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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과 욕망 사이 어디쯤에…”

James Chae 2023. 9. 10. 06:02

 
2023. 9. 10. 가해_연중23주일
출애 12:1-14 / 시편 149 / 로마13:8-14 / 마태 18:15-20
 
 

능력과 욕망 사이 어디쯤에…”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세상에 만족이 있느냐 인생에게 만족이 있느냐
있다면 나에게도 있으리라

세상에 만족이 있기는 있지마는 사람의 앞에만 있다.
거리는 사람의 팔 길이와 같고 속력은 사람의 걸음과 비례가 된다.
만족은 잡을래야 잡을 수도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도 없다.

만족을 얻고 보면 얻은 것은 불만족이요 만족은 의연히 앞에 있다.
… 중략

나는 차라리 발꿈치를 돌려서 만족의 묵은 자취를 밟을까 하노라.
… 생략

만해 한용운의 [만족]

 
 
오늘 2 독서에서 사도 바울로가 우리에게 하는 권면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이를 생활 속에 적용하려 해 본 사람은 이러한 권면이 율법처럼 우리에게 매우 부담으로 작용함을 느낄 겁니다. 아니면 말씀은 말씀이고 일상은 일상이다 생각해서 특별한 연관성을 찾지 않고 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로가 우리에게 한 권면이 어떻게 율법이 아니라 은총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을까요? 해야 할 의무로 생각하면 모든 것이 부담으로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감사가 먼저 작동하면 의무는 부담이 아닌 사랑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로마 13:8

 
율법이나 사도 바울로의 권면이나 이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조항들이 별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고, 모든 것을 이겨내며, 모든 것을 견디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로는 우리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욕망을 추구하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미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율법의 욕망을 그가 간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의롭게 될 인간은 없다는 것이 율법주의자였고 유대교 근본주의자였던 사도 바울로가 다다른 결론입니다. 
 

“무릇 만물은 본성에 충실할 때 강하다”. 장 자크 루소 [에밀]

 
‘사회계약론’으로 프랑스혁명의 불씨를 지폈고 민주주의의 근본 사상을 세운 장 자크 루소가 그의 교육론을 담은 [에밀]에서 한 말입니다. 그는 맹자처럼 인간의 선한 본성에 무한한 긍정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는 “가진 능력에 비해 욕망이 더 크다면, 사자나 영웅이라 할지라도 그 존재는 약하다”라고 말합니다. 또 반면 “욕망에 비해 가진 능력이 더 월등하다면, 벌레 같은 미물이라도 그 존재는 강하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욕망과 타고난 능력의 균형을 갖추게 하는 게 루소의 인간 교육의 핵심인 것이지요.
 
이러한 그의 교육관은 사도 바울로의 생각과 맥이 닿아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로마서 7:19 KRV 

 
바울로는 인간이 늘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욕망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욕망을 절제하는 데 있다는 루소의 말은 이 경우에 해당됩니다. 신앙 있는 사람이 자유를 얻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렇지 못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인간은 신앙이든 물질이든 그것을 ‘소유’와 관련지을 때 늘 ‘결핍’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물론 그 ‘결핍’이 자신의 분수를 넘어서는 ‘욕망’ 때문임에도 인간은 그러한 욕망을 결코 내려놓지 못합니다. 욕망은 ‘소금 나오는 맷돌’처럼 한번 작동되면 결코 멈출 수 없는 그러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결국 멸망에 이른 후에야 어리석음을 깨닫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것이지요. 그래서 만족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은 시인 한용운의 말처럼 “잡을래야 잡을 수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족을 얻고 보면 얻은 것은 불만족이요 만족은 의연히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용운 시인은 발걸음을 뒤로 돌려 “만족의 묵은 자취”를 따라가기로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구도자가 자신을 비우는 불교의 ‘공(空, Śūnyatā) 즉 비움’에 이르는 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으로 말미암는 은총으로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비움’ 보다는 ‘자기 채움’에 더 열심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족을 모르는 소유의 욕망 말입니다. 거저 받은 구원을 자기 소유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소유는 만족할 줄 모르는 그리스 신화의 “에리식톤(Erysichthon)”처럼 끊임없이 먹어도 먹어도 허기를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불행을 느끼는 것은 결핍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결핍을 느끼게 하는 욕망 때문”이라고 루소는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 내면에서 소유와 존재 간에 분열이 발생합니다. 주님께서는 ‘존재’를 말씀하시는 데, 우리는 늘 ‘소유’를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어린아이처럼 움켜줘야 직성이 풀립니다. 영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말입니다. 그래서 남이 갖지 않은 것, 내게 없는 것, 남과 비교하여 더 큰 욕심을 우리는 갈망합니다. 처음에는 종교에서 마음에 평화와 안녕을 구하던 것이 점점 소유의 증대로 나아갑니다. 영적인 것과 세상의 물질적 결핍을 경험하게 되면 종교는 일상 속에서 매우 다양한 감정을 유발하며 사람들을 갈등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영적인 것을 갈망함과 동시에 세속적인 결핍에 대한 욕망 또한 점점 간절해집니다. 이것이 종교가 가지고 있는 심리적 실존의 한 양상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을 믿으면 자유함대신 일종의 혼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영적 욕망을 추구하게 되거나, 가질 수 없는 소유를 축복으로 착각하게 되든지, 또는 완전히 소유형 인간이 되어 그것에 함몰되어 있든지 하게 됩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한탄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로마서 7:24 KRV

 
그리고 이런 모순에서 우릴 건져내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그는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도우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격과 하나 되도록 우리의 본성을 만져주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 (로마  13:14)라는 말은 바로 우리 자신의 인격이 그리스도의 인격을 덧입으라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것처럼 자신의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율법의 욕망이 이룰 수 없었던 이웃 사랑이 이렇게 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나’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자신의 자아가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고 허덕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일이든, 물질적 생계와 관련된 일이든 구분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사만큼, 또 하느님께서 주신 능력과 달란트만큼 여러분의 삶의 질을 맞추어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여기에서 할 수 없으면 하늘에서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마태 18:18

 
여러분이 이 땅에서 할 수 있으면 하늘에서도 가능합니다. 그러할 때 여러분의 욕망을 여러분의 능력에 맞추면서 자족하며 자유롭게 이 땅의 삶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겪은 시련은 모두 인간이 능히 감당해 낼 수 있는 시련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신의가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시련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1 고린 10:13

 
고린토 교회는 거짓 사도들과 다양한 문제들로 분열과 갈등을 겪는 시련을 당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교만과 잘못된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때문이라고 사도 바울로는 분명히 말합니다. 그 교만의 뿌리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우리는 압니다. 자신의 능력보다 더 큰 욕망을 갈구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교만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통해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을 가졌다가 한 순간에 인류 최초의 죄의 조상이란 불명예를 안았습니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은 하느님처럼 높아지겠다는 욕망으로 하루아침에 자신들의 언어를 잃어버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과 헤어져 동서남북으로 흩어지게 됐습니다. 그래서 실낙원 당한 인간과 각각 다른 언어로 소통이 불가능해진 인간은 이 광활한 우주에서 작고 외로운 소외감에 집단적 우울증에 빠지게 됐습니다. 우울증은 내면으로는 자신을 파괴하고, 밖으로는 다른 사람을 파괴하는 무서운 전염병 같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조증과 울증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생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자유와 구원의 은총의 기쁨은 늘 저 어두운 인간 내면 깊은 곳에서 좀처럼 빛 가운데로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시편 23:4

 
그렇습니다. 이런 불안한 상태가 인간의 실존임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은총의 빛을 함께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한 번뿐인 삶”이기에 힘들어도 잘 이겨내야 하는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날 생’, ‘명할 명’이라는 ‘생명(生命)’이란 한자어는 살라는 하느님의 명령이라는 함석헌의 말이 생각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짙은 어둠 속에서도 반드시 이겨낼 힘을 주실 것은 우리가 현재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숨을 쉬고 있고, 매일 아침 햇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한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살아 있음이 축복이고, 사람됨이 기쁨이며,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예배 드림이 은총임을 알고 감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지팡이가 늘 우리를 보호하시고, 성령께서 모든 시련을 이겨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주실 겁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경제 사정이나 사회 현상이 정말 녹록지 않은 상황입니다. 곳곳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옵니다. 서민들의 삶은 점점 더 쪼들려 가고, 희망을 말하기가 참 암담한 현실입니다. 아픈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많은 분들이 육체적 고통으로 힘들어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마음이 너무나 무겁습니다. 모든 국민들이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고 있다는 생각조차 듭니다.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인은 한 명도 보이지 않고, 서로 자신이 의롭다고 진영논리로 다투기만 합니다. 인간이 살아야 하는 데 오히려 인간이 죽어갑니다. 그래도 이러한 극한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또 한 사회의 시민으로서,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우리 서민들이 대단하고 고맙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 선한 국민들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면서,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생계를 책임지고,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묵묵히 욕심 없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오늘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연중23 (가해) 1
 
본기도
주 하느님, 우리보다 항상 앞서 가시며 이끌어 주시나이다. 구하오니, 모든 일의 처음과 끝을 주관하시어 언제나 바른 길로 가게 하시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출애 12:1-14
1 야훼께서 이집트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다. 2 “너희는 이 달을 한 해의 첫 달로 삼고, 달수를 이 달에서 시작하여 계산하여라. 3 너희는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에게 알려라. 이 달 십일에 사람마다 한 가문에 한 마리씩, 한 집에 한 마리씩 새끼 양을 마련해 놓아라. 4 만일 식구가 적어 새끼 양 한 마리가 너무 많거든 한 사람이 먹을 분량을 생각하여 옆집에서 그만큼 사람을 불러다가 먹도록 하여라. 5 흠이 없는 일 년 된 수컷이면 양이든 염소든 상관없다. 6 너희는 그것을 이 달 십사일까지 두었다가 이스라엘 온 회중이 모여서 해 질 무렵에 잡도록 하여라. 7 그리고 그 피를 받아, 그것을 먹을 집의 좌우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바르라고 하여라. 8 그 날 밤에 고기를 불에 구워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곁들여 먹도록 하는데, 9 날로 먹거나 삶아 먹어서는 안 된다. 머리와 다리와 내장도 반드시 불에 구워 먹어야 한다. 10 그것을 아침까지 남겨두어서도 안 된다. 아침까지 남은 것은 불에 살라버려야 한다. 11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잡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 이것이 나 야훼에게 드리는 과월절이다. 12 그 날 밤 나는 이집트 땅을 지나가면서 전국에 있는 맏이들을 사람이건 짐승이건 모조리 치리라. 또 이집트의 신들도 모조리 심판하리라. 나는 야훼다. 13 집에 피가 묻어 있으면, 그것이 너희가 있는 집이라는 표가 되리라. 나는 이집트 땅을 칠 때에 그 피를 보고 너희를 쳐죽이지 않고 넘어가겠다. 너희가 재앙을 피하여 살리라. 14 이 날이야말로 너희가 기념해야 할 날이니, 너희는 이 날을 야훼께 올리는 축제일로 삼아 대대로 길이 지키도록 하여라.
 
 
 
 
성시_시편 149
1    알렐루야!
.     주님께 새 노래를 불러라.
.     신도들아, 모여서 그를 찬양하여라.
2    이스라엘아,
.     너를 내신 분을 모시고 기뻐하여라.
.     시온 시민들아,
.     너희 임금님을 모시고 즐거워하여라.
3    춤을 추며 그의 이름 찬양하여라.
.     북치고 수금 타며 노래하여라.
4    주께서 당신 백성 반기시고
.     짓눌린 자들에게 승리의 영광 주셨다.
5    신도들아, 승리의 찬치 벌여라.
.     밤에도 손뼉 치며 노래하여라.
6    목청 높여 하느님을 찬양하여라.
.     주님은 손에 쌍날칼을 드시고
7    뭇 민족에게 원수를 갚으시며
.     뭇 나라에게 벌을 주시고
8    왕들에게 고랑 채우시며
.     권세 있는 자들을 사슬로 묶고
9    이미 내린 선고대로 그들을 처형하시니,
.     하느님을 믿는 온 신도들의 영광이로다.
.     알렐루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로마13:8-14
8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9 “ 간음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탐내지 마라. 출애 20:13-15, 17; 신명 5:17-19, 21” 한 계명이 있고 또 그 밖에도 다른 계명이 많이 있지만 그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레위 19:18하” 한 이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10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11 이렇게 살아야 하는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 분이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던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12 밤이 거의 새어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13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14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복음서_마태 18:15-20
15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 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주어라. 그가 말을 들으면 너는 형제 하나를 얻는 셈이다. 16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그리하여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을 들어 확정하여라.’ 한 말씀대로 모든 사실을 밝혀라. 17 그래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19 “내가 다시 말한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다. 20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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