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설교문

"차이와 다름"

James Chae 2023. 9. 17. 23:39

2023. 9. 17. 가해_연중24주일

출애 14:19-31 / 시편 114 / 로마 14:1-12 / 마태 18:21-35

 

 

차이와 다름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교육이 다르며, 생각하는 것도 각양각색인 사람들이 모여있습니다. 하느님께 받은 은사도 서로 다르고, 타고난 달란트도 각각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다름 속에서 차이의 가치를 배우고, 다름 속에서 다양성을 배울 있습니다. 그러나 다름이 타자를 판단하는 잣대가 되거나,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근거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교회나 많은 공동체들은 종종 갈등을 겪게 됩니다. 우리의 눈은 자기 자신보다 우리 시선이 닿는 밖의 타자에게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이 우리 내면을 없다는 점이 우리의 불행인지 아니면 행운인지 확신할 없지만, 남과 비교하는데 이러한 시지각을 사용하게 되면 분명 불행을 가져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근대 민주주의의 아버지 자크 루소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밖의 자연을 스승으로 삼고, 이를 관찰하고 자연의 대상들의 차이와 다름을 깨닫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자연을 관조하며 인간의 본성이 자연의 본성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지혜와 지식은 자연에 있는 대상들의 변화와 차이와 다름을 깨닫는 데서부터 발전합니다. 창작을 하는 아티스트들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아티스트들은 평범한 대상들 간의 차이와 다름을 통해 우리가 없는 대상의 감춰진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과학자들도 차이와 다름을 분석하는 실험과 연구를 통해 자신들의 이론을 체계화합니다. 음악도 음과 박자의 차이와 다름에 의해 소리의 다양한 표현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의 관계성 속에서만 이러한 차이와 다름은 부정적으로 사용될 때가 많은 것이 안타깝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있어서 무엇이든지 먹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은 채소밖에는 먹지 않습니다. 3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은 가려서 먹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가려서 먹는 사람은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도 받아들이셨습니다.” 로마 14:2-3

 

1세기 원시 그리스도 교회는 유대교와 구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종파 정도로 인식됐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도 전도 여행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회당을 복음 선포의 거점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래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 율법과 할례 그리고 축일 준수 등으로 갈등했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할지 말아야 할지가 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사도 바울로가 그토록 강조한 배경은 바로 이러한 데서 기인합니다. 율법의 속박에서 그리스도교를 독립시키는 길을 행위대신 믿음과 은총에서 찾은 이유입니다. 율법과 할례를 강조하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자신들이 배우고 따랐던 유대교의 습성에서 금방 자유해지기 어려웠습니다. 현재까지도 그리스도교회 종파로서 할례와 구약 시대의 전통을 준수하는 교회가 여전히 존재합니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에티오피아 정교회입니다. 그들은 사도행전 8장에 필립보 부제가 전도했던 에티오피아 내시로부터 자신들의 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로의 피나는 노력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우리도 에티오피아 정교회처럼 유대교 율법과 축일을 지키며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가고, 남자들은 할례를 받아야 했을 겁니다. 그러나 율법의 근본주의자였으며, 가말리엘 학파의 문하생이며, 바리사이 중의 바리사이였던 사도 바울로는 율법 조항을 준수하는 것으로는 결코 인간이 구원받을 길이 없다는 결론을 부활한 예수를 만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갈라디아 교회, 고린토 교회, 필립비 교회 그가 개척한 교회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율법이 그것을준수하는 준수하지 않는 차이와 다름을 만들며 인간을 분열과 차별로 속박하는 것임을 간파했습니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의 차이와 다름을 깨달으면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서로를 세워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이와 다름을 통해 상대에 대한 차별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 인간은 남보다 자신이 조금만 달라도 우월성 또는 열등감을 느끼는 아주 독특한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실낙원 이후 인간의 모든 존엄성이 발가벗겨진 이래로 인간이 느끼게 죄의 본성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죄는 인간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수치를 감추기 위해 자신의 죄를 남에게 전가하든지, 아니면 핑계나 변명을 하게 합니다. 누구든잘못했습니다.” 또는미안합니다.” 그리고 탓입니다.”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남보다 나은 것으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고 싶어 하고, 남보다 자신이 낫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나은 , 나은 외모, 나은 , 나은 자동차, 나은 직장 . 인간은 끊임없이 차이와 다름을 통해 남에 대한 자신의 우의를 느껴야만 존재의 안정을 느낍니다. 특히 소유를 강조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이러한 차이와 다름의 본산이 아닐 없습니다. 지역과 출신 그리고 학교에 따라 신분을 나누는 우리의 세태는 이러한 차이와 다름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로는 이러한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는 차이와 다름에 의해 발생되는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남의 종을 판단할 권리가 있습니까? 그가 서거나 넘어지거나, 그것은 그의 주인이 상관할 일입니다. 주님께는 그를 서 있게 하실 힘이 있으시니 그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 14:4

 

사도 바울로는 로마교회를 방문하기 전에 로마서를 고린토 교회에서 기록을 했습니다. 바로 로마로 넘어가서 스페인까지 전도여행을 가고 싶었지만, 일은 나중으로 미루는 대신 자신이 방문하기 전에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로마교회 교인들을 위해 편지를 썼지요. 로마서는 사도 바울로의 모든 신학이 집대성된 아주 귀한 자료입니다. 필립비서, 고린토서, 갈라디아서에서 그의 초기 신학 사상의 틀이 만들어지고, 로마서에서 매우 체계적이고 구체화됐습니다. 그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제기했던 할례와 유대교 율법 준수의 주장을 반드시 단절해야만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거짓 전도자들은 율법 준수를 통해 사람들 간에 차이와 다름이라는 차별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로의 관점에서 그것은 그리스도를 해체하여 다시 십자가에 박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로 당시에 도시의 시장에서 파는 고기들은 대부분 이방 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잡은 고기들이었습니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에 바친 고기라 하여 이를 먹는 사람들을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유대교의 관점에서 부정하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도 유대인으로서 할례를 받았으므로 그를 따르는 이방인들도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사람을할례를 받은 사람할례 받지 않은 사람으로 차이와 다름을 통해 판단하고 차별을 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할례와 율법이 오히려 차별의 잣대가 것이지요. 이것은 그리스도 공동체의 분열의 원인이었고,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고 차별하는 기준이 됐습니다. 이는 모든 죄인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보듬어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력화시키는 그리스도적인 행위라고 사도 바울로는 생각했습니다. 율법은 차이와 다름을 깨닫게 하여 죄를 드러내고 깨닫게 우리를 구원하는 아무런 능력도 없음을 그는 주장했습니다. 그가 그토록 믿음을 강조한 것은 이러한 율법의 도전에 상대적인 가치로 믿음을 사용한 것입니다.  믿음과 율법을 똑같은 비중으로 다룬 것입니다. 율법은 결국 인간의 공덕을 강조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은총을 무력화시킴으로 자가당착에 빠진 것입니다. 은총으로 주신 율법이 오히려 인간에게 걸림돌이 것이지요.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근거로 사도 바울로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심판대에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킵니다. 그러므로 서로 판단하지 말고 자신의 믿음과 신념대로 바로 서라고 말합니다. 판단과 심판은 주님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종이 사람으로서 함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차이와 다름을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근거로 사용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근거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 얼마나 다른지를 우리는 사람을 얼마나 사랑해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나와 다름과 차이를 타자에게서 느낀다면 그것을 서로를 이해하는 통로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다름을 알기에 자신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차이와 다름을 통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 이것이 분열이 아닌 연합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것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전서 12장에서 우리가 모두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고 선포합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누구는 팔이 되고, 누구는 눈이며, 누구는 그분의 손이 각각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로가 말하는 교회의 보이지 않는 표징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말입니다. 

 

“은밀한 곳에서 내가 만들어질 때, 깊은 땅 속에서 내가 꾸며질 때, 뼈 마디마디 당신께 숨겨진 것 하나도 없었습니다.” 시편 139:15

 

 

시편 139 기자는 우리가 이미 태생 때부터 어느 하나 주님께 감출 것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당신께서 나를 환히 아십니다.”라는 것이 그가 평생 깨달은 하느님에 대한 지혜였습니다. 그분 앞에서 우리 개인은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처럼 아무것도 숨길 것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남보다 나으면 얼마나 낫겠으며, 남보다 낫으면 얼마나 났겠습니까? 하느님 보시는 관점에서 우리는 모두 같습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차이와 다름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우리를 속속들이 아시는 그분 앞에 과연 우리의 어떤 것을 자랑할 있겠습니까? 

 

차이와 다름은 세상을 분별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지혜와 지식을 쌓는 아주 중요한 인간의 능력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귀한 능력을 차이와 다름을 통해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소외하는 사용하지 않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판단은 분명 하느님의 몫입니다. 그분이 심판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고는 아무에게도 판단받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특권이고 은총입니다. 그러니 남에게 판단받지 않으려면 남을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무 쉽게 남을 판단하거나 남을 비난하고 싶은 우리의 욕망을 절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판단하는 것은 사람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을 박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차이와 다름을 분별하는 귀한 우리의 인지능력을 부디 좋은 방향으로 사용하게 되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판단과 정죄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지혜와 지식이 되도록 우리의 본성을 선한 방향으로 주님께서 이끌어주시길 기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전례독서_연중24 (가해) 1

 

본기도

하느님, 교회를 통해 세상 속에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용서와 기쁨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출애 14:19-31

19 이스라엘을 앞서 인도하던 하느님의 천사가 뒤로 돌아가 호위하자 그들 앞에 있던 구름기둥도 뒤로 돌아가 20 이집트의 진과 이스라엘의 사이에 섰다. 그러자 구름 때문에 캄캄해져서 서로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밤을 새웠다.
21 모세가 팔을 바다로 뻗치자, 야훼께서는 밤새도록 거센 바람을 일으켜 바닷물을 뒤로 밀어붙여 바다를 말리셨다. 바다가 갈라지자 22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고 걸어갔다. 물은 그들 좌우에서 벽이 되어주었다. 23 이집트인들이 뒤쫓아왔다. 파라오의 말과 병거와 기병이 모두 그들을 따라 바다로 들어섰다. 24 새벽녘에 야훼께서 불과 구름기둥에서 이집트 군대를 내려다보시자 이집트 군대는 갈팡질팡하였다. 25 또한 야훼께서는 그들의 병거 바퀴들을 얽어놓아 꼼짝도 못하게 하셨다. 그러자 이집트인들은이스라엘 사람들을 버려두고 도망가자. 야훼께서 이스라엘 사람들 편이 되어 우리 이집트 군대를 치신다.” 하고 소리쳤다.
26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이집트인들과 그들의 병거와 기병들 위에 물이 도로 덮이게 팔을 바다 위로 뻗쳐라.” 27 모세는 팔을 바다 위로 뻗쳤다. 날이 새자 바닷물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집트인들은 물결을 무릅쓰고 도망치려고 했으나, 야훼께서 이집트인들을 바다 속에 처넣으셨다. 28 물결이 도로 밀려오며 병거와 기병을 모두 삼켜버렸다. 이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 바다에 들어섰던 파라오의 군대는 하나도 살아 남지 못하였다. 29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고 건너갔다. 물은 그들 좌우에서 벽이 되어 주었다.
30 , 야훼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을 이집트 군대로부터 건지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인들이 해변에서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31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께서 팔을 펴시어 이집트인들을 치시는 것을 보고 야훼를 두려워하며 야훼와 그의 모세를 믿게 되었다.

 

 

 

 

성시_시편 114

1    알렐루야!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     야곱의 집안이 야만족을 떠나
2    유다는 그의 성소가 되고
.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다.
3    바다는 이를 보고 도망치고
.     요르단 강은 뒤로 물러섰으며
4    산들은 염소처럼 뛰놀았고
.     언덕은 양처럼 뛰었다.
5    바다야! 어찌하여 도망치느냐?
.     요르단아! 어찌하여 물러서느냐?
6    산들아, 어찌하여 너희가 염소처럼 뛰며
.     언덕들아, 어찌하여 양처럼 뛰느냐?
7    땅이여, 너는 주인 앞에서,
.     야곱의 하느님 앞에서 떨어라.
8    그분은 바위를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     바위로 하여금 샘이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로마14:1-12

1 믿음이 약한 사람이 있거든 그의 잘못을 나무라지 말고 반가이 맞으십시오. 2 어떤 사람은 믿음이 있어서 무엇이든지 먹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은 채소밖에는 먹지 않습니다. 3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은 가려서 먹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가려서 먹는 사람은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사람도 받아들이셨습니다. 4 우리에게 남의 종을 판단할 권리가 있습니까? 그가 서거나 넘어지거나, 그것은 그의 주인이 상관할 일입니다. 주님께는 그를 있게 하실 힘이 있으시니 그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5 어떤 사람들은 어떤 날을 특별히 좋은 날로 여기고 어떤 사람들은 어느 날이나 같다고 생각합니다. 하여간 각각 신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6 어떤 날을 따로 정해서 지키는 사람도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아무것이나 가리지 않고 먹는 사람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먹으니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 가려서 먹는 사람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먹으니 역시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7 우리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9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의 주님도 되시고 자의 주님도 되시기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10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형제를 심판할 있으며 멸시할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사람이 아닙니까? 11 성서에도,
   “정녕 나는 모든 무릎을 앞에 꿇게 하고
      모든 입이 나를 하느님으로 찬미하게 하리라.”
      이사 45:23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12 때에 우리는 각각 자기 일을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것입니다.

 

 

 

 

복음서_마태 18:21-35

21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주님,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22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23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24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앞에 끌려 왔다. 25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몸과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팔아서 빚을 갚아라.’ 하였다. 26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갚아드리겠습니다.’ 하고 애걸하였다. 27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28 그런데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데나리온밖에 되는 빚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빚을 갚아라.’ 하고 호통을 쳤다. 29 동료는 엎드려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주게.’ 하고 애원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두었다. 31 다른 종들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일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32 그러자 왕은 종을 불러들여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33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것이 아니냐?’ 하며 34 몹시 노하여 빚을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35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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