그러니 한국의 자본주의가 가장 성장했을 때 교회 또한 성장을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로마 5:2)
그러나 이 절망의 현대사회에서, 우리의 저주 같은 실존에 짓눌려 희망조차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오늘 사도 바울로는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믿음’과 ‘은총’은 바로 현재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은 ‘현재로 침투하는 미래’입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이미 가진 것이 있으니 희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미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핏값으로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총입니다. 이 은총에 의한 희망은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다고 바울로 사도는 말합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 5:5)
제가 요즘 성령에 대해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분명한 한계를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부자가 될 수도 없고, 집도 얻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경제성장률 1.5%라는 지표는 이를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앞으로 환경적 재앙까지 더해져서 우리의 삶은 더욱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경제성장률은 더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더 잃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더 빚에 쪼들리게 될 것입니다. 막연하게 희망을 가지라는 덕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고 우리의 한계를 깨닫고 이 세상의 ‘부조리’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안 되는 것을 될 것같이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맹신’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합리적인 것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합리적인 인과율만을 믿을 수도 없습니다. 100개의 노력을 해도 10개의 결실 밖에 얻지 못할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니 더 이상 현재의 상황을 당연한 것으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조리’가 정상이 되고, 진실이 아닌 것이 정의가 되는 현재의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푯대를 놓치고 풍랑 속에서 절망하는 사람들이 되지 마시고 ‘부조리’한 세상보다 더 ‘부조리해 보이는 믿음’을 오히려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조리 있어 보이지도 않습니다. 믿음은 ‘부조리’ 해 보이고, 비합리적으로 보입니다. 마치 망상같이 여겨집니다. 그러나 눈을 잘 뜨고 살펴보시면 이 ‘부조리’한 세상이 오히려 우리의 믿음보다 더 ‘부조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합리성은 자본과 권력에 의해 독점됐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신앙의 합리성’을 추구하십시오.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 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1 고린 1:27)
이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신앙의 합리성’입니다.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이기고, 어리석음으로 지혜로운 자들을 이깁니다. 절망으로 오히려 희망을 갖게 되고, 비움으로 오히려 가득 채움을 받습니다. 육체의 배부름보다는 영적인 허기를 부끄러워하고, 육신의 안식보다는 영혼의 죽음을 더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2 고린 6:10) 이런 사람을 세상이 감당할 수 있을까요?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보다 더 실제적인 성령의 도움 없이는 우리는 전혀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건 저의 말일뿐더러 사도 바울로의 말입니다. 우리의 희망이 전혀 헛되지 않은 것은 성령께서 보증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역설적이게도 ‘부조리’해 보이는 믿음을 오히려 더 굳건히 잡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겁니다. 그건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아는 것이 아니라 확신하는 것이고, 확신하는 만큼 그대로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조리’를 ‘부조리’해 보이는 믿음으로 이겨내십시오. 그러할 때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께서 자신의 권능으로 여러분을 능히 이기게 해 주실 겁니다. 그러한 믿음이 없다면 제자들은 절대로 빈손으로 전도여행을 떠나지 못했을 겁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먹이시고 반드시 살리실 겁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겁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연중11주 (가해) 1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 예수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죽음을 물리치고 승리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온전한 믿음을 주시어, 우리가 모든 악을 물리치고 주님 안에서 더욱 굳세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창세 18:1-15
1 야훼께서는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문 어귀에 앉아 있다가 2 고개를 들어 웬 사람 셋이 자기를 향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들을 보자마자 천막 문에서 뛰어나가 맞으며 땅에 엎드려 3 청을 드렸다. “손님네들, 괜찮으시다면 소인 곁을 그냥 지나쳐 가지 마십시오. 4 물을 길어올 터이니 발을 씻으시고 나무 밑에서 좀 쉬십시오. 5 떡도 가져올 터이니 잡수시고 피곤을 푸신 뒤에 길을 떠나십시오. 모처럼 소인한테 오셨는데, 어찌 그냥 가시겠습니까?” 그들이 대답하였다. “아! 그렇게 하여주시겠소?”
6 아브라함은 급히 천막으로 들어가 사라에게 고운 밀가루 서 말을 내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고 이르고 7 소떼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살이 연하고 맛있어 보이는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종에게 맡겨 빨리 잡아서 요리하게 하고는 8 그 송아지 요리에다가 엉긴 젖과 우유를 곁들여서 손님들 앞에 차려놓고, 손님들이 나무 밑에서 먹는 동안 그 곁에 서서 시중을 들었다.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부인 사라는 어디 계시오?” 하고 묻자, 아브라함은 사라가 천막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10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내년 봄 새싹이 돋아날 무렵, 내가 틀림없이 너를 찾아오리라. 그 때 네 아내 사라는 이미 아들을 낳았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등지고 서 있는 천막 문 어귀에서 이 말을 엿듣고 있었다.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 많은 늙은이였고 사라는 달거리가 끊긴 지도 오래였다. 12 그래서 사라는 속으로 웃으며 “내가 이렇게 늙었고 내 남편도 다 늙었는데, 이제 무슨 낙을 다시 보랴!” 하고 중얼거렸다. 13 그러자 야훼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사라가, 다 늙은 몸으로 어떻게 아기를 낳으랴 하며 웃으니, 될 말이냐? 14 이 야훼가 무슨 일인들 못 하겠느냐? 내년 봄 새싹이 돋아날 무렵에 내가 다시 찾아오리라. 그 때 사라는 이미 아들을 낳았을 것이다.”
15 그러자 사라는 겁이 나서 웃지 않았다고 잡아뗐으나, 야훼께서는 “아니다. 너는 분명히 웃었다.” 하시며 꾸짖으셨다.
성시_시편 116:1-2, 12-19
1,2 주님은 나의 사랑,
⋅ 나의 애원하는 소리를 들어주셨다. ◯
⋅ 내가 부르짖을 때마다 귀를 기울여주셨다.
12 주께서 베푸신 그 크신 은혜 ◯
.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까?
13 구원의 감사 잔을 받들고서 ◯
.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
14 주님께 서약한 것, 내가 채워 드리리니 ◯
. 당신의 백성은 빠짐없이 모여라.
15 주님께 충실한 자의 죽음은 ◯
. 그분께 귀중하다.
16 주여, 이 몸은 당신의 종이옵니다. ◯
. 당신 여종의 아들인 이 종을
. 사슬에서 풀어주셨습니다.
17 내가 당신께 감사제를 드리고 ◯
.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8 주님의 모든 백성이 모인 가운데서 ◯
. 주님께 나의 성원을 채워드리리라.
19 주님의 집 뜰 안에서,
. 너 예루살렘 한 가운데서 ◯
. 나의 서원을 바치리라. 알렐루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로마 5:1-8
1이렇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2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4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5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6 우리 죄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7 옳은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혹 착한 사람을 위해서는 죽겠다고 나설 사람이 더러 있을지 모릅니다. 8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복음서_마태 9:35-10:8(9-23)
35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가시는 곳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셨다. 36 또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37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38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
10: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다.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비롯하여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 3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와 세리였던 마태 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4 가나안 사람 시몬, 그리고 예수를 팔아 넘긴 가리옷 사람 유다이다. 5 예수께서 이 열두 사람을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분부하셨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마라. 6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 7 가서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사람은 고쳐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주어라.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주고 마귀는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10 식량 자루나 여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마라.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 11 어떤 도시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고장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거기에서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12 그 집에 들어갈 때에는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13 그 집이 평화를 누릴 만하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내릴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 평화는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14 어디서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도시를 떠날 때에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려라. 15 나는 분명히 말한다. 심판 날이 오면 소돔과 고모라 땅이 오히려 그 도시보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16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 17 너희를 법정에 넘겨주고 회당에서 매질할 사람들이 있을 터인데 그들을 조심하여라.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왕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으며 그들과 이방인들 앞에서 나를 증언하게 될 것이다. 19 그러나 잡혀갔을 때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마라. 때가 오면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일러주실 것이다.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21 형제끼리 서로 잡아 넘겨 죽게 할 것이며, 아비도 또한 제 자식을 그렇게 하고 자식도 제 부모를 고발하여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여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동네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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